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음악-사랑을 회상하는 방식
『건축학 개론』의 경우
내가 『건축학 개론』을 보러 선뜻 나서지 않은 것은 제목에 대한 편견, 혹은 관념 때문이었다. 시중에 '한국 로맨스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말이 떠돌 만큼 인기 있는 영화였지만 나는 사랑과 건축이란 조합을 왠지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언제 가부터 드라마나 영화에 건축이란 화두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류 드라마의 장을 연 『겨울연가』의 주인공(배용준)이 건축가였고 『개인의 취향』, 『백만 송이 장미』, 『내 머릿속의 지우개』 등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을 건축계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현실의 건축가들은 반가워하지만은 않는 것이, 영상 속의 건축이 실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란 게 어차피 픽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일반 관객들에게 건축의 세부적인 사항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라고 하는 이상도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건축이 인기 있는 제재로 등장한 것은, 시각 이미지가 중요해진 시대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관객의 동공을 피해 갈 수 없는 덩치 큰 집이나 건축물을 미학적 대상으로 비출 때가 된 것이다. 그 주체인 건축가들이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명백히 구세대에 속하는 나는, 물화物化된 대상을 다루는 건축이 로맨스에 직접 개입하는 걸 마뜩잖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건축은 영화의 타이틀까지 차지할 정도로 감성적인 코드가 되었다. 어찌 피하기만 할 것인가.
『건축학 개론』, 개봉한 지 한 달 반 만에 관객 400만을 훌쩍 넘긴 '대박 멜로'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숫자가 나를 바로 영화관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어느 스터디 그룹에 갔는데, 사람들이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영화관으로 간다기에 얼떨결에 따라나썼다. 역시나, 보러 간 영화는 『건축학 개론』이었다. 연령대가 주로 4-50대였는데, 즉흥적으로 영화관으로 몰려가기에는 좀 민망한 나이였다.
책을 덮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인사 중에는 이미 영화를 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보는 것이 전혀 낭비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나이 오십이 다 된 남자가 한 번 더 봐도 괜찮다고 할 만한 멜로가 요즘 시중에 있단 말인가? 그게 독문학 개론도 아니고 건축학 개론이라니,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건축학 개론』은 두 개의 시간대를 병행시키고 있는, 전형적인 '철로 기법'을 쓰고 있는 영화다. 회상에 의해 재현되는 과거의 첫사랑과, 회상하는 주체의 현재 상황이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회상의 대상 시점은 90년대 중반이고 현재 시점은 2010년 쯤 된다. 대략 15년이란 세월의 간격이 가로 놓인 셈이다. 굳이 말하자면 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30대 중반의 세대가 타켓이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10년, 20년 더 내려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실제로 『건축학 개론』의 관객 중에 4-50대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영화는 일단 현재 시점에서 출발한다. 승민(엄태웅)은 30대 중반의 노총각 건축사이다. 노총각임을 굳이 표시라도 내겠다다는 지, 후줄근한 패션에 얼굴에는 피곤을 달고 있다. 오늘도 업무에 시달려 몽롱한 눈빛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사무실로 한 여인이 찾아온다. 섹시한 검은 드레스, 누가 봐도 매혹적인 자태다. 대학교 1학년 때 건축학 개론을 같이 들었던 서연(한가인)이, 중년의 숙성한 여인이 되어 찾아든 것이다. 한가인이 저 역을 맡았으니 미모야 누가 봐도 눈이 부신다.
처음에 승민은 서연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모르는 척 했을 것이다. 비록 15년 전의 일이지만 실연을 안겨준 여자에 대한 반감이 순간적으로 재가동했을 것이다. 배신당한 순정을 즐겁게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배신의 아픔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좋아했다는 뜻이니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예나 지금이나 애증은 비례의 함수관계 아닌가. 승민의 얼굴이 무심에서 반색으로 급반전한다. "아, 음대, 그 양서연. 맞네 맞어." 엄태웅의 너스레 연기가 일품이다.
그런데 15년 전에 헤어진 여자가 왜 불쑥 찾아왔을까? 서연은 일단 자신을 고객으로 포장한다. 돈 많은 의사의 사모라며 제주도 고향 집을 재건축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하고 많은 건축사를 두고 승민이를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아무래도 무슨 미련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의사의 부인이라고 괄호를 치는 심보는 또 뭔가? 승민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혼란을 겪으며 서연의 의뢰를 거부한다. 떼를 쓰는 서연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회사의 일원으로서 들어온 의뢰를 거부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수용한다.
