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소녀가 가출하기 직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떼어내 자기얼굴만을 오려내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따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 집엔 오려내고 자시고 할 만큼 그렇게 커다란 가족사진도 없으니까.
몇 년 전 오빠 결혼식 날 그 비슷한 걸 찍기는 했다. 하지만 확대해주겠다는 사진관측의 호의를 아버지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맸던 자신의 넥타이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표면적인 이류였으나, 아마도 '세상에 거저는 없다'는 투철한 세계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묘한 바가지를 씌울 요량이 아니라면 왜 굳이 특별한 친절을 베풀겠느냐는 것이 아버지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용서된다면, 나의 아버지는, 지극히 까다로운 데다 의심 많은 인간형이었다.
그런 남자와 수십년째 살고 있는 여자, 즉 나의 엄마가 낙천적이며 털털하던 본래의 성정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 앉았음에도, 아버지는 국이 싱겁네, 깍두기가 덜 익었네, 타박을 해댔다. 엄마는 다분히 방어적이며 수세적인 태도로 대응했다. 입으론 작게 꿍얼꿍얼하면서 어느새 엉덩이를 일으켜 소금을 꺼내오는 식이었다. 새 언니는 묵묵히 지호의 입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고, 오빠는 슬금슬금 새언니 눈치를 살피면서 이따금 실없는 농담을 던져 죄중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어릴 땐 우리 가족이 부끄러웠었다. 이기적이고 쌀쌀맞은 아버지, 잔소리 많고 감정기복 심한 어머니, 경박하고 뻔질대는 오라버니는 드라마뿐 아니라 어떤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참을 만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실제론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홈드라마 속에 사는 가족들도 카메라가 멈추었을 땐, 환멸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흘겨볼 게 틀림없었다.
손사래를 쳤는데도 엄마는 무거운 쇼빙백을 강제로 내 품에 안겼다. 밑반찬을 담은 밀폐용기들, 한 무더기의 일회용 홍삼 팩들이 가득했다. 압구정동 한복판까지 동행하기에는 참으로 난감한 품목들이었다. 재인이 선택한 레스토랑은 새로 생긴 스시&롤 전문점이다. 어쩌된 영문인지 그녀는 홀로 앉아 있었다. "왜 혼자야?" "유희는 좀 늦는대, 차 막힌다고," "아니 유희말고. 그 분은?" "어엉, 오빠? 갑자기 병원 들어갔어. 이머전시 콜이 와서."
또 시작이다. 대화 중에 난데없이 혓바닥을 굴리며 영어단어를 섞어 쓰는 건 재인의 고질병이다. 여고시절 영어시험시간에 무조건 답안지 3번을 좌르륵 찍고는 일찌감치 엎어져 자던 주제에! 피차의 과거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이는 이래서 위험한가 보다. 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덕대는 건, '잘난 척 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 안다'는 오만한 자세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도착하자마자 유희는 재인의 심기를 벅벅 긁었다. "딴 약속 다 취소하고 나왔는데 이게 뭐야? 설마 평소에 너한테도 이렇게 하니?" 재인은 연어크림치즈 롤이 아니라 무당벌레라도 씹고 있는 표정이다. 내가 얼른 수습에 나서야 했다. "바빠서 그렇겠지. 암튼 너 결혼준비는 잘 돼가는 거지?"
"낫 배드." 어휴, 저 놈의 혀를 확 그냥. 왠지 재인이 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으므로 나도 그만 입을 닫았다.
"은수 넌 어때, 요즘 연애전선이?" 유희가 엉뚱한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모처럼 무난한 공통 화제를 찾았다는 듯 재인도 호시김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응, 사실..." 머뭇머뭇 말을 꺼냈지만, 태오에 관해 고백할 용기가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남자를 한 명 소개 받긴 했는데." 나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김영수씨 얘기를 늘어놓았다. 저녁식사 권유를 거절했더니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약속장소까지 태워다 주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스스로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