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살기 힘들어 하는 당신에게
2018년 들어서며 삶이 팍팍하고 희망이 사그라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분이 든다는 것은 국가의 장래에 빨간불이 들어온다는 예감입니다. 그것은 우리 체제가 만들어낸 재난입니다. 옛적에는 농사군은 농토에서 어부는 바다에서 대장공은 대장간에서 도공은 가마 숯 틀에서 제 기술로 인생을 살아가되 불만은 없었습니다. 각자의 삶은 사주팔자라 치부하고 유교의 관념철학과 장자의 가치관에 위안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간의 됨됨이를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검소함도 자랑이었습니다. 그 시대 못사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인간 도리 못하는 것이 최고의 부끄럼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는 독보적인 달인이었습니다. 장자 편에는 기술의 달인들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수레바퀴의 달인 윤편, 만드는 악기마다 귀신같다는 재경, 19년째 소를 잡았지만 칼을 갈 필요가 없었던 포정, 이들은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장인들입니다. 자기의 손재주에 전념하고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미개의 사고라면 커다란 착각이입니다. 이른바 문명인의 오만과 허위도 무시 못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모두가 붕어빵 교육을 이수하고 별난 재주도 없고 똑 같은 이념교육 이론교육으로 대학을 졸업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편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선입견과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 받는 다는 편견이 각자의 개성과 소질을 뭉개버렸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이수한 전공을 찾아 일터에 근무하는 사람보다 전공과 전혀 다른 일터에서 보람을 찾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외의 대다수는 공교육의 최고지성을 갖췄음에도 적성에 맞는 일터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적재적소의 인재와 달인들이 엉뚱한 곳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삶이 팍팍해지고 앞이 안개 같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 시대 맞는 삶의 방법으로 살아갔듯이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이 방식의 하나가 도전입니다. 막무가내 도전이아니라 생각하는 도전입니다. 우리시대의 전설적인 인물 아산 정주영 왕회장님은 1915년 일제 강점기 강원도 통천에서 탄생하고 2001년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의 철학은 안 된다 나는 못한다는 생각을 해본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정주영 회장의 현실적인 성공만으로 본다면 세계적인 갑부로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뒤돌아 그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실패를 먹고 자란 인생역정이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강원도 통천 산골짜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4번을 가출 했습니다. 돈 없이 가출하니 매번 다시 집에 돌아오기에 4번째는 아버지가 소 판돈을 몰래 훔쳐 가출했습니다. 1937년 서울시 신당동에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지만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하는 통에 2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1940년엔 북 아현동에 아도서비스(현대차 전신)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창업1개월 만에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평소에 신용을 쌓은 후원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했지만 일제가 기업 정비령을 내려 1943년에 해체되었습니다. 정주영은 이정도 실패했으면 포기하는 것이 평상인들의 상식이었지만 못 한다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안했습니다. 1953년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라 막막한 해였습니다. 현대건설 간판을 달고 같은 해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냈습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때문에 물가가 120배 폭등하면서 건축자재 값이 천전부지로 뛰어올랐습니다. 신용만큼은 지켜야 한다면서 공사를 마쳤지만 일가족 집4채를 팔아야했습니다. 그 빚 갚는데만 20년이 걸렸습니다. 이쯤 되면 인생을 포기하려는 감정도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삶은 팍팍하고 희망은 사라지고 갈 길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주영 개인 이력에도 곡절은 많았습니다. 어릴 적 변호사가 되려고 초등하교 4년 중퇴 실력으로 보통고시(지금의 사법시험) 도전했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82년에는 비 내리는 한 밤중에 홀로 차를 몰고 울산 현대조선소를 순찰하다 바다로 빠졌습니다. 차문을 부수고 깊이10미터가 넘는 바다 속에서 헤엄쳐 올라와 살았습니다. 그의 장남은 경인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전두환 정권당시 정치권력에 환멸을 느껴 92년 대선에 도전했지만 낙마했습니다. 이후 대선에 승리한 김영삼 정권에 한동안 세무조사에 시달렸습니다. 청문회에서는 일해재단 출연금으로 돈 주고 욕먹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이권을 바란 게 아니고 살려고 200억을 전두환 정권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닥친 위기가 제일 어려운 법입니다. 실패했을 때 재기의 용기를 갖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정주영씨는 현대자동차를 생산하고 울산 조선소를 세우고 현대중공업을 세우면서 대한민국산업화에 기여한 대 기업인으로 우뚝 솟았습니다. 정주영회장은 그 흔한 동창회 동문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명문대 고급인재들은 그를 존경합니다. 그의 튀는 사고와 불굴의 도전정신 앞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실패가 교육한 체험이 이론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의견에 대해서 “임자 해봤어” 라고 일갈합니다. 탁상이론보다 체험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지론입니다. 일제 강점기, 6.25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를 거치며 살아온 정주영세대와 요즘기업인 세대와는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정주영회장이 겪은 어려움과 실패가 결코 현대를 살아가는 어려운 이들의 심정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 기업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최악의 취업난 때문에 쓰리고 기업은 경제여건이 안 좋다고 하고 독재노조, 귀족노조들은 억대연봉에도 한계노동자들이 노동계의 태반임에도 그들을 밟고 올라서 임금투쟁을 일삼고 기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떼 법과 독재노조와 귀족노조가 있는 한 앞으로 삶은 팍팍하고 경제에 희망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도 오뚜기 같이 일어선 정주영 회장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도전과 재기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정주영회장은 ‘인생은 신용이다’라고 정의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3. 1절입니다. 어제는 눈비가 내렸습니다. 오늘아침은 햇빛이 찬란했습니다. 삶에도 눈비가 내릴 때도 있지만 쨍하고 해뜰 날도 있습니다. 사회는 신용이 보증인입니다. 신용이란 정입니다. 이웃 간의 인정, 친구간의 우정, 그리고 요즘 힘들어 하는 당신에게는 도전을 . . 이것이 정주영회장이 남기는 선물입니다. 올 3.1절에 이런 글도 써 봅니다.
2018년 3월 1일
율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