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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덫에 걸리다
월선옥에 손님발이 뜸해졌다. 거들어주던 새침이도 돌아가버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오는데 송애는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홍이는 어째 상기 오잴까?" 봉구가 거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하마 오겠지. 혼자 가서 걱정이야? 선생님이 데려다주실 건데 뭐." 송애도 중얼거렸다. 아까 점심 나절쯤 해서 송선생이 월선옥을 찾아왔다. 송선생은 연추서 인편에 편지가 왔다는 말을 하며 정호 네 집에 급히 전해주어야 할 편진데 집을 모르니 홍이 더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해서 함께 나간 홍이 여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지망이는 언제쯤 오겠습매까?" 물통에서 숟가락을 건져내며 봉구가 묻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송애는 바락 소리를 지른다. "앙이, 어째 그럽매?" "내가 어쨌기에?" "얼굴이 해쓱해지고서리 소리르," 송애는 외면을 한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밖으로 나타난 것을 깨닫는다. '흥, 멀쩡해서 돌아왔더구먼. 난 또 죽는 줄 알았지.' 회령서 돌아온 길상에 대한 미움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것을 송애는 억제하질 못한다. 회령 병원에 가노라 하며 서희가 길상을 데리고 떠난 뒤 구구한 소문을 송애는 아직 삭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령에다 과부하고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에 꼬리를 물고 이번에서는 서희와 혼인할 거라는, 거의 장담하다시피하던 말들이 비상처럼 송애 마음에 흘러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요즘이다. 길상의 마음이 자기에게 기울어지리라는 희망은 눈곱만치도 없다. 단념을 한다기보다 단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길상에 대한 원한이요 미움이다. 한때 주변에서도 그랬었거니와 길상에게 시집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던게 병이었다. 과부 운운할 적에 송애 마음이 열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거라면 서희의 경우는 천길 낭떠러지로 구른 기분인 것이다. 송애에게 동정을 하던 달래오망이조차, "하늘의 별을 따라이. 별수없답매." 냉정히 말했었다. "흥, 사람 없어 시집 못 갈까?" 지글지글 끓는 심화 속에서도 그간 시시로 호의를 보여온 윤이병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 된다. 봉구는 국솥전에 물걸레질을 하면서 혼자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째 홍이는 오잴까?" 바깥은 아주 어두워지고 말았다. "해가 짧아서 그렇잖아. 어째 방정이니?" 하는데 손님이 들어섰다. "어 춥다." 송애는 얼른 일어선다. 남풋불과 마주한 두 사내의 얼굴, 한 사람은 젊었다. 한 사람은 오십 가깝고 수염을 기른 깡마른 사람이었는데 만주인의 복장이다. 김두수와 추서방. "이 집 아주머닌 어디 갔나?" 잘 아는 사이처럼 김두수가 묻는다. "회령 갔소." "회령에는 왜?" 목도리를 풀며 능청스럽게 묻는다. "그럴 일이 있어요. 국밥 드릴까요?" "음, 두 그릇. 그런데 아주머닌 오래 못 돌아오는 게야?" "글쎄요." "여기 아저씬 소식이 있는지 모르겄네.?" 송애는 국쪽을 들며 "예." 애매하게 대꾸한다. 김두수는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추서방은 이들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 곰방대를 꺼내어 담배를 담는다. 김두수와 추서방이 만난 것은 사흘 전의 일이다. 회령서 한양여관 주인 사내의 주선으로 잠시 동안 대면하여 동행할 것을 양해받았으며 추서방은 볼일이 있다 하여 그저께 용정으로 왔고 김두수는 윤이병을 연해주로 떠나보낸 뒤 오늘 용정에 온 것이다. "김주사." "예." "이곳서 며칠이나 묵으시려오?" "예." 