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에서 상수리나무를 만나면 반갑다. 나무 밑에 요정의 털모자같이 생긴 도토리 깍지가 떨어져 있으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 주변을 한참 서성거린다.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혹은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허리를 굽히고 마른 덤불 속을 뒤진다. 도토리를 찾는다.
우리 집 근처에 상수리나무가 많다. 슈퍼마켓으로 가는 지름길에도 운동 삼아 걷는 오솔길에도 여러 그루 서 있다. 오솔길 옆은 각자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이맘때면 단풍이 제법 곱지만 내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나무는 역시 상수리 나무이다. 상수리나무는 흔히 참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활개치듯 뻗어나간 가지가 시원스럽고 가을이면 잎이 누렇게 물든다. 노르스름해지다가 금방 갈색으로 변해버리므로 그다지 고운 빛은 아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을 끄는 것은 바로 그 열매 도토리 때문이다.
나는 도토리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떫은맛이 강해서 그냥은 먹을 수도 없건만 눈에 띄면 얼른 줍는다. 한 알의 도토리를 발견하면 어딘가에 또 떨어져 있겠지 하고 두리번거린다. 그렇다고 도토리묵을 쑤려는 것은 아니다. 묵을 만들려면 열매를 잘 손질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껍데기를 까서 볕에 말리고 절구에 빻아 물에 여러번 우린 다음 녹말을 가라앉혀야 한다. 손이 많이 가고 여러 날이 걸린다. 게다가 도토리가 아주 많아야 한다. 오솔길을 몇 번 오가며 주운 걸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줄 알면서도 도토리를 줍는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사람들이 하도 가져가서 야생동물이 굶주리게 생겼다는 소리가 들린다. 안되겠다 싶어 도토리를 잘 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숲에 다시 뿌려 놓기도 한다.
어릴 때 나는 동글동글하고 매끈매끈한 도토리를 줍는 일이 재미있어서 어른들이 시키지 않아도 온 산을 헤매고 다녔다. 먹을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어른들도 틈틈이 그것을 주웠다. 떨어진 것을 줍는 게 아니라 아예 떡메를 들고 다니며 상수리나무를 두드려댔다. 무거운 떡메로 한 번씩 칠 때마다 쿵쿵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바탕 도토리 소나기가 후드득 쏟아졌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지면 상수리나무에는 허옇게 껍질이 벗겨진 자리가 상처로 남곤 했다.
쌀쌀한 가을 아침, 이슬 젖은 풀섶에 도토리가 떨어져 있다. 금방 떨어졌는지 깍지에 붙어있던 부분이 아직 뽀얗다. 여전히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갈색의 열매, 그것을 주워들면 언제나 고향의 뒷동산이 떠오른다. 심심하면 올라가 놀던 그곳의 바람과 나른한 햇살이 생각나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얼굴들이 그리워진다. 도토리 한 알을 손에 쥔 채 잠깐 먼 하늘을 바라본다. 수수한 빛으로 물들어 가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