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느끼고 겪은 인생사와 에피소드로 인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고 기쁘고 낙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이미 주어진 것인지 내 결정으로 이뤄지는 것인지 알고싶어 했고 저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한다고 믿습니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결정론이 완성되고 결정론의 배경 하에서 자유의지가 펼쳐진다고 믿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운명 안에 자유의지가 있고 자유의지의 완성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런 상상과 비약으로 엉성한 글을 써봅니다.
사고논리로 따지면 인간에겐 자유의지는 없다고 해야합니다.
우선 절대적인 선택의 자유는 자신의 육체적 필요와 상황의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의지는 우리가 아는 것이고 우리가 아는 것은 우주 안에 있으며 우리 우주 안의 시간, 공간 및 인과관계의 조건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주의 한계를 넘어야 절대적 자유가 생깁니다. 고로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의지는 처음부터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크게 영향받기 때문에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모든 의지는 알 수없는 미래에 대한 무지의 결과와 무차별적인 과거의 조건화된 행동이며 자유의지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조건화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호킨스의 시각과 신나이(신과 나눈 이야기)에서의 세계관을 짬뽕하고 뇌피셜을 합쳐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결정론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화감 혹은 거부감을 갖습니다. 상황과 맥락으로 볼때 나의 결정과 일어날 사건이 나 아닌 누군가(내밖에 있는 신)의 의지로 인한 것이며 나와 무관하게 펼쳐지는 과정일거라는 피해의식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이번 달의 스케쥴을 스스로 짤 수 있습니다.
누구를 언제 어디서 몇시에 만나고 어디를 방문하고 언제 무엇을 하고 등등을 말이지요.
그러면 앞으로 언제 어느 시각은 스케쥴에 따라 나는 그것을 왠만하면 이행할 것입니다.
일년 후의 시간까지 시간표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결정적 약속과 사건에 부담을 갖거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에 의해서 계획되고 시행될 사건이니까요.
그 미래의 결정을 이행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의 실현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인해 나는 그 약속을 잊게되고 그 약속을 정한 것도 잊어버렸다 칩시다.
그럼 나는 그 약속이 어느날 예고없이 들이닥칠때 짜증을 낼것인가요.
아니 누가 나를 제약하고 억압하는 거야 라고 화를 낼것인가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구속했다고 슬퍼할것인가요.
아닐겁니다.
내가 잊었다해도 과거의 내가 계획된 일을 지금 수행하는 건 나의 기쁨입니다.
잊혀져 못했다면 얻게될 불이익을 생각하면 갑작스런 약속의 사건은 사라질뻔한 나의 기회를 되찾는 것입니다.
나의 비망록은 값있게 사용된 것이고
나는 또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계획을 다시 짜고 그 스케쥴표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이 삶도 그렇습니다.
나는 전생과 이승과 저승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가 직접 이 계획표를 만들었다(라고 가정합니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내가 짜놓은 계획을 현재 실현하는 것이며 그 스케쥴을 내가 짜놓았다는 걸 지금 모를 뿐입니다.
지금의 삶이 하나밖에 기회가 없고 그래서 그 하나가 그 이후의 여정(영원히 천국과 지옥에 머물것이라는)을 다 책임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결정론이라는게 성립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큰 우주의 시각에서 보면 한때 육체로서의 죽음이 영원한 끝이 아닐것입니다.
다음 생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고 볼때 우리는 비물질로 있다가 다시 물질로 환생하는 삶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단순화해서 이승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곁에 머문다고 칩시다.
우리는 살아 있을때나 죽어있을때나 다 우주의 한 부분이고 신의 한 조각입니다.
우주는 데이비드 봄에 의하면 홀로그램적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우주의 한 부분 속에는 우주 전체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한조각인 나도 전체 우주이며 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질로 화하며 이원화된 세계에 머물러 있으므로 우리가 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뿐입니다.
하느님곁에 머물렀다는 것은 이승의 시간에서 로그아웃하고 리셋하고 업그레이드하여 다시 우주의 세계로 부팅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가 죽은 후에 맞닿는 우주 세계는 신의 품 이므로 시간을 초월한 세계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나의 전생과 후생의 삶에 빚져 있지 않고 독립적입니다.
처음부터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영향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힌두와 불교는 생전에 지은 업장의 카르마를 계속 가지고 간다고 하고, 호킨스는 의식수준의 위치성에 따라 선택의 범위가 정해진다 라고 하는데,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인과론의 아주 좁은 가능성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엄청 제한될것입니다.