담뱃불을 붙이며 묻는다. "이삼 일... 형편 봐서 하루쯤 일찍 떠날 수도 있을 게요." 김두수의 대답이다. 국밥이 나왔다. 추서방은 담배를 몇 번 빨고 나서 재를 떨어버리고 국밥 사발을 끌어당기며 조용히 먹기 시작 한다. 김두수는 송애를 살펴보면서 숟갈을 든다. "그러니까 길림에서 후란으로 간다, 그 말씀이지요?" "예. 후란에서 흑룡강으로 곧장 갔으면 좋겠는데 찌찌하루에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지금 떠나도 시기가 늦는다구요?" "늦었지요. 구월부터 겨울 수렵이 시작되는데 십이월 초순에는 공세로 얼마간 모피를 바치고 그러고 나면 장이 열리거든요. 그 장에 대가야 하는 건데 늦었지요." "그럼 물건을 구하지 못하겠군요." "지난해 깔아놓은 게 있으니까..." 추서방은 굉장히 빠르게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물러나 앉는다. 말을 안 하는 편도 아닌데 왠지 추서방은 과묵하고 고집이 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두수는 국물을 홀홀 마신 뒤 국밥 한 그릇을 더 청한다. "대개 그 곳서 나오는 모피란 어떤 거지요?" "첫째 담비가 있고 녹피 곰 여우 늑대 같은 것이 있지만 우리가 구하는 건 주로 담비지요." "물론 엽총으로 사냥을 하겠지요?" "예. 덫도 놓고 함정도 쓰지요. 사슴 같은 것은 구시월에 발정기라 그때가 되면 초자라구, 피목 껍질로 만든 피리를 불어서 수사슴을 유인해가지고 잡지요. 피리 소리가 암사슴 울음하고 비슷하거든요. 그 피리 부는 사람을 초록인이라 하는데 상당한 연공을 쌓아야만 된다더구먼요." 김두수는 다시 내온 국밥을 홀홀 불어가면서 먹는다. 먹다가 "그러니까 그 일대에 사는 인종은 이른바 오랑캐들이지요?" "그런 셈이지요. 여진족들인데 그들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것도 여간 갈래가 많지 않아요." "거래하기는 어떻습니까." "본시 경위가 바르고 한곳에서 눌러 살지 않기 때문에 별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워낙이 장사하러 들어가는 중국 사람들이 악랄해서요." 두 그릇째 국밥을 비운 김두수는 손바닥으로 땀을 닦는다. 잠시 동안 얘기를 더 나누다가 그들은 일어섰다. 나간 뒤 "참말입지 홍이 가아아 어찌 도니 거 앵이요?" 봉구는 또 걱정이다. "방정도 떨어쌌는다." 아닌게 아니라 송애도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갔거니 생각했던 방금 나간 두 사람중 젊은치, 그러니까 김두수가 되돌아왔다. "머르 있었습매까?" 봉구가 묻는데 그 말에는 대답을 아니 하고 송애더러 잠깐 나오라 손짓을 한다. "왜 그래요?" "실은 내 윤선생 전갈을 받았는데." "윤선생요?" "음. 그러니까 윤선생 하숙하던 집에 잠시 다녀갔음 좋겠어." "윤선생이 회령서 오셨어요? 며칠 전에 회령 간다는 얘길 들었는데." "윤선생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은 못 올 게야." 김두수는 꼭 오라는 다짐도 없이 슬그머니 가 버린다. 송애는 다시 넑을 잃는다. 송애로서 처음 보는 사내였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슨 전갈을 받았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한참 만에 '윤선생 하숙하던 집에 잠시 다녀가라구?' 윤이병 하숙집에는 국밥 갖다달라는 주문을 받고 서너 번인가 간 일이 있었다. '윤선생은 길상이보다 못할 게 없다. 길상이는 남의 집 하인이지만 윤선생은 학교 선생님이었어. 지금은 그만두었다지만,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그런데 홍이는 왜 여태 안 오는 게지? 무슨 일이 생겼나? 음. 하기야 내 처지, 부모도 없고 남의 집에 붙어서 사는 몸이 윤선생 같은 사람한테 시집가면 잘 가는 것 아니야? 봐란 듯이 내가 시집 먼저 갈 테야. 아암, 내 마음만 작정하면은... 회령서 당분간 못 온다 했던가?' "이보오다." "왜 그래!" "앙이 어째 또 성으 냅내까?" "방정떨지 말라 했잖어!" "무시기, 그럼 걱정도 앙이 됩매까? 날이 아주 저물잲았소?" "선생님하고 함께 가지 않았어? 선생님하고," "객줏집의 할아방이한테," "사내자식이 좁쌀영감처럼, 알았어. 넌 가게 보구 있어. 내 갔다올 테니." 송애는 주섬주섬 두루마기를 찾아 입고 털목도리를 둘둘 감으며 가게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송애는 객줏집과는 반대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쇙쇙 분다.