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6년간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끝났지만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누리기에는 정치나 경제, 국가방위력이 너무도 힘들었던 시기였던 1947년 음력 10월17일 나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객지생활 중에 일년간 직업없이 방황하시던 중 그 해 서울극장에 취직이 되셔서 조금 기반이 잡히기 시작할 무렵 어머니께서 마차를 타고 가시다가 떨어지셔서 중상을 당하셨으며 어머니께서 입원하셔서 쾌차(快差)하시기도 전에 6개월 후에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세상에 나오자 마자 곧 빈사(瀕死)상태가 되었으며 사흘 낮밤을 아이가 깨어나지 않으니 살 가망이 없다 하고 묘지에 묻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까스로 깨어나서 어렵게 삶의 태동을 하였다. 나는 우리집 오남매 중 막내였다.
1950년 설상가상으로 6.25동란이 발생하여 피란하려 하였으나 전쟁상황이 위급하여 적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절단하였기에 피란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대구시내에서 정착하려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바람앞에 등불처럼 쇠잔하였던 내 모양이 안타까워 차마 도시에 살지 못하고 시골지역인 경산 백천동 샘골이라는 동네에서 동리사람의 헛간을 빌려 거주하게 되었다. 어머님과 둘째누님은 읍내 훼나무거리에서 노점을 보실 때 아버지께서는 이발을 하며 꺼져가는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개구리,뱀, 억머구리를 잡아오라 하여 구워 먹이며 내 나이 6살 될 때에 놀랍게도 걸음마를 시작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였다.
유년시절에 유난히도 키가 작고 약했던 나는 악동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았지만 인내심이 강했으며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전교에서 “꼬마천재”란 별명이 붙을 만큼 학업성적이 우수할 때도 있었다. 취학전에 공부를 가르쳐 준 봉자누님 덕분이었다.
중학교 시절 경산농예기술학교 2학년이 되던해 최전 선생님이 지도하시는 문예반에 소속되었다. 「10대의 자취」란 창작글을 영남일보 신춘학생문단에 투고하여 그 해 1월 한달간 일요일마다 신문지상에 게재되었다. 내성적이던 내가 글만 쓰니 사회 융통성이 결여될 가능성을 염려한 집안의 반대로 그동안 습작한 작품들을 폐기하고 20대가 되자 우체국 기능직공채로 27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나는 장구한 세월을 우체국 공직생활에 몸 담아 생활하면서 인생의 참된 인내를 배우게 되었다. 업무실적이 우수하여 예우를 받은 일도 많았지만 150 센티의 왜소한 외모 때문에 무시당하여 처절한 열등감을 겪을 때도 있었다. 퇴직할 무렵 우체국 고객의 권유로 칠곡문학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고 1996년에는 칠곡문화원에서 실시한 칠곡문예대학 제1기를 수료하여 시랑회(詩瑯會)회장직을 맡았다 1998년과 1999년은 문학의 행보와 발전이 상승하던 나의 해였다. 공우시인 문학상으로 시「분재감상」이 당선되었고 이어서 문학세계신인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또 전국공무원문예대전에 「낙동강」을 장려상으로 입상하였다. 2004년과 200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칠곡지부 3대 지부장직을 수행 하며 군청에서 주최한 아카시아벌꿀축제 문학의밤을 주관하였고 본회의 연례행사인〈낙동강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주민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그리고 한국문인협회 칠곡지부의 초대고문이시며 문단의 큰별이신 고(故) 구상 선생님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구상문학관이 2002년 10월4일 개관되었기에 칠곡군청 기획실에 근무하시는 백종성 시인의 도움으로 『구상예술제』를 한국문화예술진흥청에서 인가받아 그 지원금을 잘 사용하여 2004년과 2005년 가을에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구상예술제는 문학 강연을 통한 문화의식 고조 및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겸한 복합 예술을 구현하였고 시낭송 및 암송 대회를 음악 예술인들과 함께 실시하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와 음악의 만남을 추구하며,초·중·고등학생 및 일반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종합 예술 문화 창출의 성격을 띤 축제로 승화시켰다.. 본회 임원들과 함께 초·중·고교생의 백일장과 미술 대회의 개최를 위해서 칠곡군내 학교들을 순방하기도 했는데 이를 계기로 학교와 문학인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으며 예측할 수 없는 경제불황으로 힘든 때에 문학단체의 운영방식과 체제를 몸에 익히면서 봉사의 참 의미를 터득하기도 했다. 2005년 8월 26일 서울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하였고 그 이듬해 나는 지역정서에 유익한 행사를 활성화 하고픈 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어, 본회 사무국장과 함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문예기금 신청을 했다. 6.25동란의 최후 보루지였던 왜관에서의《낙동강문화축제》개최와 왜관 낙동강을 소재로 강 연작시를 쓰시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제200대 시인의 반열에 오른 고(故) 구상 시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구상예술제》개최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금신청은 아깝게 탈락되었다.
내가 공무원 재직시 제2회 전국공무원문예대전에 입선된 졸시 「낙동강」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왜구의 수난을 입었던 구왜관의 백포산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칠곡군약목면 관호리 【구왜관】에서 지금의 【왜관】으로 지역이 옮겨졌던 왜관의 근대역사와, 다시 6.25동란으로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의 흐름을 요약한 칠곡지역의 상징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왜관(倭館)이라는 글자가 일본나라 왜(倭)자와 집 관(館)자를 쓰고 있으니 일반주민들이 왜관지명으로 인해 왜관향토사를 오해할 소지가 있는지라 정확한 역사적 유래를 주지하기에 고심하기도 했다. 즉 왜관은 왜병이 주둔했기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일본과 교역하면서 수로의 중심지인 낙동강 연안 여러곳에 중로숙소를 설치했는데 그곳(舊 倭館)이 하나의 지명으로 변해서 전래되었다는 점이다.
2009년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대전『디지털칠곡문화대전』텍스트데이터 제작사업에 38항목의 원고를 의뢰받아서 집필하였다. 2011년에는 칠곡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첫댓글 그랬군요 석류씨 요즘 자서전 쓰시나요 소식도 없더니 지난역사가 빼곡히 적힌 글을 오늘에서야 봤네 지극히 친구의 정서는 남달리 알고 있지만 이렇게 상세한글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공무원 문화 대전에서 상 받은 글 좀 가지고오셔서 보여주세요...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