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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함께 하는 사랑방에서 ( 제1탄 )-
우리가 반세기를 더 살아온 길고 긴 인생의 여정 속에서 나 혼자만의 여행을 한번쯤은 해 볼만도 하지 않을 런지?-
나 혼자만의 여행-
편한 잠바하나 걸치고 쭈그러진 모자 달랑 둘러쓰고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이란 그렇게 자유롭고 편할 수가 없지-.
그러나 이러한 여행은 인생길에 있어 즐거운 삶을 위한 잠깐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서는 필요하겠지.-
물설고, 낯선 곳에서.,-
멀리서 둥지만 바라보고 살길을 찾아 먼 길을 헤 메는 긴 여행이란 진한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고통이 따르고, 그 고달픈 여정속에 누구하나 붙잡고 가슴 터놓고 의논을 나룰 벗이 하나도 없다면? .-
친구!- 친구란 무엇인가?
흔히들 말하듯이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같은 동기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 친구가 되고, 친 동기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어 아무 거리낌 없이 쉽게 만날 수 있고, 부담 없이 의논하고, 부탁 할 수 있고, 허물을 감싸 안아 줄 수 있고, 서로가 서로의 등짐이 되어 주는 것이 친구가 아니겠는가.-
난, 이러한 친구들과 헤어져서 지나온 35년이란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 혼자만이 담아둔 못다 한 이야기들을 들어줄만 한 친한 벗과 마주 앉아 술 한잔 앞에 놓고 밤을 새워 가며 하소연이라도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친구들이 살아가는 일상들이 제각기 다르기에 자리를 함께 할 시간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점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네.-
친구들아-
자네들과 헤어져 살아온 세월을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나 혼자만의 여행을 지금도 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네-
요즘은 -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고- 너무 좋아진 세상인지라 -
친구들이 [카페]라는 걸 만들어 주어서 인터넷으로 자네들이 가끔씩 올리는 이야기들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읽고, 또 읽어 보면서 친구 하나,하나에 대한 정을 새롭게 느끼면서 지내는 재미로 살아간다네.-
우리 친구들이 “우현이 저-녀석 촌구석에 오랫동안 파묻혀 살더니 엄청 실없는 놈이 되었구나.” 하는 우스개도 들어가면서 우리 친구들은 충분한 이해가 있을 것으로 보고 아무 부담도 갖지 않고 이것 저것 무엇이든지 많이 보여 주려고 나름대로 엉뚱한 애(?)를 쓰고 있다네.-
오늘은-
방학 중이라 시간도 많고 해서 집에서 하루쯤 푹 쉬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랜만에 집사람과 나란히 앉아서 아침 방송을 듣다가 지루한 느낌도 들던 차에, 문득-벽장 깊숙이 처 박아놓았던 내 유품? (30여년전부터 몇년간 주워 모아 놓은 자료) 상자가 생각나서 꺼내보니 초임교사 시절 - 생전 처음으로 쓴 일기장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려고 일년 동안 쓴 일기)이 나와서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워지더구나.-
글을 읽다가 -
비록 내 세울 것도 없는 나의 인생길의 한 토막이지만 밀양산내 초등학교 초임교사 시절,- 친구들과는 조금은 특이한 생활을 해온 나의 이야기들을 일기장에서 발취한 내용을 정리해서 한새벌 사랑방에서 우리 친구들에게 들려주어야지- 하는 생각에서 올렸다네.-
친구들아.-
흉이나 보지 말고 재미있게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교대 졸업 후-
아무 생각 없이 철없이 까불고 내달으면서 지냈던 시간들이 지나고 갓 스물을 넘긴 시근 없고 철없는 머 스마 한 녀석이 친구 하나 없는 밀양에서도 깊숙한 산골 속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학교에 선생이랍시고 발령을 받고나서야, 그동안 내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하고 살아왔는지를 일찍이 깨달게 되었다네.( 게으름 )
당시에 교대를 졸업한 우리는 군 복무사항인 RNTC 라는 교직근무 의무연한(7년)에 묶여 있어서 어떻게 진로를 바꾸어 볼 수 없는 형편이었지.-
뭔가 부딪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박살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놈이 전기불도 없는 깊은 산골 속에 두어평도 되지 않는 골방 속에 갇혀 있으니 그때의 그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
나 자신에 대한 회환- 분노-. 갈등- 미치고 싶은 심정, - -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지고 --
날이 새면 -
그래도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우리 아이들이 있어, 초년병 선생 노릇 한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고 함께 웃고 뛰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낼 수는 있었으나 해가 지고 어두움이 찾아오면 온 몸을 감싸는 깊은 고독감과 외로움 속에 빠져들기 일쑤였지. -
어떻게 하지? -
어떻게 살아야하지? -
야생마 같은 혈기에 젊고 젊은 놈이 닭장 움막 같은 곳에 갖혀 한마디로 죽을 지경 이었지.-
수많은 나날들의 번민과 갈등 속에서 헤메는 나날이 계속되었지.-
