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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일
12월의 첫날이라 학원에 일이 많아 오늘은 일찍 병원에 못 간다고 새벽에 형한테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에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니 8시30분이고 오전에 신설동에서 들어온 보증금 일부를 대출금 이자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아내에게 주었다. 운동을 가려는데 오늘 낮에 어머니께서 일반실로 가신다는 연락이 와서 반가웠지만 다시 간병인도 불러야 하고 직장암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점심을 하고 학원에 들어가니 어제 면접한 초등부 선생이 사정으로 출강을 못 한다고 연락이 와서 새로 면접을 하면서 일과를 시작했다. 오후 4시에 초등부 1,2교시 수업은 하는 수 없이 내가 들어가 자리를 지켰는데 아내가 초등부 수업을 하는 이유로 낯설지는 않았다. 고등부 수업까지 늦게 마치고 교무실에 앉으니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하였다. 10시에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학원에서 아들이 왔고 내일부터는 기말시험이라며 오늘은 밤을 새워 공부한다고 여러 번 장담을 한다. 안방에서 있다가 밤이 깊어 아들을 격려하려고 나오니 화장실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어 빨리 나오라고 독촉을 하니 노래로 한문 공부를 한다며 더 소리를 높인다. 나도 국어선생으로 한문을 오랫동안 가르쳐 봤지만 천자문도 아니고 화장실서 노래로 준비하다니 아마 고득점은 어려울 것 같다.
2일 일반 병실로 옮긴 어머니를 밤새 형수께서 지키고 있고 나도 걱정이 되어 편하지 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병실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잠도 오지 않을뿐더러 환자들의 기침 같은 소음으로 아침까지 힘들고 긴시간이다. 새벽에 거실에 나오니 오늘부터 시험을 보는 아들은 바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고 반대로 아내는 늦게까지 누워 있어 결국 식사가 늦었다. 허둥지둥 밥을 먹고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일단 학교로 출발하여 아들을 내려주면서 집중하여 시험 잘 보라고 등을 두드려 격려했다. 종로를 경유하여 병원에 도착하니 출근하는 형수가 내려와 곧장 신내동으로 태우고 갔더니 김장을 했다고 차에 김치 한 통을 실어 준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방배동으로 차를 몰아 영식이네 아파트에 트렁크에 있는 20킬로 쌀을 두 개 내려주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형수한테는 김치를 얻고 영식이에게는 쌀을 주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서로가 배려하는 따뜻함이 있는 아침이었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2시에 병원을 나와 학원으로 출발했고 중간에 내가 평소에 잘 다니는 성북동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으로 땀을 흘리며 김치찌개를 사 먹었다. 추운 날씨에 지하철을 탄다는 아내를 안국역까지 가서 내려주고 다시 돌아서 학원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강의를 하며 저녁을 보내고 집으로 오는 중에 고향에서 쌀이 온 것처럼 반갑고 고맙다는 영식이 전화를 받았다. 친구의 성의나 관심에 비하면 이제 시작일 뿐인데 아무튼 서로 간 우정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저녁에는 대견스럽게도 조카 진우가 병원에서 밤을 보낸다는데 할머니의 존재도 부모 못지않게 소중함을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일 중등부 월급이 밀려 현재 강의를 하는 중등부 선생이 장원장을 노동청에 또 고발했다. 내가 운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밀려온 강사료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처리해 가는 중인데 선생들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어제 장원장과 통화를 하여 마무리를 잘 하라고 재촉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표를 맡고 있는 내 입장도 편하지는 않다. 병원에 어린 조카가 어머니를 지키고 있어 빨리 가 보려고 이른 아침에 아들을 태우고 일단 학교로 출발했다. 오늘은 기말고사 국어를 응시하여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소설을 운전을 하면서 설명해 주었는데 집에서 미리 지도하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병원에 9시에 도착하니 조카는 아침에 집에 먼저 들어갔고 대신 형수께서 새벽에 나왔다가 출근을 한다고 나선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어제는 지루해서 오늘은 아예 편안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을 안방으로 여기며 느긋하게 있으니 시간도 잘 가고 여유도 있어 좋았다. 처음 병원을 올 때에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실까 많이 걱정을 했는데 그 사이 수술을 받고 지금은 미음까지 드시어 다행이지만 마지막까지 나는 자식의 도리를 다 할 것이다. 