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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5년 봄호
【김남주 읽기 · 5】
김남주는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가진 혁명가였다
대담 : 김정길(김남주 후배. 광주평화연대상임대표 겸 자주통일평화연대(전국) 상임대표) | 맹문재(시인)
일시 : 2024년 11월 3일
장소 :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사진 및 유튜브 : 박이정 TV
참석자 : 이승철(시인), 임동확(시인), 박이정(시인)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남주 시인 30주기를 맞이해 시인과 함께한 분들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들께서도 연세가 많으시니 더 늦기 전에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귀중한 기록을 남기는 일이고, 이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지요. 김남주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요?
김정길 : 『함성』지 사건 직전에 처음 만났어요. 1972년 9월 이강 선배가 군 제대한 뒤 복학했어요. 그런데 한 달 뒤에 유신이 공포되었어요. 그때 김남주 시인은 학교에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이강 선배가 박정희 정권과 한 판 하려고 하는데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법대 김용래 후배한테 물었는가 봐요. 그래서 나를 만나면 전체 조직을 알 수 있다고 해서 김용래가 이강 선배를 데리고 왔어요. 나는 원래 69학번인데 2년 쉬다가 학교에 들어갔어요.
전남대학교에 입학해서 교양학부를 다니다가 교련 반대 데모를 해서 무기정학을 받고 낙제를 했어요. 그래서 교양학부 수업을 두 번이나 들었어요. 어느 날 문리대에서 수업을 받고 나오다가 김용래가 데리고 온 이강 선배를 만났어요. 문리대 앞에 있는 등나무 밑에서 악수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강 선배는 정부가 썩었다, 정보부를 불질러야 한다 등으로 열정적으로 말했어요. 그때는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아나키스트 기질이 있고, 불이 붙으면 행동할 수 있겠다 하는 기대와 의심이 교차했어요. 프락치도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그 정제되지 않는 열정 속에 진정성이 보였어요. 그래서 다시 보자고 했어요.
맹문재 : 그 자리에 김남주 시인이 있었는지요?
김정길 : 그 자리에는 없었어요. 그 뒤 시민회관 근처의 한성다방에서 이강 선배를 만났는데, 조그마하고 새까만 사람이 같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김남주 시인이었어요. 매우 특이한 얼굴이었는데, 아프리카 토인처럼 토속적이면서도 지성미가 있었어요. 이강 선배는 그 자리에서도 나를 설득시키려고 아주 열심히 말했어요. 나는 그때 따로 데모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듣고만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김남주 시인이 신경이 쓰였어요.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일부러 묻지 않았어요. 언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소개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어요.
맹문재 : 그 뒤 어떻게 함께하시게 되었는지요?
김정길 :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뒤 곧바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렸어요. 찍 소리도 못 하는 상황이 되었지요. 국회의원들도 남산에 잡혀가 각서를 썼다고 해요. 그런데 대학은 학사 일정을 채우기 위해서 12월 8일 개학했어요. 그날 김용래가 전남대에 뿌려진 『함성』지 유인물을 주워서 가지고 왔어요. 내용을 보니 참 잘 썼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승철 : 그 원문이 남아 있는지요?
김정길 : 원문은 없고, 판결문에 인용되어 있어요. 『함성』지의 내용을 누가 썼는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전남대 내부에는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외부에서 썼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강과 김남주의 실력을 잘 모를 때였잖아요.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살펴보니 아나키스트적인 순수한 정열은 있었지만, 공부가 잘 안 된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을 가늠할 수 없었어요.
그 무렵 나는 남북문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체험하고 싶어서 휴전선에 갔어요. 장교로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오피(OP. observation post)에, 즉 관측소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보았어요. 공부를 해도 남북문제가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아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오후 2시쯤 되니 북한 주민이 들에서 써레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렇게 오피에서 북한 모습을 보고 서울로 나와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을 좀 만나고 광주로 내려왔어요.
