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대 청계노조 전 위원장께서 9월 27일 방문 하셨습니다. 과거에 사진을 찾기 위해서 오셨는데요, 곧 출간 될 자서전에 넣을 사진이라 했습니다. 자서전 하면 삶을 살아온 과정의 모든 얘기들 아니겠습니까. 노조 사무실에서 수정본을 다운받아 바탕화면에 깔아 놓고 가셨습니다. 모두 다 올리면 책을 안사 볼 것 이라 하면서 부분적으로 올리라 하니, 올리는것은 내가 알아서 연재로 올리겠습니다. 11월 11일 까지만요. 바쁘실 텐데 무려 에이포 용지로 101장이나 쓰셨더군요. 모쪼록 올리는 것 관심있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제 1 장 착한 아이
1. 연탄마차를 타고
나의 아버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목소리라는 산골 마을에서 8남매 대가족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금산은 다른 농촌과 달리 인삼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아 큰돈이 돌기 때문에 사람들이 통이 크고 대범한 편이다. 인삼 농사를 짓던 나의 할아버지는 한때 물레방앗간을 두 개나 가진 부농으로, 막내아들을 위해 서울 변두리 상봉동에 마당 넓은 기와집을 사주셨다.
나는 상봉동의 그 마당 넓은 집에서 태어났다. 1957년 11월 10일,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폐허 위에 재건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호적에는 내가 60년에 출생한 것으로 올라가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 복수면에 나의 출생신고를 했는데 마을 이장이 서류 접수를 깜빡 잊고 내버려두었다가 3년이 지나서야 등록한 탓이었다. 이장의 부주의로 나처럼 3년이나 호적이 늦어지고 생일도 엉터리로 기록된 동갑내기 동네 아이가 세 명이나 있다. 나는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주민등록 나이로는 다섯 살에 입학한 것으로 되었다.
상봉동의 어린시절은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퍽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집 근처 연탄공장 노동자였다. 마차에 연탄을 가득 싣고 공장에서 대리점까지 운반해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저녁이면 빈 마차를 집으로 끌고 왔는데 기분 좋게 취한 날이면 나를 마차에 태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장난감을 사주기도 했다. 지금은 상봉동이 시외터미널과 아파트로 가득한 도심이 되었지만 그 때는 농촌으로 둘러싸인 빈민촌이어서 집 근처에 배 밭이 많았다. 가을이면 먹골배를 한 아름 들고 오기도 하고, 고기를 사와서 마당에 연탄을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구워 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꼭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함께 사와 당신은 돼지고기만 먹고 소고기는 내게만 먹였다. 연탄불에 잘 익은 소고기를 소금에 찍어 내 입에 넣어주시며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수십 년 전 일인데도 생생이 기억난다.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유별난 것이었다. 부부관계가 썩 애틋하지는 못했던 데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소리 내어 싸우는 일은 없어도 다정다감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고 떠드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중매결혼이 일반적이던 시절이라 대개의 부부가 무덤덤하기 마련이었으나 우리 부모는 더 그랬다. 왜 그랬는가는 나중에 이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인근 제일의 부잣집 아들인데 비해 어머니는 마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딸이었다. 아버지는 착하기만 할뿐, 무능한데다가 술을 좋아하는 한량인데 비해 어머니는 사뭇 당찬 처녀였던 것 같다. 중매로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어머니는 자신이 돈에 팔려간다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던 모양이다. 결혼식 바로 전날,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온 동네가 떠들썩한 가운데 신부가 줄행랑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목소리에서 읍내로 나가는 중간에 당고개라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는데 꽤나 먼 거리다. 어머니는 야밤에 산길을 달려 도망치다가 당고개에서 뒤쫓아 간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고 아껴주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냉담했던 듯 하다. 집집마다 대여섯 명씩은 낳던 시절인데 나 하나만을 낳고 아이를 갖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관계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유순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은 성품이어서 어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넓은 마당에 상추와 고추부터 토마토, 들깨, 오이, 호박 모종들을 심었다. 화사한 봄 햇살 아래 누구보다도 예쁜 우리 어머니가 마당에 앉아 호미질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나는 행복했다. 여름철 시원한 장마 비가 쏟아져 내릴 때면 어머니는 부지런히 호미를 들고 돌아다니며 쓰러진 꽃과 채소들을 일으켜 세우셨고 나는 우산을 펴들고 뒤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어 어머니를 귀찮게 하곤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일감이 없던 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부침개에 막걸리를 마시며 흐뭇하게 우리 모자를 바라보곤 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평범한 가정이었고, 내게는 아쉬울 것 없이 행복한 집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팔을 다친 것은 내가 다섯 살 무렵이었다. 망우역 옆의 연탄공장에는 늘 탄광지대에서 석탄을 싣고 들어온 화물열차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를 건너오는 중에 기차가 출발하자 균형을 잃고 밑으로 떨어져 오른쪽 팔이 기차에 깔려 버린 것이다. 멀리 돌아오면 될 것을 빨리 집에 오기 위해 기차 연결부분 사이로 건너는데 마침 기차가 움직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팔목 부위만 잘려나갔는데 수술이 잘못되었던지 팔이 점점 썩어 들어가 서울위생병원에서 연세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몇 차례 수술을 거듭한 끝에 오른팔 전체를 잘라내게 되었다.