그런데 서연이 설계과정은 물론 건축 현장까지 따라와 승민이와 함께 작업을 한다. 곧 서연이 '돌싱', 즉 이혼녀임이 드러난다. 얼마 전에 위자료를 톡톡히 받고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옛집을 다시 짓는 두 사람, 과연 사랑도 재건축이 가능할까? 아마도 관객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서사는 승민이와 서연이 옛 집을 재건축하는 현재 상황이 한 라인을 이루고, 15년 전에 일어난 첫 사랑이 다른 한 라인을 이룬다. 스무 살의 대학생이 건축학 개론을 들으며 사랑에 눈떠가는 몇 달 간의 풋풋한 시간과 중년의 남녀가 바닷가에 집 한 채를 지으며 보내는 성찰적 시간이 정확히 겹친다.
그러면 15년 전의 사랑은 왜 실패로 끝났을까? 그 정황은 이러하다. 서연은 제주도 출신의 대학생으로 전공이 피아노인데 건축학과의 한 남학생(재욱)을 좋아하여 건축학 개론 수업에 따라 들어온다. 여기서 승민을 만난다. 재욱은 승민의 과 선배로 잘 생기고 집이 부자이지만, 꼴값하느라 소문난 바람둥이다.
이렇게 건축학 개론을 함께 수강하게 된 서연과 승민은 공교롭게도 같은 동네(정릉)에 살고 있다. 자연스레 자주 만나며 숙제도 같이한다. 두 사람 사이에 클래스메이트 이상의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경험이 없는 승민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너무나 미숙하다. 오히려 서연이 더 적극적이고, 리드해 나가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서연이 결정적인 사인을 보내오는 것은 아니다. 닿을 듯 말듯 승민은 감질 나는 불확정의 시간을 보낸다. 가을은 깊어가고 학기가 끝나간다.
그 동안의 진도를 요약하면, 손잡고 몇 번 걸은 것과 한 번의 키스가 전부다. 아, 키스가 아니라 뽀뽀다. 이것은 승민의 친구 납뜩이 명백히 증명해 준 사항이다. 다행히 좀 더 큰 희망이 겨울에 예정되어 있다. 서연이 첫눈이 오는 날 숙제를 위해 둘이서 찾아갔던 빈집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빈집에서 두 사람은 CD 플레이어로 「기억의 습작」이란 음악을 들으며 기본 감정은 공유해 놓았다.
첫 눈 오는 날의 데이트, 승민이로서는 가슴 뛰는 기다림이다. 하지만 데이트를 제안했다는 게 바로 사랑의 고백은 아니지 않는가. 고백은 말 그대로 입술로 언표되어야 하는 것이다. 승민은 언제 내릴지도 모르는 첫 눈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가슴이 너무 답답하여 사랑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서연을 위해 정성을 다해 미래의 집을 설계하고 하얀 스티로폴로 모델을 만든다. 어느 날 밤 그걸 가슴에 안고 서연을 찾아간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소주 한 팩을 단숨에 들이켜고. 그렇게 하우스 모델을 안고 서연의 집 앞으로 간 승민,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못 볼 장면을 보고 만다.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술을 마신 서연이 재욱이 선배의 부축을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망연자실,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들고 있던 하우스 모델을 내팽개치고 몸을 돌린다.
술을 잘 모르던 순진한 서연이 선배가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다가 인사불성이 되어버렸지만 심신에 별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민은 깊은 상처를 입고 결별을 선언한다. 영문을 모르는 서연이 찾아오지만 승민은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늦가을이 지나가고. 그 후 15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해 서울에는 분명 눈이 왔을 텐데, 첫 눈 오던 날은 어떻게 되었을까?
15년 뒤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집을 지으며 아프게 버려두었던 기억의 파편을 하나 둘 모은다. 빛바랜 청춘의 감정이 생기 있는 스토리로 재구성된다. 집이 완성될 쯤 두 사람은 친구처럼 격의 없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렇다. 친구, 복원되는 것은 거기까지다. 상처는 치유되었지만 새로운 시작은 없다. 서연은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승민은 같은 회사 직원과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남의 남자이다.
물론 반전의 모멘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집을 완성하고 서연의 이삿짐을 나르던 승민은 어떤 박스 안에서 15년 전에 자신이 만든 하우스 모델을 발견한다. 서연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장미 대신 들고 갔다가 내팽개치고 온 하얀 스티로폴 모델이다. 이걸 서연이 주워 15년이나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민의 가슴이 15년처럼 다시 뛰기 시작하는데 현실의 울타리도 뛰어넘을 태세다.
