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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예비하라
마태복음 25:1-13
오늘 말씀을 나누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어제는 이상기온이었다. 늦가을 날씨가 유난히 따듯하였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을 한 사람도 눈에 뜨였다. 철없는 사람들이 많더라. 갑자기 날씨가 무더웠지만, 그래도 다시 여름으로 계절이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어김없이 겨울은 다가온다. 11월은 어둠이 깊어 가고, 점점 대기가 차가워진다. 겨울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예후이다. 얄팍한 달력은 한해의 끝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누구나 겨울을 준비한다. 겨울은 생활비가 많이 들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노약자들에게 훨씬 힘겨운 계절이다.
이 즈음에는 저녁이면 빨리 어두워지고, 아침에 늦게 밝아진다. 여름의 아침과 겨울의 아침은 참 다르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출근길 사람들의 표정을 본다. 여름철은 이미 밖이 환하다. 그래서 출근길 표정도 마치 금요일 아침 같다. 그런데 아직 출근길이 컴컴한 겨울철에는 그 표정이 꼭 월요일 풍경이더라.
날이 어두우면 누구나 등불을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누구나 영혼의 등불을 찾게 된다. 언제든 자기만의 등불을 하나씩 마련하기 바란다. 내 밖을 비추어주고, 내 안을 밝혀 주는 그런 등불이 필요하다.
이번 주 성서일과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메시지를 들려준다. 우리는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 어렵다. 성경의 묘사는 은유적이지, 실체적 접근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재림은 단지 영적인 교훈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우리에게 ‘할렐루야 신앙’은 만발한데, ‘마라나타 신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만족적인 신앙생활은 익숙한데, 예수의 말씀과 그 뜻에 따르는 생활은 부족하다. 종말론적 긴장감으로, 영적 성숙함으로 새로운 삶과 세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하다.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긴장할 일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비유이다. 이 비유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혼인 잔치의 들러리들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
당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저녁에 신부집에 신랑이 도착함으로서 시작하였다. 신부의 들러리들은 저녁때가 되어 신랑을 맞기 위하여 동구 밖까지 나가서 기다린다. 날이 어두우니 등잔은 신부 들러리들이 갖춰야 할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 문제가 발생했다. 신랑의 도착이 계속 미루어지고, 자꾸 늦어졌다. 마을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처녀들이었지만 졸음은 어쩔 수가 없어 열 명, 모두 피곤한 나머지 맥이 풀려, 잠이 들고 말았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
사실 문제는 들러리들이 잠든 때문이 아니다. 신랑이 오면 깨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새 어둠이 깊어가고,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흘러가 버렸다. 물론 열 명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고, 다섯만이 자기가 쓸 기름을 예비하였다. 예수님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고,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슬기롭다고 하신다.
이윽고 한밤중에 한 외침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
드디어 신랑이 온다는 황급한 목소리였다. 잠든 열 명의 처녀는 반사적으로 동시에 깨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절반의 처녀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자기 등잔에 불을 밝히며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지만, 다섯 명의 처녀는 기름이 없어 등불을 밝힐 수도,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도 없었다.
애초에 등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지 못했다. 그렇게 신랑이 늦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에 이 만큼이면 충분하겠지, 판단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딱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냉정하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니, 돌아온 대답이 아주 냉정하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
사실 부탁하는 사람에게는 딱한 노릇이지만, 합리적인 대답이다. 인정상 나누어 쓰다가 모두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당장 가게에 가서 기름을 구하라는 당연한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기름을 사느라 지체한 다섯 처녀들이 신부집에 도착했을 때, 너무 늦었다. 문은 닫혔고, 늦은 대가로 거절당하였다. 문을 열어달라는 간청에 들려온 대답은 더 냉정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
이 비유의 결론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미련한 다섯 처녀란 남을 빗대어 예를 들었을 뿐, 사실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다.
인생이 피곤하고 삶이 고달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느라 바빠 기름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했지만 신랑이 늦게 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도 자주 변명하면서 산다. 잠이 든 것도 양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빈 등잔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은 아량도 없고,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약함과 고달픔을 이해하는 따듯한 눈빛이었는데, 오늘 본문은 참 무정하시다. 물론 그 사태가 엄중함을 일깨워 주고 계신다.
다행한 일은 아직 재림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된다. 깨어 있어야 하고, 기름을 준비해야 하고, 등불을 밝히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때 가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비라는 의미이다.
1) 네 영혼을 밝히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우리 인생에는 육적인 삶과 함께 영적인 삶이 있다. 영혼은 육체에 깃들어져 있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신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9).
내 안에 등불을 켜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남들이 나를 통해 빛을 느끼고 따듯함을 경험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일이다.
어느 장님이 등불을 켜고 길을 간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빛을 볼 수 있소? 아니오,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오. 그렇다. 빛을 볼 수 없는 장님조차 등불을 켜는 까닭은 어둠 속에서 마주 오는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속담에 ‘어둠을 쫓으려면 촛불을 켜고 도깨비를 만나면 등불을 밝혀라’는 말도 있다.