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고 그런가 하면 울음이 터질 것같이 목이 메인다. 송애가 간 곳은 얕은 지붕의 집들이 따닥따닥 붙은 동네, 좁은 골목을 한참 들어간 곳의 낡은 초가집 앞이다. 늙은 작부 서울댁이 살던 집이었다. "여보세요." 괴괴한 채 불빛은 새나오는데. "여보세요." 판자문을 흔들어본다. "뉘기요?" 어둠 속에 얼굴이 나타났다. 서울댁은 아니었고 그보다 나이 젊은 여자다. 송애는 보따리를 싸서 떠난 서울댁은 알지 못했으나 이 여자하고는 안면이 있다. "아아 국밥집으 처자 앵이요?" "손님 계시지요?" "있지비. 그러잉 들어옵세." 송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김주사아! 국밥집으 처자 왔소꼬망." "들어오라 해요." 내다보지도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들어가라이" 송애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윤이병이 묵고 있던 방에 사내는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앉아." "무슨 전갈을 받아오셨어요?" 볼멘 목소리다. 아까부터 처음 본, 나이도 많잖은 사내가 반말지거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윤이병은 깍듯하게 존대를 했는데 뭐가 저렇게 상스러운가 싶기도 하고 "벋장나무같이 서서야 얘기가 되나." 송애는 퍼질러 앉는데, '제법 감칠맛 있게 생겼군 그래.' 빤히 쳐다본다. 송애도 빤히 쳐다본다. 불빛이 둘 사이에서 춤을 춘다. "어서 말해요." "말보다 윤선생 편질 가지고 왔는데." "편질요?" "전에도 편지질을 했다며?" "..." "찾아온 걸 보니 그 쪽에서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먼." 김두수는 먹이를 물어다놓은 맹수같이 느긋한 몸놀림으로 벽에서 등을 뗀다. "거 윤선생 똑똑한 사람이지." "..." "듣자니까 부모형제가 없다며?" "그래요." "허어 참, 왜 그리 톡톡 쏘지?" "가져왔다는 편지나 주세요. 가야 하니까요." "가면은 잠밖에 더 자겠나? 늦은 밤에 국밥 손님이 찾아올 것도 아니겠고, 객줏집 공서방이 양아버지라 하든가?" "..." "일의 순서를 따지잘 것 같으면 명색이 양부모라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 중간에서 내가 나서야 하는 건데." 송애는 역겨운 생각이 든다. "편지 안주시면 그냥 가겠어요." "서둘기도 하네. 편지 뿐인줄 아나? 내 편에 반지도 만들어 보냈어." "반지를요?" "그래. 윤선생을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고향에서는 부잣집 맏아들이야. 공연히 이런 곳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살림만 유복한가? 가문은 또 어떻고? 시집을 간다면 아주 썩 잘 가는 게야. 내 비위를 잘 맞추어놔야 일이 수월하다는 것쯤 알아두어얄 게고 흐흐흣..." 송애는 잠시 주판질하는 장사꾼 비슷한 미묘한 생각에 빠진다. "헌데 국밥집에는 길상이라는 그 사람이 더러 오나?" "아니." "윤선생이, 그 여자 길상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근심을 하더구먼. 윤선생으로선 마음에 걸리는 일이겠지.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니예요!" "아니라?" "그 사람은 곧 장가갈 거라..." "장가 간다면 이쪽에도 생각이 있다 그 말이야?" "아니래두요!" "그건 다행이고... 자아, 그러면은 편지하고 반지를 주어야겠는데." 김두수는 부스럭부스럭 조끼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꾸겨진 편지 한 장과 한지에 돌돌 말은 작은 물건을 꺼내었다. "자아." 건네준다. 편지 피봉의 글씨는 분명히 윤이병의 필적이다. "편지보다 그 반질 펴보아. 손가락에 맞는가 껴보고," 주저주저하면서 한지에 싸인 것을 송애는 펴본다. 두 돈쭝 가량의 봉숭아 반지다. "손가락에 껴보라구." 송애는 김두수를 한번 건너다본다. 양볼이 발갛게 된다. 눈이 반짝거린다. 조심스럽게 약지에, 작은 힘을 주며 낀다. 이때였다. 비호처럼 달겨든 김두수, 언제 마련해두었던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목을 비튼 닭의 털을 뽑듯이. 손등에 손톱자국은 남겼으나 송애는 허무하게 당하고 말았다. 