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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24절(막10:25,눅18:25)을 보면서 낙타(camel)가 바늘귀(바늘의 눈,the eye of a needle)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성경기록이 나옵니다.
이때의 '바늘귀'는 진짜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바느질용 바늘의 구멍'을 말하는 가? 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바늘귀(the eye of a needle,바늘의 눈)이라는 이름의 문(門)은 실제로 이스라엘 성문에 존재했습니다."
이 주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제가 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음'을 먼저 밝힙니다.
1. 성경본문기록을 중심으로 먼저 본문의 전후문맥과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습니다.
2. 문자적해석,문법적해석,역사적해석과 바른 전후문맥에 의한 해석과 이해에 집중하였습니다.
3. 한글번역상 의미를 놓친 부분들이 일부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이해를 보충하면서 정확한 문맥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엿습니다.
4. 관련서적들을 참고하되 성경본문기록에 부합한 주장들 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말 그대로 참고자료일 뿐 중요한 판단은 말씀에서 이미 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5. 바늘귀에 대한 실제적인 기록물들이 있는지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6. 제가 아는 선교지현장체험자들의 증언과 경험을 수집함은 물론 전문가들의 자료를 참고하였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정확한 성경기록이 주는 건전한 이해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먼저 위 '3번그림'의 사진은 흑백사진모습으로 실제 당시의 나사렛(Nazareth)이라는 지역에 존재하였던 '바늘귀'문에
대한 '실제사진'이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본 주제에 대한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낙타는 그리스어로 '카멜로스(주격), 카멜론(목적격)'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발음의 '그리스어단어'에 해당하는 '카밀론'이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밧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부 소수 사본들에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라고 일부가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밧줄'에 대한 주장은 이런 소수의 부패한 원어사본들을 근거로 한 인본주의사상이 만들어 낸 결과이므로
성경신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엉뚱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다수의 정통그리스어사본(Textus Receptus)인 Stephens본(1550년)의 내용을 보여드립니다. 직접 확인해 보세요.
오늘 다루는 '바늘 귀'(the eye of a needle)는 실제 이스라엘의 성문들(느3장,양 문, 물고기 문, 옛 문, 샘 문, 물 문,
양 문...)들에 대한 야간쪽문(=비상구) 이름인 '바늘 귀'라는 문(門)을 실제적으로 직접 가리키고 있는 비유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의 성문들과 관련하여 당시 실생활에서 '바늘귀'라는 문(門)이 실제로 예수님당시에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실제 생활현장에서의 소재를 가지고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하시게 된 것입니다.
마19:22-27절을 중심으로 제가 살펴보고자 한 것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24절, 당시 이스라엘에는 비상구역할을 한 '바늘귀'라는 이름의 쪽문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2) 26절, '이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의 이것(=this)이 가리키는 내용은 낙타가 바느질용 바늘의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2절의 부자청년이 '자신의 많은 소유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3) 27절, '모든 것을 버리고'가 '하나님이 함께 하면 모든 것이'(with God,26절) 가능하고, '사람들과 함께 하면
이것이'(with men,26절) 불가능하다.에서의 with God와 with men의 정확한 한글해석과 번역으로 원래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살펴야 합니다.
(with God : 하나님께는->'하나님과 함께 하면' , with men : 사람들에게는->'사람들과 함께 하면' )
4) 26절,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27절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전 답변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입니다.
이런 상황논점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여, 후대에 성경기록을 대하는 독자들이 오해 아닌 오해를 지금까지 해 온 것입니다.
이제 지금부터 마19:22-27절에 나타난 성경기록에 의한 정확한 문맥을 통해 함께 기록이 보여주는 진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22절) 그 청년이 많은 소유를 가졌으므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절)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리라.
24절)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매
25절) 그분의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심히 놀라며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 하거늘
26절)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
('But Jesus beheld [them], and said unto them,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마19:26)
* With men(사람들과 함께면)과 With God(하나님과 함께면)에 대한 해석과 번역오해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결론부분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27절)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매
마19:16에서 어떤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19:21절에서 부자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마19:22절부터 부자청년의 반응이 시작됩니다.
