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종택의 행정적 위치는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34 번지이다. 이 종택은 암벽(岩壁)으로 병풍을 두른 대석산(大夕山) 남쪽 기슭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광활한 들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 황학산(黃鶴山)에서 근원하여 의성 옥산(玉山)을 거처 80리를 누벼 내린, 이름도 예쁜 미천(眉川)의 살찐 냇물이 마을을 안아 굽이치고, 들녘 저 편 서남에 오산(烏山), 동남에 향로봉(香爐峰)의 수려한 연맥이 그림처럼 에워 둘러 강산이 빼어난 안동에서도 풍광이 명미하기로 일컫는 마을이다. 영가지(永嘉誌)에 일직현 동쪽 8리 산과 물이 서로 안고 휘감아 흡사 거북과 뱀이 모인 형상이어서 귀미라고 일컫는데 귀미에는 안귀미, 안망실, 소호촌, 성남촌, 노애촌, 귀천촌 등 몇 개의 마을이 있으며 예로부터 이름난 가문이 많았고 그 형승이 고을에서 제일이라고 했다. (중략)
사랑방은 2칸 반인데 정면과 측면에 쌍띠살문이 3개 있고 머름중방도 설치되어 있으며 사랑마루 쪽으로는 사분합문이 2조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마루는 3칸인데 평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칸은 열린 공간이고 1칸은 사분합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사랑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오량가에 판대공을 사용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이 마루 옆에도 1칸의 방이 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모두 6칸 반인데 중간 중간에 설치된 사분합문을 열어 들어 올리면 모두 한 공간이 된다. 이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 와가이다. 그리고 건물 오른 쪽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다.
청렴한 선비였던 수은 이홍조
이홍조(李弘祚, 1595~1660) 한산 이씨 안동 입향조로서 선생의 자는 여곽(汝廓)이고 호는 수은(睡隱)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선조 28년(1595) 호남 함열(咸悅)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의 명현으로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 손으로 그 아버지는 이인도찰방을 지낸 이문영(李文英)이다. 어머니는 풍산류씨로 선조조 중흥의 주석인 서애(西厓)의 딸이다. 한산 이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광해군 때이다. 서애 류성룡의 사위인 이문영(李文英)은 목은 이색의 맏아들 후손으로 찰방 벼슬을 하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는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서애 류성룡의 셋째아들)을 사사했는데, 광해군 때 대북(大北) 정권의 전횡에 염증을 느껴 회인현감 직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옮겼다. 출세의 뜻을 버린 선생은 외가 고장인 안동으로 내려와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날로 어지러워져 가는 세상을 탄식하며 자연과 서책을 벗하여 울회(鬱懷)를 달랬다. (중략)
증손자는 이태화(李泰和, 1736~1808,자 來仲, 호 觀稼)이다. 관가 이태화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며, 주부(注簿)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대산 이상정을 낳았다. 대산 이상정이 밀암의 학문을 이어 퇴계 학통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 현판이 걸려있다.
(2)수옥정
수은종택에서 오른쪽으로 난 들길을 따라가면 산 아래 정자가 보인다. 이 건물은 수은 이홍조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과 사림에 의해 건립된 건물이다. 현판은 단아한 예서체로 쓰여 있다. 수옥은 옥을 씻는다는 옥지수이기광우저(玉之漱而其光尤著)에서 따 온 것이다. 내부엔 정묘년에 풍산의 류승우(柳承佑)가 쓴 기문과 갑오년에 후손 원구(遠求)가 쓴 수옥정 중건기가 게판되어 있다.
이 정자는 원래 향로봉 아래에 있었던 수은 이홍조의 서식지소(棲息之所)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1954년(갑오년)에 수은 종택 오른쪽 호숫가 대석산 아래 비교적 넓고 평탄한 곳에 복원하였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반누각식 건물로 이중기단이다. 전면은 자연석 기단 위에 원형으로 다듬은 화강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나머지 기둥은 각주를 세웠다.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 반칸은 마루로 꾸몄으며 좌우측과 후면에는 퇴를 내어 마루로 꾸미고 사면에 난간을 돌렸다.
중앙마루 전면에는 사분합문이 설치되어있고 후면에는 쌍판문이 2개 있으며 좌우 방 쪽으로도 사분합문이 있다. 이 사분합문 4개를 들어 올리면 아주 넓은 공간이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오량가로 판대공을 사용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좌우의 온돌방은 정면에 쌍띠살문이 있고 옆에도 쌍띠살문과 띠살문이 있다. 이 건물은 주심포 양식에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흙돌담이 둘러져 있다.
앞마당에는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290여년 된 향나무가 있다. 높이는 11미터, 나무둘레가 2미터 가량 된다.
(3) 대산종택
이상정은 목은 이색(1328-1398년)의 14대손으로 1717년(숙종37년) 고향인 안동 일직현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산(大山)이다. 본은 한산이다. 아버지는 휘 태화(泰和), 어머니는 영양 석보에 세거한 이시명(李時明)의 증손녀인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참고: 이시명은 안동 서후면 경당 장흥효의 사위이다. 장흥효의 외동딸 정부인장씨 -장계향-가 이시명의 부인이다. 이문열은 재령이씨 집안이며 그의 소설 ‘선택’에 장계향과 이시명이 소개되어 있다)
대산 이상정은 6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14세에 외조부인 밀암 이재로부터 사사받으며 퇴계학문을 소개받게 된다. 그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게 된다. 그는 1735년(영조10) 25세 때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한다.
1739년(영조14) 선생께서 29세 되던 해에 연원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740년(영조15)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일직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몰입한다. 1748년(영조23)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상변통고’와 ‘약중편’을 편찬하였다.