그건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선택한 것 같지만 유도된, 혹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일방도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쨋든 저는 이 부분에서는 신나이의 정체성을 가져봅니다. 영체가 머무르는 세계는 사건의 지평선으로 모든 것이 초기화되고 시간을 초월한 곳이라고 말이지요.
다시.
이 물질로서의 죽음 이후 다다른 영역에서 나는 다음의 삶을 계획합니다.
ABC라는 사건을 들고 시간에 따라 A->B->C로 펼쳐놓을 세세한 청사진을 짭니다.
나는 전체우주이자 신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주는 인드라망 속에서 완벽한 계획을 짜는게 가능합니다.
결정은 개인인 나_신 중심으로 짜여지면서 동시에 여럿이 같이 사는 이 지구의 삶속에서 사건_신 중심으로도 짜여집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짜여지면 그 결정은 한 개인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축에서 변할 수 있습니다.
사라진 과거가 여전히 살아서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고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대한 관점을 바꾸면서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나고 맥락이 바뀌면서 과거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A->B->C가 아니라(A가 B에 영향을 주고 또 그 B가 C에게 영향을 주는게 아니라)
ABC가 각각 A와 B와 C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물질로서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환생하는 그 순간 그 전의 모든 기억을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생겨도 나는 그 사건이 내가 미리 짜놓은 것라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삶은 촘촘하게 때로는 듬성듬성하게 결정되었으며 내가 내 의지로 짜놓은 스케쥴입니다.
나는 태어나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삶의 DNA대로 합목적적으로 의지를 일으켜 이 생을 풀어나가는 것이며 그게 바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풍예보를 우리는 기상청이 날씨를 예언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명확히 태풍의 눈이 보이므로 며칠후 우리나라에 태풍이 언제 어떻게 불것인가는 얼마든지 관찰과 데이터로 예측 가능합니다.
삶이라는 영토를 하늘에서 바라볼 눈이 있다면 언제 사건의 바람이 불지 시련의 태풍이 불지 슬픔의 비가 올지 괴로움의 추위가 닥칠지 당연히 보이고 예측 가능할 것입니다.
그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고, 운명이라고, 결정론이라고 폄훼할 수 있을까요.
만일 비가 온다고 예보하면 나는 그 기상캐스터의 말을 믿고 우산을 준비해서 외출합니다.
심한 태풍이 올 것이라고 예보하면 미리 집안밖을 점검하고 살펴보고 외출을 삼가합니다.
이럴때 어떤 사람은 기상예보를 무시하고 우산없이 밖에 나갔다가 비 맞고 감기 들수도 있고 태풍경고를 무시해서 호되게 일을 치를 수 있습니다.
똑같이 기상예보를 듣고 누구는 준비해서 안전하고 누구는 무시해서 애를 먹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상 상황이 옵니다.
알 수없는 은유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귀밝은 자는 준비하고 귀먹은 자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뻔한 삶의 기상도가 충분히 펼쳐졌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나의 준비태도가 바로 좁은 의미의 자유의지입니다.
어떤 뭉게구름에게서 우리는 강아지도 보고 꽃송이도 보고 말탄 기사와 침팬지도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시련과 고통을 어떻게 보고 견딜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이와 비슷합니다.
고통이 괴로움과 분노, 슬픔과 죄책감, 수치심과 절망과 같은 일차반응(update되지않는 오토파일럿이라 부르겠습니다)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도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영적인 진화와 함께 인내와 사랑, 용서와 포용같은 이차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하여 우리는 비슷한 고통유발 사건의 순환고리, 그 알고리즘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지혜와 교훈을 배워 그 상황을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대처와 태도가 나의 자유의지입니다.
우주의 본질은 진화이므로 앎과 사랑이 생기면 같은 상황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이 삶 이전에 우리가 스스로 설계했습니다.
육체로 태어나 선택을 하면서 나는 내가 잊은 스케쥴을 소화하고 이행합니다.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쫒는 허영은 아닐까 의심도 하지만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생한 실감을 갖고 느끼도록 운명의 스케쥴 사이를 별자리처럼 이어주는 게 또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운명을 탓할 것도 아니요 내 자유의지를 무시할 일도 아닙니다.
그 둘은 서로를 장식하는 액자입니다.
내 삶의 쓰라린 조건과 상황을 내가 스스로 만들었는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