오후 2시까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다가 신설동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학원에 들어가 금전적으로 어려운 장원장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오후를 보냈다. 저녁에 고등부 수업을 마치고 친구 형준이와 약속한 화곡동으로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이동하여 방배동에서 달려온 영식이까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식당을 나와 형준이가 자주 간다는 5인조 악단이 있는 음악홀로 자리를 옮겼는데 거기는 노래를 신청하고 무대에 나와서 직접 부르는 곳이다. 형준이는 맥주와 과일을 주문하고 영식이는 노래를 신청하더니 먼저 한 사람이 계속 박수를 받고 부르자 자기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영식이가 소리를 지른다. 평소에 화를 낸 적이 없고 음치 수준이라 노래도 못 하는 놈이 어인 일인가 깜짝 놀라 밖으로 붙들고 나왔다. 공정한 기회가 필요하다는 둥 횡설수설하는 영식이를 택시로 보내고 늦기도 해서 나도 얼떨결에 그대로 집에 돌아왔다.
4일 어제 밤에 형준이가 맥주도 시키고 과일 안주도 주문한 사이에 영식이가 화를 내어 노래도 못하고 나까지 집에 그냥 왔으니 혼자 있었을 형준이한테 미안하다. 이미 마이크를 잡은 손님이 연속으로 노래를 불러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영식이가 떼를 썼으니 웃음이 나온다. 비가 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말고사 3일 째인 아들을 아내와 병원에 가면서 학교 앞에 내려주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아내에게 자리를 맡기고 나는 피곤하여 바로 집으로 돌아왔고 잠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병원으로 가서 아내를 태우고 왔다. 우리를 포함하여 형의 가족이나 여동생까지 어머니에 대한 정성이 대단한데 힘은 들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오늘이 기억될 것이다. 3시경 학원에 나가니 이번에는 중등수학과 장원장 간의 갈등이 생겼고 내가 중재를 했지만 초중고 강사들이 많다보니 정신이 없다. 사실 갈등이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금전과 연관된 것이고 강사료 잘 주면 훌륭한 원장이고 못 주면 나쁜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재물이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도 있다. 교무실 국어과 자리에 있는 중등부 국어선생은 내가 다닌 대학교 국문과 후배인데 현재 남아있는 교수 이름을 언급하자 나의 실체를 모르고 놀라며 바라본다. 훌륭한 교수들이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고 전통이 오래된 좋은 대학이라고 했더니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집에 11시에 와서 현관문을 열었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일까지 시험인 아들이 공부를 하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하여 소리도 못 내고 식사를 마쳤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이라는데 그보다 더 반갑고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마음으로 응원을 하고 잠이 들었다.
5일 아침 기온이 영하 6도라니 분명히 추운 겨울이 왔다. 오늘이 마지막 시험인 아들을 태우고 끝까지 집중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학교 앞에 내려주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밤을 지킨 형수님을 신내동 집까지 태워다 드리고 병원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주무시고 나도 피곤하여 간이 의자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병실이 6인실이고 더구나 공간이 좁아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하고 병문안 오는 사람이나 의사나 간호사들의 소리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환자로 전락할 것 같은 어수선한 병실의 오전이다. 어머니 점심을 도와드리고 중화동에 위치한 4촌 동생 정환이가 운영하는 학원에 들렀다. 근처에 있는 학원과 동업한다고 하여 걱정이 되어 조언도 할 겸 방문한 것인데 무슨 일이든 함께 투자를 해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긴다. 상대학원 원장까지 만나 학원의 이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동업의 부당함을 언급하였다.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내가 불러 마장동 정석학원을 맡겼고 시간이 지나 그 경험으로 지금의 학원을 운영해 오고 있는 터이다. 경기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하고 오늘은 내가 병원을 지키는 날이라 장안동 정식이 사무실에 들러 함께 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뵈었다. 저녁을 먹으러 병원 앞 아담한 식당으로 친구와 들어가서 식사를 했더니 음식이 맛있고 주인장은 전라도 김제의 솜씨라고 자랑하여 사람조차 반가웠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바람이 쌩쌩 불어 친구를 택시로 보내고 병실로 들어왔다. 어머니 옆에 누워서 보내는 12월의 밤, 새벽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고 어머니의 머리 위에 매달려 밤새 떨어지는 수액과 여러 약품들만 눈에 들어와 어지러울 뿐이었다.