하루빨리 나를 옥죄는 고독감과 외로움을 떨쳐 내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참으로 어려웠지만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미쳤고-
결국 내가 지금부터 할 일을 찾은것이 학창시절 게을리 해 왔던 권투에 모든 정열을 쏟아 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 것이라네-
자신과의 싸움-
결심이 다져진 3월말경 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혼자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샌드백을 치고, 사이드복싱으로 기술력을 쌓았고 저녁밥을 일찍이 해 먹고는 오지도 않는 잠을 초저녁부터 자기 시작해서 밤 11시경부터 칠흑같이 어두운 학교 운동장을 수십 바퀴를 돌고 또 돌면서 지구력을 키우고 아침 6시부터 1시간동안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누군가가 잘라놓은 고목나무 밑둥뿌리에 oe고 죽어라고 헴머를 수백번이나 두들기는 노력을 반복하면서 펀치력을 키우면서 운동을 했다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부터는 고독과 외로움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의 마음도 안정 되어 가면서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교사가 복싱 참피온이 되어 흔히들 말하는 “무슨 일이든지 하면 된다는” 신화(?)를 꼭 이루어 보겠다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앞만 보고 살아가기 시작 했다고나 할까?-
이상한 놈, 정신이 나간 놈, 황당하고 우스운 놈-
첫 발령을 받은 초임교사가 나를 포함해서 5명이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교사 2명, 여교사 3명 이었지.-
처음에는 저녁마다 함께 어울리기도 했는데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나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더니 차츰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되는 분위기로 변하더구나.
함께 근무하고 있던 동료 교사들이나 교장, 교감선생님들 조차 초임 발령을 받고 온 녀석이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지금 와서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한 일이라고는 해도 매우 황당스러운 일은 틀림없는 것 같아-
덩치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놈이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중에 미친 놈 마냥 자그마한 학교 운동장을 거친 숨소리를 내 품으면서 내 달리지를 않나- 이른 아침부터 학교 뒷산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진동을 하고,- 수업을 마치고 나면 혼자서 산속을 숨어드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 있겠는가.-
심한 불안, 걱정, 못 말리는 놈-
교장 선생님이 이거 잘못 했다가는 큰일이다 싶어서 인지, 하루는 나를 불러서 “ 진선생- 니 그 권투를 꼭 해야 되겠나?- 내가 보니 불안스럽다-. 우짜몬 좋겠노-”
“ 교장선생님- 불안 할 것도 없고, 아무 걱정 마이소-, 우리 아이들 수업에 지장이 없게 열심히 할 것이고, 학교 업무도 내 할일은 다 한 뒤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교장 선생님- 걱정 안하셔도 될 낍니다.. 교감인 제가 업무 같은 것은 잘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박세량 교감(후일-함안교육청 교육장)선생님이 부산사범을 졸업하신 동문 선배님인지라 초임 학교에서 후배인 나를 많이 도와 주셨지.-(나 대신 시합이다, 합숙이다, 하는 통에 - 반년은 보결수업을 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상과의 싸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작정하고 피나는 노력- 노력- 노력을 거듭 했지.-
언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 온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네.-
4월이 가고- 5월- 6월이 다 지나갈 무렵, 부산 체육회와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던 나에게 태국 방콕에서 거행되는 제6회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후보 선발전이 7월초에 있으니 경기에 출전 하겠느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이번에 반드시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어 우선 우리 직원들에게 그동안 나를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에 대한 이해와 내가 왜 복싱에 몰두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더욱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였지.-
현직 초등학교 교사복서의 출연. -
교대를 졸업 하고 며칠 뒤 70년 2월 25일 동부아시아 복싱대회(자유중국)를 마치고 약 5개월 만에 다시 링에 오르는 기분이란 조금은 어떨떨 하기만하고 다소 생소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지.-
( 교대 2학년때 6월경에 강원도 원주에서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국가상비군으로 선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표 1진은-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하고 2진에 속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자유중국 원정을 갔었지-.)-몰랐지?
