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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김종래
195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 경복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사회부기자, 정치부 차장을 거쳐 《주간조선》 부장을 지냈으며, 조선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 총괄 및 디지털미디어 담당 부국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대우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조선일보 출판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몽골 정부로부터 친선 훈장을 수상했으며, 몽골국립대학과 칭기스칸 아카데미에서 명예박사 학위(역사학)를 받았다. 저서로는 『밀레니엄 칭기스칸』, 『CEO 칭기스칸-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전략』, 『우마드-여성시대의 새로운 코드』, 『유목민 이야기-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고용불안, 업무 스트레스, 불안한 미래…. 비즈니스맨의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문명의 진화가 만들어낸 21세기의 단면이며, 절대풍요가 만들어낸 절대빈곤, 그야말로 구조적 패러독스paradox이다. 하지만 혼돈 속에서도 세상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계속 새로운 것들이 창조되고, 그것으로 진보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세상에 없던 것을 내어놓는 꿈의 개척자, 그들은 바로 인간이다. 인류가 발전해온 길은 인간이 어떠한 분야나 특정 아이템에 미쳐 일한 결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인간인 이상 동물과 다른 ‘프로마니아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 프로마니아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치면 길이 있다.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저 즐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마추어와는 다르게,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프로마니아Promania는 Professional과 Mania의 합성어로, 일에 대한 전문성은 물론 자신이 하는 일에 광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무한열정을 가진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생을 온전히 바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만약 그렇더라도 자신을 절대 될 수 없을 거라며 지레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호기심과 집중력만으로 누구나 프로마니아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프로마니아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프로마니아의 길을 제시한다. 죽음을 앞둔 결정적인 ‘5분’을 체험한 도스토예프스키, 나만의 것이 아니면 가짜라는 신념으로 살아간 천재 예술가 안토니오 가우디, 경쟁자를 관리하고 경영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한 쿠빌라이 칸,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이 된 오프라 윈프리 등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프로마니아가 되는 길을 보여준다.
▣ 차례
프롤로그 - 인간만이 유일한 프로마니아다!
01 아주 특별한 체험이 시작이다
02 호기심은 모든 것을 뚫는다
03 애벌레가 아니었던 나비는 없다
04 처절한 소망은 초능력도 낳는다
05 세상을 떠나면 세상이 열린다
06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이 황금어장이다
07 숨 쉬는 한 무한 상상하라
08 나만의 것이 아니면 가짜다
09 시간의 주인, 지식의 연인이 되라
10 출구를 모르면 취미 활동일 뿐이다
11 설계되지 않은 꿈은 신기루다
12 경영할 것은 내가 아니라 적이다
13 이길 것은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14 더 아름다운 것은 야생화다
15 장점과 약점은 일란성 쌍둥이다
16 최후의 목표는 휴머니즘이다
17 올인 속에 영혼의 평화가 있다
18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
에필로그 - 미칠 것은 도처에 널려 있다
아주 특별한 체험이 시작이다
비슷한 재능과 성장 배경이 주어지더라도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한 인생을 산다. 왜 그럴까?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요소가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기억이 쌓여 그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기 때문에, 어떤 체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은 물론 그에 따른 행동과 인생 전반이 달라진다. 프로마니아는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체험,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절체절명의 순간을 체험함으로써 인생이 바뀐 사람이 있다. 때는 제정 러시아 시대 영하 50도의 혹한 속. 그러나 사형대에 묶인 세 청년은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중 한 청년은 반체제 비밀 독서 클럽에 가입한 죄로 정치범이 된 28세의 문학도였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집행관은 죽음을 준비할 시간 5분을 허락한다. 청년은 함께 묶인 동료에게 인사하는 데 2분,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는 데 2분, 그리고 발붙이고 살아왔던 대지와 자연을 돌아보는 데 나머지 1분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인사를 시작했고 2분은 금세 흘러갔다. 마침내 삶을 정리하려던 그는 문득 3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매순간 아껴 쓰지 못했던 28년이 뼈아프게 후회되었다. “다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순간순간 정말 값지게 쓰련만!” 청년은 끝없이 한탄했다. 바로 그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르의 특사였다. 사형을 중지시키고 대신 4년간의 강제노동을 명하는 내용이었다. 성탄절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이 청년의 이름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의 유형생활은 사형의 공포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고된 노동, 벼룩이 들끓는 감방, 무자비한 폭행, 도스토예프스키의 체험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1,500명의 죄수들과 함께 한 4년, 끔찍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인간의 내면과 삶의 다양한 일면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사색하게 만들었다. 고된 수형생활이 위대한 명작을 낳을 수 있었던 창작의 원천이 된 것이다. 수형생활 이후 그는 놀라운 대작을 연이어 발표한다. 모두 선과 악, 도덕과 양심 그리고 냉정한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들이었다. 어떤 예술작품도 작가의 삶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섰던 절체절명의 순간, 공포 속에서 삶의 가치를 되새겨 보았던 사형장에서의 5분, 그 특별한 체험이야말로 평범한 청년을 대문호로 거듭나게 한 결정적인 계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순간이었다.
