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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 개인 여행기 스크랩 천산남로-7일차. 7월 24일 토요일(쿠얼러에서 투루판으로)
윤상현 추천 0 조회 101 10.10.11 07: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일차. 7월 24일 토요일(쿠얼러에서 투루판으로)

코피까지 흘리는 등 어제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잠자리를 벗어났다. 이른 아침 8층의 객실에서 내려다 본 거리가 너무도 깨끗하다. 신축된 고층 빌딩이 즐비한 가운데 왕복 십 차 선의 넓은 길에는 아직 별다른 통행이 없어 한가한데 청소부들만이 빗자루를 든 채로 분주하다. 근래에 발견된 석유에 기대어 부흥하는 도시답게 모든 것이 너무도 현대판인지라 가까이에 끝없이 황량한 사막이 자리했음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어제는 계획보다 훨씬 늦게 도착이 된 까닭에 아무런 일정을 갖지 못했음이 많이 아쉽다. 지난 밤 호텔을 찾아 헤매다가 보았던 호수의 아침 모습이 궁금하다. 아침 식사 시간 까지는 한참의 여유가 있다. 조박사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호숫가로 향한다. 택시 기사에게 “강변공원(江邊公園)”으로 가자하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몇 마디 보충 설명 끝에야 이해한 기사는 ‘강변(江邊)’이 아니고 ‘하변(河邊)’이라고 해야 통한다며 친절을 다한다.

거리는 한산(閑散)해도 호숫가에는 강태공들이 널렸다. 사막 안에서 낚시질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신기하다. 아직은 일출 전인지라 강바람이 선선하다. 다리 위에서 대나무 낚시를 던져둔 중노인의 살림망 속에 손바닥 크기의 ‘버들치’ 닮은 고기가 가쁜 숨으로 뻐끔거린다. 다리를 건너 호숫가 계단에 내려서니 더욱 많은 이들이 고기잡이에 한창이다. 거울 같은 수면 위에 비춰진 고층 빌딩과 현수교의 아치가 푸른 하늘 흰 구름에 어울려 아름답다. 바로 곁에 청년이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고기 이름을 묻자 뭐라고는 답(答)하는데 생소한 이름인지라 돌아서며 잊게 된다. 기념촬영을 제의하니 야박하게도 싫단다. 이제까지 만났던 여느 위구루 사람들과는 딴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석유로 인한 신흥도시로서 한족(漢族)들이 부흥(復興)시킨 곳이기에 거주민들의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구성원의 90% 이상을 위구루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이제까지의 도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이다.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위구루족은 단 한명도 찾을 수 없고 몽땅 다 둥굴넙적한 모습에 머리를 바짝 밀은 중국인들만이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서 수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냥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그 사이에 거리에는 차량이 많이 늘었다. 호텔에 돌아가니 스님과 처사님께서는 이미 식사를 마친 뒤 짐까지 챙겨서 내려오셨다. 우리의 아침 산책 이야기에 같이 다녀오지 못했음을 못내 아쉬워하신다. 묽은 쌀죽과 만두 몇 개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삶은 계란 몇 개를 싸이드백에 챙겨두었다.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간식으로 요긴하리라.

아홉시에 호텔을 나선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이제까지의 공로와는 달리 사차선의 훌륭한 길이다. 왼편으로 쿠얼러 시내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연녹색의 오아시스 중심에 높고 낮은 빌딩들이 성냥갑처럼 놓였다. 그 넘어 뿌연한 사막 뒤로 천산의 줄기가 희미하다.