예선 전-.
첫 시합은 육군에 소속되어 있는 선수였는데 내가 워낙 운동을 열심히 해서 인지 몸이 나르듯이 가벼웠고 펀치력도 매우 강해져서 인지 상대선수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나는 상대선수를 1라운드 초반에 쉽게 ko로 물리칠 수 있었다네-.
준준결승에 진출해서는 교대 2학년때 전국 학생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한번 싸워본 이0활(경희대)이라는 선수를 만났는데 그때 내가 판정패를 했었지- 그러나 나에겐 별로 어려운 상대라고는 여기지 않았고 교대 다닐 때는 내가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경기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지-.
나는 그때의 진 빚을 이번엔 톡톡히 갚아 주기로 하고 처음부터 맹렬히 몰아 부쳐서 일방적인 게임으로 심판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었다네 -. ( 지방선수가 중앙대회에서 판정승이란 일방적인 우세가 아니고는 승리하기란 매우 어려운 시절 이었지-.)
이 시합을 위해 평소에 72KG이나 나가는 중량을 67KG으로 줄여서 나가야 하니 체중 조절을 위한 싸움은 경기 때 얻어맞는 것 보다 더 어렵다네-
(안 해보면 모르지.-)
참고로 이야기 하지만 예선경기부터 이기면 다음날 아침에 매일 체중을 달아야 되는데 만약 1G이라도 체중이 오버 되면 탈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복싱선수들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지-.( 의지와 끈기, 깡다구가 없으면 못하는 운동이라고나 할까? )
준결승-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복서들의 꿈인 국가대표선수가 되겠다고 몰려들었으나 대부분 탈락하고 경기가 앞둔 한달 전부터 체중조절과 싸우고 몇 번의 경기를 치르다 보면 대부분 선수들이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이때부터는 체력보다는 정신력으로 싸워야 될 장면으로 접어들었다고나 할까-
준결승전에는 김0철(전매청)이라는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 김 선수는 전국대회 우승을 여러차례나 해서 전매청으로 스카웃 되어온 선수로 웰터급(67KG)의 강자로 이름이 이었으나 이날 경기에서 나의 강력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맞고 3라운드 중반에 KO로 나가 떨어졌다네 -
결승전-
초등학교 교사가 결승전에 오르자 숙소에 신문기자들이 몰려들었지-
그날 저녁 석간에는 각 지방지에도 나왔는지- 아는 사람들로부터 격려 전화도 오기 시작 하더군-( 운동선수는 성적에 따라 역적과 충신이 하룻밤 새 바뀌는 세상이지- )
김0연( 해군)- 김 선수는 세계 군인 복싱선수권대회 은메달을 획득한 바 있고 당시에 우리나라 웰터급 대표선수 상비군에 속해 있는 강자였는데 복싱기술이 다양해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경기하기를 꺼려하는 스타일 이였으나 나는 사우스포(왼손잡이)이고 빠른 동작으로 김 선수를 능히 이길 수 있었지
치열한 난타전과 체력전으로 불꽃 튀는 경기가 진행되는 사이에 나의 주무기인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김 선수의 턱에 한방 꽂히자 김 선수는 리듬을 잃고 KO 직전까지 갔었다네-
이경기에서 나는 일방적인 승리로 심판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의 영광과 함께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네 -.
