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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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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스크랩 티벳
김용천 추천 0 조회 17 07.08.12 14: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윈난(云南), 구름의 남쪽
태어나는 것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구름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나고 죽는 것 또한 실체가 없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

생사는 구름 같지만 생사의 무게는 구름 같지 않다. 구름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삶은 실체가 없으나 삶의 고통은 실체가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삶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고통은 거기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삶에서 원하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위로다. 사람들은 삶의 진실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진실은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로의 방식으로 삶의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위로란 잠시 고통에 눈멀게 해주는 마약에 불과하다.

이방(異邦)으로의 여행도 그런 것일까. 마취에서 깨면 다시 지옥이겠지. 그래도 대합실은 늘 만원이다. 대합실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 아니다. 흐름과 멈춤의 경계, 떠남도 아니고 정주도 아닌 지점에 대합실의 시간은 위치한다. 경계의 시간을 떠도는 여행자의 삶이 비현실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비행기가 정시보다 20분 늦게 이륙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거대한 쇳덩이가 날개 짓도 없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다.

윈난성의 하늘 길


본래 하늘을 날고 바다 속을 거니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신들의 일이었다. 사람이 신들의 일을 하나 둘씩 대신하게 되면서 신들의 영토는 점점 좁아져 갔다. 더 이상 현세에 신들의 영역은 없다. 신들은 모두 사후 세계로 쫓겨 갔다. 이제 이 세계의 운명은 온전히 인간의 손으로 넘어왔다. 밤 10시 30분, 인천을 떠난 중국 동방항공 여객기가 새벽 1시, 쿤밍(昆明)에 도착한다. 중국의 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이 늦다. 나는 같은 시간대를 두 번 지나왔다. 절대적 시간이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시차를 두지 않는다. 북위 4˚31'에서부터 북위 53˚52'까지 남북 5,500km, 동경 135˚2'인 우수리강(江)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고원까지 동서 5,200km에 달하는 거대한 제국의 시간이 모두 북경의 시간이다. 하나의 중국을 위한 시간의 통일이다.

윈난성의 성도, 쿤밍은 흐리다. 거대한 시멘트 도시. 고층건물과 백화점, 호텔이 즐비한 거리 곳곳은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농촌을 떠나온 남루한 행색의 이농자들로 북적인다. 쿤밍 시내 어딜 가나 구걸하며 손 내미는 여인들과 아이들, 노인들, 장애인들이 포획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아이들 셋이 주르르 달려와 동냥 그릇을 내민다. 아이들 손에는 지폐 몇 장씩이 들려 있다. 챙겨 뒀던 비행기 기내식 빵을 하나씩 나눠준다. 마시려고 샀던 음료수 한 병도 함께 건네준다. 아이들은 순순히 물러나 의자에 앉아 빵을 먹으며 저희들끼리 속삭인다.

윈난의 시장



어째서 나는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일까. 낯선 시공간 속에도 여전히 익숙한 삶의 질서가 있다. 떠나왔으나 나는 결코 떠나온 것이 아니다. 삶을 떠나서는 어떠한 삶도 불가능하다. 거리 곳곳에 옥 가게, 차를 파는 가게가 성시를 이룬다. 이곳의 여름은 그늘에 들면 가을이다. 아열대 지방이지만 해발 1500~2000미터의 고원 지대라 일 년 내내 기후에 큰 변화가 없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다. 예전에는 이곳에 타이 족의 나라 남조국(南詔國)과 대리국(大理國)이 있었다. 13세기부터 중국 중앙 정부의 지배가 시작됐고, 청나라 때인 17세기 말 윈난성으로 편입되었다. 2모작의 벼농사와 다양한 과일과 곡물, 열대작물이 재배된다.

