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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과 소설의 운명
1930년대 중·후반 비평에서의 '현실'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변모를 중심으로-
1. '사실의 세기'에서 '근대의 초극'까지
1935년을 전후로 한 식민지 조선은 정치적으로 볼 때 만주사변(1931)과 중국에 대한 일제의 잇따른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준(準)전시상황을 맞고 있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는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대두하고 있었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매우 불안한 국제정세가 형성되고 있었다. 세계경제는 1929년의 대공황의 여파에서 좀처럼 회복할 기세를 보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국내 자원이 부족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자신들에게 미친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약소국가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개시하게 되었다.
1935년 파시즘의 문화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니스에서 개최된 <지적협력국제회의>에서 의장 폴 발레리(Paul Vallery)의 발언을 통해 유명해진 '사실의
세기(l'ere du fait)'란 말은 1935년 카프 해산 이후의 국내의 지식·문화계 내부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1935년 카프의 해산은 단순히 한 문학단체의 해체가 아니라 역사철학적 근대성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이념적, 실천적 사유와 행동의 존립방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조선의 지식계급의 일부는 이젠 근대에 대한 어떤 보편적 전망이나 예측도 불가능하며 종래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연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건들만 난무하는 이 시대에 대한 판단중지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의 세기'라는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시기의 서구의 작가들은 역사는 더 이상 구제할 수 없이 공허한 것이며 진보의 법칙이나 신(神)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우연에 내맡겨진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으며 근원적인 비관주의나 숙명적인 번뇌감을 표현하는 각종 '불안의 문학literature of anxiety'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불안의 문학의 표현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파탄 의식과 그것을 포착할 상징적 공식에 대한 절망적 탐색이었다." 1935년 이후의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도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1930년대를 전후로 한 이 시기의 서구에서 위와 같은 문화의 위기와 근대의
종말에 대한 불안감에 대한 담론들이 출현했다면, 한편, 당시의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32년도까지 라프(RAPP)에 의해 지속되던 소련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라는 문예이론 정책은 라프의 공식적인 해산(1932)과 함께 "현실을 그 혁명적 방법에 있어서, 진실하게, 역사적 구체성으로써" 그릴 것이며,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노동자를 사회주의정신에서 사상적으로
개조하여 교육하는 과제와 결부시켜야" 한다는 목적을 띤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바뀌게 된다. 거기에는 소련의 제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
인텔리겐챠들의 프롤레타리아트 쪽으로의 대규모 전환, 대중의 문화적 욕구의 성장이라는 저간의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기가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1935년 전후로 서구의 국가와 소련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인민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시의 서구의
개인주의자 앙드레 지드와 같은 작가에게도 파시즘의 현실에 대항하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 때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던 나프(NAPF)가
1932년부터 나프에 대한 대규모 구속과 이에 따른 작가들의 전향 속에서 그
존립근거를 위협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즉, 소련의 공식적인 문예정책을 그대로 이어받던 나프가 그 존립근거가 희박해지는 때에 받아들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그를 둘러싼 논쟁은 따라서 일종의 전향·비전향의 명분을 나프의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다양하게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해서, 비록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과 그를 둘러싼 논쟁이 나프 측의 논의를 거의 옮긴 형태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 번안은
1933년 이후 급속하게 괴멸된 나프의 현실적 상황과 카프의 그것이 유사하다는 데서 오는 현실적인 고민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카프 내부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을 비판한
논자에 속하는 안함광과 김두용이 비판의 근거로 내세운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논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의는 1930년대 중·후반의 리얼리즘 개념을 둘러싼 현실 개념에 대한 변모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중일전쟁 이후, 위 '사실의 세기'라는 말에 대한 일본 사상계 측의 적극적인 해석이 대두한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서양이 몰락의 징후를 보이자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신질서의 개편을 도모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철학적 기초가 다져지는데, 그때 '근대의 초극'론이 출현한다. 그런데, 근대의 초극은 일본에서의 맑스주의에 대한 탄압과 대량 전향 사태 이후에 나타난 사상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의 필연적 귀결인데, 이때 이 해방은 그것이 근대를 의미하는 한에서는 근대로부터의 해방을, 서구를 의미하는 한에서는 서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러한 근대의 초극은 '불안의 시대'라는 혼돈과 '사실의 세기'라는 절대적 필연을 해석하고 극복하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에서 시작, 신세대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몇 가지 중요한 논의 중 현실 개념의 변모를 중심으로 리얼리즘과 소설의 개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의미변환을 탐색하고자 한다.
