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움에 진달래는 피어나라>, 푸른사상, 2014년 12월.
【편집 후기】
강민 시인 5주기 추모 시집을 간행하며
맹문재
1.
강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14년 1월 21일 인사동에 있는 포도나무집에서였다. 그 자리에는 이행자, 이경철, 이소리, 박희호 선배님들도 함께했는데, 강민 선생님의 시집 발간을 논의했다. 그 이전에도 이승철 선배님 등이 강민 선생님의 시집을 간행하면 좋겠다는 추천이 있었다. 나는 선배님들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어서 대면 자리는 편하고 즐거웠다.
선생님께서는 뵌 지 보름쯤 되는 2월 6일 시집 원고를 정리해서 충무로에 있는 푸른사상사의 사무실에 방문하셨다. 박정희 선생님과 이소리 선배님이 동행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시집의 구성이나 편집 등에 관한 일체를 나에게 위임하셨다. 그리고 시집 해설은 이경철 평론가를, 시집 뒤표지 글은 신경림 시인이 쓰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또한 뒤표지 글 한 꼭지는 내가 쓰면 좋겠다고 하셨다. 젊은 시인의 글을 받고 싶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부탁하신 것이라는 판단이 되어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선생님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는 6월 30일 ‘푸른사상 시선 42번’으로 간행되었다. 작품의 주제와 발표 시기 등을 고려해서 72편의 시를 골라 4부로 나누어 편집했다. 나는 시집을 간행한 뒤 그냥 묻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이경철 선배님 등에게 출판기념회를 언론사에 많이 알리는 행사로 갖자고 의견을 드렸더니 흔쾌히 도와주셨다.
선생님의 시집 출판기념회는 2024년 7월 9일 12시 30분부터 인사동에 있는 포도나무집에서 열렸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신봉승, 구중서, 박정희, 서정란 등 원로 시인들뿐만 아니라 이경철, 이승철 선배님 등도 참석했다. 언론사에서는 김여란(경향신문), 유민환, 김선규(문화일보), 조용호(세계일보), 황수현(한국일보) 기자 등이 참석했다. 조문호 사진작가가 행사 사진을 찍어주셨다. 7월 10일 조용호 기자는 『세계일보』에 「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https://www.segye.com/newsView/20140710004807?OutUrl=daum)란 제목으로 강민 선생님의 시집을 크게 소개해주었다. 선생님의 시집은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옛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도서) 우수도서로도 선정되었다.
2.
강민 선생님께서는 시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과 그 후의 문단에 대해 자주 들려주셨다. 매우 귀한 말씀이어서 『푸른사상』에 대담 형식으로 연재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당신보다는 더 좋은 분이 있다면서 양보하셨다. 그분이 바로 김수영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여사님이셨다.
4월 17일 선생님과 함께 김현경 선생님 댁에 인사를 갔다. 그날부터 김현경 여사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해 『푸른사상』 여름호에 첫 번째 대담을 실었고, 그것을 계기로 2024년 봄호까지 실었다. 장장 10년간이나 김수영 시인의 삶과 문학을 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 귀한 인연을 강민 선생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다. 되돌아보니 강민 선생님의 말씀도 듣는 것이 필요했는데 하는 후회가 든다.
내가 김현경 여사님과 대담하거나 김현경 여사님의 생신 등 이러저러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강민 선생님께서도 함께하셨다. 주로 함동수, 정원도, 박설희, 김가배, 신동명, 오현정, 남기선 등이 모였다. 현재는 금선주, 김은정, 김임선, 김효숙, 박규숙, 박홍점, 성향숙, 조은구슬, 최기순, 홍순영 등이 함께 모이고 있다. 2014년 5월 4일 김현경 여사님의 주선으로 강민 선생님과 함께 충북 보은에 있는 선병국 가옥을 다녀온 시간이 문득 떠오른다.
김현경 여사님의 댁에서 자주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인연을 살려 책을 내자는 의견이 오고 가서 2017년 10월 30일 사랑을 주제로 한 합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를 출간했다. 강민 선생님께서는 「창문을 두드리는 새」 「노을녘, 그 커피의 추억」 「나의 인사동 이야기」 등 세 편을 수록하셨다. 김현경 여사님 댁에서 산문집 출간을 자축하는 자리도 함께하셨다.
강민 선생님께서는 나의 일들에 많은 응원을 해주셨다. 2014년 11월 15일 용인 삼정문학관에서 가진 김규동 시인 3주기 추모 시 낭송회에 오셔서 시를 낭송해주셨고, 2015년 7월부터 9월까지 문학의집 서울에서 남산시학당을 진행할 때 김현경 여사님과 함께 오셔서 격려해주셨다. 2018년 6월 9일 용인시청 컨벤션홀에서 열린 김수영 시인 50주기 추모 시 낭송회에도 참석해주셨다. 2018년 12월 31일에 간행한 나의 평론집 『시와 정치』를 다음 해 1월 31일 김현경 여사님 댁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을 때도 찾아주셨다.
3.
강민 선생님께서 응원해주신 것 중에서 촛불 집회를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11월 4일 광화문광장에서 예술인 시국 선언 이후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해 예술인 단체들이 광화문광장에 텐트촌을 치고 박근혜 정부 탄핵 운동에 들어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아무런 자격도 없는 한 개인이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유로 국정 전반에 부당하게 개입한 정황이 밝혀지자 국민이 분노했는데, 예술인들이 앞장선 것이다.