한쪽 팔을 완전히 잃은 아버지는 더 이상 연탄공장에서 일할 수가 없었다. 산재보상금을 받고 집을 팔아 당신의 작은 형님이 사는 논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에 다닐 때였다.
당시 나는 동네 아이들 중 그래도 모범생이었다. 전쟁직후인 데다가 변두리 빈민촌이다 보니 아이들 분위기가 거칠었다. 학교 안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데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먼지떨이로 칼싸움, 몸싸움을 하다가 붙잡혀온 아이들은 공부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릴 때까지 다른 반 교단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했다. 점령군이 포로를 다루는 것과 같다. 개발이 한창이던 서울의 외곽지대라 사방에 야산을 깎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방과 후면 수십 미터나 되는 급경사에 아이들이 떼 지어 몰려 올려가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때로는 윗동네 아랫동네 간에 돌멩이를 던지며 위험한 전쟁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어린 나이 임에도 모든 놀이에 빠지는 일없이 끼어 놀면서도 공부 역시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낙향과 함께 어린시절 봉화산자락을 누비며 즐거움이 모락모락 피어났던 서울 생활도 끝날 수밖에 없었다.
논산에는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셋째 형님이 되는 분으로 작은 변전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개인 집 전기공사도 도맡아 유복하게 살았다. 논산읍내에서 다소 떨어진 마을이었는데 큰아버지는 지역 유지의 한 사람으로 내가 다니게 되는 왕전초등학교 기성회장이기도 했다. 우리가 내려갔을 때 큰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큰 기와집을 짓던 중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집안에 화장실을 두었고 타일을 붙여 만든 둥근 욕조가 있는 목욕탕이 딸린 저택으로, 마당도 무척 넓었다.
막내로 자라난 아버지는 의타심이 강한 편이었다. 서울 상봉동에 올라갔던 것도 나에게는 고모인 누나 한 분이 그곳에 살고 계셨기 때문이었고, 논산을 택한 것도 형 때문이었다. 잘 사는 형에 의지해 살면서 장사라도 하려고 생각한 듯 하다. 서울 집을 판 대금과 산재보상금을 모두 챙기고 이삿짐을 싸서 논산에 도착한날 큰아버지를 비롯한 큰집식구모두와 함께 논산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산재사고 이후 불구가 되신 아버님은 이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서울을 싫어했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시던 아버님이 시골에 내려와 첫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희망과 불안이 교차했을 것이다.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마친 아버지에게 결혼을 하여 논산시내에서 살고 있었던 큰아버지의 딸인 사촌누나가 현금을 들고 다니시면 위험하다며 오늘은 자기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내일 오셔서 은행에 맡기시라고 하였고 아버지는 아무 의심 없이 전액을 맡겼다. 그날 밤 조카딸이 식구들과 함께 논산을 떠난 것을 아버지는 다음날에야 알았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알거지가 되어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일 이후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조카딸 원망하며 한말을 되풀이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어느 날 나를 부둥켜안고 하루 종일 우시더니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셨다. 돈을 잃은 때문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누적되어 온 불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술에 찌들어 눈물만 흘리다가 아내와 조카딸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는 그 때 사촌누나가 왜 돈을 가지고 달아났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몇 년인가 지난 뒤 나중에 아버지가 만나기는 했으나 돈은 벌써 다 써버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어 회수를 할 수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후에도 이모를 통해 아버지와 나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어 초등학교 때까지는 꼬박 내 옷을 사서 보내주었으나 아버지를 만나려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는 만나지 못한 채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삼십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만난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과 함께 작은 주차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아내와 조카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동안 나는 큰아버지 댁에 맡겨져 있었다. 딸이 훔쳐간 거액을 갚아줄 능력은 없던 큰아버지는 돈을 물어주는 대신 자기 집 마당 한편으로 자그마한 별채를 따로 지어 아버지와 나를 살게 해 주었다. 아버지와 나는 본의 아니게 논산 큰집에 얹혀사는 꼴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