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만에 오롯이 혼자 머문 집이다. 시댁도 안 가고, 일도 안 가고, 일도 안 하고, 책 보다 잠 오면 자고, 컴퓨터 하다 허리 아프면 따뜻한 방에 들어가 책 봤다. 소로우의 월든을 다시 폈다. 아무 페이지나 폈는데. 콩 농사 이야기다. 완전 무공해 농사를 지으며 느낀 점을 상세하게 서술했는데 놀라웠다. 다음은 월든 호수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다음은 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소로우의 월든은 찬찬히 음미하며 읽을 수록 감명깊다. 글은 섬세하고 문장은 찬찬하다. 파문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글, 건조하지도 않고, 뛰어나지도 않은 평면 같은 글인데도 그 속에는 사물에 대한 깊이와 자연에 대한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점심 때가 되었다.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렸다. 어제 장조카 부부가 사 온 목살을 굽고, 독에서 맛이 알맞게 든 시원한 무김치를 내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담고, 마늘과 된장, 새우젓을 내고, 동치미도 한 사발 떠 놓고, 배추김치는 척 걸쳐먹게 꽁지만 짤라 냈다. 날마다 똑 같은 밥상인데도 갓 나온 김치라 그런지 맛깔져 보인다.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가. 이 추운 날 산초나무 가지치기를 간 남편이다. 산초나무 가지를 치면서 잡다한 일상을 잊고 편안해져 돌아왔으면 싶다. 임대한 단감 산 주인이 보낸 내용증명서 때문에 소심한 남편이 혼자 속앓이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남에게 독하게 못하는 선한 사람이 어쩌다 사람 잘 못 만나 마음 고생이 심하다. 지금은 맞대응을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내용증명서의 내용은 단감나무를 박피한 것은 단감을 크게 키워 조기 수확할 목적으로 고의 훼손을 했다는 죄목을 달고 왔다. 고의 훼손이라니. 우리에겐 생계가 달린 문젠데 고의 훼손이라니. 단감농사 지을려고 남의 논 임대해서 옥수수 농사 짓던 것도 주인에게 돌려주고 고사리 농사도 뒷전에 버려두고 오로지 단감농사 하나에 골인했던 한 핸데 단감나무 고의 훼손이라니. *임대인은 임차인의 농사에 대하여 간섭할 권한이 전혀 없다*는 임대차계약체결보호법(노무사에게 질의하여 받은 답변임)에 명시된 사항조차 지키지 않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직불금조차 임대인이 수령해 놓고도 단감나무 박피를 고의 훼손이라는 죄목을 씌워 임대계약해지를 알려 온 것이다. 성질 못 된 사람 만났으면 진작 박살이 나도 났을 것이고, 창고에서 쫓겨 나 제 집으로 가야 했을 양반인데 워낙 말이 없고 다툼을 싫어하는 남편이라 꾹 참고 단감 산만 가꿨는데.
나는 잘 됐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남편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 만약 임대인이 임대계약 기간 도중에 일반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면 임차인은 계약기간 동안 토지를 사용 수익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상당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라는 임대차계약보호법에 명시 되어 있다는 항목을 보여주며 우리도 내용증명서 보내면 되니 괜찮다고, 귀찮지만 저 쪽에서 저렇게 나오는데 가만히 있으면 진짜 우리만 등신 되는 것이라고, 설마 사람인데 그럴 리 있을라고 하다가는 덤터기 쓰게 된다고 했지만 남편은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노인네가 한 것을 생각하면 혼쭐을 내 주고 싶지만 인정상 그럴 수가 없어 단감농사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용증명서가 날아 든 것이다. 아직 임대 기간이 5년이나 남았는데. 법은 법이다. 법의 잣대는 증거다. 인정은 말 그대로 별 볼 일 없다. 마음 약하고 선한 남편은 아무리 임대인이 뭘 몰라도 그럴 리는 없다지만 그 영감님에게 덤터기 안 쓰려면 우리도 맞대응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내용증명서를 보니 법무사에 가서 한 것 같았다. 누군가 영감을 조종하고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아 심히 불쾌했다.
만약 이번에 우리가 맞대응을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박피한 단감나무에 대한 변상조치 하라고 고소장이 날아 오지 싶다. 올해는 첫해니까 우리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단감나무 수형을 잘 잡아두면 3년 째부터 제대로 된 좋은 단감을 수확할 것이라는 계산하에 박피를 단행한 것인데. 엉망진창으로 키운 단감나무를 제대로 잡아 멋진 수형을 만들 욕심으로 단감나무 지지대와 고정핀을 트럭 한 차나 사다 7백 주 나무를 손 보며 고생고생 했는데. 임대인은 고마움을 모르고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갖은 시비를 건다. 단감을 못 따 가게 하려고 갖은 수를 썼었다. 밭떼기 장사꾼이 와서 단감산을 둘러보고 나가면서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주인 영감이 감나무 가지를 박피 해서 못 쓰게 만들었다더마 내가 보니 박피한 것도 몇 개 안 되네요. 잘라내야 할 가지더마."
밭떼기로 사려고 했던 그 상인도 주인부부가 중간에서 난리를 피우자 아무래도 밭떼기로 샀다간 손해가 나겠다 싶었는지 손을 들어버렸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감 수확을 해 들였는데. 아직 단감 산에 널린 일거리를 갈무리해야 하는데. 시간이 안 나서 못 가고 있을 따름이다. 내년부터 단감농사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가 투자한 것은 거두어와야 정상인데 임대인은 그것조차 주기 싫은 모양이다. 임대계약서를 우편으로 보내란다. 도대체 우리를 세살 짜리 어린애로 보는 것인지 머슴으로 보는 것인지. 사람이 선하게 대하면 선한 줄을 알아야지.
임대인의 행위를 생각하니 다시 열이 뻗치려고 하는데 남편이 왔다. 나는 지글지글 구운 고깃점을 숟가락 위에 올려 준다. '착한 당신, 힘 내요. 당신 옆에는 내가 있잖아.' 이런 마음을 담아 전하면서도 겉으로는 딱 부러지게 한 마디 했다.
내일 내용증명서 작성해서 보냅시다. 차후 생각해서 법무사 들리고 농협기술센터에 가서 단감 박피에 대한 책갈피 복사해서 첨부하고. 아예 법적 대응 할 준비 해 놔야 할 거요. 틀림없이 누군가 뒤에서 저 영감을 조종하는 것 같은데. 잘못 하다간 우리가 당해. *임차인은 계약기간 동안 토지를 자유롭게 사용 수익할 수 있다*라는 임대계약 체결 보호법에 대해서도 똑똑하게 명시해서 보내야 할 거요. 그 영감이 이번에 계약해지에 대한 내용증명서 보내 우리가 아무 말 없이 있으면 계약해지 완료로 처리하고 단감나무 박피에 대한 변상조치 하라고 법에 고소할 거요. 그러기 전에 우리가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혼쭐을 빼야 할 거요.
알아. 00이가 그렇게 해야 한다더군. 내일 법무사부터 가 봐야겠다.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법대로 해 놔야 탈이 없지 싶다.
00이는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200대 1을 뚫고 공기업에 합격하여 법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조카다.
점심을 먹고 남편이 일하러 간 후 나는 다시 월든을 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 월든, 마음이 고단할 때마다 펴 드는 책이다.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조곤조곤 숲 속의 삶과 사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창 밖의 자연이 참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나도 자연인으로 산다는 것, 행복 아닌가. 잡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사유의 샘에 풍덩 빠져 지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