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라도 훌쩍 다녀오고 싶은 오래된 고옥이 있다.
속리산 봉우리를 멀찍이 밀어놓고 물돌이동이 돌아가는 곳에 자리잡은 선병국 가옥이 그렇다.
청주에 근거지를 두었을 적에는 종종 찾아가곤 했던 곳이다.
청주를 떠나 세종시로 공주로 돌아서 온 세월이 언 7~8년이 되었다.
그때 머릿결 곱게 빚고 나직한 목소리로 객을 귀히 여기시던 주인 아주머님을 이만큼에서 바라보고 누군가 했다.
넓은 사랑마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계신 뒷모습에 흰 서리가 머리에 가득 내렸다.
처음엔 이곳에 일하러 오신 분인줄 알았다.
세월이 그만큼 흘러간 것이다.
노년의 세월은 그렇게 빨리 가고 있는 것이다.
오십줄을 바라보는 나 역시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빨리 변해가고 있다고 여길테다.
함께 온 분들과 6칸 대청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품격높은 대청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을 품어주고 있다.
활짝 열린 쌍창으로 사월 하순의 바람이 아직은 차갑다.
차가운 기온 탓인지 따뜻한 찻잔이 손안에서 다정스럽고
목줄기를 타고 가슴으로 흘러드는 모과차의 따듯함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이곳은 사랑채다.
사랑채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양반가옥에서는 보기 드문 배치로 별당채라고 봐야 하는게 옳지싶을 정도로 안채와 마주하고
있지만 안채에서 한참 먼 거리에 별도의 내담을 두르고 지어졌다.
이 건물과 안채 사이의 중간지점(북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사당이 역시 내담을 두르고 배치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느 그리 올라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초창기에 해당되는100년 안팎 정도로 알고 있다.
당시 이집을 지은 주인은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특히 기존의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 단독으로 집을 지었다.
담장의 총연장 길이가 약 1km가 넘는다.
넓은 경역에 외담을 두르고 동서에 안채와 사랑채를 별도의 내담을 치고 자릴 잡았다.
사당은 전체적인 배치로 볼때 중심부의 북쪽에 위치한다.
외곽 담 남쪽에 소슬대문이 있고 북쪽 담에 사주문의 후문이 있다. 이 두 문을 기준으로 외곽담이 연결되었는데 어느쪽에 서
있든 끝이 보이질 않는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H' 자 형태로 지었다.
안채는 사랑채 보다 규모가 약간 크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답게 주변에 행랑채, 곳간채, 변소, 장독대, 문간채 등이 둘러서
있다. 사랑채는 안채와는 달리 단독건물로 세워졌다. 우물을 제외하곤 담장 내에 별다른 시설이 없다.
사랑채는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택지 위에 북좌남향으로 지어졌다. 마당은 H자로 튀어난온 건물의 양 날개로 인해 안쪽으로
깊이 패이면서 밖으로 넓게 열린 모습으로 인해 더욱 선명한 네모꼴을 보여주고 있다.
마당 좌우엔 장대석 화단경계 위에 각진 정원이 구비되었다.
동쪽엔 산수유, 목련, 매화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꽃을 피웠다.
서쪽엔 노송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고 그 옆으로 감나무가 있고 아래로 초화류와 물확이 고풍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를 처음 대하는 이들에게 처음엔 다양한 창호에 놀라고 안팎의 목구조 짜임과 공간 구성에 또 놀란다.
세살, 완자, 팔각불발기, 팔각벽창호, 격자창... 특히 전면쪽으로 튀어나온 평면의 약방과 제조실이 이채롭다.
이들은 마루방인 데 서쪽의 약방은 쌍창 두껍이 벽에 팔각창호를 달아 내측 고정 벽(살위에 문종이 바름)으로 은은한
채광이 비껴들도록 하여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은은한 영명함에 절로 명상이 된다.
전면의 외측 기둥 사이에 아자와 기하학 형태의 교란이 기품있는 여성을 대하는 듯하다.
건물의 몸체에 해당되는 중앙은 동서에 겹방을 두고 사이에 6칸 대청을 배열했다.
열린 쌍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마당은 고즈넉하리마큼 간결하고 말쑥하다. 예로부터 사랑채는 남정네들의 공부방이요 사교장
이라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선 공부하기는 어렵고 놀기는 좋을 듯 하다.