1) 22절, 부자청년은 자신이 많은 소유를 가졌으므로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근심하며 (뒤돌아) 가버립니다.
2) 23절, 그때에(=부자청년이 뒷모습을 보이며 가는 때에)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자청년이
'자신의 많은 소유'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무릎꿇고 경배하며 회심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부자가 이렇듯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려움을 실감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3) 24절, 그런데 23절의 말을 제자들이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하자. 다시 힘주어 말하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easier)'라고 거듭 말씀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4) 25절,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바늘귀라는 야간 쪽문을 지나가는 힘든 낙타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연상기억과 활용법을 알아차리자 마자 다음과 같이 되물어 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몇명이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잠깐!!
여기서 '바늘귀'(=the eye of a needle)라 불리던 쪽문에 대한 [실생활속 풍속이야기]에 대한 참고가 될 자료를 하나 먼저 좀 살펴 보고 가겠습니다.
참고로, 한가지 중요한 거는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사람들의 현실속의 생활이야기를 1:1로 직접 빛대어서 뽑아내어 제자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인용한 '비유'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익숙한 이스라엘의 실제 생활풍습을 통해서 이야기를 늘 쉽게 풀어 주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들의 대부분은 거의 이스라엘의 생활풍습을 벗어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이셨습니다.
최근의 영어를 사용하는 저술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양의 도시들에는 우리가 '황소의 눈'이라고 부르는 창문이 있듯이 입구는 커다란데 문이 매우 낮고 적어 은유적으로 '바늘구멍'이라고 불리는 문들이 있다.
이 문들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 통과할 수 없었고 짐을 지고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짐을 실은 낙타가 이 문을 통과해야 할 때는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은 채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실생활속 풍속이야기]와 관련하여 '어제'라는 책을 쓴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더프 고든(Duff Gordon)은
'나는 낙타 한 마리가 바늘구멍(=바늘귀)이라고 일컬어지는 담의 아치형으로 생긴 낮은 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았다.
낙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기어서 통과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Bible Animals, by the Rev. J. G. Wood, p. 243)
출처:하단의 참고자료2 ('이스라엘 생활풍속'관련 전문연구서적의 일부자료)
25절 기록을 통해서,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위의 [실생활속 풍속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22절에서 부자청년이 '자신의 많은 소유를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로 떠나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이것(=this)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라면',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이것'(=this)이라 함은 '낙타가 실제의 바느질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잘 이해하시는 것이 오늘 글의 핵심내용이요, 뼈대입니다.
22절에서 보셨듯이 부자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많은 소유)를 버리거나 내려놓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임을
27절에서 제자들의 고백('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과 같은 동일한 상황인식점을 통해서 '이것(=this)'이 무엇이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의 <실체와 그 대상>을 생각하면서, '물리적으로 바늘질 바늘구멍으써의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지금 여러분은 '본문에 대한 오해'를 여전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19장 22절과 27절을 보시면 부자와 제자들 모두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가 '<불가능(=impossible)과 가능(=possible)에 대한 정확한 실체요 대상>'입니다.
마19:26절에서 주시는 주님의 주된 메세지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사람들과 함께 라면(=With men) 불가능한 것(=impossible)이나,
하나님과 함께 라면(=with God)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가능함(=possible)을 실생활의 <낙타와 바늘귀 쪽문>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제자들에게 생생하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19:26절의 영어킹제임스성경의 with men과 with God를 한글흠정역성경에서 '사람들에게는'과 '하나님에게는'
이라고 번역한 것은 영문법과 문맥의 용례상으로 볼 때, '사람들과 함께 라면'과 '하나님과 함께 라면'이라고 보다 뜻을
좀더 자세히 해석하고 번역해서 독자들의 더 나은 이해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글로 설명한 것처럼, 본래의 예수님의 메세지에 대한 문맥의도를 독자들이 더 정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사람들과 함께 할때 불가능하게 보이던 일들(부자에게 불가능했지만 제자들 자신들에게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는 '모든것을 버리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도 가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19장에 나오는 '낙타와 바늘' 비유의 전체 에 대한 명확한 문맥적 내용과 진술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어렵다.'라고도 하고, 24절에서는 '...보다 쉬우니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만일, 그동안 과거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과 설교현장에서의 강론들처럼 낙타가 지나간 것이 실제 '바느질용 바늘귀'였고,
실제 <'바늘귀'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에서 '쉽다'라 하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했어야만 앞뒤의 논리전개가 맞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6:24절('하나님과 맘몬'의 선택)과 마7:13-14절('좁은 문'의 선택)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성경신자들에게 그렇게 적용되어져 왔던 것을 저나 여러분들께서는 너무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참으로 많은 성경신자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With God)
사람의 눈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한 일들로 체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있게 알아가면서 살아갑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그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마6:24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주인을 미워하고 다른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한 주인을
떠받들고 다른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맘몬(mammon)'이란 '재물의 신'을 말합니다.