삶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늘 생존과 도태라는 또 다른 사형장에 놓여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절박함을 따지면 격동기를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와 다를 바가 없다. 이곳이 영하 50도 혹한 속 사형장이라고 상상해 보라.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자. 누구에게나 내면세계 깊숙이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있다. 지금이라도 그 특별한 체험, 도망가고 싶은 두려운 순간 앞에 다시 한 번 마주 서자. 그 체험 속에서 버려야할 과거의 나, 그리고 새로워질 미래의 나를 발견하자!
호기심은 모든 것을 뚫는다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인간에게 재앙을 초래했다는 판도라 상자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호기심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왜?”를 생각하고 “어떻게?”를 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생활이 점점 편리해지는 데 기여한 것 중의 하나가 호기심이다. 일상 속의 편리한 물건들,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사용하는 종이컵이나 음료수를 마실 때 쓰는 빨대 같은 것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휴 무어는 1907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한 살 위 형 때문에 공부 대신 발명에 매달리게 된다. 당시 그의 형은 생수 자동판매기를 발명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판기에 사용되는 컵이 도자기로 만들어져 쉽게 깨졌던 것이다. 이런 결함으로 인해 자판기의 인기는 점점 떨어졌고,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휴 무어는 형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쉽게 파손되는 도자기 컵 대신 깨지지 않는 컵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정말 간단한 생각이었다. 그는 깨지지 않는 컵을 상상하던 중 종이를 떠올렸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종이는 물에 젖는 데다 쉽게 찢어졌다. 컵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에 젖지 않는 종이를 사용해야 했다. 그는 긴 연구 끝에 촛농을 묻혀 물이 새지 않도록 한 태블릿 종이를 발명한다. 그리고 대학을 자퇴하고 생수 자판기 사업에 본격 참여하게 된다. 그 무렵 한 자본가가 제안을 해 왔다. “20만 달러를 투자하겠으니 종이컵 생산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종이컵은 간편하고 안전하다는 슬로건 아래 본격 판매에 들어갔다.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20년엔 아이스크림 컵을 개발하여 인류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든다. 휴 무어는 깨지는 컵이라는 실패에 호기심을 더함으로써 새 발명품을 개발하고 사업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종이컵 안에 담긴 성공의 비밀, 그것은 바로 호기심이었다. 도자기보다 가볍고 깨지지 않는 컵은 없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사용하는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프로마니아의 정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자신의 인생을 새로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못 말리는 호기심. 아이러니한 점은 호기심이 매번 우연히 싹튼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다가, 무언가를 보다가, 상황에 관계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한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하면 된다. 호기심을 풀어볼 마음을 먹는 것이다. 무언가 실천해 보는 것이다 우연을 호기심으로 발전시키고 특정한 완성품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프로마니아가 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뚫는 탈출구, 바로 호기심이 있다면 프로마니아가 되는 첫걸음을 이미 내디딘 셈이다. 작은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뚫듯, 호기심이 막연한 불안감과 안정되지 않은 미래의 벽을 뚫고 새로운 삶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 세상이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여기이다. 그런데 이 문밖을 나가 다른 곳으로 가보고 싶다. 간단하지 않은가.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선뜻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텐데, 모든 것이 보장되는데 굳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매너리즘은 인간 생명을 단축시키는 보이지 않는 질병이다. 이 바이러스는 늘 소리 없이 다가와 눈치 채지 못하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잠식한다. 이것으로부터 탈출을 원한다면 현재의 안일함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야 한다. 여기 인생 전반이 보장된 길을 두고, 거칠고 험한 행로로 겁 없이 뛰어든 한 젊은이가 있다.