방안에는 거친 숨소리뿐, 문을 따준 여자는 도시 집안에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다. "이 날강도 같은 놈아." 낮은 목소리다. 김두수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날벼락을 맞아 죽을 놈!" "더 크게 외쳐보지. 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테니 말이야." 비로소 자기 처지를 깨닫기나 한 것처럼 송애의 얼굴이 질린다. "외쳐보아. 그러면 윤선생한테 시집가긴 다 틀린 일이지. 그 편이 내겐 좋지 않겠어? 데리고 살 수 있으니까. 안 그래? 흐흐흐..." 송애 얼굴은 더욱더 질린다. 입이 붙어버린 것 같다. "거기서 원한담 오늘 밤 일은 싹 묻어둘 수도 있고, 내야 뭐 여자에 궁한 처지도 아니니 말이야." 김두수는 목구멍 속으로 웃음을 굴린다. "이젠 가보아. 없었던 일로 하면 될 거 아냐? 문벌 좋고 부잣집 맏아들한테 시집가는 건 어려운 일 아니래두. 길상이놈 따위가... 으흐흣흣..." "..." "가보라니까?" 송애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빛은 약하게 흔들리고 있다. 약하게.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태산 같으나 약아지는 힘이 더 강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을 짜기 시작한다. 옆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장롱을 열어젖히는 소리다. 송애는 펄쩍 튀듯이 일어선다. 판자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온 송애는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걸음을 멈춘다. '죽일 놈! 칼을 갈아서 찔러죽일까. 속절없이 내 신세가! 아이구!'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몇 발짝을 못 가서 '정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다시 몇 발짝을 못 가서 '그놈이 말 안 한다면... 미친 개 한테 물린 셈친다면, 내가 뭐할려고 그곳에는 갔을까? 의심도 안하고, 아이구!' 그러나 가게 앞에까지 왔을 때 송애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금반지 생각이 났다. 편지를 두고 온 생각도 났다. 얼른 반지를 뽑아 치맛말기 속에 집어넣고 "봉구야? 홍이 왔니?" 하고 가게로 들어가는데 "왔소꼬망." 봉구의 말보다 거기 앉아 있는 길상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송애는 쌀쌀하게 외면을 하며 "그런데 홍이는 어디 갔니?" "방에서 자고 있습매." "벌써?" "벌써랑이? 나간 지 얼마나 오래," 하는데 봉구 입을 틀어막듯이 "오래되긴?" "객줏집에 가보니 앙이 왔다 하잲소? 어디 갔었지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동무 집에서 놀다오는 거야." 천연스럽게 둘러댄다. "봉구야." 길상이 불렀다. "옛꼬망." 봉구는 길상으로부터 돈을 받아들고 나간다. "어디 갔다왔지?" 길상의 노한 음성이다. "누굴보고 묻는 거예요?" "거기보고 물었다!" "왜요?" "그럴 이유가 있어." "이유부터 말해요." "대답부터 듣고 말하겠다!"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는 것은 이쪽이야." 송애는 혼란속에 빠진다. 혹시 하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되어 가슴 한복판에 커다랗게 퍼져나간다. "말 못하겠으면 내가 말해주지. 송애가 간 곳은 윤가놈의 하숙집이다." "뭐라구요!" 길상은 등을 굽히며 가겟바닥을 내려다본다. "설사 그렇다해도 무슨 상관이지요?" "나는 상관이 없겠지." "네?" "나는 송애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그래요. 상관이 없지요!" "..." "염치없고 주제넘는 일이에요! 남이야 무슨 짓을," 송애 얼굴이 분노의 불길이 탄다. 혹시 했었던 만큼. 이제는 애정이고 뭐고 다만 미운 것이다. 이 사내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야..." "송애."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나도 임자 있는 몸이란 말이에요!" "내 말을 허술히 듣지 말어. 