마7:13-14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이후의 내용들은 꼭 함께 필독해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필독)아래의 자료글을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의 '바늘귀'문에 대한 풍습을 더 정확히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1
이 글을 정리하면서 독자들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해,
아래의 글내용들중 영어원문에 대해 제가 번역한 <한글번역>부분은 '파란색'글씨로 제가 영어원문의 사이사이에 삽입하였습니다.
내용이 많은 관계로 제시된 영어성경구절에 대한 번역은 각자의 성경을 참고하시되, 가능하시다면 한글흠정역성경(=영어KingJames성경번역본)으로 읽어보시면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The Eye Of A Needle (=바늘귀,바늘눈)
Matthew 19:16-26
16 Now behold, one came and said to Him,
“Good Teacher, what good thing shall I do that I may have eternal life?”
17 So He said to him, “Why do you call Me good?
No one is good but One, that is, God.
But if you want to enter into life, keep the commandments.”
18 He said to Him, “Which ones?”
Jesus said, “‘You shall not murder,’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You shall not steal,’
‘You shall not bear false witness,’
19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an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0 The young man said to Him,
“All these things I have kept from my youth.
What do I still lack?”
21 Jesus said to him, “If you want to be perfect,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follow Me.”
22 But when the young man heard that saying,
he went away sorrowful, for he had great possessions.
23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Assuredly, I say to you that it is hard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24 And again I say 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25 When His disciples heard it, they were greatly astonished, saying,
“Who then can be saved?”
26 But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to them,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What did Jesus mean when He shared about a camel going through the eye of a needle?
바늘귀를 지나가는 낙타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던 때에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Is it the physical eye of a sewing needle? Or is it something else?
바느질용 바늘의 물리적인 눈(=바늘귀)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다른 바늘귀)입니까.?
In ancient times, some city gates were constructed with a small door installed upon a larger door.
고대에는 몇몇 도시의 출입문들은 작은문들이 큰 문위에 설치되어지는 방법으로 건축되어 졌습니다.
The larger door of this city gate would be opened in the day but kept closed at night.
이런 도시출입문의 큰 문은 낮동안에는 열려져 있었으며 밤에는 계속 닫혀져 있었습니다.
The little door would be opened during the night.
그 작은문은 밤동안에는 열려져 있었습니다.
This small door was so designed for security reasons so that the enemies would not ride easily into the city
on their camels or horses in the night to attack the people living inside.
이 작은 문은 적군들이 성안에 사는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밤사이에 자기들의 낙타들이나 말들을 타고 성안으로 쉽게 쳐들어
달려오지 못하도록 보안상의 이유들의 목적으로 특별히 설계되었습니다.
The little door of the gate was called the eye of a needle.
그 출입문의 작은 문을 '바늘의 눈'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참고로, 'the eye of a needle'은 영어킹제임스성경 마19:24절로써, 이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실제 비상구문을 나타낸다는 뜻으로써 정확히 일치하는 표현입니다.
단지 한국적인 정서와 한글용례 그리고 한국인의 바른 이해를 고려하여 '바늘귀'라고 번역하였을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It was used for people to enter the city after the main door was closed at night.
그것(=바늘귀문)은 주된 문(=큰문)이 밤에 닫히고 난 뒤에 사람들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되어 졌습니다.
A man had to first unload his camel of all that it was carrying, and then carefully led his camel through this small door.