좋은 길 달리기도 잠깐,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곧바로 차가 출렁거리는 시골 길이다. ‘쿠얼러’에서 북쪽으로 57km의 거리에 자리한 ‘버스팅(博斯?)호수’를 찾아가는 길인데 열악한 도로 때문에 무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아시아 대륙 중에서도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바다는 너무 멀어서 꿈에도 떠올리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바로 이 버스팅(博斯?) 호수를 와 보고서야 바다의 느낌을 상상한다. 요즈음 같은 개명세상이라도 TV에서 보는 것과 직접 물에 몸을 담굴 수 있음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만큼 이 호수는 넓다. 또한 소금 호수가 대부분인 신장(新疆)지역에서 제일 큰 담수호인 이곳은 유일하게 따뜻한 물을 가진 곳이다. 그리하여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호수가에 들어서자 금사탄(金沙灘)이란 이름에 걸맞게 넓은 백사장의 모래가 아름답다. 더불어 가이없는 수평선은 정말 바다를 떠오르게한다. 물가에 정렬된 비치파라솔과 그 곁의 대여가격표, 얕은 물가에서 튜브를 띄우고 노는 아이들 등등 여느 해수욕장과도 똑 같은 모습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큰 파도가 일지 않는 것뿐이리라.

나는 평소 물과는 상당히 친한 편인지라 관련해서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확 벗어부치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마음일 뿐 이내 생각을 접는다. 객지에서 괜한 객기로 남들을 불편하게하지 말자. 그저 준비된 모터보트에 몸을 실을 따름이다. 보트 계류장에서 보이는 호면(湖面)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한 쌍의 신혼부부가 웨딩촬영에 한창이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웃음 짓다가 그만 요즈음 아내와의 불편함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평생에 초심을 지켜 한결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래 이쯤에서 그만하고 문자라도 한통 날려주자.” 이렇게 맘먹고 나니 그간에 나도 별반 잘한 게 없다는 회한(悔恨)이 든다.

선착장을 떠난 모터보트는 이내 물살을 가르며 호수의 중심을 향한다. 볼에 스치는 강바람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조종간을 잡은 운전수는 수면 위를 지그재그로 달리면서 맘껏 솜씨를 뽐낸다. 그 속도감이 얼마나 높던지 함께한 일행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인다. 잠깐 사이에 떠나온 부두는 까마득한 거리가 되면서 앞에 삼각주를 이룬 섬이 다가온다.

이 섬에는 상륙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대신 두리둥실 배 띄워 두고 조망이나 하기로 한다. 여행길에 올라 입에 물기 시작한 연초 한 모금이 향긋하다. 바로 곁에 먼저 와있던 보트 안의 풍경이 싱그럽다. 대여섯의 아가씨들이 비키니를 포함한 수영복 차림으로 떠들썩하다. 일행인 두 청년의 신나는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또래의 운전수는 겸연쩍음에 눈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그저 턱을 괜 채 수면만 응시하고 있다. “홀로 유럽을 떠돌고 있는 우리 큰 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꼬.”하는 혼잣말에 곁의 아주머니께서 냉큼 말을 받는다. “집 나가서는 우리 딸도 저런 게 당연 커니 해야 맘이 편해요.”하신다.

선착장에 되돌아오니 정오를 넘겼다. 얕은 물가는 아까보다 훨씬 불어난 사람들로 북적댄다. 인근의 식당 주인들이 주변을 맴돌며 호객(呼客)을 한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역시 한족(漢族)들이 많은 영향이리라.

점심을 들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 큼지막한 금사탄(金沙灘) 알림판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돌이킨다. 고르지 못한 노면(路面) 위를 나룻배 저어가듯 한 시간 가까이 가니 길가에 먹자골목이 이뤄져있다. 검은 색 비닐로 어설피 천막을 쳐 둔 아래로 자리를 잡으니 친절하신 스님께서 먼저 차가운 찻물을 챙겨주신다. 전형적인 ‘갈수록 호감형’이시다. 어쩔 때는 너무 챙겨주시다가 그만 처사님께 핀잔을 듣기도 하셔서 내가 다 민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순수(純粹)하신 그 마음이 얼마나 큰 자산(資産)이겠는가. 메뉴는 역시 하나, ‘양고기탕면’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에 수박으로 입가심까지 하고나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이제 배꼽 내놓고 한숨 잔다면 정말 신선놀음이리라. 버스의 뒷자리는 묵시적으로 나 홀로 여행자 세 사람의 전용석이 되어있다. 차에 오르자마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취침 준비를 하는데 스님께서 뒤로 오시더니 우리에게 달달한 캬라멜을 건네주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신다. 그러다가 대화가 궁해지니 그러면 심심하니까 노래나 부르면서 가자신다. 이거 낭패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싫어요” 하기에는 너무 야박하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참에 스님께서는 앞쪽에 앉아계신 처사님까지 모셔온다고 일어서신다. 더욱 낭패다. 이때에 젊은 박사장이 과감히도 맨 뒤쪽 의자에 길게 누어버렸다. 눈치 빠르신 스님께서는 당장 알아차리셨다. “아 이게 아니구나.” 처사님을 모시러 갔던 스님은 결국 뒤쪽으로 다시 오지 못하셨다.