시장은 풍요롭다. 옥수수 토마토, 사과, 고추, 버섯, 피망, 생강, 땅콩, 가지, 부추, 상차이(고소)등 채소는 싱싱하고 탐지다. 마늘, 오이, 호박, 배추, 갓 등 익숙한 작물들은 잠시 한국의 시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건들은 막대 저울에 달아서 판매된다. 이곳의 한 근은 500그람이다. 고춧가루도 한국 재래시장의 고춧가루 그 모습이다. 반찬가게의 갓 김치가 맛깔스럽다. 한 입 먹어 보니 많이 짜다. 메추리나 닭들은 산채로 철망 안에 갇혀 죽음을 기다린다. 옹기점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만두, 국수, 찐빵, 간식거리들은 허기진 나그네의 입맛을 자극한다. 윈난성에는 한족(漢族) 외에 타이족·먀오족[苗族]·이족[彛族] 등 20여 소수민족 60여만 명이 살고 있다. 최근에는 소수 민족 사이에 에이즈가 만연해 있다. 마약 때문이다. 주사기를 통해 에이즈가 번져 가지만 속수무책이다

 

(2) 쿤밍에서의 나날들
“내일이나 다음의 생, 어느 것이 먼저 올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 한다.”(티벳 속담)

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해 간다. 모든 것이 덧없다. 죽음이 먼 일 같지만 실상 생사란 한 호흡에 달려 있다. 숨 쉬다가 숨 멈추면 죽음이다. 인생무상이다. 하지만 덧없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 막 살아보자는 부추김은 아닐 것이다. 함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어느 예기치 못한 순간 각기 생사의 세계로 갈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은 살아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자각이며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나를 둘러싼 존재들을 보다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쿤밍 시내의 사치스런 백화점과 거대한 빌딩들, 노숙자와 걸인들. 평등의 가치를 포기한 사회를 더 이상 사회주의라 규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가슴이 먹먹하다.

윈난은 티벳으로 가는 길목 중 하나다. 최근 칭하이(淸海)성 꺼얼무(格彌木)에서 티베트(西藏) 수도 라싸(拉薩)를 잇는 1,142㎞ 칭짱(靑藏)철도가 완공 됐다. 해발 4000미터 구간이 960㎞나 되는 하늘 길의 철로다. 베이징부터 라싸까지는 총 연장 4,064㎞나 되는 먼 여정이다. 칭짱 철도가 개통됐지만 외국 여행자에게 티벳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칭짱 철도는 그저 중국인의 티벳 유입만을 쉽게 했을 뿐이다.

윈난 성도 쿤밍 시내


외국 여행자는 차별적으로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하고 거기다 티벳 관광국(TTB)의 입경 허가서까지 따로 받아야 한다. 허가서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한국 돈으로 10만원 가까이 된다. 네팔 쪽으로 가도 허가서는 필수다. 산적들의 통행세와 다르지 않다. 개통 초기라 그런지 칭짱 철도의 표 또한 구하기가 쉽지 않다. 청두(成都)로 가서 칭짱 열차를 타려 했으나 표를 구하는데 열흘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기차여행은 포기한다. 티벳 관광국(TTB)의 입경허가서를 받고 비행기 편으로 티벳에 들어가기로 한다. 비행기로의 이동은 중국 국제 여행사의 비싼 여행 상품을 이용해야만 한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여행사 몇 곳을 전전하다 어렵게 연결 된 곳이 첸 씨(Mr, Chen)의 사무실이다. 입경허가서를 대신 받아주고 비행기 표를 싸게 구해 준다고 했다. 그에 대한 정보는 론리 플래닛에서 얻었다. 나중에 티벳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비용과 비교해보니 결코 싼값이 아니었다. 미스터 첸은 자신이 외국 여행자들의 입경허가서를 쉽게 받아 주고 비행기 티켓을 싼값에 구해 주는 여행자의 수호천사처럼 행세했지만 그 또한 영악한 장사꾼에 불과하다. 그 자신이 티벳 관광국의 쿤밍 사무소다. 그가 입경허가서를 내 준다. 도장 하나 찍어주고 앉아서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다. 이런 자들로 인해 티벳 입경 허가서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없는 돈벌이도 만들려는 상황에 쉽게 벌리는 큰 돈벌이를 포기할 까닭이 있겠는가.