6일 어제 저녁에 추워지더니 오늘은 서울 영하 10도까지 내려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병실 안이라 추위는 느끼지 못하고 새벽에 잠깐 든 잠을 오고 가는 간호사들의 발소리에 깨어 6시에 눈을 떴다. 병실의 시간이 흐르고 1층 로비로 내려와 밖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추위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꽁꽁 묶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7시30분에 어머님 식사가 나오고 아내는 9시30분에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회기역으로 온다는 전화를 한다. 날씨가 너무 추워 회기역으로 차를 몰고 마중을 나가서 기다리는 중에 기름이 떨어져 동부화재 보험에 긴급 유류공급 신청을 했다. 준비성이 부족한 내 탓이 크지만 날씨가 추울 때는 기름뿐 아니라 차에 문제가 많이 생겨 낭패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늘도 영하 10도를 내려가니 고장 차량이 많아 출동 서비스가 거의 1시간이 되어 도착했는데 회기역 남쪽 출구에서 춥고 배고프고 생각지도 않게 고생하며 보냈다. 병원에 아내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시험을 마친 아들이 돌아와 있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면접을 실시 한 뒤에 장원장과 학원 발전을 위해서 토의하고 다음 주 월,화,수 3일 동안은 자신이 제주도에 간다며 여러가지를 부탁한다.
7일 일요일 아침, 일어나니 눈이 펑펑 내린다. 올 들어 내린 눈 중에서 가장 큰 눈이다. 연일 학원과 어머니 간병으로 피곤하여 늦게까지 자려고 했으나 시간이 되니 절로 눈이 떠졌다. 식사를 마치고 TV를 보면서 밖을 보니 아직도 눈발이 날리고 아들은 홍은중 팀과 축구시합을 한다고 준비에 여념이 없다. 누워 있는 시간이 아까워 11시에 안산을 오르니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려 서울시내가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다. 정상을 단숨에 올라 숨을 고르고 중턱 길을 돌아 눈을 머리에 쓰고 1시에 집으로 내려왔다. 아내와 딸이 손수제비를 만들었는데 딸이 반죽한 수제비에 요즈음 음식솜씨가 좋아진 아내가 여러 가지를 넣어 끓여서 맛이 특별하다. 차를 몰고 학원에 가니 중등부, 고등부 선생들이 다음 주 시험을 대비하여 열심히 보충 수업을 하고 있고 나도 시간표를 만들며 일정을 정리하고 보냈다. 영식이는 어제 오후부터 늦은 시간까지 다니며 술을 마시고 오늘은 오후에 일어났다고 전화가 온다. 하는 일이 없으면 편하고 자유스러울 것 같지만 불규칙적인 생활이 되기 쉽고 결과적으로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저녁 7시가 되어 집으로 오는 중에 눈이 펑펑 내려 엉금엉금 차를 운전하여 가까스로 도착했다. 김치찌개로 저녁식사를 마치니 온종일 축구를 했다는 아들이 돌아왔고 미안한지 코만 훌쩍거리며 밥을 먹는다.