광주에 오니 박석무 선생이 나를 찾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찾아갔더니 『함성』지에 대해 물었어요. 나는 전남대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만든 것 같다고 말했어요. 확실하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어요. 1960년대, 1970년대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은 박석무 선생이었어요. 그 당시 전남대 법대 교수로 임용되려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학교에서 박석무 선생을 많이 아끼고 있었어요. 『함성』지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보고 격노해서 범인을 빨리 잡아들이라는 언명이 떨어졌다고 했어요. 죽창으로 염통을 찔러라, 등으로 유신 정권을 직접 공격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요. 『함성』지는 유신에 저항했던 최초의 지하신문이었어요. 그래서 정보부에서 안달이 난 것이에요.
임동확 : 김정길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조직을 갖고 있었는지요?
김정길 : 1971년 전남대에서 최초로 민족사회연구회를 결성했어요. 이양현, 정상용, 박형선 등이 시작했다가 나중에 윤한봉 선배도 함께 참여했어요. 전남대 민청학련으로 활동했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민족사회연구회 회원들이었어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우리 사회 구조에 큰 변동이 있었어요. 1967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면서 전국적으로 이농이 본격화 되었어요. 저곡가, 저임금 정책으로 농민 분해가 시작된 것이지요.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자 도시로 가서 소위 공돌이 공순이가 되고 도시 빈민이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막연한 민중이 구체적인 민중으로, 계급적인 민중으로 등장한 것이에요.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기 위한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민족사회연구회를 만들었어요.
맹문재 : 『함성』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1973년 2월 『고발』지 사건이 일어나지요.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정길 : 『함성』지는 이강과 김남주가 만들어 뿌린 것은 다 알고 있지요. 그들은 광주만이 아니라 서울도 함께 움직이게 하려고 『고발』지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함성』지의 여분, 『고발』지 500매, 제작 도구 등을 싸서 화물소에서 서울로 부쳤는데, 너무 무거우니까 화물소 직원들이 짐을 뜯어본 것이에요. 짐 속에 있는 쪽지에서 우리들의 명단을 발견한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 바람에 본격적으로 검거가 시작되어 국가보안법 혐의로 모두 구속되었어요. 이강 선배가 잡힌 지 3일 뒤 우리가 잡혀갔어요.
도경찰국에 잡혀갔는데, 그곳에 간첩들만 잡는 공작반이 있었어요. 1973년 3월 20일 밤 12시경에 공작반 지하실로 끌려가 당했어요. 혁띠 풀리고, 안경 벗기고, 옷 벗기고 난 뒤 무조건 패고 구둣발로 짓뭉개었어요. 처음에는 두려워 맞기만 했는데, 맞다 보니 오기가 생겨 악을 썼어요. 민주 경찰이 이러면 되느냐 등으로 항의했어요. 그러자 빨갱이 새끼, 동해바다에 빠트려야 한다고 무자비하게 때렸어요. 김남주와 이강 선배에게는 권총을 들이대었다고 해요. 이틀 후에 이강 선배가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얼마나 물고문을 심하게 받았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곳에서 취조당한 뒤 광주경찰서 유치장으로 갔다가 광주교도소로 갔어요. 완전히 특별 감시를 받았고, 우리는 북에서 온 간첩들만 있는 소위 특사라는 곳으로 수감되었어요. 그곳은 교도소의 시베리아라고 했을 정도로 겨울이면 대부분 동상에 걸렸고, 간첩 취급을 받았어요. 깜깜한 1.8평 방에서 한 달 이상 밖으로 못 나왔어요. 완전히 관 속에서 있는 셈이었어요. 단순한 유인물 사건을 국가보안법으로 덮어 씌어 인권을 탄압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을 김남주 시인이 「진혼가」로 담았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진혼가」가 새롭게 읽히네요. 작품을 다시 읽어볼게요.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니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그 상황을 좀 더 말씀해 주시를 부탁드려요.