기쁨,- 찬사,-, 환영-.
무슨 일이든 지옥과 천당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라는 진리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시합을 오기 일주일전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동료직원들이 시합을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신문을 보고, 마치 개선장군이 나타난 것처럼 환영일색으로 변 했다네 -
그 당시(70년도)는 TV나 라디오가 귀 할 때이고 볼거리가 없던 시절인지라 복싱의 인가가 최고조로 달할 때였기에 지방신문은 말 할 것도 없고 전국 중앙지와 잡지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초등학교 교사가 웰터급 국가대표후보로 선발 되었다는 보도는 조그마한 산골동네의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나 할까.-
내가 시합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온 후에는 밀양산내면 관내 면장, 지서장, 중학교 교장, 우리 교장선생님과 전 직원, 동네유지들이 전부 모인 가운데 우리학교 당시 사친회장이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큰 잔치가 벌어졌었지-.
그때-. 나의 기분은 어찌 되었겠는가? ( 영웅이 따로 없는 것 같았지. )
이후로 학교엔 프로모타( 프로복싱)를 비롯한 대학관계자. 보안대 복싱감독, 등등 나의 진로에 대한 문의가 오기 시작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 하더군-.
부산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일념-
수시로 들려오는 벼라 별 이야기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앞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반드시 이번 기회에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아시안게임 출전해서 금메달을 획득하면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학교로 돌아온 뒤부터는 동료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까지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동료선생님들의 사모님들이 나서서 번갈아 가면서 음식도 제공해 주시고 동료 여선생님들은 땀에 젖은 운동복과 옷가지 세탁이며 심지어 방청소까지도 해주기 시작하는데 나는 보기보다 마음이 여려서 남의 도움을 받으면 미안함에 사족을 못 쓰는 성격 인지라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네
정말 행복한 시간들 이였지.-
태릉에서의 강 훈련 -
상비군으로 선발 된 한달 후 대한복싱연맹에서 태릉선수촌에 입촌 하라는 연락을 받고 약 한달 동안 대표선수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네-
나와 최종선발전에 붙을 상대는 주00( 수도경비사령부)선수인데 주00 선수는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인 동시에 세계군인선수권대회금메달을 획득한 강자로 프로전향후 세계챔피온을 지낸 000선수를 7회KO를 시켰고 세계쥬니어미들급 1위로 일본의 구또마사시(세계쥬니어미들급 챔피온)와의 타이틀메치에서 15라운드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끝에 판정패를 한 강펀치의 소유자였지-.
나도 소 시적에는 부모님의 강한 체질을 타고나서 친구 두서명과 모래사장에서 레스링(고상 받기)을 해야 상대가 될 정도로 힘이 좋았고 복싱 기술도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누죽이 들거나 긴장 같은 것은 별로 되지 않았지-
태릉에서의 훈련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처절 할 만큼 내 스스로도 한점 부끄러움 없는 훈련을 했다고나 할까- 최선에 최선을 다 했지-
그 당시 대한체육회장 민관식, 대한복싱연맹 회장이 김택수(공화당 원내총무)씨 였는데 이분들의 말씀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상여금으로 금메달 100만원, 은매달 50만원, 동메달 30만원을 복싱연맹에서 회장 개인이 지급하고 정부 포상금으로 이와 같은 수준으로 주고 금, 은, 동메달획득 선수는 전원 청와대로 초청해서 훈장수여 까지 한다고 하니 태능에 있는 복싱선수뿐만 아니라 전 종목의 선수들의 눈에는 광채가 빛을 발하게 되는 동시에 모두가 죽기 아니면 까물치도록 운동에 전념을 하는 것이었다.
( 당시 우리 초임교사봉급이 2만원도 안되었지요.)
아- 나에게 이런 행운이 왔구나.