하지만 역시 거기까지. 『건축학 개론』은 막장 드라마의 파격이 더 이상 파격이 될 수 없는 초 현대에 나온 로맨스다. 막히면 돌아가라고 했던가. 영화는 사실 70년대 「소나기」의 서정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중년을 겨냥한 전략일까?

서연에게 집을 지어준 뒤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 승민이 제주도에 있는 서연에게 소포를 하나 보낸다. 낡은 CD플레이어와 「기억의 습작」이 실린 CD, 15년 전 첫 눈이 내리던 날 서연이 약속한 빈집에 가 승민을 위해 마루에 두고 온 것이다. 승민이도 그날은 가지 않았지만 다음 날 그예 그 집으로 가 서연의 선물을 받아온 것이다. 그렇게 피아노 치는 여자는 하우스 모델을, 집짓는 남자는 CD를 애증의 상처로 가슴에 안고 15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로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진다. 15년 전 두 사람의 사랑이 어긋난 것은 변심도 배신도 아닌 오해, 다른 말로 하면 운명이었다는 사실 밀이다. 비극적 운명만큼 카타르시스가 강한 것도 없다. 첫 사랑을 순정의 사랑이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15년이 걸린 것이다.
이쯤에서 젖은 눈시울을 말리고 『건축학 개론』의 화두인 건축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자. 사실 『건축학 개론』에서 건축은 음악이 없으면 그 의미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건축과 음악의 만남에서 그 묘미가 드러난다. 건축학과 남학생과 피아노과 여학생의 사랑, 예전에는 선호하는 멜로의 조합이 아니었다.
노가다에 삽질, 이게 건축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더 확장해서 보면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를, 이과보다 문과를, 무보다 문을, 가슴보다 머리를 선호한 것인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이었다. 이게 작금에 들어와 크게 바뀌면서 건축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음악이 개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건축과 음악은 내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질적인 영역이 아니다. 전자를 공간 예술로, 후자를 시간 예술로 말하는데 사실 공간이란 시간 없이 생각할 수 없고 시간은 공간 없이 생각할 수 없다. 특히 회상과 추억이 문제가 될 때는 더욱 그렇다. 특정한 시간이 대상화될 때, 특정한 공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추억이란 언제나 '그때 그곳'을 의미한다.
『건축학 개론』에서 사랑의 추억을 만드는데 오래된 집이 그 배경이 되고 그 과정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그 음악의 제목이 「기억의 습작」인 것은 아주 노골적이다. 사랑을 추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특정 공간이 따라온다. 그러한 공간에 대한 회상을 한 순간에 이미지화하고 재현시키는 것이 음악이다. 서연과 승민이 15년 전 90년대를 회상함은 그 때 공유했던 공간의 감정을 건축으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음악은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찍이 쉘링은 건축을 '응고된 음악 die erstarrte Musik'이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건축을 '동결된 음악 gefrorene Musik'이라고 했다. 음악은 딱딱한 건축에 리듬을 부여하고 건축은 추상적인 음악에 형상을 부여한다. 추억이 작동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의 추억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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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 daum까페에서 구매할 밑천이 없나요? 이왕 올릴 거 <기억의 습작>을 배경음악으로 올리지.... 우째 좀 해 보이소~~~ 김동률 목소리 쫌 들으입시다~
그 생각을 못했네. 음악 담아 오는 절차가 까다로워 귀찮기도 했고. 한 번 시도해 보지. 영화에서 들은 노래는 좋았는데 난 노래도 가수도 그 전엔 몰랐어. 그런데 가수 란에 김동율은 뭐고 전람회는 또 뭔지?
작곡가이자 노래부른 가수가 김동률이고 그가 서동욱이라는 멤버와 처음에 활동할 때 '전람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거든요. 그 노래 담긴 CD는 전람회 1집에 담긴 곡이어요. 멤버였던 서동욱은 실제로 노래는 거의 안 해서 전람회의 노래는 전람회 이름보다 작곡가이자 가수인 김동률 이름으로 더 많이 이야기해요. <기억의 습작>은 오케스트라 연주가 웅장해서 벅찬 감동을 이끌어 낸다고 많은 가수들이 탐내는 곡이라고 합니다. <건축학개론> 개봉전 KBS <불후의 명곡>에서 슈주 규현이 이 곡으로 우승을 한 바 있어요. 웃기게도 김동률은 노래 안 듣고 CD자켓에 나온 그의 모범생 인상착의와 희고 긴 손가락을 보고 단숨에 구입한 케이스~^^
뭐가 좀 복잡하네. 음악인들이 '전람회'는 와?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희고 긴 손가락에 필이 온다? 역시 애로스도 귀족적 취향이야. 역시 몸도 관념에 제어를 받고 있으니...