진혼가
1
총구가 내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신념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신념 나의 싸움은 미궁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발가락이라도 핥아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유일한 나의 확실성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2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벽에 갇혀 쓰고 있다
여러 골이 쑥밭이 된 것도
여러 집이 발칵 뒤집힌 것도
서투른 나의 싸움 탓이라고
사랑했다는 탓으로 애인이 불려다니는 것도
숨겨줬다는 탓으로 친구가 직장을 잃은 것도
어설픈 나의 신념 탓이라고
모두가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주먹밥 위에
주먹밥에 떨어지는 눈물 위에
환기통 위에 뼁끼통 위에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마룻바닥 벽에 천장에 쓰고 있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쓰고 있다
발가락이 닳아지도록 쓰고 있다
혓바닥이 쓰라리도록 쓰고 있다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라고
3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은 참기로 했다
신념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자유가 피 같은 불 같은 꽃을 닮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
신념아 싸움아 너는 참아라
신념이 바위의 얼굴을 닮을 때까지는
싸움이 철의 무기로 달구어질 때까지는
김정길 : 집안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변호사를 섭외했어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기홍 변호사와 홍남순 변호사의 무료 변론으로 도움을 받았어요. 그 당시 홍남순 변호사의 사무실은 민주화운동의 사랑방이었어요. 홍 변호사는 1970년 초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광주 책임을 맡기도 했어요. 백기완 선생이 전국 청년위원장을 맡았고, 다음에는 이재오 선생이 맡았지요. 홍 변호사님이 처음 면회를 왔을 때 지옥에서 산신령을 만난 것 같이 기뻤어요. 깜깜한 지하에 한 달 정도 갇혔다가 홍 변호사를 만났기 때문이지요. 홍 변호사님은 인자하고 풍채가 좋으셨어요. 우리들에게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했다고 격려를 해주시고 힘내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이기홍 변호사는 전남내 법대 재학 중에 고시를 합격한 분으로 실무적인 일들을 많이 처리해주셨어요. 두 변호사님들을 접견하면서 마음이 많이 풀렸어요. 어차피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니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맹문재 :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고 싶네요.
김정길 : 6월 즈음부터 재판이 열렸어요. 1심만 10번 가까이 했어요. 재판장이 전남대 학생들의 학습장이 되었어요. 재판이 있는 날은 상대, 법대가 전부 휴교를 하고 학생들이 재판을 보러 왔어요. 서울에서도 함석헌 선생 등의 원로들이 참석했어요. 이강은 정공법으로 유신체제의 논리를 깨려고 달려들었어요. 김남주는 시니컬하게 한마디씩 던졌는데,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핵심을 찔렀어요. 마치 권위 있는 시골 원로들의 말씀 같았어요. 전남대 학생들은 검사와 우리들의 논쟁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부했어요. 다시 말해 재판정이 의식화를 위한 학습장이 된 것이지요. 9월 하순에 1심 판결이 나왔는데 김남주, 박석무, 이강을 제외하고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어요. 석방되어 나오는 날 학생들이 카퍼레이드까지 마련해주었어요.
맹문재 : 집행 유예로 석방된 뒤의 생활이 궁금하네요.
김정길 : 김남주, 박석무, 이강 세 분은 감옥에 남았다가 3개월 뒤 항소심에서 석방되었어요. 세 분도 석방될 것으로 예상했어요. 그 사이에 면회를 간 적이 있는데,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안부를 전하는 정도였어요. 감옥에 있을 때보다 나오니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우리집이 빨갱이 집으로 낙인찍힌 것이에요. 그 이전까지는 이웃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감옥에 다녀온 뒤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내가 사는 광주보다 시골은 더했어요. 그래서 이평의, 김용래, 윤영훈 등의 고향인 곡성, 장흥, 무안 등에 가서 청년들에게 막걸리를 마시며 설득했어요. 그런 상황이어서 고향에서 살 수 없어 타지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아픈 사연을 알게 되었네요. 그 뒤에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나고 선생님께서도 가담하셨지요?