2016년 10월 29일(토) 오후 6시 서울 청계광장 등에서 열린 제1차 촛불집회부터 2017년 3월 4일 제19차 촛불집회까지 강민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다. 나는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광장에서 뵐 때마다 수고한다며 응원해주셨다. 때로는 경비에 쓰라고 지갑을 털어 전해주시기도 했다. 유순예 등 젊은 시인들도 많이 격려해주셨다. 그 결과 2017년 3월 10일(금)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선생님께서는 광화문광장에서 무수히 많은 시민과 함께 환호하며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부르셨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4.
강민 선생님께서 2019년 2월 22일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를 간행하셨다. 염무웅 선생님께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엮으신 시집으로 선생님의 시 세계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선생님의 시집 간행을 그냥 넘길 수 없어 가까운 시인들과 뜻을 모아 2019년 3월 6일 용인 포은아트홀 이벤트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마침 2019년 2월 25일 김태수 선생님도 시집 『베트남, 내가 두고 온 나라』(푸른사상)를 간행했기에 두 분을 함께 모셨다. 광주에서 올라오신 김준태 선생님을 비롯해 박정희, 이혜선, 임동확, 정우영, 이경철, 정원도, 박몽구, 윤일균, 이명옥, 박재웅, 이인휘, 칡뫼 김구, 임경일, 채상근, 박설희, 성향숙, 정동용, 권지영 등 많은 후배 문인들이 참석해 축하의 시간을 마련했다.
2019년 5월 10일 합동시집 『광장으로 가는 길』(푸른사상)이 간행되었다. ‘푸른사상 시선 100번’ 기념 시집이었는데, 강민 선생님은 「외포리의 갈매기」로 참여하셨다.
5.
강민 선생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지병을 내색하지 않고 지내셨기 때문이다. 분당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에도 크게 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백암 샘물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비교적 차분하셨다. 선생님께서는 2019년 8월 22일 돌아가셨다.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렀고, 장충단교회의 묘지인 양주시 광적면 장충동산에 안장되셨다. 나는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시 「인사동 시인」을 써서 『세계일보』(8. 23)에 발표했다. 조정진 기자가 지면을 배려해주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경안리가 궁금해 찾아가 보기도 했다. 마침 그 근처에서 문학강연이 있어 시간을 낸 것이다. 그리고 시를 써서 2019년 『모든시』 겨울호에 발표했다.
경안리에서
정형외과, 노래방, 순대국집, 부동산 중개소
법무사, 치과, 한의원, 가구백화점……
어느 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들이 즐비한
경안동 행정복지센터 주위를
더 이상 살필 수 없었다
강민 시인이 1950년 8월
열여덟 살 북한군 동갑내기와 밤새 얘기하다가 헤어졌다는
경안리 주막을 찾는 일은
애처로웠다
여관 간판이 보이기도 했지만
들어가 물어본 일 역시 허무했다
그래도 문학 강의하러 갔던 경안리
겨울바람처럼 떠나오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병원 침대에서 들려주던 시인의 말을
유언으로 듣는다
이놈의 전쟁 언제 끝나지…… 우리 죽지 말자……
악수를 나누고 새벽에 헤어졌던 그 북한 동갑내기를
한 번 만나고 싶어
6.
어느 날 강민 선생님께 왜 큰 출판사에 계속 재직하지 않으셨냐고 여쭈어보았더니, 그 당시 노조 문제가 있었는데 노조의 편에 서는 바람에 회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하셨다. 경영자의 편에 서면 살아가는데 유리했을 텐데, 그것을 버리고 정의의 길을 택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선생님을 모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21년 『푸른사상』 여름호 특집으로 백기완 선생님을 모셨다. 방배추(동규), 유홍준, 최열, 임진택, 송경동 등이 참여했다. 그때 유홍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1975년에 출소했는데, 6남매가 먹고 살아야겠기에 백기완 선생님께 취직을 부탁했어요. 백 선생님은 금성출판사의 편집국장으로 있는 강민 시인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충무로에 있는 금성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처럼 그 무렵 재야운동은 강민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강민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밥을 많이 사주시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셨어요. 백기완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가면 강민 선생님께서 궤짝으로 보내주신 소고기를 쓸 정도였어요. 시민운동 및 노동운동이 조직화되는 시기로 넘어가기 전에는 이렇게 개인 차원에서 연대가 있었어요. 강민 선생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17쪽). 강민 선생님의 훌륭한 삶을 다시금 확인한 자리였다.
7.
2024년에 들어 강민 선생님의 5주기 추모 시집을 기일 전에 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일이 바쁘고, 경비 마련이 만만하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맏아들인 일구 씨에게 전화를 했는데, 마침 기일이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미루어서는 선생님께 큰 결례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튿날부터 김금용, 공광규, 김윤환, 장우원, 조미희 시인들께 편집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모두 승낙해주셨다. 곧바로 원고 청탁서를 만들고, 섭외하기 시작했다. 후원 안내도 알렸다. 그 결과 마흔세 분이 원고를 보내주셨다. 강송림, 강송숙, 공광규, 김금용, 김난석, 김미녀, 김선진, 김영은, 김윤환, 김종선, 나숙자, 맹문재, 박설희, 서정란, 유순예, 유종, 이경철, 이명옥, 이수영, 이영숙, 이은정, 이인성, 장봉숙, 장우원, 정원도, 조미희, 조정애, 채상근, 최금녀, 함동수, 함진원, 홍사성 등이 후원금을 보내오셨다. 강일구 아드님도 큰 금액을 보태주셨다. 유족과 조문호 사진작가께서 귀한 사진을 제공해주셨다. 함께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강민 선생님의 추모 시집을 간행하게 되어 다행이다. 선생님의 선하고 의연하고 정의로운 삶을 다시금 배울 수 있는 자리를 조촐하게나마 마련했기 때문이다. 큰 인연을 맺어주신 선생님, 부디 평온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