귀족적 취향은 무슨.... 그런데 나는 확실히 고운 손이 더 땡기지 식스팩은 별로여요. 어제 우리팀이 나눈 경험론에 입각해서 볼 때 그 관념의 출처는 분명 내 경험이 아닌데 참 미치겠네 경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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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스의 취향이 경험없이 저절로 생긴다는 게 가능할까? 프로이트 식으로 생각하면, 의식하지 못하는 유년기에라도 long white fingers와 어떤 실질적인 관계가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 땡기고 안 땡기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걸 해소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 지점으로 향하고 있는데. <은교>를 쓴 박범신이 그랬지. 욕망은 있으되 더 이상 풀수 없는 욕망의 슬픔, 그게 깊은 슬픔이라고. 여기에 대해 <남자 물건>을 쓴 김정운이 그랬어. 그렇다고 손만 잡고 마는 것은 비겁한 것 아니냐고? 영화의 한 장면인 모양. 김정운은 51살이고 박범신은 67살이지. 결국 슬픔의 깊이는 세월에서 온다는 것.
손만 잡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손이라도 잡을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그 기억만으로도 남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 우리 인간사가 얼마나 기기묘묘 흥미진진합니까? 관념론이고 경험론이고 다~ 확률적인 론일뿐 절대적인 공식은 아니어요. 에로스의 취향이 경험을 전제로 한다는 발상은 절대적으로 반대~~~ 최소한 내게는 웃기는 소리여요. 고운 손이 좋은 것과 마찬가지로 근육질 식스팩이 싫은 것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험이 또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없거든요~
인터레싼트! 굳이 그렇다면 어야겠노. 아줌마가 되고 나이가 들면 즉물적으로 바뀐다두만 끝까지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 렌쯔의 <Hofmeister>에 보면 고자를 사랑하는 순진한 처자가 나오는데, 사람들이 '시집가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도 못하고 우째 살려고 그러냐'고 하니 이렇게 대답하지. '애를 키워야 한다면 친정집에 오리와 닭이 많으니 그거 갖다 키우면 돼요.' 남자가 감동해 '천사 같은 여인이여!'라며 키스를 하는데, 처자는 또 그게 다인 줄 알고 감동을 하고 ㅋㅋ. 그렇게 렌쯔가 18세기 중엽에 관념화된 애로스를 희화했는데, 그건 역시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의 한계인 모양.
흠.... 전 오리와 닭보다는 애키우는 게 더 좋으니 그 처자보다는 순진하지도 않고 즉물적이군요. 나이들면 즉물적이 된다에 동의해요. 휘황 유치란란한 색들이 자꾸 땡기는 기 바로 그거 아니겠어요? 고로 아주 정상인거죠.
글쎄, 색채감으로 땡김을 말하는 건 내 영역과 거리가 멀어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대체로 울긋불긋한 것보다는 흑색에 어필되지 않나. 달이 차면 지듯이 요즘 막장도 막판까지 갔는지 클래식한 데로 회귀하는 분위기도 보이두만. <건축학 개론> 같은 야함 제로의 영화를 요즘 대학생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데 놀랐어. 비록 흥행엔 실패했지만 대명동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사랑비>란 드라마도 몇 회 보니까 유치할 정도로 고전적이두만. 70년대 '세시봉' 식 감성의 촌스러움이라니. Schiele의 그림 한 장 걸어 놓고 '삶과 죽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멘트 같은 거, 정말 오글거리두만.
<건축학개론> 요즘 대학생들이 주관객이라고요? 4-50대들이 많이 보는 줄 알았는데 대학생들도 많이 보는구나. 야함 빵빵, 자극 두둑한 영화들이 판을 치다보니 <건축학개론>과 같은 야함 제로의 영화나 <사랑비> 방식의 오글거리는 촌스러움이 대학생들에게는 완전 신선할 수도 있죠.
주 관객인지는 모르지만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애. 일단 대학생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어필했겠지. 학생들에게 글쓰기로 영화 감상문 써내라고 했더니 3분의 1 이상이 <건축학 개론>에 대해 썼드라고. 내가 이걸 본 것도 사실 애들 때문이지. 흥미로운 것은, 대학교 1학년들이 감동적이었다고 하는데 중고등학교 때의 첫사랑이 생각났다는 애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야. 시대적으로 조숙해진 건 사실인 모양이야. <사랑비>에선 30년만에 재회한 오십대의 이미숙과 정진영의 연기가 그럴듯하두만. 차원이 좀 다르긴 하지만 역시 오글거리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