8일 일어나니 6시가 조금 지났다. 어제 밤에 눈이 내려 오늘 출근하는 길이 걱정인데 거실에서 보이는 무악재 고개는 아직 컴컴하여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이 내리면 사고 위험이 많아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유로 분명 평소보다는 차량 행렬이 적다. 식사를 마친 후에 아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병원에서 밤을 샌 형수와 교대하기 위하여 아내와 서둘러 이동했다. 병원에서 자고 일어나면 새벽에 간호사들이 움직이고 환자들도 일찍 일어나 6시부터는 시끄러워 잠도 더 못자고 지루한 시간이다. 오늘은 기온이 올랐는지 아침이 되면서 비가 내리고 1층 로비 여기저기를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 당연히 누워서 계시는 것보다 기력이 있어 보였고 12시 점심에 정상인처럼 식사를 잘 하신다. 오후 1시에 병원을 나서 닭곰탕으로 점심을 사 먹고 학원으로 일찍 들어가 교재를 연구하고 장원장이 없는 자리를 지키며 여러 역할을 하였다. 일찍 나온 후배 국어선생은 면접을 할 때 국문과 출신 선배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을 물었는데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형편없다고 여겼지만 요즘은 내가 대선배인지도 모르고 언제나 깍듯이 인사를 하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마친 저녁에 수강료 정산 등 마무리를 하며 나는 아직도 꿈이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다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9일 어제 늦게 영식이 전화가 와서 오늘 형준이랑 정식이랑 광화문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한다. 일주일 전쯤 형준이가 맥주와 안주까지 노래홀에서 주문했는데 노래를 안 시킨다고 화를 내고 나가서 미안했던가 보다. 아침식사하고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 와서 병원에 가려다가 오늘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 6만원씩 4일 동안 간병인을 쓴다하여 체육관에 가서 오랜만에 운동을 했다. 점심을 먹고 병원에 가니 간병인이 말하기를 오늘 아침부터 음식이나 물을 드시면 삼키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뱉어낸다는 이야기를 한다. 의사를 찾아가 이유를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여 나왔는데 나로서는 불안하기만 하다. 무거운 걸음으로 학원에 가서 오늘도 선생들 면담과 수업을 하고 영식이가 부탁한 대로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저녁 8시30분에 종각에서 모이자고 약속을 잡았다. 수업을 마치고 종각역 근처에 나와 쭈꾸미 집에서 6인분 6*7000원과 소주를 마시고 청진동으로 이동하여 수육으로 2차를 했다. 늦은 시간에 정식이의 직장 동료 후배가 합석하여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오늘도 영식이가 비용을 모두 지불하였다. 형준이는 고향친구, 정식이는 대학친구, 영식이는 학원에서 만난 친구로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인데 영식이에게 미안했고 다음에는 내가 자리를 마련하리라 생각했다.
10일 새벽 1시경 광화문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형준이가 나에게 뭔가 쫓기는 기분이라는 문자가 왔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시간도 늦었지만 나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친구들이 술자리를 한다는 것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나와 형준이는 전라도, 영식이는 경상도, 정식이는 충청도 출신들이라 지역적인 차이도 있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더구나 늦게 합석한 정식이의 후배가 너무 무례하여 자리를 빨리 마치고자 했던 것이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병원에 가면서 밤새 간병인의 전화가 없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구토의 정도는 어떤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았다. 오늘도 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의 얼굴을 뵈니 생사의 기로에 계시는 모습이 안쓰럽고 자식으로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원에 돌아와 달력을 보니 벌써 내가 경기학원에서 근무한 지가 40여일이 되었고 이번 달 강사료와 차용액 일부를 합한 780만원 가운데 350만원이 먼저 입금이 되어 있다. 지금이 가장 어려울 때이고 연체된 기존 강사료와 공과금 그리고 차량 기사들의 밀린 임금까지 계산하다보니 늦어지는 것인데 다음 달부터는 금전적인 속도가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제 늦게 들어간 탓으로 강의를 마치고 오늘은 일찍 가서 집에서 식사를 했다. 오늘이 12월 10일이니 내일부터는 중순으로 접어들고 앞으로 20여일 남은 2008년도를 돌이켜보며 시간의 빠름으로 아쉬움이 남는 겨울밤이다.
