한국교회의 씨를 뿌렸던 선교사들의 행적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을 사랑했고 또 열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던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의
60년 회고록이 총신대학원 박용규 교수님의 번역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용규 교수는 곽안련 선교사가 나왔던 매코믹 신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회고록을
발견하였습니다. <신학지남 1993년 겨울호>에 번역하여 올려놓았는데 모두에게 유익함과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1954년 필자(곽안련 선교사, 1878년생)의 76회 생일을 맞이하면서 후대에 알려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선교사 60년 회고록'(원제 - Memories of Sixty Years)을 작성했습니다.
Ⅰ. 준비기 - 건축과 출판 분야
* 소년시절 10년간 신문배달(150집)
* 아버지는 건축업자(목수, 석궁, 배관공, 양철공, 페인트공) - 선교사로 준비 과정(한국에서 건축 많이 함)
* 한국에 와서 20년 동안 선교회에 관련된 모든 건축과 관계 맺음
* 교회 건축 계획, 건축 재료, 음향 장치, 조명 장치 등에 대해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가르침
* 미국에서 10년 동안 출판업계에 종사, 한국에서 40년 동안 서적과 잡지 및 문서의 창작과 판매 담당
Ⅱ. 교육적인 준비
* 미네소타 대학교 2년 다님
* 노회의 강권으로 목회자 후보생이 되기로 작정하고 맥칼리스터 대학으로 옮겨 졸업(1899)
*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
* 휴가 기간에 맥칼리스터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1911), 시카고 대학 문학석사(1920), 철학박사(1921)
* 미네소타 대학시절 헬라어 탑, 조교 자리 포기
Ⅲ. 나의 소명
* 대학을 마칠 때까지 라틴어와 헬라어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
* 히브리어와 아람어도 공부
* 14살에 소명을 받았으나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으로 힘들어 함/노후까지 이 성격이 바뀌지 않음
* 목사와 선교사가 되는 길을 최대한 피하려 함, 특히 해외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주저함
* 급우 44명 가운데 18명이 한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자신과 다른 한 친구만 선택받음
" 당시 한국은 하찮은 존재였고,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아는 이도 거의 없었지만
모든 사람은 한국을 원하였다"(p.200)
Ⅵ. 선교지에서 처음 겪은 일들
* 1902년 9월 22일 제물포(인천) 상륙
* 도착 당시 콜레라가 창궐, 천연두도 엄습
"후에는 천연두가 엄습하여 어린이들의 시체가 수백명씩 서울의 동소문 밖으로 실려나가
수마일이나 떨어져있는 그 둥그스럼한 봉분들 사이에 매장되었다"(p.201)
* 성홍렬에 걸려 첫째 아이(아들)를 잃음
* 곽안련 선교사가 상륙한지 6개월 후 동료 선교사가 천연두에 걸려 14일만에 소천(직접 간호함)
* 둘째 아이(아들) 잃음
"두 아이를 (한국에 온지) 1년 안에 잃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면 때로는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p.201)
Ⅴ. 복음 전도 사역
* 선교지로 떠나기 5년 전의 활동 - 여러 곳에서 설교함 : 중국인 교회, 빈민가, 교회 개척, 페이스 교회(70명 조직)
* 한국에서 36년간 신학교에서 가르침, 6년 동안은 교장으로 재직, 항상 우선 순위 - 나는 전도자이다
* 20개 이상의 교회 담당, 최대 102개 교회 담당
"어느 해에는 102개 교회를 담당하였다. 교회는 동해안까지 뻗어 있었다.