나는 반드시 국가대표선수가 되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면 우리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지 - 하는 부푼 꿈을 안고 최종 시합만을 기다리면서 운동을 했다네.-
( 당시에 복싱부분은 아시아권에서는 우리나라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곧 아시아 금메달로 직결될 정도로 복싱의 최강국이었다네-. 6회 아시안게임 금메달 8개 은메달 3개로 전 체급 메달 획득함. )
운명을 건 경기-
장충체육관 특설링-
5000여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체육관이 매진되고 양대 TV중계가 이어 지면서 한체급 한체급 대표선수가 결정 될 때마다 체육관안은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귀가 먹을 정도로 흥분의 도가니 그 자체였지-
드디어 내가 링에 오를 차례가 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름 모르는 신에게 빌었다네.
이번 경기에서 내가 꼭 승리 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지.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강한 훈련을 거친 나는 권투 장갑을 끼는 손에 주먹의 강도를 느끼면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지 -
당시 동아대학 손영찬 복싱 감독이 나에게 와서 세컨 코치( 코치 및 보조역활 )를 보아주었는데, 시합을 할 때 처음부터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 가도록 당부를 해왔다.
주00선수- ( 선수의 명예를 생각해서 가명 씀 )
그는 나와 비슷한 체격이나 근육질에 강한 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금 느린 편에 속하기 때문에 큰 주먹만 피하면 별것 없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다.
드디어 운명을 결정 짓는 1 라운드 공이 울렸다-.
나는 거리를 조금 떨어뜨리고 가볍게 잽을 치고 돌면서 상대선수를 견제하면서 찬스를 노렸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주00선수를 향해 나의 스트레이트성 잽이 나가는 순간, 상대방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총알같이 날아들었다.
나의 머리위로 빗겨 스치는 주먹의 강도를 느낄 수 있었는데 우리와 같은 중량급 선수들은 큰 주먹을 한대만 맞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조심해야지-
찬스를 엿보면서 또다시 스트레이트성 잽을 날리는 순간 주00선수의 레프트와 라이트가 동시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찬스가 보이질 않았다.
내가 주00보다 스피드 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주00선수는 자기사범( 최00- 국가대표 코우치)과 나를 두고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나의 주무기가 나올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내가 라이트 잽만 내는 순간을 포착해서 들어오면서 레프트훅을 먼저 치고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결정타를 노리고 있었다.
찬스를 노리는 잽과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주먹교환만 수차례 하다가 1라운드를 마치는 공이 울렸다.
아- 1라운드는 내가졌다.
내가 밀린 경기를 한 것이 분명했다.( 20점 : 19점 )
동아대학 손영찬 감독도 이대로 간다면 내가 진다고 야단이었다.-
2라운드 경기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나는 작전을 바꾸어서 찬스를 노리기 시작 했다네-
주00의 주위를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1라운드처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치는 척 하면서 주00선수가 레프트훅을 치도록 유인하고 나의 주무기인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눈 깜짝 할 사이에 주00의 턱을 향해 강하게 꽂아 넣으니 정통으로 들어맞는 것 이었다.-
나의 주먹에 “찍-” 하는 감각을 느끼면서 뒤로 빠져 나오면서 보니 주00의 코 언저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당황해 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재빠른 후드웍과 강한 스트레이트성 잽이 맞아 들어가고 또다시 유인작전에 말려든 주00의 턱에 강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으니 2라운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 할 수 있었다.
나는 2라운드에서는 주00의 주먹을 한대도 제대로 맞지를 않고 마치게 되었지-
2라운드는 아무리 잘못 보는 심판이라도 내가 분명히 이겼지,
( 19점 : 20점 )
운명의 갈림길인 마지막 3라운드 공이 울렸다.
2라운드에서 점수를 잃었다고 생각한 주00선수는 공이 울리자 말자 거칠게 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스텝(발놀림)이 빠른 나는 주00선수의 외곽을 돌면서 크게 휘두르는 강한 주먹을 피하면서 찬스를 노렸다.