대청의 상량 대들보의 곡선이 심상치 않다. 소위 팔자형의 곡선처리가 과감하다. 요즘 같으면 저런 목재는 재목감이라고
여기지 않고 외면했을텐데 목수의 나무부림의 탁월함에 놀랍다. 뿐만아니다 그 위의 배면쪽에 동자주와 중량의 가구 짜임도
왠만한 경험자가 아니고선 흉내도 내기 어려운 기법을 썼다. 수덕사의 홍예보를 연상케 한다.
저정도의 과감한 첨가와 적용을 할 수 있는 목수라면 무슨 모양의 집인들 못짓겠는가 싶다.
목수라는 이름은 참 많이 듣는데 실력있는 목수를 만나기 어려운 요즘의 현실이 아뜩해 진다.
목수의 기기묘묘한 잔재주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대청의 연등천정에 노출된 연목은 아랫쪽이 약간 휘어진 것을 사용했는데 그 곡선이 주는 부드러움은 이집에 감춰진 가장
아름다운 곡선이다. 연목하면 소매걷이와 선자연을 제외하곤 의례이 곧은 것을 제일로 치는데 어떻게 저런 멋스러운 생각
을 하였을까, 참으로 번득이는 디자인 감각이다.
목수의 이런 재주 뒤에는 풍부한 재력의 지원이 있었을 것은 분명한 이치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마음껏 집을 짓는 목수
는 없는 법이다. 나도 고향에 집(이우재)을 지으면서 목수와 맺은 협약이 하나 있었다.
'목수가 마음껏 하고싶은데로 내버려 둘 것' 그 약속은 지켜졌다. 덕택에 이우재는 다른 집에선 볼 수 없는 목수의 잔재주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보이지 않는곳에 들어간 그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대신에 재력이 많이 소진되
는 결과를 낳았다. 이곳 사랑채도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볼때 그랬을 것이다.
어찌보면 재력을 기반으로 한 호사스러움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호사스러움이 지금 우리에게 보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게 하였으니 그때의 목수는 후일의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알았던듯싶다. 이우재의 그것이 그러했듯이...
이집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속리산 준봉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꿈틀대며 움직일 것만 같은 남성적인 봉우리의 굵고 거친 형태가 여성스런 건물에 정기를 불어넣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변화무쌍한 속리산 준봉의 아름다움이 이 집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언젠가 늦은 가을에 이곳에 왔다가 들녘엔 아직 단풍이 남았는데 저 멀리 뵈는 속리산의 정상에 희끗희끗한 잔설이 내린
것을 보았다. 그 신선함이란 잊을 수 없는 명 장면이었다.
선병국 가옥의 사랑채는 남성들을 위한 건물이었지만 미적인 형태는 안채에 비해 훨씬 여성적이다.
그런 모습은 내달리듯 뻗어 나온 속리산의 준봉들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주인 아주머니의 가냘픈 미소와 서리가 성성히 내린 쪽진 머리가 자꾸만 떠오른다.
마음씨 고운 아주머님이 안 계실 집은 얼마나 적막하고 서글플까.
아주머닌 이집이 좋아 어디를 가지 못하는 중병에 걸리신 분이다. 그분의 입을 통해 그 소릴 듣고 쓸쓸한 세월을 사랑채를
벗삼아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담박에 알아버렸다. 오래토록 건강하게 그 자리에 남아계셨으면 좋겠다.
마당 구석에서 바라 본 사랑채 전경
동측 협문 밖으로 안채 행랑채 뒷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저 멀리 속리산 준령이 보인다.
거목의 산수유엔 아직 노란 꽃들이 만발하다 그 아래에 작약과 모란이 대궁을 내밀고 있다.
사랑 대청에서 바라 본 마당과 남쪽 담의 협문과 그 밖으로 정문인 소슬대문이 보인다. 그 밖으로 군부대가 호위하듯 자릴 잠았다.
목수의 잔재주(실력)가 물씬 배어나오는 화려함의 극치미(?) 사랑대청
굵고 휘어진 자연목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린 대량과 옥개부 가구의 짜임에 한계가 없는 목수의 치밀한 기술을 본다.
따뜬한 모과차를 마시며 소형주택에 대한 토론이 한창인 전통건축설계 동호회원(제 2기생)
약방이라 일컫는 서쪽 마루방의 내실에서- 두껍이집은 대개 벽지를 바르는데 이집은 문살로 두꺼비집을 짜고 외벽에 팔각벽창호를 달고 안쪽엔 한지를 발라 은은한 빛을 안으로 들였다. 재치있는 생각이다.
첫댓글 보존하기가 여간이 아닐텐데, 안방 주인이 장수하시기만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