28세 조영일 씨는 요식업에 종사한다. 직함은 대리, 주 종목은 설렁탕이다. 사실 그는 80평 규모에 25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설렁탕집 사장이다. 어린 사장에 비해 직원들은 모두 연세 지긋한 아저씨 또는 아주머니뻘이다. 어른들 모시고 장사하기에 사장 직함이 부담스러워, 영일 씨는 대리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는 원래 의대생이었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사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만 의사가 20명에 달하는 집안의 자손이다. 이 가운데 몇몇은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종합병원 원장 또는 이사장이다. 다니고 있던 의대만 졸업해도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일 씨는 메스 대신 식칼을 잡았다.
영일 씨는 인턴을 시작할 무렵 “의사로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예전부터 먹는 것을 좋아했고 그에 관련된 장사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는 외도를 결심했다. 의대에 다니면서 틈틈이 식당 일을 배운 것이다. 뚜렷한 포부를 안고 영일 씨가 가게를 차린 곳은 근처에 4군데 설렁탕집이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개업 후 광우병이 돌았고, 설렁탕이며 고기, 저장해 놓은 김치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영일 씨가 가게를 비우면 직원들이 술을 먹고 싸우거나 식자재를 빼돌리는 일도 발생했다. 영일 씨는 개업 한 달 만에 전 직원을 해고하고, 이후 교체된 직원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지금 그곳에서 살아남은 설렁탕집은 영일 씨 식당뿐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우습게도 성공비결은 너무 평범하다. 성실함과 겸손, 누구나 아는 비결이다. 나이 많은 직원들에게 자신의 허리를 낮추는 겸손함, 그리고 직원들보다 부지런한 사장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 더불어 중요한 것은 일을 즐기는 프로마니아다운 태도다. 장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놀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 적이 없다. 조 대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사업 성공 비결이 아니다. 진짜 메시지는 현실의 한계, 즉 눈앞에 보이는 것에 갇혀 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리를 떠나봐야 그곳이 우물이었음을 깨닫는 법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두려워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가. 먼저 떠나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조 대리의 성공을 부러워하기 전에 의사의 길을 버린 용기, 자신의 일에 죽어라 미칠 수 있는 열정, 남몰래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현실의 한계, 기득권은 닫힌 문과 같다. 닫힌 문 너머 새롭게 열리는 세상을 바라보자. 닫힌 문을 열어야만 볼 수 있다.
숨 쉬는 한 무한 상상하라
“상상력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좌우된다. 경영에 상상을 접목하라.” 주식회사 남이섬 강우현 사장의 말이다. 그는 경제 혹은 경영과는 무관했던 자신이 남이섬을 하나의 성공 상품으로 이끈 비결은 상상경영에 있다고 강조한다. 1953년생인 강 사장은 홍익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했다. 2001년 남이섬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광고 분야에서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그런 그도 처음 남이섬을 맡았을 때는 암담했다. 손님도 돈도 없는 절망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남이섬을 살린 것은 황무지에서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꾸었던 그의 상상력이었다.