나의 특기는 사우스포(왼손잡이)로써 밀고 들어오는 선수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버리고 그 빈틈을 받아치기를 잘 하기 때문에 주00선수가 밀고 들어오면서 날리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잽싸게 피하면서 강력한 레프트 스트레이트와 라이트훅을 치니 나의 주먹은 정확하게 주호의 턱에 작열했고 나의 주먹에 휘청거리는 주00선수를 따라 붙어 무차별 공격을 쏟아 부었다.
라이트훅- 레프트훅, 더블퍼치와 보디블로우 -.
코너 쪽으로 몰아붙이고 쉴새 없이 공격을 하고 있는 나를 동아대학 손영찬 감독이 “ 우현아-! 나온나, 나와 ” 하면서 다급하고 흥분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완전히 그로기 상태로 조금만 더 밀어 붙이면 완전히 넉 아웃을 시킬 수도 있는 찬스였는데 손영찬 감독은 나를 떼어 놓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중량급 선수- 특히 주00선수와 같이 강한 주먹을 가진 선수에게 조금만 잘 못 맞으면 역전 KO를 당할 수 있다고 보고 나를 더 이상 접근을 안 하도록 말린 것이다.
3라운드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주00선수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힘이 빠졌는지 방어 형태로 나가기 때문에 나는 손 감독의 말을 듣고 마지막 남은 약 30초가량을 여유있게 게임을 운영하면서 3라운드를 마쳤다.-
분명히 나는 ( 17 점 : 20점 ) 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아- 드디어 이겼다.-
내가 나의코너로 돌아오자 말자, 손영찬 감독과 부산에서 올라온 체육관 친구들이 자기가 이긴 것 마냥 좋아서 펄쩍 펄쩍 뛰면서 야단들 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리면서 오늘까지 왔던가-
나는 드디어 해 내었다-
나는 두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관중들의 박수에 답례를 보내고 있었고-
주00선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다섯명의 심판들이 매긴 채점이 끝나고 판정이 가려지는데 주00선수가 3 : 2로 승리 했다는 링 아나운서의 멘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1심-( 59: 58 ) 2심-( 59 : 58 ) 3-심( 59 : 59 )
4-심( 56 : 59 ) 5-심 ( 56 : 59 )
1심판과 2심판은 1라운드, 2라운드를 주00가 이기고 3라운드만 내가 이긴 것으로 판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판정을 했지-
3심판은 1라운드 주00 승리. 2라운드 무승부, 3라운드 나의 승리로 체점 하여 주00 우세승을 주는 야비한 짓을 했고-
4심판 5심판은 1라운드 주00승리 2라운드 나의승리 3라운드 나의완전승리로 정확하게 판정함
(예-라운드마다 매기는데 약간우세 1점차, 우세 2점차, 완전우세 3점차 )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얼토당토 않은 판정에 5000여명의 관중들은 심한 야유와 함께 방석이 날아들었고 TV중계까지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링 위에 드러누운 나를 잡아내려고 경찰관들이 몰려오고 극렬한 관중 수십명이 몰려와서 경찰관들을 밀어내고 하는 난장판이 벌어졌지-
“ 국가대표 선수를 뽑는 마당에서 이런 몰지각한 심판들이 있어 되겠나-”
야유와 고함- 한마디로 난장판 이었지-.
당시 대한복싱연맹 전무이사 이었던 박00씨가 나와서 마이크를 통해 이 경기는 태릉선수촌에서 반드시 재 경기를 하여 다시 선발하도록 하겠다는 말로 관중들을 진정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경기든지 심판의 오심이라 할지라도 한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 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는 더 이상 기대 할 일도 없었지-.
