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기전에 조선의 동포들을 치료해주게 되였으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요"이렇게 서두를 뗀 연길시북대골과진료소(개체 진료소)원장이며 저명한 한의사인 김천석씨(남,71세)는 응당 지원해야 할 일을 했는데 왜 굳이 언론에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김응룡)작가친구의 재삼 설득에 의해 기자를 만난다고 했다.
2004년4월24일에 조선 룡천군에서 렬차폭발사고가 생겨 사상자가 1300여명이나 생겼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한 김천석한의사와 그의 가족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필경 폭발사고인 것만큼 화상,타박상,골절 등 환자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으리라고 짐작한 김천석한의사는 동포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생각하고 외상에 필수되는 한약을 제조하기 시작해 3일간의 불철주야로 인민페 10만어치의 약을 제조했다.
년로하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속내를 손끔보듯 알고있던 셋째아들 김만철(진료소 약제조사)씨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진 지원차로 가겠다고 엿주니 아버지는 이슬맺힌 눈길로 승낙하고 로비 만원을 쥐워 주면서 반드시 사고현지에 도착하면 환자들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약을 전해주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김만철씨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10만어치의 한약을 갖고 원정의 길을 떠났다.당시의 정경을 김만철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고가 생겨 3일만에 중국 단동에 도착하니 국제적십자 구호물자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의주로 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조선 관계부문과 련락을 취하니 입국이 인차 비준되여 개인 첫 지원자로 룡천에 도착했다.조선측 관계자는 그에게 가장 수요되는 것이 의료품이라고 했다.관계자의 안내하에 조선 평안북도립병원,신의주시립병원에 가보니 침대가 모자랄 정도로 부상 환자들로 꽉찾다.병원 원장이 친히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면서 환자들의 병세를 일일이 소개한 뒤 인차 갖고 간 약들로 화상,골절,타박상 등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갖고 간 한약들이 효험을 보게되자 조선측 관계자들은 참으로 설중송탄이라고 감동하면서 동포의 정에 대해 감격을 금치못했다고 했다.
김만철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룡천폭발사고에 중국 등 47개 나라에서 지원의 손길을 보냈지만 개인적으로 지원의 길 그것도 치료지원길에 오른 것은 그 혼자뿐이였다고 한다.
“조선땅에서 동포들이 이런 참상을 당했을 때 아버지는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고 나로서도 아버지의 처사에 큰 감동을 받고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도움의 원정길에 나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슴뿌듯하다"고 아들 김만철씨는 얘기했다.
김천석 한의사는 “다른 나라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에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응당한데 우리동포들이 사고가 생겼을 때 한피줄로서 더더욱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그제날 현지 언론인들이 찾아와서 취재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가 작가 김응룡씨가 당시 흑룡강신문만이 조선족언론신문으로서 큰 편폭을 할애하면서 도움의 홍보에 나섰고 또 사회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이는 등 지원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듣고 재삼 되는 권고에 못이겨 흑룡강신문사 기자의 취재에 응하게 되였다고 내심을 털어놓았다.
김천석씨는 30여년간 한의사로 사업하면서 수많은 불우한 동포들을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김응룡작가는 소개하고 나서 그의 사적에 감동을 받고 김천석씨의 사실을 담은 실화소설‘삶의 선택’을 펴냈다고 밝혔다.
김천석한의사는 아들 넷에 손자손녀까지 있지만 작년부터 또 두집 불우한 가정의 사실을 알고 두집의 10여살되는 애들의 학잡비, 생활비를 공부가 끝날 때까지 대주기로 약속했으며 25년간이나 불우한 로인들을 위해 연길시북대로인협회에 매년 500원이라는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김천석한의사의 룡천폭발사고 재해복구지원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일전에 조선정부에서는 그에게 감사패와 상장을 수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