비행기 시간까지는 또 며칠을 쿤밍에서 기다려야 한다. 쿤밍 호텔 앞에서 5번 버스를 타고 서산(西山) 공원으로 간다. 버스 안은 등짐을 진 승객들로 복잡하다. 엄지족 소녀는 빈자리가 생겨도 앉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부지런히 문자를 날린다. 휴대폰은 노키아 제품이다. 등짐을 진 젊은 여인은 짐을 진 채로 목적지까지 간다. 공원 입구의 호객은 어느 나라나 같다. 승합차도 호객을 한다. 땀 흘리며 한참을 걸어가는데 순찰 중일까. 공안 차가 달려온다. 앞좌석에 탄 남자 공안 둘은 입이 귀에 걸렸다. 뒷좌석에는 젊은 여자 여행객 셋이 환하게 웃으며 앉아 있다. 남자들의 검은 속은 국적이 없다. 남자 여행객에게는 흠을 잡아 무언가 뜯어낼 생각이나 하는 공안들도 여자들에게는 순한 양이다. 그 심정을 누가 탓하겠는가. 낯선 땅의 풍경이 낯설지 않다.

윈난의 식당



공원 구내 길을 자동차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린다.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걷는 사람보다는 몇 배는 빠르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운전했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욕이 나오는 건 참을 수 없다. 대체로 사람은 이기적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세상을 본다. 모든 운전자들에게는 속도의 유혹이라는 것이 있다. 속도의 유혹은 목표의 유혹과는 다르다. 도달할 목표와는 무관하게 그저 막무가내로 대책 없이 달리고 싶은 속도의 유혹. 세상의 운전자 누군들 속도의 유혹을 피할 수 있으랴.

공원으로 가는 길목 우측에 거대한 ‘남양 화교 항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길가에 탑이 있어도 참배객은 드물다. 망각,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더러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저항의 역사를 잊는 것은 다시 압제의 시대를 불러올 수 있는 토양이 된다. 탑을 세운 윈난성 인민정부인들 다르겠는가. 부패한 관료와 공안(경찰)들. 사회주의 국가의 변방 도시에도 밤이면 환락이 극에 달한다. 건물 안에 공안 사무실이 있지만 맛사지 업소들은 스스럼없이 섹스를 판다. 공안이 지켜보는 앞에서 호객을 한다. 공공의 안녕을 지켜야 할 공안이 업자들의 사익을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3) 고해를 건너는 자비의 배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마더 데레사>

세계를 구원하겠다고, 인류전체를 구원하겠다고 떠드는 것은 사기꾼의 언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진정한 수도자들은 늘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사람, 한 영혼의 상처부터 위로하고 치유했다. 절집에 들면서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화팅스(華亭寺)는 11세기에 건립된 남조 시대의 절이다. 입구에서 향을 파는 행상들이 여럿이다. 대웅전에도 사천왕문에도, 나한전에도 복전함이 없는 곳이 없다. 보현보살상 앞에도 복전함이 있다. 선행은 보살님들이 하고 복은 스님들이 받는다. 불교뿐이겠는가. 기독교 또한 고난은 예수님이 당하고 안락과 영광은 교황과 주교들, 고위 목사들이 누린다. 관음보살상 앞에도 복전함이 있다. 우리가 아는 관음보살님은 자비의 화신이지 대가를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장사꾼이 아니다. 이 절의 보살님들은 앵벌이인가!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곳인데 이곳은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이 중앙에 계시고 좌우로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앉아 계신다.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사이에는 석가모니불의 시자인 아난존자가 서 있다. 약사불과의 사이에 서 있는 분은 가섭존자다. 불이법문(不二法門) 현판이 걸린 법당에서 법회가 열린다. 모두들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며 도량을 돈다.

여섯 분의 비구 스님과 두 비구니 스님이 앞장을 서고 스물 한 분의 할머니, 할아버지 신도가 뒤따른다. 오래된 이 절도 세월 따라 늙어버렸다. 앞장 선 비구스님들은 예불에 몰두하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스님들은 젊고 신도들은 늙었다. 예불에 깊이 빠진 신도들은 눈을 지긋이 감고 무아지경으로 탑을 돈다. 젊은 비구스님들은 목탁을 치고 종을 울리면서도 관광객들을 힐끔거린다. 독경 소리가 겉돈다. 맨 앞의 비구스님이 바닥에 가래침을 뱉더니 젊은 여자 여행자에게 눈웃음을 친다. 수행자라기보다는 직업인의 냄새가 짙다. 절 또한 신앙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관광자원으로 더 크게 기능하는 듯하다. 노인들이 누리는 종교의 자유는 관광 산업의 부흥에 기댄 바 크다.