김정길 : 감옥에서 출소한 뒤 박석무, 김남주, 이강과 나는 생활을 같이 할 정도로 항상 함께 어울리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민청학련사건으로 나와 이강이 구속되자 김남주는 외톨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김남주는 당시 고창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했던 박석무 선생을 찾아다니며 외로움을 달랬고, 『함성』지 사건 경험을 중심으로 시를 써서 「잿더미」 외 7편을 창작과비평사에 보냈어요. 그 뒤 염무웅 선생이 그 시를 보고 깜짝 놀라 박석무 선생한테 전화가 왔다고 했어요. 박석무 선생한테 김남주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이해를 하고, 송기숙 교수한테인가 김지하의 대를 이을 제목이 나왔다고 칭찬을 했다고 했어요.
맹문재 : 그 이후 김남주 시인의 생활을 어떠했는지요?
김정길 : 1975년 초에 <카프카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원래 김남주 선배는 헌책방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일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일서나 영문판 사회과학 서적도 많이 읽었어요. <카프카 서점>은 광주운동권의 센터가 되었어요. 우리처럼 운동하는 사람들과 박몽구, 이영진 등 시인 지망생 후배들이 거기에 다 모였는데 그 뒷바라지를 김남주 선배가 다 했어요. 공부하고 밥 먹고 술 마시는데 김남주 선배가 돈을 다 쓴 것이에요. 아버지한테 빚내서 차린 서점인데 결국 다 쓰고 만 것이지요. 창비 등 서울의 출판사에서 책들이 많이 내려와 팔리기도 했지만, 결국 빚을 지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서점을 마지막 정리했고, 김남주 선배가 오갈 데 없게 되자 내가 거처하고 있던 봉선동 제석산 밑에 있는 봉심정으로 모셨어요. 우리는 봉심정을 산적들의 근거지를 의미하는 산채(山寨)라고 불렀어요. 1970년대에 광주전남에서 운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한 번씩은 산채를 거쳐 갔어요. 김남주 선배도 산채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봉심정에서 생활할 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김정길 : 산채에 있을 때 김남주 선배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어요. 나는 김남주 선배를 어떻게 농촌으로 보낼까, 진정한 농민시를 쓰게 할 수 있을까를 중심으로 고민했어요. 나는 민중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농민의 입장에서 농민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김남주 선배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가끔 빌려준 돈을 받으러 왔어요. 그럴 때면 김남주 선배는 뒷산으로 도망가곤 했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예비군법에 걸려 있었어요. 예비군법 위반으로 김남주 선배가 수배가 된 것이에요. 그때는 예비군법이 무서웠어요.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해서 김남주 선배를 농촌으로 보내서 진정한 농민 시를 쓰게 하고 싶었어요.
맹문재 : 어떻게 김남주 시인이 고향에 내려갔는지요?
김정길 : 그때 작은 계기가 있었어요. 연세대의 밤 행사가 있었는데 그 팸플릿에 김남주의 시가 실려 있었어요. “나는 한 마리의 파리인지도 몰라라, 나는 한 마리의 모기인지도 몰라라”라는 내용이었는데, 이 시를 보고 매우 실망이 커서 “이것도 시요?”라고 김남주 선배에게 좀 심한 말을 했어요. 나는 시는 안 써도 읽을 줄은 좀 알았어요. 그랬더니 김남주 선배가 “시인이 모든 시를 잘 쓸 수 있다냐. 이런 시도 나오고 저런 시도 나오는 것이지.”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 말이 맞소. 그렇지만 선배의 생활이 이러니까 이런 시밖에 안 나와요.”라고 다시 말했어요. 그리고 “빨리 내려가서 선배의 아버님의 운명을 시로 쓰고, 동생과 친구들의 아픈 삶을 시로 써야지 도시에서 이렇게 어정어정해서는 안 돼요.” 라고 얘기했어요. “내가 아버지 설득하고, 그리고 예비군법을 다 정리해서 주민등록을 해남으로 옮겨줄 테니까 내려가시겠어요?” 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네가 할 수 있냐?”라고 해서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할 테니까 내려가시오.”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내가 아버님을 만났어요. 마침 그 며칠 후에 아버님께서 올라오셨어요. 그래서 내가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들이 빚낸 돈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근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지금 김지하가 세계적인 시인입니다. 그런데 김남주는 김지하 못지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문학계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남주가 세계적인 시인이 되려면 농촌에 내려가서 아버지의 운명에 대한 시를 써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래 알았다. 