나의 예상과 마찬가지로 그 후에 대한복싱연맹으로 부터 아무른 연락도 받지 못했고 이것으로 나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한낱 이름 없는 무명선수로,- 2등 선수로 전락 해 버리고 말았다고나 할까?-
이번 시합에 나 이상으로 기대에 차 있는 산골마을의 우리학교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어떻게 대하고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잠적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한달 뒤 나를 꺽고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주00선수는 금메달을 안고 귀국하여 훈장과 상여금, 그리고 체육사에 이름까지 등록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지-
금메달을 획득하고 돌아온 주00 선수와 그뒤에 두 번을 더 싸웠는데 뮌헨올림픽 파견후보 서독 국제복싱대회 선발전에서 이겨서 내가 다음해(71년도) 서독원정을 가게 되었고 72년도 뮌헨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준결승에서 나에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난 다음 프로선수로 전향해서 세계 쥬니어미들급 1위까지 올라 간 훌륭한 선수였다네-.
만약이라는 단어는 별로 가치 없는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때의 시합에서 올바른 판정만 내려 졌어도 난 이렇게 고달픈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우스운 생각을 가끔씩 해 보기도 한다네-.
인생에 있어서 찬스라는게 있기 마련이거든.-
1등과 2등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라고 할 수 있지-.
그 후 학교생활과 선수생활을 함께하면서 끈질긴 도전을 해 보았으나 결국 2등 선수의 꼬리를 떼지 못하고 복서로써의 좌절을 맞보면서 쓸쓸히 링에서 사라지게 된 거라네-.
내가 권투에 미쳐서 이렇게 쏘다 다니다가 78년 결혼 할 때 까지 체육관 사범과 코우치를 겸해 선수생활을 계속 했으니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겠는가-.
78년부터 85년도까지는 경남 대표팀 코우치, 감독을 한다고 매일같이 바깥으로만 다니다가 학교 일에 전념 해 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먹고 나름대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근무를 했는데 나는 인덕이 많아서 주위의 많은 분들이 도와 준 덕분으로 교감(98년도)이 되더구나.
교감을 몇 년 했더니 권투선수 출신도 학교경영을 한번 해 보라고 교장도 시켜 주어서 지금은 시골의 조그마한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다네-.
부산교대 2년 졸업-
권투선수 진우현이가 오늘까지 끈질기게 살아 올 수 있도록 해 준 뿌리가 부산교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모교를 사랑하고 우리 친구들을 사랑하고 우리모교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교직을 마칠 때 까지 최선을 다해 볼 각오를 다져본다네-
내가 이곳 경남에 와서도 옛 정을 잊지 않고 끝까지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진정태형과 몇몇 친구들--- 그 고마운 정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경남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로 내가 살아가면서 빚을 갚아 가면서 살아야 될 고마운 분들도 많이 있다네..
끝으로
나는 78년에 이영자(경주이씨)와 결혼을 해서 1남 1녀를 두었다네.-
우리 집사람은 나보다 한살 위이고 현재 마산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집 사람은 너무 착하고 순한 순동이라고 할 수 있다네.
나는 언제나 우리 집 사람을 고맙게 여기면서 산다네.-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팔불출 이라고도 하지-.
우리 아들(영래)은 올해 28살이 되는데 한양대학 법대를 지난해 졸업하고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한다고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지.-
그런데 나와는 너무나 달라서 누구를 괴롭혀 본적도 없고 괴롭힘을 당해 본 일도 없이 그저 그렇게 커 왔다고나 할까? - 저거 엄마 닮아서 순동이지
우리 딸(선화)은 올해 26살이 되는데 집과 학교 밖에 모르는 쑥맥이라네.-
경상대학교 사범대학을 지난해 졸업해서
현재 고성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네-.
친구들아-
시간이 있으면 언제든지 놀러 온나.
친구가 술은 있는 대로 다 받아 줄께-
- 꼭 온나- 알았재-
-
-
친구야-. 끝까지 읽어주어서 고맙다.-
첫댓글 장하다,진우현.아!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이른 새벽 너의 글을 읽고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진우현의 인생역전...
틀림없이 훌륭한 교장선생님이 될끼다.
차교수가 정말 오랜만에 왔구나. 반갑다.- 앞으로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주라.- 격려 해 주니 더욱 고맙고- - 뒤에 부산에서 만나면 꼭 술 한잔 받아 주라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