(이때) 사람은 먼저 낙타의 등에 올려져 운반되어진 모든 짐들을 낙타에서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낙타주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낙타가 이 작은 문을 통과할수 있도록 잡아 끌어 줘야 했습니다.
It was a slow and difficult task. However, it was not an impossible thing to do.
그것은 천천히 진행되어지는 어려운 작업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기에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였습니다.
Hard to enter but not impossible. A stubborn and proud camel would not enter in.
들어가기에 힘들었다는 것이지 불가능했다는 것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집스러우면서 거드름 피워대는 낙타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But if it obeyed its master and stooped down humbly after letting go of all its burdens, it might be able to enter the small door eventually.
그러나 만일 낙타가 자신의 주인의 말에 복종하고 자기가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버린 뒤에 겸손히 웅크린 자세로 자세를 납작 숙인다면,
그 낙타는 종국에는 그 작은 문을 들어 갈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To refute all claims that these types of gates do not exist in Israel, below is an old black and white photo of such a gate in Nazareth.
이스라엘에는 이런 종류의 출입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간의) 모든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사렛에 있는
그런 출입구에 대한 오래된 흑백사진이 아래에 있습니다.
These small doors are often not named simply because it is only customarily to name the larger gates and not their small doors.
이들 작은 문들은, 단지 전통적으로만 볼 때 더 큰 문들이라고 이름지어지지 않으면서 그문들의 작은 문들이 아니기에
가끔은 단순하게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However there were people who nicknamed or called the small doors as needle gates.
그러나 '별명'으로 부르거나 그 작은 문들을 '바늘문(needle gate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The camel is one of the largest animals in Israel. It is often loaded with all kinds of material goods worth lots of money.
낙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동물들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종종 많은 돈의 가치가 있는 모든 온갖 종류의 유형의 재화들이 실어지게 됩니다.
Jesus made this reference to the eye of a needle in His response to a rich young ruler who had asked Him
what he needed to do in order to inherit eternal life.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게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었던 부유한 젊은 통치자에
대한 답변으로 바늘의 눈(=바늘귀, the eye of a needle, 마19:24) 을 '참조언급'하신 것입니다.
Jesus replied that he should keep the commandments. And the young man was delighted to tell Jesus that he had done so.
예수님 그 (=부유한 젊은 통치자)에게 계명들을 지켜야 된다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사람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다고 기쁘게 말했습니다.
Jesus then gave him a difficult and high calling, “If you want to be perfect, go, sell your possessions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Then come and follow Me.”
예수님은 그때에 그에게 어렵고 고귀한 부름을 주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 지기를 원하거든 가서 네 모든 소유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가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나서 와서 나를 따르라."
The young man became sad as he was unwilling to do what Jesus had told him to do. He went away sorrowful, for he had great possessions.
그 젊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라로 말했던 것을 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애통해 하면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Jesus did not despise or dislike the young ruler for being wealthy having great possessions and goods.
예수님은 큰 재산들과 재화들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사람이였다는 이유로 인해 그 젊은 통치자를 경멸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셨습니다.
But Jesus was testing his heart like God tested Abraham’s heart whether he would sacrifice Isaac or not.
Was the rich man willing to unload his material goods? Was he able to humble himself, repent and be saved?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물로 드리는지, 드리지 않는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테스트하신 것처럼 그의 마음(=부자청년의 마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유형의 재화들을 내려놓을 의사가 있었나요?
자신을 겸허히 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수 있었나요?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is rich young ruler needed to first disentangle himself from his worldly affairs
and wealth just like a camel needed to unload all the material goods off its back in order to get through the eye of a needle.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이 부유한 젊은 통치자는 마치 바늘귀('문'의 이름)를 통과하기 위해서 낙타가 자기의 등에서
유형의 모든 재화들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부자 자신의 세속적인 것들과 부(富)로 부터 매여엉켜있던 자신을 먼저 풀어 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Unfortunately, the young man chose not to. He was unwilling to unload his worldly possessions
as he had so much. He was unable to humble himself, bow down to God and enter the narrow gate of heaven.