(4)소산정자
도깨비 문양의 귀면이 특이하고 일직마을 전체가 거의 다보이는위치에있었어요..
일직은 미천을 따라 유독 정자가 많다네요..
(5) 소호헌
소호헌(1969년 4월 22일 보물 제475호로 지정)은 마을에서도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수 없으나 조선 중엽으로 추정된다. 고성이씨 임청각 이명(李洺)의 다섯째 아들로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 이고(無襟亭 李股)의 분가로 건립한 것을 무남독녀 사위인 함재(涵齋) 서해(徐嶰)에게 물려준 집이라 한다. 그 후 아들인 약봉(藥峰) 서성(徐渻)에게 물려준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별당건물이다. 왼쪽 3칸은 넓은 대청이 되고 오른쪽 한 칸은 누마루로 만들었다. 누마루에 접하는 대청 전면에 직각으로 꺾어서 2칸×1칸의 규모의 방을 들였으며 전체의 평면은 丁자형과 같다. 지붕은 팔작지붕이지만 옆에 있는 방은 맞배지붕이다. 대청과 누칸과의 사이에는 사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고 이 누마루에서 방뒤의 툇마루에 이르는 주위에는 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기둥위에 얹은 주두로서 장혀와 도리를 받쳤으며 초익공 계통의 형식에 속한다. 창방머리의 조각적 수법은 고격을 띠고 있다. 가구(架構)를 보면 대들보가 주두위에 얹혔고 사시 포대공을 놓아 종량과 중도리를 받히고 있다.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派蓮臺工)을 세우고 합장형(合掌形) 소슬대공을 사용하였다. 기단부는 누마루 이외의 부분에는 축대를 높게 쌓았으나 주초석 위에는 기둥을 직접 세우지 않고 넓직한 나무를 수평으로 돌려 놓은 듯한 귀틀을 짜 돌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또 망와(望瓦)에 쌍비용문(雙飛龍門)이 들어 있어 일반 민간 건축에서 보기 드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소호헌 공사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여 시내에서 나오셨다는 약봉의 후손 서영석씨(73)를 우연히 뵙게 되어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집은 함재가 세상을 뜬 후 이씨 부인이 어린 약봉을 데리고 서울로 간 후 한때 비워져 있었다. 병자호란 후에 약봉의 셋째 아들 과천현감 경빈이 소호리 약봉선려(藥峰先廬)에 30년동안 우거하다가 연세가 많아 충주로 올라가셨다. 경종 1년(1721) 약봉의 5대 손녀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내탕금(內帑金)을 하사하시고 경빈의 현손 유안당(遺安堂) 명량으로 하여금 청풍공묘소와 약봉선려를 수호하게 하여 다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약봉 집안에선 선대의 유훈에 따라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고 있다.
(6)권정생어린이 문화재단
작가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모두 잃고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빈곤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졌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허드렛일을 하며 몸을 챙기지 못해서 결국 결핵, 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 등을 앓게 된다. 그는 경북 북부지역을 떠돌며 걸식을 하다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하여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작가 권정생은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0년대 초 일직교회 뒤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살며 작품활동을 하시다가 2007년 5월 17일 지병이 악화되어 대구 가톨릭대학교 병원에서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
(8) 성남정
성남(星南)비내미는 약 400여년 전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낸 장문보(張文輔)의 호(號)를 따라 성남이
라 칭하였으며,노곡(魯谷)노래골은 약 400년 전 노계공(魯溪公)이란 학덕 높은 선비가 살았다 하여 노곡
(魯谷)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 1899년 안동군 원동면(元東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앞
장에서도 언급한 바 소호리,안망실을 병합하여 망호(望湖)라 하였다.비내미 마을 앞 언덕에 성남정(星
室),진주목사(晋州牧使),유혜정(有惠政)의 벼슬을 지낸 장문보(張文輔)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웠으며,건
축년대는 알수 없고,장문보(張文輔)의 연혁은 남주일록(南州日錄)에 수록 되어있다.
1996년 국도 5호선 도로 확장공사 이전에는 효자각(孝子閣)이 있었는데,그 효자각은 영양남씨(英陽南
氏)호(號)는 허영정 남응원(南應元)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그는 유림에서 널리 알려진 선비로서 당시
영의정 서애(西厓)유성용(柳成龍)선생이 인품을 보아 관직에 천거하였으나 부친 상중이라 관직을 거부,
부의 무덤에서 3년동안 기거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숙종 원년(1675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여 비각(碑
閣)을 세웠다. 지금은 광연리(光淵里)에서 원리(院里)가는 길 좌측 산 밑에 허영정 누각 앞으로1996년에
이전하였다.
(9)서산서원
서산서원은 1771년(영조 47) 목은(牧隱)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祠)를 세웠고,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현재 목은 선생 사진 영정, 별본영정과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매년 3월,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서원 내에는 정면 3칸 규모의 숭덕사(崇德祠), 10칸의 명교당(明敎堂),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삼문, 15칸의 주소 등의 건물이 규범에 맞추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다.
첫댓글 오~예! 즐독. 감사ㅎㅎ
저도 감사 ~~~
권정생 기념관은 개관 했나요.
아직 안한거 같아요 ~~~
우와 부지런하시다. 난 숙제 받고도 아직 정리도 못 했는데... 그런데 이것 답사를 다녀와서 방으로 옮겨야할 것 같아요. 정말 정리한 것을 보니 짧은 시간에 많이 봤네요.
답사기는 아니죠.. 그냥 사진이 맞아요 .. 답사기는 연두님이쓰셔야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