사장 취임 후 그는 과감한 경영 혁신과 환경 경영을 통해 남이섬을 한국의 대표 관광지로 확립시켰다. 먹고 마시는 유원지에서 문화 예술과 자연 생태가 어우러진 안식처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취임 5년 만에 회생불가 낙인을 깨고 관광객 수를 6배 이상, 매출을 100억 원대로 5배 늘려 놓았다. “남이섬에 IT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상상 테크놀로지(Imagination Technology)가 우리의 IT이다. 이는 문화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 경쟁력이다.” 아들과 함께 남이섬에 놀러갔다가 단돈 100원으로 연봉 계약을 하고 남이섬의 대표가 된 그는 “앞으로 1억 달러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상상펀드를 만들어 문화 마을을 조성하는 데에 쓰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프로마니아의 길을 찾아 나섰지만 빈손이라 시작도 못 하고 망설이고 있는가? 돈도 많지 않고 특별한 권력이나 배경이 없다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더욱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남들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새로운 땅, 남들이 선점하지 못한 블루오션을 발견하고 항해해 나가야 한다. 블루오션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상상력에 있다. 남다른 상상력만이 다른 사람이 미처 생각지 못한 나만의 신대륙으로 안내할 것이다.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부술 때, 발상은 신선해진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관습이나 규격화된 제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신비한 체계여서 상상력을 발동시키지 않으면 창조적 기능이 퇴화될 수 있다. 벽을 깨는 참신한 두뇌와 그것을 실현코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프로마니아로서의 성공은 어렵지 않다. 무한 상상하라. 그것이야말로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에 남들보다 한 발 앞설 수 있는 성공의 열쇠이다.
나만의 것이 아니면 가짜다
인간에게는 개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고유성으로 함부로 숨길 수도 없고, 숨겨지지도 않는다. 비즈니스 사회에서 화합은 필수적이지만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화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른 척 살아가기엔 인간이 지닌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창조행위는 인간에게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나만의 것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함께 또 따로” 인간의 특징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프로마니아의 길을 택해 자신만의 미래를 준비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프로마니아가 남의 성공이나 부러워하며 성공한 사람이 거쳐 간 길을 무조건 따라나선다면 죽는 길로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탄탄대로를 뚫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한 분야에 미친 전문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한 분야에 미친 전문가가 아니라면 나만의 미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그런 의미에서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가짜라는 신념 속에 살다간 프로마니아다.
건축 역사상 유일하고도 독창적인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가우디에 의해 건축의 장식화, 건축 기하학 화, 건축의 자연화는 태어났다. 스페인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해 그의 17개 작품을 국립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하나같이 하늘, 구름, 물, 바위 같은 자연의 모습에서 기상천외한 영감을 얻어 지은 건축물이다. 자연 외에 그의 작품 모티브는 환상의 세계이다. 사람의 뼈를 흉내 낸 기둥, 스테인드글라스를 떡 주무르듯 만든 집, 네 개의 팔이 달린 십자가 등, 어찌 보면 정신상태가 뒤틀려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보는 이를 몽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이런 건축물들은 그의 꿈이 얼마나 원대하고 엉뚱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것도 비슷한 것이 없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건축가의 길로 나섰는데, 졸업식 날 학장이 그에게 남긴 말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온다. “우리가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가우디는 자유롭게 흐르는 선의 형태를, 3차원의 표현력을 갖춘 건축으로 전환한 아르누보(Art nouveau) 건축가 중 가장 독창적인 인물이다. 자연은 물론이고 인체의 골격에서도 디자인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가우디의 작품은 시대와 양식을 모두 초월하고 있다. 1883년 이후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매달렸다.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된 이 성당의 건축은 이후 4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너무 앞선 예술가인 탓일까? 가우디의 삶은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건축에 미친 그의 생활은 초라했다. 74세 되던 해 그는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전차에 치였지만 차림새가 너무 남루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 세상을 떠났다. 