내가 논을 떼어줄 테니 남주를 내려 보내라.”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어요. 김남주 선배가 고향에 내려가자 내가 주민등록을 정보기관의 협조를 얻어 옮겨주었어요. 기관에서도 김남주가 시골로 내려갔으니 자기들을 귀찮게 하는 일이 해결되었다고 좋아했지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시는 김남주의 「솔직히 말해서」라고 보이네요. 인용해볼게요. 그래서 김남주 시인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었는지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김정길 : 그럼요. 아버님이 떼어준 다섯 마지기로 농사를 지었어요. 자기가 농사를 지었다고 좋아하고 자랑했어요. 농민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는 않았잖아요. 학교에 갔다 돌아와서 일이나 조금 거들어주었을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손수 지어보니까 기쁨이 컸던 것이지요. 그래서 첫 수확을 한 체험으로 「추곡수매」 같은 시가 나왔어요. 체험이 바탕이 된 본격적인 농민시가 나온 것이에요. 동생 덕종이의 운명을 꺼내 농민들의 아픔과 고통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리하여 신경림의 농민시가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김남주의 농민시는 농민의 운명과 함께한 것이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께서 김남주 시인의 새로운 시 세계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하셨네요. 「추곡수매」는 총 7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연은 “이문 없이 까다로운/정부수배 추곡매상/땡땡볕도 아닌 볕에/축축한 것 말리자니/하룻볕은 턱도 없고/사나흘볕 가을볕에/널고 담고 말려봐도/깡깡하게 안 마른다”라고 노래하고 있지요. 김남주 시인은 해남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쓰는 것 외에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김정길 : 김남주 선배가 고향에 내려갔을 때 정말 우연하게 김지하 시인과 황석영 소설가도 내려와 있어요. 그때 황석영은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상(想)이 막혀 황해도 고향과 가장 비슷한 해남을 찾아 내려왔어요. 김지하는 몸이 안 좋아 요양차 내려왔어요. 당시 짧은 기간이지만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들이 해남에 함께 있었어요. 그렇게 되어 김남주는 농민 운동에 참여했어요.
맹문재 : 그 농민운동에 함께 참여하셨는지요?
김정길 : 나는 그 무렵 서울에 있었어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선교 교육원에서 안병무 박사와 민중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민청학련 사건이나 감옥에 들어갔다 온 사람 중에서 소양이 있는 사람을 안병무 박사가 선발해서 민중신학을 공부시켰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과 생활의 근거가 달랐네요. 그 뒤에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또 무슨 일을 함께 하셨는지요?
김정길 : 1979년 남민전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만나지 못했어요. 김남주 선배는 겨울 시골에서는 일이 없으니까 후배들을 교육시킨다고 광주로 올라와서 일어판으로 된 『파리 코뮌』 강의했어요. 그것을 문제 삼아 정보부에서 체포령이 떨어지자 김남주 선배는 서울로 피신했어요. 그리고 박석률 선생을 만나 남민전에 가입했어요.
이승철 : 김정길 선생님은 누구를 통해 남민전에 가입하신 거예요?
김정길 : 박석률 선생을 통해 가입했어요. 남민전에 박석률과 최석진 두 사람이 조직 가입을 많이 시켰는데, 최석진 선생은 법륜 스님 친형이에요. 김남주 선배가 먼저 가입하고 나는 나중에 가입했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남민전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시다가 검거되었는지요?
김정길 : 나는 좀 늦었어요. 그 무렵 우리는 내부 논쟁이 있었어요. 우리가 먼저 통일이 될 줄 알았는데, 베트남이 먼저 되니 기가 막혔어요. 그래서 우리도 강력한 지하 전선으로 뭉쳐서 통일을 준비하자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김근태나 나는 한국의 상황에서 그런 지하 전선이 쉽지 않다, 대중이 엄호를 해줘야 하는데 아직 대중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반합(반합법적) 조직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지금 강력한 지하조직을 만들어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고, 대중적의 조직들이 자라나고 있으니 사회적 요건이 성숙될 때까지 좀 더 기다리자는 입장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서로의 목표는 같았어요.
