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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산 원문보기 글쓴이: 군계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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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한 김세보(金世輔, 1468~1538)가 연산군(燕山君)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영양(英陽)에 들어와 일월산(日月山) 중에 은거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입암(立岩)에 들어와 시를 짓고 글을 읽기 위한 장소로 삼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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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는 왼편 담장 밑에 방형 모양으로 시멘트를 발라 만든 ‘일월지(日月池)’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인공 못에 대해서는 관련기록이 없어서 김세보가 이곳에 들어와 부용재를 지을 때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공 못 뒤편에 자리를 잡은 일월지 표석 우측면에 “신미년(1931) 8월”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 못은 193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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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는 정면4칸, 측면1칸 반의 규모의 건물이다. 재사는 크게 2칸의 당(堂)과 당 옆 각 1칸씩의 온돌방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면에 반칸 규모의 퇴칸(退間)을 두고, 당의 전면에 각 칸마다 사분합문(四分閤門: : 당(堂) 앞에 다는 네 짝으로 된 문. 이 문은 필요에 따라 들고 내릴 수 있어서 방과 마루의 기능을 겸하게 해준다.)을 설치하여 방과 마루의 기능을 겸할 수 있게 하여 공간활용에 있어 편리성을 도모하였다. 재사를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두르고, 전면에 3칸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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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芙蓉齋) |
신락당(新樂堂) |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
부용재기(芙蓉齋記) |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 |
부용재건립기금표성록(芙蓉齋建立基金表誠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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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재는 배동환(裵東煥)이 지은 「부용재기(芙蓉齋記)」에 의하면, 입향조인 김세보(金世輔)를 기려서 1930년경에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원래 김세보가 은거하며 부용재를 지은 곳은 이곳이 아니며, 원래 입향조가 지은 곳에 부용재를 다시 중창하려 했으나, 지형이 험하고 부지가 협소하여 후손들이 모이거나 관리도 쉬운 이곳으로 옮겼다고 현 위치에 중건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부용재는 지금은 입향조인 김세보를 기리는 목적 이외에, 인근에 사는 후손들이 문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모이는 장소로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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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보(金世輔, 1468~1538) |
자는 고우(故佑). 호는 부용재(芙蓉齋)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부친은 현감(縣監)을 역임한 김영순(金永純)이다. 1468년(세조14)에 출생하여 1484년(성종1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청요직을 거쳐 벼슬이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직 중 연산군(燕山君)이 정치를 잘못하여 종사를 거의 위태롭게 만듦을 보고, 여러 번 간언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중에 숨어 살며 나무를 하고 소를 치며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가 높은 벼슬을 지낸 존귀한 사람임을 모를 정도였다. 그 뒤 무오(戊午) ·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지만, 김세보만 홀로 그 화를 면하였다. 이후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을 하고 여러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부용봉(芙蓉峰) 아래의 신업리(新業里)로 옮겨가서 풀을 베어다가 집을 얽고 재를 ‘부용(芙蓉)’이라 하고, 당을 ‘신락(新樂)’이라 이름 지어 일생을 은거하는 삶을 살았다. |
영양 > 석보입암권 > 입암면 신구리
- 우물을 파지 않은 마을, 신구리(新邱里)
신구리는 마을의 모양이 배와 같다고 하여 물이 생기면 좋지 않아서 우물을 파지 않은 마을이다. 본래는 영양군 남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탑구동,신사동,신하동,양기동의 일부를 합쳐서 신구리라고 하였는데, 신구리란 명칭은 신사(新泗)와 탑구(塔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구리에는 네 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크게는 현재의 초등학교와 행정기관이 위치한 신구1리[상조기리(上釣沂里) , 기상(沂上), 하조기리(下釣沂里) , 기하(沂下)]와 마을 안에 3층 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신구2리[탑구(塔邱) , 탑구동(塔邱洞), 옹기굴몰 , 점촌(店村)]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부용재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은 신구1리인데, 이 마을은 상조기리(上釣沂里) , 기상(沂上) 부락과 하조기리(下釣沂里) , 기하(沂下)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웃조기리와 아랫조기리를 합하여 조기리라고 하는데, 김해김씨 영양입향조인 김세보(金世輔)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신기라고 하였다. 그 뒤 마을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고기가 많아서 낚시꾼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또한 마을 모양이 낚시 모양이라서 조기리(釣沂里: 속칭 조고리)라 불렸다고 한다.
부용재 주변으로는 부용재 뒷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김세보의 9대손인 김종환(金鍾煥)을 기려 후손들이 중수하고 개와(蓋瓦)한 기암정(沂巖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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