고속도로의 좋은 노면(路面) 상태에 힘입어 한숨 잘 잤다. 안대(眼帶)와 귀마개는 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분명하게 나눠준다. 눈을 뜨자 다른 일행들 모두가 취침중이다. 다들 점심의 식곤증을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심심하다. 핸드폰의 MP3를 켜니 심수봉의 노래가 열 댓 곡이 들어있다. 첫 곡으로 나오는 ‘당신은 누구시길래’가 애절하면서도 구성지다. 내 마음을 가져가버린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란 말인가. 실없이 웃음이 난다. 갑자기 든 출출함에 아침에 챙겨두었던 삶은 계란을 생각해내었다.

그 사이 가는 길의 해발고도가 훨씬 높아져있다. 물경 1,700m대이니까 대략 설악산 높이다. 지금 향하고 있는 투루판은 해면(海面) 하(-) 200m의 도시이니 거의 2,000m의 표고차를 보인다. 길고 긴 천산(天山)의 허리부근을 남북으로 건너뛰며 놓인 고속도로가 구불구불 험하기도 하다. 끝없는 내리막길이 위험하기 짝이 없어 제한 속도를 60km로 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흙더미를 쌓아올려 비상용 스톱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차창 밖의 거친 산들이 마치 죽은 짐승의 썩은 시체를 널어둔 듯하다. 온 산에 나무 한그루 없이 약간의 가시풀 만이 겨우 생명의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저기 산야(山野)가 무채색(無彩色)으로 거무튀튀함은 쇠(鐵)도 아니요 구리(銅)도 아닌 석탄 성분이라 하니 볼품없는 모양새를 그리 흉 볼 일이 아니다. 저기 보이는 완만한 골짜기는 아마도 먼 옛날에는 얼음으로 덮였던 빙하이리라. 문외한이 보아도 당장 알아차릴 만큼 그 흔적이 완연하다.

뒤편에 앉아서 세상에 둘도 없는 풍경을 향하여 자꾸만 셔터를 눌러대니 맨 앞자리의 가이드가 기분 좋게 제 자리를 내어준다. 아까 점심 식사 뒤에 스님 덕분으로 약속보다 많은 팁을 챙겨서인지 몰라도 한결 많아진 말수에 표정까지 친절하다. 운전사 뒷자리의 처사(處士)님은 스님과 더불어 낮은 목소리로 동요를 부르시며 천진(天眞)한 표정이시다. “대전 발, 영시 오십 분”으로 화답하는 내가 상대적으로 좀 닳아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속웃음을 짓는다.

계속되는 내리막길 저 아래에 푸른 빛 오아시스가 눈에 들기 시작한다. 드디어 투루판(吐魯番)이 가까워진 것이다. 아직도 천 미터 이상의 고갯길 위인지라 내려다보이는 사막 안의 오아시스가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이 아득하다. 작은 고을 퉈커쉰(托克遜)의 화력발전소는 한 줄기 하얀 연기를 메마른 하늘 위로 뿜어내는데 그 뒤로 허옅게 펼쳐진 물줄기는 소금 호수인 아이딩호(艾丁湖)다.