맹문재 : 남민전 활동을 하시다가 언제 어디에서 체포되었는지요?
김정길 : 1979년 10·26사건이 난 뒤 사흘 되어서 체포되었어요. 광주에서 체포되었어요. 잡혀 가보니 김남주, 이강, 이학영 등이 다 들어와 있었어요. 사건이 터지고 나서 알았지, 그 전에는 누가 가입했는지 몰랐어요. 김세원 선생님도 계셨어요.
임동확 : 박석률 선생이 광주 출신이고 경기고를 진학했지만, 어떻게 광주의 운동 조직과 연결될 수 있었는지요?
김정길 : 박석률 선생은 광주일고의 운동 맥으로 해서 연결되어 있었어요. 박현채 선생과 임동규 선생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맥을 박석률이 이어 받았어요.
맹문재 : 취조 과정은 어떠했는지요? 몇 년이나 옥고를 치르셨는지요?
김정길 : 나는 가입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사건이 거의 정리되어 별로 조사할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3년 있다가 1983년에 석방되었어요.
맹문재 : 활동도 별로 안 했는데, 정말 가혹한 판결이었네요. 선생님께서 출옥하셨지만, 김남주 시인은 계속 옥고를 치르셨지요. 면회를 가신 적은 있는지요?
김정길 : 제일 약한 판결이 징역 3년이었어요. 김남주 선배에게 면회를 가지는 않았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김남주 시인과 마찬가지로 5·18항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셨네요?
김정길 : 그렇지요. 나는 1980년 5월 22일에야 5·18항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하고 친분이 있는 서울구치소의 한 교도관이 알려줬어요. 지금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전주로 올라오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아차 싶었지요. 서울이나 대구, 부산은 어떠하냐고 물어보니 조용하다고 했어요. 나는 그 순간 친구들이나 광주시민들이 다 죽었구나, 생각하니 밥이 안 들어갔어요. 그래서 당시 서울구치소에 있는 정치범들에게 교도관 몰래 통방을 해서 단식을 시작했어요. 23일 밤에 10·26사건으로 김재규가 감옥에 들어왔고, 유성욱은 내 옆 방에 있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출옥한 뒤 언제 만나셨는지요?
김정길 : 김남주 선배가 광주에 올 때 주로 만났지요. 그러다가 윤한봉이 귀국했을 때 서울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서 환영식을 준비했는데, 행사를 마치고 목동에 있는 김남주 선배의 집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김남주 선배가 석방되어 여기저기 초청이 많아서 바빴는데, 시간이 흐르자 김남주를 비판하는 정도를 넘어서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맹문재 : 어떤 점을 비난했는지요?
김정길 : 결국 김남주의 시와 사상이 교조적이고 관념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사실 그러한 면이 있었지만, 모든 시나 사상이 교조적이고 관념적이지 않은 것은 없지요. 따라서 관념과 실천을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문제이지요. 또한 교조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사회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폭과 상상이 필요한 것이지요. 김남주에 대한 나의 고민들을 2019년 추모제 때 추모사로 표현하기도 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의 결혼식 때 참석하셨지요?
김정길 : 그럼요. 문빈정사(文彬精舍)에서 했는데, 내가 먼저 결혼한 곳이기도 해요. 나의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지선 스님이 주례를 섰고, 법능(정세현) 스님이 축가를 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이 문빈정사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역할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김정길 : 김남주 선배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우리들에게 문빈정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운동권의 요람이었어요. 김남주 선배가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암묵적인 관례라고 볼 수 있어요. 지선 스님은 소위 민중불교 운동을 하신 분이었어요. 법난을 당하고 난 뒤 우리하고 쭉 만나왔어요. 1970년대, 1980년대에 어렵고 오갈 데가 없는 우리를 종교적 도덕성을 가지고 품어주셨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과의 만남에서 더 소개해주실 일이 있는지요?