불행하게도, 그 젏은 사람은 그러지 않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세속적인 소유물들을 내려놓을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스스로를 겸손히 준비시킬 수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할 수도 그리고 하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Matthew 7:13-14 (마태복음7장13-14절)
Enter by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way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there are many who go in by it.
Because narrow is the gate and difficult is the way which leads to life,
and there are few who find it.
Jesus had given the rich young man an open door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the rich man simply
missed out the best divine exchange of all times.
예수님은 그 부유한 젊은 사람에게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열린 문을 주셨습다. 그러나 그 부자는 (자신의) 모든 시간에 대한 가장 좋고도 신성한 교환물을 단순하게 놓쳐 버렸습니다.
Believing that he was rich, the young man was in fact very poor in the sight of God. Was he getting hold of
his money or was his money getting hold of him? So full of himself, he was puffed up with youthful pride and
arrogance.
자기가 부자였다고 믿는다면 그 젊은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사실상 아주 가난한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그의 돈을 쥐고 있나요 아니면 그의 돈이 그 사람을 쥐고 있나요?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가득한 상태로, 그는 젊은 청춘의 자부심과 거만으로 우쭐대었던 것이다.
He was unable to decrease so that Christ would increase in his life! His past and present accomplishments
deterred him from pressing on to his future and winning the prize of the high calling of God in Christ Jesus.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에서 커질수 있도록 자신을 작아지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과거와 현재의 업적들로 하여금 그는 자신의 미래로 전력하여 방향을 설정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받지 못하게 되게 된 것입니다.
Let’s take a look at another equally proud and arrogant person named Saul of Tarsus. He was later named Paul,
an apostle and a servant of God. Thus,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God.
Even the young, rich and proud are able to enter the kingdom of God only if they are willing to let go of
their earthly burdens, humble themselves and bow down to God!
다소의 사울이라고 이름 불리었던 또 다른 예로의 똑 같이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의 사도요 종인 바울이라고 이름 불리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니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 젊고 부유하면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세상적인 짐들을 내던지고 자신들을
스스로 겸손하게 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려 절할 의사가 있기만 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Here is the personal testimony of Paul:
여기 바울의 개인적인 증언을 있습니다.
Philippians 3 (빌립보서 3장)
1 Finally, my brethren, rejoice in the Lord.
For me 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is not tedious, but for you it is safe.
2 Beware of dogs, beware of evil workers, beware of the mutilation!
3 For we are the circumcision, who worship God in the Spirit,
rejoice in Christ Jesus, and have no confidence in the flesh,
4 though I also might have confidence in the flesh.
If anyone else thinks he may have confidence in the flesh, I more so:
5 circumcised the eighth day, of the stock of Israel, of the tribe of Benjamin,
a Hebrew of the Hebrews; concerning the law, a Pharisee;
6 concerning zeal, persecuting the church;
concerning the righteousness which is in the law, blameless.
7 But what things were gain to me, these I have counted loss for Christ.
8 Yet indeed I also count all things loss for the excellence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9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my own righteousness, which i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is from God by faith;
10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ormed to His death,
11 if, by any means,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12 Not that I have already attained, or am already perfected;
but I press on, that I may lay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has also laid hold of me.
13 Brethren, I do not count myself to have apprehended;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those things which are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those things which are ahead,
14 I press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15 Therefore let us, as many as are mature, have this mind;
and if in anything you think otherwise, God will reveal even this to you.
16 Nevertheless, to the degree that we have already attained,
let us walk by the same rule, let us be of the same mind.
17 Brethren, join in following my example,
and note those who so walk, as you have us for a pattern.
18 For many walk, of whom I have told you often,
and now tell you even weeping, that they are the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19 whose end is destruction, whose god is their belly,
and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who set their mind on earthly things.
20 For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from which we also eagerly wait for the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21 who will transform our lowly body that it may be conformed to His glorious body,
according to the working by which He is able even to subdue all things to Himself.
Source:
http://en.wikipedia.org/wiki/Eye_of_a_needle
Written on 27 May 2013
출처 : http://www.thejoshlink.com/article290.htm
참고자료2 ('이스라엘 생활풍속'관련 전문연구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