그 해에 나는 말 위에서 살다시피 하였다"(p.202)
* 한국에서 떠나던 해(1940) 20마일 범위 안에서 지역 안의 46개 교회, 도시 근처의 7개 교회,
도합 53개 교회 목회(6,000명 성도 모임)
* 선교사역 40년 동안 100개 이상의 교회 설립에 관여, 3,000명 이상에서 세례 베품
* 장마철 교회 순회와 전도 -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 : 강물, 얼음위로 건넘
* 즐거움 : 시골 장터(5일장)에서 복음 전하는 일
Ⅵ. 신학교 사역
* 어떤 교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게 되어 대타로 들어감, 설교학 교제를 출판하기 위해 준비했는데
아무도 설교학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서 모두 기뻐함, 대타로 들어가 36년간 머무름
* 목회 신학/교회법/심리학/사회학,
* 석사과정 설립
*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1개월)과정 설치
* 신학생들에게 현장 전도 실시 - 매주 90분
* 신학생들을 부흥회 사역에 투입 - 직접 인도하게 함
* 23년간 신학교에서 회계로 일함(지하실에 큰 서점 운영)
* 신학교에 있는 동안 1,600명의 사람들이 신학 과정이나 일부의 과정을 거쳐감
Ⅶ. 문서 사역
* 문서 사역이 구두 설교와 같은 것이라 믿음, 전도지를 읽고 목사가 된 평양 중앙교회 목회자
* 한국 사역을 위해 42권의 책을 씀, 21권은 성경 주석(약 1,000페이지), 욥기와 시편 4천부 팔림
* 주석 가운데 구약 18권, 신약은 3권(마태, 마가, 누가복음)
* 주석 출간 조건 - 최소 6권의 미국 표준 주석들 참고, 한국상황에 적합한 자기 자신의 주석 집필
* 신학교 잡지 출판(22년), 금주 운동 잡지 도움(12년), 주일학교 연합회 잡지(5년)
* 영어로 7권의 책 출간, 도합 51권
* '한국 선교 사역에서의 네비우스 정책' - 세계 도처에 큰 반향 일으킴
Ⅷ. 서적 판매
* 신학교 지하에 서점을 만들어 창고에 있는 책들을 판매
* '매서인'들을 조직하여 자립하게 함, 각 교회들을 방문하여 책을 팔게 함
* 매서인들을 책 장사꾼이 아닌 문서 전도자들로 환영하게 함
* 1년에 7만권의 책 판매
Ⅸ. 법적인 문제들
* 1925년 법인 단체 설립, 모든 재산 등록
* 매년 토지세, 소득세, 자동차세 및 모든 지부에 요구되는 세금 계산과 두 번 점검
"아메리카의 일부 법률가들도 그만큼 많은 업무를 갖고 있지는 않다.
간섭이 심하고 종종 적대적이기까지 한 일본인 관리들을 상대하는 일도 때로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p.212)
Ⅹ. 금주 운동
* 술을 마시거나 팔거나 제조하거나 운반하는 등 관련 자들은 학습교인조차 될 수 없었음
* 세례를 받은 후 타락해 술을 마시면 권징
* 금주운동을 후원함
"한국의 총독은 도덕적으로 천사가 아니었으나 좌우간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도움을 주었다"(p.213)
* 12년간 투쟁 끝에 20세 미만 아이들에게 주류 판매 금지 법안을 통과 시킴
* 매춘과의 전쟁도 시작했으나 전쟁으로 멈춤
"일본의 매춘부 장사는 세계에서도 가장 부패한 것이다...일본의 각 지방으로부터 중국에 있는
일본 군대의 매음 사업을 위해 일정량의 처녀들을 공출 받았다. 매달 수천명의 처녀들이
그 곳으로 건너갔다"(p,213-214)
XI. 건축 사업
* 건물을 짓기 위해 중국인 석공, 일본인 목수, 한국인 인부들을 동원함
* 석회와 서까래를 구하기 위해 산들을 매입
* 수돗물이 없어서 바위를 뚫고 물을 얻음
* 바닥까는 재료, 문짝, 창틀 재료, 유리, 못, 철물 등은 미국에서 공수
* 아버지께 배운 기술로 30년 이상 선교회 모든 건물 짓는데 참여
XII. 기타
* 해마다 봄이 되면 5만명의 중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일함(가을 귀국), 중국인 교회 설립,
남은 중국인들 섬김, 12개 교회 운영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교회들의 자립적(경제적으로) 성향에 영향을 받아 그(중국) 교회들도
역시 중국 본토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자립화되었다는 점이다"(p.216)
* 북경에 있는 한국인 교회 설립에 도움을 주고 몽골 안에까지도 들어감
* 자주 만주지역 사경회 인도
"만주의 사경회에는 150명이 참석했는데 개중에는 영하 40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200마일이나 걸어온 사람도 있었다"(p.216)
* 산적떼들의 위협을 피해 영하 50도의 저녁에 여행, 만주의 회교 사원
* 1912년부터 28년간 격년으로 교회들 방문, 재일 한국인 60만명이 있었고, 48개 교회와 약 5천명의 신자들 있음
* 1919년 헌법, 1925년 개정 헌법 작성, 선교지 분할(감리교와 함께)
* 여자 고등성경학교에서 대타로 가르침
* 휴가 - 1928년 휴가를 얻어 세계 일주, 미국 43개 주에서 한국을 위한 연설 행함
XIII. 모험적인 체험들
* 1904년 러일전쟁 목격, 일본의 한국 정치 관여
* 한국의 여러 미신들 기록
* 1930년대 신사참배 강요 당함