로마 교황청은 가톨릭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묻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사람들의 핀잔도 있었고, 알 수 없는 예술에 대한 멸시도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며 독자성을 잃지 않았던 가우디. 진정한 개성은 그런 것이다. 그가 만약 남들이 만든 작품을 따라 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고집과 창의적인 사고가 그를 남다른 예술가, 자신의 일에 미친 프로마니아로 만든 것이다. 가우디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딱 하나다.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의 것이 아니면 가짜인 것이 냉엄한 프로마니아 세계의 법칙이다. 다른 이들이 가는 길을 무심코 따라가고 있다면, 발을 돌려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진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만의 길을 개척하는 자만이 진정 프로마니아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출구를 모르면 취미 활동일 뿐이다
취미생활이 다양해지면서 무언가에 대해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적극적인 참여를 펼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마니아라고 부르고 남들로부터 마니아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프로마니아가 되지는 못한다. 왜일까? 취미 활동을 넘어 프로마니아로서의 열정을 분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한 탓이다. 분재를 좋아해서 집안을 온통 분재로 채워두었다고 그를 분재의 프로마니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프로마니아는 단순히 즐기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취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타크래프트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요환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테란의 황제라 불리는 그는 프로게이머이기 이전에 프로마니아이다. 방황하던 고3 시절 어느 날 임요환은 인생에서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게임에 열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것이다. 친구가 하고 있던 컴퓨터 게임은 이제까지 그가 하던 오락실 게임과는 전혀 다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스타크래프트)이었다. 이것이 스타크래프트와 임요환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PC방에서 온종일 게임에 몰두했다. 당연히 대입시험에도 낙방했다. 사람들은 그를 ‘PC방 죽돌이’라 불렀다. 그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게임에 걸어 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기획사로부터 프로게이머로 활동해 보겠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마음 한 편에서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전한 대회에서 그는 예선을 통과하기 무섭게 본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오기가 생겼다. 자신보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모두가 그의 표적이었다. 어느 날 그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또 다른 사건이 생겼다. 스타크래프트 세계에서 1인자로 불리던 사람을 만나 대결을 부탁했다가 한 마디로 거절당한 것이다. 훗날 자신이 최고의 게이머가 되기로 결심한 가장 큰 계기가 그 사건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의 일은 그에게 엄청난 도전의식을 유발했다.
게임에만 매달리며 뚜렷한 인생 목표 없이 사춘기를 보낸 그였지만 일단 목표가 생기자 무섭게 돌변했다. 그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이었다. 계약금도 연봉도 없이 시작한 프로게이머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인정받는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목표 아래 첫째도 둘째도 무조건 연습이었다. 프로게이머들과 연습하면서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게임이라고 하지만, 깨어있는 시간의 거의 전부를 연습에 쏟아 붓는 생활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하루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프로게이머의 세계에 들어온 것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99년 12월 그는 SBS 멀티게임 챔피언십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 만이었다. 이후 주요 리그를 모조리 평정하고, e스포츠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게임 마니아들을 열광시켰다.
어떤 경위를 거쳤든 우리는 모두 입구까지는 서 있다. 그런데 출구는 각기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출구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남이 가리키는 출구를 향할 것인가? 진정한 프로마니아 기질은 정확한 출구, 나만의 출구를 찾아가는 정신에 있다. 출구를 모른 채 입구에 서 있는 것은 그저 취미 활동을 즐기려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입구는 다른 사람에 의해 정해졌더라도 출구는 자신이 정해야 성공한다는 사실을 임요환의 사례는 말해주고 있다.