11일 쌀쌀한 목요일이다. 새벽에 거실에 나오니 출근 차량의 꽁무니 빨간 불빛이 어둠속에 일렬로 줄을 그어 놓고 있다. 병원에 간병인이 있다는 이유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오전에 안산에 올랐다. 언제 와도 친근한 산인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어 오늘도 정상을 거치고 중턱에서 기구운동을 하고 1시경 내려왔다. 점심을 먹고 병원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니 어젯밤과 오늘 아침까지 푸른색 액체를 구토하여 간병인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푸른 액체의 정체에 대하여 장腸운동이 안 되거나 다른 합병증으로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도 어머니의 현실이 심난하고 불안하다. 병원을 나와 임대 문제로 신설동에 도착하니 근처에 있는 식품회사에서 겨울 2개월만 1층에 식품을 보관한다고 선불로 2개월분 260만원을 전달한다. 3시경 학원에 들어가 일과를 정리하고 강의를 하며 저녁을 맞이했지만 어머니의 근황 때문에 가까스로 하루를 보낸 시간이다. 밤 10시에 선생들과 식사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한가한 창경궁 담을 돌아 경복궁을 거쳐 11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12일 며칠 전부터 식사도 못하고 밤에 구토만 하시는 어머님을 오늘 외과담당 과장이 보겠다고 하여 일찍 병원으로 나섰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불안한 마음으로 안국역까지 지하철로 나와서 버스를 갈아타고 8시20분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에 들어서니 의사와 간호사 4명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 있어 여러 가지 소견을 말하고 결론은 이상이 없다며 원래의 요양원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한다. 푸른 액체 때문에 걱정을 한 터인데 퇴원을 하라니 더 이상 치료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지시한 대로 수속을 하고 휠체어로 5분이면 도달하는 요양원으로 퇴원을 했다. 주렁주렁 주사 바늘을 달고 추위에 이불을 덮어쓰고 차도 아니고 휠체어로 이동하는 상황을 지켜보니 우리 어머니의 인생이 이보다 더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요양원에 들어서니 나이가 지긋한 원장이 여기서 잘 간호하면 오히려 병원보다 더 좋아질 수 있다고 위로하고 사전에 계셨던 곳으로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병원비용은 수술과 입원까지 230만원이 나왔는데 전액 내가 부담을 하고 학원으로 돌아가 업무를 보고 저녁까지 강의를 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조용한 거실에 들어서니 왠일인지 식탁에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 놀라서 까닭을 물어보니 컴퓨터만 하는 아들을 나무랬는데 계속 말을 안 들었고 급기야 아빠나 엄마 유전인자를 닮아 그런다면서 막무가내로 대들어 억울해서 그런다고 한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갔지만 엄마한테 대들었다니 내심 괘씸하기만 하다. 애처로운 어머니 때문에 낮에는 내가 울고 버릇없는 아들 때문에 밤에는 아내가 울었다.
13일 연일 술을 마시기도 했고 학원에서의 스트레스도 있어 피곤하다. 어제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긴 어머니는 잘 주무셨는지 구토는 안하셨는지 걱정이 되어 토요일이라 학교에 안 가는 아들과 함께 병원으로 나섰다. 가는 중간에 일이 있어 학원에 잠깐 들렀는데 처음 온 아들은 깨끗한 시설에 놀라고 강의실 구경을 하면서 필요한 중학교 참고서도 몇 권 챙겼다. 병원에 11시에 도착하여 간병인부터 만나보니 밤에는 별일이 없었고 새벽녘에 구토를 조금 했다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병실에 들어가 어머니를 뵈니 나보다도 손자인 경목이를 먼저 맞이하고 반가움으로 여러가지 기억들을 말씀하신다. 휠체어에 모시고 병실 밖으로 나와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도와드렸다. 식사 후 잠을 주무신 어머니께서 1시간이 지나자 활기를 되찾은 사람처럼 일어나셨고 마침 들어온 동생에게 부탁하고 병원을 나왔다. 오는 중에 친구하고 홍제역에서 찜질방 가는 약속이 있다는 아들을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 내려 주고 학원으로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2시30분 일찍 수업을 시작했는데 시험이 끝난 뒤라 결석생이 많아 어렵게 수업을 마쳤고 선생들에게 D.M 발송 주소 컴퓨터 작업을 지시하고 7시에 집으로 출발했다.