칠년 전 찾아갔던 그 호수는 정말 경이(驚異)로웠다. 접근로는 말할 것도 없이 비포장에 대절한 택시의 아랫면이 땅바닥에 부딪쳐 궁쾅거릴만큼 요철이 심한 도로였다. 어렵게 다가간 호수는 문자 그대로 불모(不毛)의 땅이었다. 두터운 소금의 결정(結晶)때문에 독한 기운이 눈까지 아리리게 하고, 발아래 개펄은 약간의 물이 섞인 채로 완전히 늪을 이뤄 한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날 수 없겠다는 공포가 일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십도 이상의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는 곳이기에 해면(海面) 아래로(-) 154m 의 바닷물이 다 말라붙어 오늘 그 모양을 이룬 것이다.

천산의 고갯길이 다하고 평지로 내려오자 이제는 정말 열사(熱沙)의 사막이다. 같은 사막이라 해도 이제까지의 고원지대에서는 눈만 부셨지 비교적 선선함이 유지 됐었다. 차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시리고 풀가동한 에어컨 바람 탓에 살갗은 건조해져 푸석푸석하다. 재(再) 주유(注油)를 위하여 퉈커쉰(托克遜)의 초입에 자리한 주유소에 들어선다. 달궈진 땅에서 훅 하며 끼쳐오는 열기에 코 안이 먹먹한 것이 고온(高溫)의 숯가마에 들어온 듯하다.

여기서부터 투루판까지는 잘 닦인 직선 도로를 따라 30km이니 정말 지근거리다. 잠깐의 사막 뒤에는 드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해발은 이미 해면 하(-) 80m를 나타낸다. 한눈에 봐도 그 옛날에는 물이 가득 했던 호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길을 한없이 달려가다가 해면 하(-) 123m에 이르러서 다시 잠깐 오르니 바로 투루판의 초입이다. 이제 온 사방에 네모반듯한 벌집모양의 포도 건조장이 나타나고 이내 온통 포도 농장의 연속이다. 여기 투루판은 신장(新疆) 지역에서 제일 덥고 건조한 곳이지만 지하에 설치한 관개(灌漑)시설 카알징(坎兒井)으로 인하여 풍부한 농업용수가 확보된 곳이다. 너무도 뜨거운 곳인지라 수로를 지상에 설치하면 모두가 증발해버릴 것이기에 몇 천 년 전부터 이렇게 수천km의 지하 수로를 파서 천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여 사용했다니 정말 인간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시간은 이미 일곱 시를 넘어섰지만 아직도 해는 중천이다. 투루판 시내에 들어서니 너무도 깨끗이 관리된 도로가 가로수에 어울려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푸른색의 90%가 포도밭이다. 안내받은 민가의 포도나무 그늘이 시원하기도하다. 뺑 둘러 놓인 평상위에 여행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중앙의 그늘 마당에는 위구루 전통 의상으로 성장(盛裝)한 아가씨가 전통춤을 춘다. 따로 선생님을 두고서 배우지도 않았고 어깨 너머에서 홀로 익혔다는 독무(獨舞)가 예사 솜씨가 아니다. 다섯 살배기 어자아이의 재롱 역시 만만치 않다. 야무진 전통(傳統)차림으로 이방인들에게 붙임성 좋게 다가와 예쁜 짓을 하는 것이 꼭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다.

포도가 유명하니 건포도(乾葡萄)도 이름을 날리는 것은 당연하리라. 사막 안에서 재배되었으니 그 맛이 얼마나 달 것인가. 투루판을 상징하는 네(四)가지 “고” 중에 “달고(甘)”가 들어간다니 그 성가(聲價)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머지는 “낮고(低)와 마르고(乾)와 덥고(熱)”란다. 마당 한편에는 다양한 품질의 건포도가 준비되어 손님을 기다린다. 칠년 전 여기에 왔을 때 귀국 선물로 건포도를 준비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귀국 후 처음 며칠간은 귀한 대접받던 것이 나중에는 그만 잊혀 져 곰팡이가 핀 씁쓸한 기억이 있다. 하여 그냥 맛보기로 몇 가지를 집어먹어볼 뿐 전혀 구매할 생각은 일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빨리 숙소로 들어가 쉬고 싶을 뿐이다.