2.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의 '현실'과 리얼리즘의 분열
1933년, 백철의 [문예시평]에서 최초로 소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카프의 새로운 창작방법 개념은 이후 추백의 [창작방법 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무수한 논쟁 과정을 거친 이후, 카프가
공식적으로 해체된 1935-6년을 전후로 하여 거의 소멸되기에 이른다.'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추백의 글이 먼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기존의 카프의 지도적 문예이론이었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수용에
따른 현실적 한계에 관한 것이다. 추백은 그 한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그 원인을 생각하여 본다면 첫째로 카프 조직의 결함, ××(검열), 발표기관의 부족 등 일언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주체적 역량이 약한 것, 둘째로 우리들의 작가, 비평가들이 현실 그것의 발전에 대하여 파행하기 시작하였다는 것, 셋째로 구라프의 운동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문학운동에 있어서도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슬로건이 부족과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이 문제에 인(因)한 이론 그것이 작가 자신 또한 비평가들에 의하여 규정화되었다는 그곳에 있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슬로건이 갖고 있었던 '창작방법의
단순화'는 우리들의 비평가들에 의하여도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유물변증법의 도식화와 그와 관련되어 비평의 관료화 등이 생기고 작가 자신에 의하여서는 정치적 이해의 비근한 형상으로 구체화에 만족하는 경향을 낳게 하고
타방에 있어서는(...)작가에 의하여 위협수단으로 생각되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구라프의 운동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우리들의 문학운동 자체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추백의 이러한 비판은, 일견 카프를 둘러싼 정세를 적확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먼저 받아들인 나프의 현실적 수용배경을 그대로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추백은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근간을 이루는 작가의 세계관, 곧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정하면서도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주장하던 세계관과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형식의 과도한 분리를 비판한다. 이것은 동경지부 카프 소장파로써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내세운 이전의 추백 자신의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는 "예술가의 이데올로기적 기도와 그의 작품의 객관적 의의와는 문학의 역사상에 있어서 언제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예술창작이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유물변증법에서 출발한다는 전도된 방법"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 카프
지도부에 있는 주요 비평가들의 비평 태도를 들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카프의 비평가들은 작가가 갖고 있는 주관적 세계관을 먼저 검증한 다음 이에
따라 실제 작품의 반영된 객관성, 진실성의 여부를 평가해왔다는 것이다.
추백이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았지만,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태도보다도
실제 작품에 반영된 현실 비판의 객관성과 사회주의적 전망을 높이 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공식적 슬로건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비평의 범례는 엥겔스의 '발자크'론과 레닌의 '톨스토이'론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발자크와
톨스토이는 각각 왕당파와 귀족적 기독교 계층이라는 계급적 조건 속에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주관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작품은 당대의 부르조아 계층의 타락상을 폭로하고 미래를 이끌어 갈 민중의 위대한
상이 '객관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추백이 자신의 글에서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예술가가 여하히 사실을
보느냐라는 것만이 아니고 그 현실을 여하히 예술적으로 표현하느냐 라는
문제를" 새로운 창작방법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추백의 이러한 논의가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지도적·집단적 창작원리로 삼던 카프의 존립근거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제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논의가 전향론과 나란히 시작되었으며 전향론의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예술 창작의 복잡성과 다면적인 면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의의 이러한 측면은 (일본과) 조선의 현실적 수용 단계에서의 굴절과정을 통해 상당히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인다.
먼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추백의 설명에는 작가의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작가의 실제 창작 태도와 방법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내재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세계관이 갖추어야 할 유물변증법적 태도가 주관성의 개념으로 치환되고, 실제 예술 작품의 성과에서 객관성의 범례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카프에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작가의 세계관이라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창작방법까지 설명하려는 이론이었다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실제로는 작가의 '주관'과 작품의 '객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상상적' 이데올로기와 실제 작품의 '상징적' 텍스트간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다. 소련에서 제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현재화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로 변신한 작가의 이데올로기는 실제 작품과의 화해가 이미 상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주관과 객관은 일치하게 된다. 이때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의 또 다른 측면이 새롭게 발견된 엥겔스의 발자크론(1933)에 내재한 '비판적 리얼리즘'을 지양한다는 차원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자본주의적 사회에 내재한 첨예한 모순을 살아가는 작가가 자신의 의식적·무의식적 이데올로기적 신념과 실제 창작과정상의 갈등과 반목을 주요한 문제틀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프의 존립근거마저 위태로운 상태에서 제출된 추백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그를 둘러싼 논의는 작가들이나 비평가들로 하여금 당연히 그것이 발생한 토대 자체에 대한 의문, 예컨대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가의 주관적 사상적 태도보다는 예술 작품의 복잡성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요구는 전향 쪽에 기울고 있었던 카프계 작가와 비평가들로 하여금 '정치에서 인간(문학)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에서 예술로'라는 등의 전향의 명분을 마련해주게 된다. 더 이상 작가 혹은 비평가의 주관적 사상=사회주의적 세계관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제 그런 세계관을 철폐하고 예술=문학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맨 처음 소개했던 백 철("비애의 성사")과 심리적 리얼리즘을 논의한 박영희("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가 전향의 대표적 경우라면, 반대편에는 작가의 주관적 이데올로기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참을 수 없는 간극과 모순을 극복하려는 김남천과 임화의 주체재건의 노력이 있게 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카프 : 전향과 비전향으로 분열
리얼리즘 : 이데올로기=세계관(주관)과 텍스트=현실(객관)로 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