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민씨(驪興閔氏씨)의 시조(始祖)는 노나라의 공자(孔子)의 10 제자중의 한명인 민손(損)의 후손인 민칭도가 유력
여주에 있는 민굴(閔窟)이라는 동굴에서 나왔기에 민씨라고 하기도 한다
민칭도(閔稱道) 고려조 상의봉어(尙衣奉御)
2세 민세형(閔世衡) 감찰어사
3세 민의(閔懿) 검교상서좌복야
4세 민영모(閔令謨)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
민영모는 2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5세조 민식(閔湜)은 고려 신종(神宗)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이 후손을 상서공파(尙書公派)
둘째 아들 5세조 민공규(閔公珪)는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소보(太子小保)
이 후손을 정의공파(定懿公派)
민식의 증손인 8세 민지(漬)가 고려의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조(忠宣王朝)에 결쳐 원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忠肅王)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음
민지의 후손은 대부분 문인공 민지를 중시조로 하여 문인공파
북한산에는 민지가 즐겨찾았던 민지암閔漬岩
민식(閔湜)의 5대 손으로 고려 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던
10세 민안부(閔安富)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던 1392년 조의생, 임선미 등 72 명의 고려 충신들과 함께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72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민안부는 중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5세조 민공규(閔公珪)의 후손 13세 민신이
계유정란으로 인하여 그의 5子(보창, 보해, 보석, 보흥, 석이)가 모두 참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용케 그의 손자 중건이 살아남아 해남으로 낙남
당시 종이였던 사람이 7살 먹은 중건을 항아리에 숨겨 지게에 짊어지고 그의 외숙인 진도현감 김종에게 데리고 오게 된다.
옛 진도땅이였던 삼산면(당시 삼촌면)에서 자랐던 중건은 성장 초계정씨와 결혼, 해남읍 해리로 분가 그후 후대에 이르러 마산면 화내리로 옮겨갔다고한다.
해남의 여흥민씨는 중건의 조부인 충정공 민신의 후예로 충정공파로 삼아 한 파를 형성
충정공파의 부조묘가 남계리 창환이 집앞에 있다.
즉, 마산면의 여흥민씨는
13세 이조판서 민신 (충정공,계유정난三中臣)
충정공 민신의 손자 민중건 (해남읍 해리)
민중건의 5대손 20세 첨추 민회안 (화내리)
의 후손 임
마산초 50회 친구들
29세 권식
30세 병삼 병서
31세 탤런트 민욱(민우기)
32세 경식 경묵 경국
아직 모름 (내가)
동수 홍제
광자 숙정 현자 정님 원자 삼홍
남현 명희
한자 필순
https://youtu.be/vQs5OWiyR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