경영할 것은 내가 아니라 적이다
지금부터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기상천외한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자. 13세기 후반 몽골군과 남송의 전쟁이다, 당시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남송의 전략적 요충지인 상양과 번성 두 도시를 포위한다. 두 도시와 몽골의 10만 병력.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많은 사람들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묘미는 지금부터이다. 몽골군은 전쟁을 하지 않고 토목공사를 시작한다. 두 도시를 온전히 두른 토굴을 파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100km가 넘는 장벽을 쌓았다. 도시를 둘러싼 몽골군은 어떤 공격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송에서 탈주해 온 병사가 있으면 치료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기근이 들면 식량을 원조해 주기도 하였다. 남송에 무역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전장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쟁터 근처에 큰 무역장터가 생기게 되었다.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급급한데 오히려 전쟁을 구경하겠다고 관광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에게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상인이 모여든 것이다. 심지어 사창가도 생겼다. 그야말로 전쟁의 산업화였다. 쿠빌라이 칸은 무슨 생각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는 중국 전체를 점령하여 세계를 경영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비전을 갖고 있었기에 전혀 다른 방식의 전쟁을 택한 것이었다. 큰 나라를 세우려면 남송의 국가경영 노하우, 기술자, 학자, 무기 등을 송두리째 받아들여야 한다. 즉 전쟁을 하지 않는 전쟁을 해야 한다. 이런 구상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장터 같은 전장에서 남송과 몽골의 대치상태는 7년간 계속된다. 당시 상양성은 남송 최고의 장군 여문환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식량난이 닥치자 처자식들까지 성 밖으로 내쫓으면서 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남송 수도인 임안의 권력자들은 그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남송 최고의 장수가 몽골군을 퇴치하지 못하는가? 일부러 우물쭈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엄청난 오해와 비난이 쏟아진다. 여문환은 고민에 빠진다. 원군도 없이 비난만 하는 조국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반면 몽골은 무인을 우대하고 한족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제대로 평가해 주었다. 결국 여문환은 쿠빌라이 칸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임을 확신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몽골에 투항한다.
항복한 여문환은 감격에 휩싸인다. 식량난 때문에 내쫓았던 처자식들을 쿠빌라이 칸이 잘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 칸은 여문환과 그의 부하 그리고 두 도시의 주민들을 우대했다. 몽고군의 일원이 된 여문환은 자신의 인맥을 살려 남송 공격의 선봉으로 나섰다. 여문환의 행동은 교착상태에 놓인 전쟁국면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았다. 1274년 각 국경선에서 몽골의 공세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남송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고, 몽골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자진해서 문을 열고 환영했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고 행진이었다. 마침내 몽골군은 남송의 수도 임안에 무혈입성을 한다.
기묘한 전쟁에 기묘한 결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역사만 읽을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적이 있고 라이벌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대하고 다루는 방식이다. 진정한 프로마니아라면 쿠빌라이 칸처럼 경쟁자를 관리하고 경영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라이벌을, 적을, 경쟁자를 포용하면 그들의 장점과 노하우를 함께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다루는 일에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경영할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점을 새겨 두자.
더 아름다운 것은 야생화다
2003년 보기 드문 여성 보컬 그룹이 등장했다. 신연아, 이지영, 이영현, 박민혜를 멤버로 한 <빅마마>이다. 당시 가요계는 가창력보다 외모가 우선시 되고 있었다. 이른바 비디오형 가수가 대우받았고, 립싱크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시절에 용감하게 대중 앞에 선 빅마마는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뛰어난 음악성과 매력적인 보이스 컬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웬만한 방송에도 출연하지 않고 1집 음반이 40만 장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가수는 노래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우치며 대히트를 친 것이다.
빅마마의 성공 뒤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었다. 얼짱만을 찾던 가요계 관계자들은 그들의 진정한 노래 실력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웃었다. 멤버 중 한 사람인 이지영은 오디션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겨울이어서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던 그녀에게 심사위원들이 외투를 벗고 한 바퀴 돌아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지영이 울면서 항의하자, 그들은 “요즘 모델 같은 가수가 대부분이어서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빅마마는 “외모가 별로면 기회조차 주지 않던 시절을 생각하면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가요계에는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많다. 외모를 가꾸고 춤 연습만 하던 신인들도 작곡 공부나 악기 연습을 한다고 한다. 이제야 비로소 본질의 실체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딛고, 사회적 편견을 깨부수고 일어선 그들은 대중의 우상으로 대접받을 만하다. 천박한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실력으로 우뚝 선 그들은 “잘 가꾸어진 화초보다 들판의 야생화가 훨씬 더 아름답다”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해 준 진정한 프로마니아이다. 현란한 플레이로 포장된 속임수가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누가 화초이고 누가 야생화인지 판별하는 대중의 능력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까지 왔다. 대중은 빅마마의 목소리에 담긴 진정한 영혼을 알아보았고,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군인은 전투로, 작가는 작품으로, 배우는 연기로 승부해야 한다. 