김정길 : 1990년 이후 혁명의 시대가 갔다고들 말했잖아요. 실제로 미국 주도의 금융 자본주의의 패권적 질서와 독점이 강화되고 있었지요. 인간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김남주 선배에게 인간다운 세상의 상(모습)을 한번 그려보자고 말했어요. 노동자, 농민, 중소상인 등이 어떻게 해야 희망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가를 우리가 정리해 모아서 새로운 상을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지요. 과거의 이야기도 좋지만,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과 새로운 상을 상상력으로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문학을 비롯한 예술 각 부분에서 광주를 중심으로 해보자고 했어요.
맹문재 :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요?
김정길 : 그런데 그 이후 김남주 선배가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아져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췌장암인 줄 모르고 그냥 소화가 안 되고 피곤이 안 풀린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광주에서 조남중 박사와 전홍준 박사가 발견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을 마지막으로 본 때는 언제인지요?
김정길 : 입원하고 있는 고려병원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어요.
맹문재 : 그때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김정길 : 말을 나눌 수 없는 상태였어요. 내가 보러 가니 누런 이로 희미하게 웃음을 내보이셨어요. 그 누런 웃음이 항상 정다웠어요.
이승철 : 김남주 시인의 전남대 노제 때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였잖아요. 그 행사를 누가 조직했는지요?
김정길 : 내가 했지요. 그때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책임을 내가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 손으로 마지막을 정리해 드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울음을 삼키면서 “형 잘 돌아가셨어. 이미 혁명의 시대가 끝났어. 범이 숲속에 있을 때 위용을 발휘할 수 있지만, 아스팔트 위로 나오면 난쟁이들한테 찢기고 말아. 더 찢기기 전에 잘 돌아가셨어. 나도 같이 죽고 싶은 심정이야.”라고 토로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찡하네요. 긴 시간 동안 참으로 의미 깊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마지막으로 김남주 시인에 대한 평가라고 할까요, 한 말씀 부탁드려요.
김정길 : 김남주 선배는 내가 본 어떤 분보다도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분이었어요. 그렇게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싸운 사람은 못 봤어요. 남민전을 통해 김남주 선배는 범이 숲을 만났다고 볼 수 있어요. 그 속에서 자유를 얻었어요. 감옥에서 사상적, 실천적, 육체적 모든 자유를 얻었어요. 나는 선배가 행복한 시대를 살고 갔다고 생각해요. 한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봐야 100년인데, 역사에서 혁명의 시대라는 시기는 그렇게 길지 않아요. 그와 같은 시대를 만나서 살고 갔다고 하면 그건 행복이에요. 혁명에 대한 고귀하고 순수한 열정을 다 펼쳤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네요. 그만큼 고통도 컸겠지요. 두 선배님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보세요.
이승철 : 김남주 시인이 농민시를 쓰는 데 김정길 선생님께서 봉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을 알게 되었네요. 선생님께서 나서지 않았으면 김남주 시인이 고향에도 못 갈 형편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이네요.
임동확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잿더미가 떠오르네요. 우리가 아쉬워하지만, 김남주 시인은 모든 열정을 다 태워버리고 가셨네요.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광주 운동권의 지형도가 비로소 보입니다.
맹문재 : 김정길 선생님,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늘 건강하세요. 이승철, 임동확 선배님도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 김정길
1950년 광주광역시 봉선동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김남주, 이강과 함께 『함성』『고발』지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1974년 민청학력사건과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6월항쟁 이후 광주전남민주연합 상임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상임의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상임대표를 거처 현재는 광주평화연대상임대표 겸 자주통일평화연대(전국)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 맹문재
1993년 김남주, 신경림 시인의 심사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했다. 공저로 『김남주 시인의 삶과 문학』, 논문으로 「김남주 시가 수용한 파블로 네루다의 삶과 시」가 있다. 김남주기념홀 건립 전문위원, 김남주 시인 개인화 음성합성 기술(P-TTS) 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안양대 교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