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 어느날 마포나루 배 앞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군졸과 실랑이를 벌인다.
"내가 준용이를 만나 볼 것이다!이 놈들이 준용이를 죽이는 일을 음모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예약한 배이다. 손자 이 준용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 교동도로 끌려간 뒤었다.
1895년 3월 이준용 '역모사건'이 터졌다.
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들이 대원군의 손자 이 준용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타도하려는음모를 꾸몄다.
바로 동학혁명세력을 사주하여 대궐을 처들어가 왕과 세자를 살해하고 이준용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을 미리 탐지한 민씨 일파는 대역사건으로 확대해서 주모자들을 잡아들였다. 이 준용까지 의금부에 가뒀다.
이 사건을 다섯 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이 준용도 사형언도를 받았다. 흥선대원군 부인 부대부인 민씨가 아들 고종을
만나 "제발 준용이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종신형을 받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흥선대원군 이 하응은 귀양 간 이준용을 살리기 위해 마포항까지 달려간 것이다.
"가리다.내 몸소 준용이를 만나러 강화섬으로 가리다!"
흥선대원군 이 하응의 피눈물나는 몸부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들이 마포나루에서 강화섬으로 떠나는 배에 오를 때였다.
"멈추어라!"
순검들이 달려와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애손 준용을 만나고자 했던 대원군의 꿈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만다.
마포나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공덕리 별장 아소정(我笑亭)이다.
군졸들은 마포나루에서 흥선대원군 이 하응을 강제로 연행하여 아소정에 감금시킨다.
"이 놈들아! 이 못된 놈들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예약한 배를 군졸들이 막아 실패한다. 나루에 있던 파선 한 척을 발견하고
그것이라고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기마순검들에게 방해를 받고 마포강물에 빠지는 등 봉변을 당하고
끝내 아소정으로 끌려와 감금생활에 들어간다.
1899년 4월 장윤상 권형태 신현표 등이 황제를 폐하고 이준용을 초대 대통령으로 앉힌다는 음모사건도 벌이지는 등
이준용은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여러 번 거론된다.1881년 8월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척사론자들과
제휴하여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흥선대원군은 여러차례 정권재창출을 위한 '역모'를 꾀한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한다.
서울 마포 공덕리금표(孔德里禁標)이다.
限 一百二步(여기서 120보 되는 곳의 통행을 금한다) 孔德里 禁標(공덕리 금표)
同治庚午八月日(동치는 청나라 연호이고 경오는 1870년이다) 이 금표는 1870년 8월에 세웠다는 표석이다.
여기서 120보 거리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거처하는 공덕리 별장 아소당이 있으니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서울여중 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 '금표' 푯돌이 있어 이곳을 '푯돌백이삼거리'라고 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만년에 감금생활을 하던 아소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표시한 것이다.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3시
흥선대원군 이항응은 경성수비대의 장병 400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마포 아소당을 떠났다.
일본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쯤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입었다.
일본인 일행이 서대문께에 이르렀을 때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 우범선과 합류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 우범선의 공동 호위를 받으며
새벽 5시 경복궁에 도착한다.
그는 별장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거사이유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했다.
그는 며느리 명성황후가 미신에 젖어 금강산의 모든 절에서 세자를 위한 불공을 드리고
날마다 굿판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였다고 고유문에서 지적한다.
이 고유문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명성황후를 엄히 질책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진행되었다.
미우라가 행동대원들에게 말한 대목이다.
"그래. 그럼 바로 우리의 계획을 말해주겠다. 시해 날짜는 흥선 대원군이 이끄는 훈련대가
해산되는 8월 20일로 한다. 흥선 대원군과 훈련대가 짜고서 왕비 민씨를 죽인 것처럼 꾸며야하니,
알아서들 잘 움직여라."
일본 군부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경복궁 건천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뒤 건천궁 앞 연못 향원지에 그의 재를 뿌렸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대원군은 경복궁내 강령전에
고종과 함께 머물며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보고까지 받았다.