성경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라고 말한다.
지금 내 영혼에 불이 꺼져 있지는 않은가? 희미하게 가물거리지 않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둡다. 어서 영혼의 등불을 밝히라.
2) 깨어 있으라
사실 혼인식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요한의 제자인 우리는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보라 신랑이로다”(6)는 외침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의 하나인 종말론적 각성을 말한다. 본문인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 등 종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맥락에서 보면 ‘저기 오는 신랑’은 종말론적인 사건, 곧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이제 예수께서 종말의 때에, 영광에 싸여 오실 때에 그 혼인식이 완성될 것이다. 이제는 먹고 마실 때가 아니다.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새로운 시대와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종말은 마지막, 곧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 즉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로운 창조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혼인잔치 비유는 우리들을 향해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희망의 기지개를 켤 때나 절망의 고개를 숙일 때나 어느 순간이든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의식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막다른 벼랑에 선 인간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존재에 대한 일깨움인 것이다.
비록 주님의 오시는 시점이 지연되더라도, 그 도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은 중요하다. 준비된 삶은 자신의 삶을 예수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루하루 세상의 종말로 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궁극적인 오심과 하나님의 통치와 미래의 나라가 현재의 내 삶의 나침반으로서, 내 인생의 시계와 달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5-6).
3) 등불을 들어라
예수께서는 이미 캄캄해진 네 삶에, 이 역사에 ‘일어나라! 너의 등불을 밝혀라’고 명령하신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등불을 높이 쳐들고 주님의 강림을 예비할 자 누구인가?
독일에 히틀러가 만든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가 있다. 이곳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수용소이지만 유대인뿐 아니라 유랑민인 집시와 소수민족들, 히틀러에 반대한 독일인 지식인들이 수용되어 있었기에 유명해진 곳이다.
나는 그곳을 방문해 독방이나, 목욕탕, 사형장 등 끔찍한 시설을 관람했는데, 여전히 깊은 인상으로 남은 것은 수용소 출입문의 가장 높은 망루에 페인트로 그린 둥근 시계였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 장소에 하필이면 시계를 그려놓았을까? 아마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 그 시계는 양면 모두가 11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유로운 삶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 그림시계를 보고 자신에게 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몇 시인가?’ 그들은 운명의 시계처럼 정지된 절망의 공간에서 ‘내 희망은 과연 몇 시인가?’ 라고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나는 수용소문을 나선 후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필이면 왜 11시 05분이란 시각을 그려 놓았을까? 수첩에 ‘11시 05분’이라고 써놓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그 시각이 오전일까, 아니면 한 밤중일까? 그리고 나는 내 나름의 결론을 찾아내었다. 11시 05분은 종말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바로 “보라 신랑이로다”(6)는 외침이 있는 그 한 밤중, 바로 그 때와 일치하고 있다.
그 때는 모두 졸음에 넋을 잃고 있는 시간, 역사마저 피곤함에 지쳐 멀미를 하며 선잠에 든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시간은 동시에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 올 때’(마 24:43)요,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할 때’(마 24:48)이며, ‘저기 신랑이 올 때’(마 25:6)이다. 한 밤중인 11시 05분, 그 시각은 절망의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는 구원의 외침이 있는 때이다. 그러나 등잔의 기름은 충분한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는 당시 고백교회 지도자 마틴 니멜러 목사도 갇혀있었다. 그 역시 오랜 수용소 생활을 겪으며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알아 본 다른 수인 하나가 감시 속의 짧은 산보 시간에 그의 옆을 지나치면서 막대기로 그리듯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다’ 라는 네 글자의 라틴어를 쓰고 지나 쳤다.
마틴 니멜러는 이 막막한 수용소 안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삶의 용기와 희망을 되찾았다. 그는 처형 직전, 연합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독일교회를 다시 재건한 지도자가 되었다.
나는 내 영혼의 등불을 밝히는가? 나는 기름은 충분히 준비했는가? 나는 깨어 있는 삶을 사는가? 등불이 없는 사람은 없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기름이 넉넉히 남아있다는 증거요, 절망에 빠졌다는 것은 기름이 소진되었다는 증거이다. 깨어있어 준비하는 일은 믿음으로 희망을 키우는 일이다.
어두울수록 등불을 켜야 한다. 절망 속에 있을 때일수록 깨어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다. 그래서 기회가 열린다. 그래야 희망을 얻는다.
예수님은 말한다. 아직 기회가 있다. 당장 눈앞이 캄캄할 때에 한줄기 불빛을 응시하라. 어두울수록 남에게 따듯한 존재로 곁에 머물라. 시대의 어둠을 탓하지 말고 한 자루 촛불을 켜라. 그리고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따르라.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가 언제나 등불을 밝히는 여러분과 같이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