군인이 경례자세로, 작가가 책의 디자인으로, 배우가 용모로 승부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주변을 둘러보자. 실력 없는 상사가 폭탄주로, 여사원이 애교와 교태로, 남자 사원이 오직 상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며 복종하는 자세로 일하는 민망한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프로마니아를 꿈꾸는 사람들도 자칫하면 이런 행렬에 유혹받기 쉽다. 그러면 프로마니아는 고사하고 평균적인 삶도 살기 힘들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본질이 아닌 것을 두고 사회를 영리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 보기 좋게 포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합리화시킨다고 하더라도 본질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프로마니아가 되기 위해서는 명심하자. 제아무리 가꾼들 화초는 화초일 뿐, 대자연의 들판에서 자란 야생화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장점과 약점은 일란성 쌍둥이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이 없고 완벽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런데 왜 누구는 약점이 없어 보이고, 누구는 약점 투성이로 보일까? 약점을 어떻게 보고 극복하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강한 인간들은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낸다. 프로마니아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약점을 극복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워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약점이 거꾸로 장점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장점과 약점은 일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오프라 윈프리. 그러나 그녀의 과거는 온통 얼룩투성이다. 그녀는 1954년 미국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9세였던 어린 나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친척과 주변 사람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 14세의 나이에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조차 2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 초반에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100kg이 넘는 비만의 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인기, 존경, 돈 모든 것을 얻은 사람이 되었고 미국을 움직이는 막강한 브랜드가 되었다. 오프라의 약점 투성이 과거는 현재의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그녀의 삶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물론 <오프라 윈프리 쇼>이다. 이 프로의 인기 비결은 다름 아닌 솔직함이다. 미국에는 오프라 윈프리화라는 신조어가 있다. “속마음이나 과거 철없는 행동을 만인에게 털어놓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을 뜻하는 표현이다. 자신의 쇼에 나오는 게스트들의 고백본능을 자극하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녀는 국민심리치료사로도 불린다. 게스트를 고백하도록 만드는 힘은 다름 아니라 그녀 자신의 고백이다. 자신의 아픈 과거, 사생아였으며, 가난했고, 성폭행을 당했으며, 마약을 했고, 비만이었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그런 용기에 게스트들은 공감했고 시청자들은 감동한 것이다.
그녀가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만들고자 했던 것은 조금 더 건전하고 안전한 세상이었다. 그녀는 의회에 출석하여, 아동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 대한 전국적인 데이터베이스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들은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곧바로 “오프라 법안”이라고 불리는 아동보호법에 서명을 했다. 그녀의 진솔한 모습과 다양한 사회활동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분명 자신의 어두운 과거, 즉 숨기고 싶은 약점으로부터 잉태된 힘이다.
그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없었다면 강점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성공은 자신의 약점의 무덤 위에서 출발하였다. 결코 운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녀의 과거 속에는 타고난 장점이나 든든한 배경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있다면 당장 지우고 싶은 과거, 격한 성격과 가난하고 불행해서 책을 보지 못했던 치명적인 약점과 불행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았고 치명적인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성공이 더욱 아름답다.
최후의 목표는 휴머니즘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이념 홍익인간 사상이다. 이런 핏줄을 타고난 우리 민족은 프로마니아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프로마니아의 필수 품성 중 하나가 이타적인 삶, 따뜻한 피가 흐르는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오직 휴머니즘 하나로 고된 길을 갔던 프로마니아의 삶이 있다. 역사책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온몸으로 19세기를 살다 간 고산자 김정호이다.
김정호는 청구도와 대동지지, 대동여지도라는 우리나라 지도를 만든 실학자이다. 그의 지도와 지지들 속에는 이 나라 산하에 대한 주옥같은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다. 최초로 한반도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해 체계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지도와 지지는 전통적인 동양식 지도와 지지의 금자탑으로 꼽힌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일찍이 내다본 그는 정보통신혁명의 선각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도대체 한성으로 가려면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하나? 이 나라 백성들 모두가 그걸 알면 얼마나 편할까?”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이 점이 무척 궁금했고 답답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산줄기와 냇물과 강물들이 뻗어나간 지도나 도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전국을 두루 살피면서 새로운 것을 구경하고 정확한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자.” 그는 그때부터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답사하는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 작업은 개인의 힘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국가가 나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는 지도를 만들어 나라 기밀을 팔아먹으려 한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투옥시킨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려고 지도를 만들었을 뿐이다”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옥 안에서 숨을 거둔다.