신봉승은 그의 책에서 이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우라가 어전에 당도하자 고종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고종의 밑에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미우라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옥체에는 별고가 없었습니까?"
그때 고종을 보고 앉아 있었던 노인이 미우라 쪽으로 홱 방향을 돌렸다.
"뭣하는 노인인가?"
미우라가 이렇게 묻자 통역이 대답하였다.
"대원위 합하십니다."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완전히 말려든 것이라고 믿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닌가. 미우라 공사는 금후 외국공사들이 배알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윤허하지 않겠다든 고종의 다짐을 받고 나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자리를 떴다.
'한성신보’ 사장으로 이 사건에 가담한 고바야카와 히데오가 그의 <민비시해기>에서 설명하는 아소당이다.
"별장은 남향으로 자리잡아 별로 넓지 못하며 벽돌담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남쪽에 정문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연못이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는 행랑이 있다.정문 왼편의 방 하나는 궁중에서 파견된 경관들이 쓰고 있었다.
다시 정문에서 왼편으로 몇 걸음 간 곳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것이 대원군이 거처하는 본채였다."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당시 아소당에서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러 경복궁으로 가는 일본인들을 따라가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한다.
"한 노옹이 침대 위에 엇비슷이 기대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강본 등은 침대 곁에 엎드려 있었다. 손자 이준용도 들어와서
그 옆에 서 있었다. 경관들을 이미 가두어 놓아 병장 안팎을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대부분의 낭인은 응접실에 모여서 대원군의 출발을 기다렸다. 대원군은 더운 물을 침실로 가뎌오게 하여 세수를 마친 다음 의복을 정제하고 입궐할 채비를 꾸몄다. 우리들은 짚신 감발을 신은 채로 응접실에 올라 혹은 의자에 기대거나 혹은 서거나 하면서 대원군의 침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원군과 강본 등과의 교섭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원군의 침대는 서쪽 벽 밑에 놓여져 높이 두어 자쯤 되어 보였는데 그 위에 백발의 영감이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강본 등이 침대아래 바싹 다가앉아서 노옹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공사는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계략에 기대어 '여우사냥' 작전을 진행하였다.
오카모도 류노스케는 명성황후의 감시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은밀하게 찾아가 <거사계획>을 설명하고
일본정부의 <약속>을 제시했다.
첫째 대원군은 궁중에 들어가서 사태정리는 꾀하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둘째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고 그 밖의 개혁파를 기용한다.
셋째 이재면(대원군의 아들) 김종한을 궁내부 대신 및 협판에 임명한다.
넷째 이준용(대원군의 손자)을 일본에 유학을 보낸다.
대원군은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에 자필로 서명했다.
작가 신봉승은 그의 책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 당시 상황과 흥선대원군의 심경을 묘사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이 네가지 조건을 지그시 되씹어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왕비는 노국공사와 결탁하고 있어 대궐의 경비가 삼엄하고 이를 민씨의 족당이 지휘하고 있는데.....,
그대들이 어떻게 나를 입궐하게 하고자 하는가."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요. 실패할 까닭이 없소. 질풍조도의 기세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
"이달 스무 날이 지나서 거사할 것이니 머칠 더 기다려 주시고
거사 당일에 전하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신봉승은 비록 문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며느리가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이를 승낙했다는 사실은
그때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풍운아 이하응은 말년 마포에서의 한 맺힌 삶이다.
그는 그 한(恨)을 달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살았다.
"자신의 부질없었던 삶을 뒤돌아보면서 스스로를 비웃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마포의 별장을 아소정(我笑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공덕리의 천변은 동작진의 하류로 산세가 수려하고 마을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는데
대원군이 이곳 민가를 철거하고 가묘(家廟)를 만들었다.그 속에 당(堂)을 지어 광(壙)을 가리고
아소당이라 하였으며 그 광(壙)을 우소처(尤笑處)라고 하였다."-황현의 <매천야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