대웅전 뒤편에도 현판이 걸려 있다. 고해자주(苦海慈舟). 고통의 바다를 건네주는 자비의 배. 반야용선(般若龍船)과 같은 뜻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고해자주이고 반야용선이다. 그런데 이 절의 대웅전은 진실로 고해자주인가. 고해에 빠진 중생들에게 승선료를 받고 건져 주는 구명보트는 아닌가. 돈만 밝히는 세속화된 불교가 더 이상 부처님의 종교가 아니듯이 세상의 정의나 자비에는 무관심하고 극한의 정신적 추구를 통한 자기 구원에만 몰두하는 불교 또한 부처님의 교단은 아니다. 더러 어떤 이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불교 이론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복잡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어려운 것도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쉽고 단순하다. 부처님 말씀에는 못 알아들을 소리가 한마디도 없으나 불제자를 자처하는 주석가들의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소리가 한마디도 없다.

 

(4) 서산, 드래곤 게이트
중생(衆生)에게 고통의 시간은 건너 뛸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견뎌내야 할 시간일 뿐. 고통은 또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통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옥죄어드는 올가미와 같다. 삶 또한 그러하다. 삶이 참담하다 해서 건너 뛸 수는 없다. 인간은 그 삶이 어떠한 것이든 온전히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삶의 초월 따위를 이야기하는 어떠한 종교적, 초자연적 언술도 모두 사기다. 건너 뛸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은 아닌 것, 초월은 초월자의 권능이지 인간의 일은 아니므로.

서산의 정상 부근에 용문(dragon gate)이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50여년 동안 도교의 수행자들이 만든 석굴이다. 산 정상 부근 벼랑 끝 바위에 굴을 파고 도를 닦던 도사들은 끝내 우화등선했을까. 소문은 분분하지만 어디에도 떨어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성부모전(聖父母殿)에서는 전각의 지붕 공사가 한창이다.

서산 드래곤게이트


이족(彛族)일까, 묘족(猫族)일까, 두 청년이 질 통 가득 진흙을 지고 길고 긴 계단 길을 오른다. 걸음이 위태롭다. 도사들, 신선들은 다 어디로 가고 신선들 거처를 사람 손 빌려서 짓는 것일까. 도사와 신선들이 게으른 것일까. 무능한 것일까. 우습지 않은가. 옥황상제와 신선들의 거처를 사람 손을 빌려 짓다니!

신선이나 도사들은 어찌 이토록 위태로운 절벽이나 기괴한 것만을 좋아하는가. 그러나 옛날 도사들이 바위를 뚫어 굴을 판 노동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오늘 이 위태로운 석굴에 붙어서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연명하는가. 도술로 하늘을 날지는 못했으되 밥을 만들었다.

대체 이런 천 길 낭떠러지, 바위에 굴을 팔 수 있었던 원력은 무엇일까. 크게 미치거나 무엇에 홀리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겠는가. 광부들도 수백 미터 땅 속까지 굴을 파고 광석을 캐내기도 한다. 땅을 파고 바위를 뚫는 것은 절박한 욕망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천길 땅속 광맥을 찾아 석굴을 파는 것이나 정신의 욕망으로 천길 절벽 끝에 굴을 파는 행위가 본질은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은 추악한 것이고 정신적 욕망은 훌륭한 것처럼 칭송하기도 하지만 정신적 욕망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물질적 욕망을 버리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정신적 욕망을 버리기는 진실로 어렵다.
서산 용문의 노천예술가

인류가 저지른 끔찍하고 잔악한 행위는 대체로 물질적 욕망에 기인한다. 하지만 물질적 욕망으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적어도 노예로 팔아넘길지언정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 욕망에서 비롯된 전쟁은 사람의 씨를 말렸다. 그 잔악함이 비할 바가 아니다. 인류의 수많은 전쟁을 보라. 물질적 욕망보다 정신적 욕망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더욱 사악했다. 수많은 종교 전쟁들, 홀로코스트는 또 어떤가. 유대인의 절멸과 아리안족 순혈주의를 주장하며 400만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이루고자 한 것이 물질적 욕망이었는가. 200만 인민을 학살한 크메르루즈나 좌우대립으로 수백만의 민간이 학살 된 해방 전후의 한국 또한 물질적 욕망보다는 이념이나, 종교 따위의 정신적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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