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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경파(금녕군파)
 
 
 
 
 
카페 게시글
기본 게시판 스크랩 부용재 이야기
김영광 추천 0 조회 113 13.11.13 1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부용재(芙蓉齋)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500
건 축 주 :  김세보(金世輔, 1468~1538)
건축시기 :  1930년대
중건시기 :  1978년
소 유 자 :  김해김씨 문중

건축 배경
부용재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한 김세보(金世輔, 1468~1538)가 연산군(燕山君)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영양(英陽)에 들어와 일월산(日月山) 중에 은거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입암(立岩)에 들어와 시를 짓고 글을 읽기 위한 장소로 삼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건축 특징
부용재는 왼편 담장 밑에 방형 모양으로 시멘트를 발라 만든 ‘일월지(日月池)’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인공 못에 대해서는 관련기록이 없어서 김세보가 이곳에 들어와 부용재를 지을 때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공 못 뒤편에 자리를 잡은 일월지 표석 우측면에 “신미년(1931) 8월”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 못은 193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 구성
부용재는 정면4칸, 측면1칸 반의 규모의 건물이다. 재사는 크게 2칸의 당(堂)과 당 옆 각 1칸씩의 온돌방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면에 반칸 규모의 퇴칸(退間)을 두고, 당의 전면에 각 칸마다 사분합문(四分閤門: : 당(堂) 앞에 다는 네 짝으로 된 문. 이 문은 필요에 따라 들고 내릴 수 있어서 방과 마루의 기능을 겸하게 해준다.)을 설치하여 방과 마루의 기능을 겸할 수 있게 하여 공간활용에 있어 편리성을 도모하였다. 재사를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두르고, 전면에 3칸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현판
부용재(芙蓉齋)
신락당(新樂堂)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부용재기(芙蓉齋記)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
부용재건립기금표성록(芙蓉齋建立基金表誠錄)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내력과 기능
부용재는 배동환(裵東煥)이 지은 「부용재기(芙蓉齋記)」에 의하면, 입향조인 김세보(金世輔)를 기려서 1930년경에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원래 김세보가 은거하며 부용재를 지은 곳은 이곳이 아니며, 원래 입향조가 지은 곳에 부용재를 다시 중창하려 했으나, 지형이 험하고 부지가 협소하여 후손들이 모이거나 관리도 쉬운 이곳으로 옮겼다고 현 위치에 중건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부용재는 지금은 입향조인 김세보를 기리는 목적 이외에, 인근에 사는 후손들이 문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모이는 장소로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인물
- 김세보(金世輔, 1468~1538)
자는 고우(故佑). 호는 부용재(芙蓉齋)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부친은 현감(縣監)을 역임한 김영순(金永純)이다. 1468년(세조14)에 출생하여 1484년(성종1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청요직을 거쳐 벼슬이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직 중 연산군(燕山君)이 정치를 잘못하여 종사를 거의 위태롭게 만듦을 보고, 여러 번 간언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중에 숨어 살며 나무를 하고 소를 치며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가 높은 벼슬을 지낸 존귀한 사람임을 모를 정도였다. 그 뒤 무오(戊午) ·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지만, 김세보만 홀로 그 화를 면하였다.

이후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을 하고 여러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부용봉(芙蓉峰) 아래의 신업리(新業里)로 옮겨가서 풀을 베어다가 집을 얽고 재를 ‘부용(芙蓉)’이라 하고, 당을 ‘신락(新樂)’이라 이름 지어 일생을 은거하는 삶을 살았다.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입암면 신구리
- 우물을 파지 않은 마을, 신구리(新邱里)
신구리는 마을의 모양이 배와 같다고 하여 물이 생기면 좋지 않아서 우물을 파지 않은 마을이다. 본래는 영양군 남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탑구동,신사동,신하동,양기동의 일부를 합쳐서 신구리라고 하였는데, 신구리란 명칭은 신사(新泗)와 탑구(塔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구리에는 네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크게는 현재의 초등학교와 행정기관이 위치한 신구1리[상조기리(上釣沂里) , 기상(沂上), 하조기리(下釣沂里) , 기하(沂下)]와 마을 안에 3층 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신구2리[탑구(塔邱) , 탑구동(塔邱洞), 옹기굴몰 , 점촌(店村)]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부용재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은 신구1리인데, 이 마을은 상조기리(上釣沂里) , 기상(沂上) 부락과 하조기리(下釣沂里) , 기하(沂下)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웃조기리와 아랫조기리를 합하여 조기리라고 하는데, 김해김씨 영양입향조인 김세보(金世輔)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신기라고 하였다. 그 뒤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고기가 많아서 낚시꾼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또한 마을 모양이 낚시 모양이라서 조기리(釣沂里: 속칭 조고리)라 불렸다고 한다.

부용재 주변으로는 부용재 뒷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김세보의 9대손인 김종환(金鍾煥)을 기려 후손들이 중수하고 개와(蓋瓦)한 기암정(沂巖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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