송애는 윤가놈을 만나서는 안 된다. 송애 신세도 망치겠지만." "망치기는 왜 망쳐요?" "윤가놈은 나쁜 놈이야. 학교에서도 쫓겨나지 않았어? 자세한 얘긴 할 수 없지만 그놈은 송애가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요." "넌 공노인의 양딸이며," 하다 말고 길상은 깊이 뭣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이다. 담배가 없어 사러 보낸 것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연기를 훅 뿜어내며 "그놈 윤가는 송애를 망칠 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었다. 학교를 쫓겨난 빈털터리가 용정에 남아 있는 것도 수상 쩍지만. 그놈의 하숙비는 어느 놈이 대주는 걸까?" 고향에서는 이름난 부잣집 맏아들이며 가문은 또 어떻고 하던 사내 목소리가 송애 귓가에서 쟁쟁 울린다. 바닥에 깔린 엷은 의혹이 말려올라오면서 그 목소리는 더욱더 크게 울린다. '모르거든 말이나 말지? 자기가 뭘 안다고 하숙비 누가 대는 걱정까지 하는고?' "송애, 내 말 허술하게 들어선 안 돼. 송애는 후회할 거야. 윤가놈은 송애를 이용하는 거야. 내 말 고깝게 듣지 말구 신셀 망쳐서는 안된다. 송애도 조선나라 백성이거든." "후회해도 좋아요. 이용당하면 어때요? 버림받아도 좋단 말예요! 내가 뭐 양반집 규순가요? 쓸데없는 참견 말구 가, 가주세요. 사돈의 팔촌이나 된다고 이, 이러는 거예요!" 송애는 앞 뒤 생각 없이 소리를 지른다. 아래위 입술이 실룩실룩 경련을 하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다. 흉한 모습이다. 길상은 송애가 이미 당해버린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상대가 윤이병 아닌 김두수라는 것을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미운 생각도 없다. 다만 싫은 생각, 보기가 민망스럽다는 냉정한 거리감이 있을 뿐이다. 길상은 몸을 일으킨다. 좀더 설득해보리라는 생각을 버린 것은, 그러나 다만 송애가 싫다는 감정에서뿐만은 아니다. 감정 자체는 양심으로 봐서는 약점이다. 송애를 아끼고 지켜주리라는 마음보다 상대편, 윤이병의 정체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좋잖은, 그 결과를 근심해서 찾아왔으니까 개운찮은 면이 있다. '누가 저한테 어쨌기에?' 보기만 하면 앵돌아져서 피해가는 것을, 그럴 때마다 길상은 꼴같잖다 싶었고 얼굴이 벌개져서 노려볼 때도 정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송애의 새된 음성을 들었으나 길상은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린다. 길바닥에 피던 담배를 버린다. 마침 뛰어오는 봉구로부터 담뱃갑을 받아든 길상은 "수고했다." 하고 가버린다. 봉구는 입김을 내어뿜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송애는 홍이 잠들어 있는 방을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봉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어디 두고보자. 어디." "어째 그럽매?" "뭐가!" "소리르 지르문서리," "소리를 질렀음 질렀지, 아아니 네가 시아비냐? 내내 방정을 떨더니 이젠 참견이야?" 죄없는 봉구에게 시비를 건다. 봉구의 입술이 튀튀하게 불거진다. "그만둡세." "그만 안 두면 어쩔테냐?" "이러지 맙소. 무시기 잘못이 있다고 나더러 싸움질하재는 건가." "저게, 뭐 어째? 너하고 쌈하잔다구?" "앙이 그럿소꽝이? 아까부터 나르 보구 성으 앙이 냈다 말임둥?" "달라들어?" 송애는 쫓아 오더니 봉구 뺨을 찰싹 소리나게 때린다. "어째 때립매까! 앙이, 무시기 때리는 법이 어디에 있능야!" 봉구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가게 문이나 닫아!" "싫슴!" 송애는 가겟방에서 뱅뱅이를 돌다시피하다가 뒷간으로 튀어간다. 뒷간의 문고리를 걸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송애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아, 죽어버릴까 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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