순수한 동기는 외면당하고 억울하게 옥사한 김정호.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지도 제작에 집착했던 것일까?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 백두산을 수없이 올랐다는 일화가 말해주듯이 그는 우리 국토의 모습을 지면 위에 옮겨 그리려는 열정 속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런 열정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한없이 깊은 동포사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바로 휴머니즘 정신이다. 당시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고 편찬한 까닭은 국토에 대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와 지배층이 독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했다. 지배층의 눈엣가시 같은 일에 생을 다해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끝없는 사랑, 동포애, 인류애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앞에 목표물이 있다. 그곳을 향해 옆도 돌아보지 않고 마냥 뛰어 마침내 그 목표물 앞에 도착했다. 어떤 생각이 들까? 그저 행복하기만 할까? 많은 사람들이 허탈감 내지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원하던 꿈을 이루었는데 그토록 허전하고 쓸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목표물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행복감을 느낀다. 무슨 차이일까?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이다. 허무한 공간을 인간과 인간이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은 달리는 동안 생기는 공간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 뒤도 돌아보고 옆을 보는 사람은 공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인간을 보게 된다. 인간과 인간, 그들의 사랑과 따뜻함으로 공간을 채운다.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다. 부와 명예를 얻은 상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편안함에는 비수가 숨어 있다. 현재의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에 만족하면, 언젠가는 그곳에서 굴러 떨어지는 비극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안주한다고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안락사시킬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안주 욕구 뒤에는 그것을 파괴하고 뛰어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다. 그것이 바로 도전 욕구이다. 이 점이 바로 다른 생명체와 인간이 다른 점이다. 도전 욕구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본성이며 프로마니아의 근성이다.
2001년 8월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히말라야 14좌를 최단 기간에 올라 세계 최고의 산악인 반열에 오른 박영석. 그는 동양인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딛고 전 세계 산악인 중에서 유일하게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위대한 산악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굴의 투혼으로 처참한 실패를 극복한 기록이기도 하다.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 때는 앞에서 루트를 뚫다가 1백여 미터나 추락했다. 선혈이 낭자한 채 함몰된 안면을 마취약도 없이 바늘로 꿰매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는 6개월 후 재도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뼈마디를 쑤시는 살인적인 추위와 강풍 때문에 정상 1백여 미터를 앞두고 포기해야 했다. 1993년에는 아시아인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하지만 하산 길에 동료 2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극원정 첫 도전 당시에는 준비와 경험부족으로 인해 절반 넘게 갔던 길을 돌아와야 했던 뼈아픈 기록도 있다. 이 이야기는 그가 분루를 삼켜야 했던 숱한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극복의 기록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거두어들인 성공보다 도전하고 이루고 싶은 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북극점 재도전, 좌절을 안겨주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 인도 갠지즈강의 발원지 추적과 탐험, 무동력으로 세계 일주,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로 히말라야 정상에 서는 것 등이 그에게 남은 중요한 목표이다.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박영석. 그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시킨다”는 영혼의 소리일 것이다. 생사를 건 위험천만한 모험의 세계로 그를 내몰았던 이유,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는 등반의 프로마니아 세계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 멈추고 말았을 것이다.
박영석은 충고한다. “실패가 두려운 게 아니라 도전하지 않는 게 두려운 것이에요. 100% 완벽한 실패를 해야 그게 내 것이 됩니다. 그래야 재도전을 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어설프게 실패하면 계속 실패합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도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의 고지를 가리키는 안내판일 뿐이다. 한 번의 성공은 인생의 게임 오버를 알리는 차임벨이 아니다. 값진 성공을 거둘수록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에 귀를 기울이자. 안락은 스스로를 안락사 시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