숙소인 ‘투루판 빈관’에 이르니 이미 날이 어둡다. 서울에서 우루무치까지 같은 비행기를 탔던 천산북로팀을 일주일 만에 여기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해있던 그들은 호텔에 딸린 위구루 식당에서 민속 쑈와 함께 거의 식사를 끝낸 중이다. 몇몇 일행은 왁자지껄, 무희들과 어울려 춤을 함께하면서 여행의 고단함을 털어내고 막바지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북로(北路) 팀은 아마도 우리 남로(南路) 팀보다는 훨씬 수월했으리라. 상대적으로 지역이 작은 북로와는 달리 천남남로를 이 정도 기간으로 돌아보기에는 너무도 무리다. 적어도 보름 이상은 되어야 만이 조금은 여유를 갖는 여정이 될 것이다. 처음 여행길에 오를 때 친구 중 누구 하나라도 동행했으면 하는 마음에 몇몇에게 권해보기도하였는데 이제 와서 이 여정을 되돌아보니 혼자오기가 천만다행이다. 나야 스스로 좋아서 이 고생을 즐긴다지만, 만약 누군가가 마지못해 따라왔다면 아마도 내심(內心) 욕이 나왔으리라.

마지막 저녁식사다. 역시 양고기를 이용한 여러 메뉴가 올라온다. 뭐니 뭐니 해도 양고기 꼬치(양러우촤얼)에 소주 한잔이 최고다. 이제 귀국할 날에 가까우니 스님은 곡차(穀茶) 곁에 얼씬도 하지 않으신다. 처사님과 단둘이서 권 커니 잣 커니 할 따름이다. 아까의 무희들은 판을 접은 지 오래다.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되어 위구루 민속무용을 보지 못했음이 아쉽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그냥 쉴 수는 없다. 호텔 앞에는 택시로 쓰이는 마차가 대기 중이다. 여섯 명이 함께 중심가의 호수공원을 찾아간다. 모두가 거꾸로 걸터앉은 채로 어두운 골목길을 느릿하게 가는 그림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 속이다. 이내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 곁 광장에는 불빛을 밝히고 한 무리의 시민들이 댄스파티 중이다. 대략 짐작컨대 낮에는 더위에 아예 움직이기도 힘드니 해가 지고나면 광장에 나와 여가를 즐기는 것이리라. 깔리는 음악이 육 박자 지루박에 별반 차이가 없다. 슬며시 호기가 동한다. 다짜고짜 스님께 춤 한곡 청했더니 너무도 선선히 응하신다. 여행 내내 뵈었지만 웬만한 남자는 갖지 못한 배짱을 지니신 여장부시다. 하지만 춤이란 것이 어디 배짱만으로 되는 것이랴. 결국 한 바퀴 돌려보지도 못하고 그만 두기로 했다. 그랬어도 이방인임을 눈치 챈 주변의 시선이 모두 우리를 향한다.

두 명은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기를 원하고 넷은 발 맛사지를 원한다. 하지만 주변에 널린 것이 양꼬치를 굽는 좌판이지만 그 흔하던 맛사지 간판은 눈에 띠지 않는다. 제복 입은 청년에게 물으니 이 공원 주변에는 아예 맛사지업소가 없단다. 술맛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둘은 그냥 호텔로 가고 넷이 남아 거리의 탁자를 차지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역시 술값을 책임지신단다. 호탕(浩蕩)하신 스님의 기개(氣槪)를 당할 길이 없다. 맥주잔과 함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스님의 교도소 교화(敎化) 말씀이 귀에 많이 와 닿는다. 박사장님의 동티벳 여행담과 처사님의 북인도이야기도 내 다음 여정을 준비하게 하는 말씀이 되었다.

아까의 마차꾼이 먼발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어서 마차에 걸터앉기를 종용(慫慂)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늦은 밤 길, 텅 빈 거리에 가득히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목탁삼아 스님의 낭낭한 염불소리가 멀리 퍼져간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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