"우리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이(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수천의 사람들이 감옥으로 갔고,
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기독교 학교 학생들을 신사로
데리고 가 참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노라고 말하고 학교들을 폐교시켰다"(p.222)
* 가택 연금 → 시력 악화 → 미국에서 치료 권고 → 2차 대전 발생 이전 마지막 배를 일본에서 타고 미국행
XIV. 나의 한국인 자녀들
* 양자 - 딸 9명, 아들 7명 모두 16명
* 훌륭한 인물들로 자람,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도 한 명
* 부통령을 역임한 함태영 목사
*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 - 신사참배 거부로 고문당함, 공산주의 반대로 사살당함
"죽도록 충성하라, 나의 한국인 자녀들이 자랑스럽다. 거의 모든 이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p.224)
XV. 나의 친 자녀들
*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두 아들이 질병으로 숨짐
* 그 후 아들 알렌, 딸 캐더린 얻음
* 해방 후 다시 한국에 돌아가려고 함
"나는 자비를 들여 뉴욕까지 가서 선교부 앞에 출두하여 한국의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특권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은 내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며 거절하였다"(p.225)
* 1946년 아내와의 사별, 일년 간 외로움의 시간, 재혼(수잔)을 통해 다시 활동 시작
첫댓글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바울사도처럼 하늘에 상급이 클 것입니다.
회고록을 읽으면서 더 열심히 수고해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성령의 힘주심을 통해 하늘의 보화를 쌓아야겠습니다.
쓸데없는 곳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죄입니다.
욕설이나 비방 역시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애쓰신 삶을 사신 분과 십자가의 강도의 상급이 같다고하면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성경이나 읽어..
자네 종파에서는 선구자이겠지만..
내가 보기는 같아.
통일교에서 문선명의 업적을 기리고
신천지에서 이만희의 업적을 찬양하고
안식교에서 화잇여자를 책을 교리로 보고.
장로교에서 칼빈주의를 교리와 우리 나라에 장로교를 전파한 자나..
같은 부류..
자기 종파에서는 위대한 사람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단교리를 전파한 사람으로 보여..
넘 회로록 보지 말고
성경이나 좀 읽어..
성경으로 토론하자고 하면 꿍하고 있다가
이런 것으로 자기 학문 자랑질 하지 말고..
@새하늘사랑
참 애쓰네요...
십자가의 강도가 님보다 못하다 하는 생각은
누가 심어주었을까 궁금합니다.
@오은환 질문에 답을 못하시네요^^
님이 칭찬하는 게시글의 선교사님과 십자가의 강도가 상급이 같다는 이상한 해석에 대해서 거론하는 겁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마세요^^
말을 돌린다고 진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ㅎㅎㅎ
@새하늘사랑
십자가 강도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자를 무임승차한 자로 만들지 마세요
@오은환 누가 그래요?
십자가 강도가 순교자라고??
이제는 소설까지...ㅉㅉ
@새하늘사랑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순교자입니까?
삐딱한 마음이 보이네요
@오은환 누구든지 십자가의 강도를 천년왕국에 왕노릇하는 자로 보지 않습니다.
님이 쓴 게시글의 순교자 같은 분이 받으실 상급이지요^^
누가 님의 이런 주장을 수긍할까요??
성경을 삐딱하게 본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어거지 주장입니다.
십자가 강도를 왜 순교자의 반열까지 올립니까??
누구을 위해서??
당신 해석의 정당성을 위해서??
그만 하세요^^
그동안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소리가 안들리나요??
@새하늘사랑
순교자 이야기는 님이 꺼내고, 전개하고..
적당히 누명까지 얹으시고...
님은 내가 조그마한 실언이라도 하면
잡아먹을듯 달려들 기세네요,
소설은 혼자서 쓰세요
질서를 지키자
이런 것은 종교계 동정에 올려라.
왜 이런 니들의 종파이야기를 성경연구방에다 올니냐?
니들 종파에는 관심 없어
언제 철들래???
땡강이나 부리는 철없는 애처럼 굴지마라...
읽었으면 부질없는 일에나 매달려 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새 사람이 되려고 좀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