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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대왕의 對唐 和戰 양면 작전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당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내게 한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唐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會盟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왜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백촌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精騎兵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北을 치자 任存城 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城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杜大夫가 말하기를, '勅旨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인덕 원년에 (당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을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당은 망해버린 백제를 唐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敗者와 勝者를 같이 취급하는 唐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蕃漢의 모든 군사가 蛇水에 총집합하니 南建(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의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성중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당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빼앗아 갖고 있던 비열성을 당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당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계 말씀드리시오>
671년 백제땅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은 문무왕은 겨울엔 당의 조운선 70여척을 공격하여 100여명의 장병들을 사로잡았다. 672년 당군은 4만의 병력으로 평양성에 와서 주둔하면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당군과 일진일퇴의 격적을 벌였다. 한편 문무왕은 포로가 된 당의 장수들을 귀환시켜주면서 사신을 보내어 당의 고종에게 사죄하였다. 겸하여 은, 구리, 바늘, 우황, 금, 포목을 바치기도 했다. 和戰 양면을 구사한 것이다. 신라는, 당의 체면이 결정적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한반도의 전투에서는 이겨야 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문무왕의 반박문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對唐 결전을 준비해간다. 말과 글을 중시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민간출신 정치인들은 항상 개혁, 민주화, 진보, 부패척결, 2만불 시대, 동북아 중심국가, 자주국방 등 좋은 말을 앞세우고 행동 대신 그 좋은 말로 때우지만, 군사와 외교전략의 천재인 문무왕과 김유신은 은인자중하면서 입체적 대응을 해나갔다. 우리 민족사상 이 정도의 깊이와 넓이의 자주국방 자주외교는, 1953년 李承晩이 휴전을 앞두고 미국을 붙들고 늘어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만들어낸 사건이 있을 뿐이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劍牟岑(검모잠)이 遺民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숫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당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성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大唐총관 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귀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天命을 어기고, 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에 대한 긴 答書의 서두에 문무왕은 唐이 약속을 어겼음을 지적해두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당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왕(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당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당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 일만명과 신라 명 7천명을 두어 지키기 하였는데 賊臣 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의 漢兵으로 하여금 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일천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兵馬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周留城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府城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 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唐將 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명문장가 强首가 썼다는 설이 있다. 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여진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여졌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 의도는 분명했다.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당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羅唐은 공동의 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敵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당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당은 또 문무왕을 鷄林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당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 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김유신, 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당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와 만주의 삼국을 당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평화를 선택한 신라 지도부는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이 [答薛仁貴書]인 것이다.
문무왕 碑文의 미스터리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金法敏, 즉 文武王의 陵碑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正祖 때인 1796년에도 陵碑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拓本(탁본)은 凊의 劉喜海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있다.
이 비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史積,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능)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0(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투후 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투후 祭天之胤傳七葉」이다. 투후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霍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의 아들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 김일제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인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의 조상은 匈奴人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음이 확실하다.
김일제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져 있고 서안에는 김일제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昆邪王과 休屠王이 다스리던 곳은 지금의 甘肅省의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이후 어느 해에 霍去病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사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사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흉노어로 여인을 뜻하는 말. 金閼智의 閼智도 같은 말인데 뜻은 金이다. 알지는 알타이를 漢字로 표음한 것인데 알타이란 뜻이 金이다. 알타이=閼智=金=金氏는 알타이 산맥 근방의 흉노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와 아들 김일제, 그의 동생 侖은 霍去病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김일제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金氏 성이 탄생하는 단초이다.
1998년 중국의 언론은 山西省에 살고 있는 金氏들이 흉노족 휴도왕(투후 김일제의 아버지)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투후 김일제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흉노 김일제의 후손들이 들어올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漢武帝는 포로로 끌려온 흉노 소년 김일제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漢武帝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김일제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이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토만 투르크,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외국인은 반역할 근거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 오로지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일제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김일제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라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김일제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김일제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霍去病(당시는 사망)의 동생 霍光과 김일제를 불렀다. 漢書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霍光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霍光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김일제보다 못합니다』
김일제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霍光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詔書(조서)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보니 한무제는 김일제를 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霍光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농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투후(투는 김일제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왕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직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김일제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투후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김일제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김일제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투후의 印綬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霍光과 김일제는 매우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김일제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한편 霍光은 한무제를 이은 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霍光은 소제가 죽자 다음 황제로 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宣帝는 霍光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宣帝 즉위 6년에 죽었다.
당시 선제의 황후는 霍光의 딸이었다. 霍光이 죽자 이제 그의 非行이 터져나왔다. 霍光의 아내가 선제의 첫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匈奴人 김일제의 동생 아들 金安上은 여전히 宣帝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金安上은 큰 아버지의 친구였던 霍光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霍光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버렸다. 宣帝는 마침내 霍光의 아내 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하는 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일제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匈奴人이므로 漢族 사이에 세력 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덕분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인 출신의 이런 출세는 순전히 그 개인의 능력과 인품 덕분일 것이다.
김일제 후손의 운명은 王莽(왕망)과의 인연으로 急轉(급전)한다.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김일제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왕망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專橫(전횡)을 하다가 서기 8년에 漢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김일제 家門은 득세한다.
왕망의 新은 그러나 15년만에 망했다. 왕망 일가는 물론 김일제 가문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王莽 시대의 五銖錢(오수전)을 들어서 왕망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慕華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前漢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고학, 언어학, 민속학, 인류학, 고미술학 등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큰 흐름이 되고 있다. 신라김씨는 흉노족이라고 문무왕이 1300년 전에 이미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