14일 엊그제 금요일부터 오늘 일요일까지 아내의 안색이 좋지가 않다. 그저께 책도 안 보고 컴퓨터만 하는 아들을 꾸짖었는데 부모 유전자를 닮아서 그런다고 아들이 대들어 충격으로 눈물을 흘렸고 어제와 일요일인 오늘 아침까지 눈이 부은 상태다. 함께 사는 나도 이런 상황이 유쾌할 리가 없어 새벽에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침식사도 거른 채 안산에 올랐다. 언제나 산에 올라 1시간 2시간을 걷다보면 마음이 밝아오고 근심과 걱정도 사라진다. 기구운동을 하고 내려오면서 이발소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와 대일학원 형문태선생 딸 결혼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시청 근처로 나갔다.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코트도 없이 춘추복 양복만 입고 갔는데 날씨가 워낙 추워서 기도 펴지 못하고 떨기만 하였다. 예식장에서 대일학원 동료들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12월 말경에 송년회 모임을 추진했는데 사람들의 성의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오후에 요양원으로 가서 어머니 뵙고 미리 와 있던 아내와 집으로 오다가 경동시장에 들러 식품을 구입하여 5시에 집에 왔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인데 생사를 넘나드는 어머니의 상황으로 가족이 마음으로만 추모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지 35년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뵌다고 해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이라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다.
15일 어제 일찍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6시가 되었고 검퓨터를 검색하며 일정을 준비하다 보니 오늘도 바쁠 것 같다. 7시20분에 아침식사를 하는데 아들은 밥도 안 먹고 말도 없이 그대로 학교에 나간다. 이번 기말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 짜증이 나고 성적표 보여주기도 두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 수학학원에서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하겠다고 뜻밖의 문자가 왔기 때문이다. 오늘은 잘못했으니 내일은 잘하겠다는 마음과 자세는 좋지만 그 동안 아들은 순간의 어려움만 모면하려는 경향이 있어 말과 다르게 실행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약속을 했으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수하며 반드시 해내는 의지와 집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런 인생이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1시가 지나 병원에 갔더니 밤새 구토도 안 하고 잠도 잘 주무셨다고 어제보다 뚜렷한 의식으로 어머니께서 나를 맞이한다. 기력이 생겨서 오늘 1주일 만에 미음으로 식사를 하시어 다시 살아나는 어머니같아 큰 안도감이 생겼다. 여동생이 와서 병원을 나와 점심을 사 먹고
학원으로 들어가 컴퓨터 작업으로 중등부 수업계획안을 준비했다. 살면서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아들의 학업으로 인하여 집에서도 그렇고 학원에서도 신,구선생들의 부조화로 어색한 분위기라서 불편한 하루였다. 저녁에 중등부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아들같은 학생들이라 잘 가르쳐야 하리라 생각하고 선생들에게도 최선을 당부했다. 집에 11시에 들어왔는데 적적하기만 하고 아침에 말도 인사도 없이 나간 아들은 방안에서 두문불출 꼼짝도 하지 않는다.
16일 잘 자고 눈을 뜨니 새벽 4시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6시에 일어났는데 평소 잠이 많은 아내가 일찍 일어나 거실에 나가 책을 읽고 있다. 7시20분에 아침식사를 마친 아들은 오늘도 뭐가 불만인지 인사도 없이 나가기에 불러서 기말고사 점수가 적힌 꼬리표를 요구했다. 영어는 100점, 수학은 70점으로 국어를 포함한 전과목 평균점수가 83점이다. 중학교는 대부분 80점 정도는 되고 단 몇점으로 석차가 크게 나기 때문에 평균 83점은 중간 성적에 불과하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찜찜한 마음으로 있다가 오늘 김장한다는 중계동 여동생 집에 고춧가루를 전해주고 바로 요양원으로 갔다. 먼저 와 있는 형이 지난 번 카드로 계산한 병원비용이 280만원이 아니라 최종 230만원 나왔다고 하여 병원에 가서 다시 정산을 하고 돌아왔다. 어머니는 편안하며 기력도 있고 말씀도 잘 하시어 기분이 좋은 형과 옛날 시골에서 농사짓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요양원을 나와 신설동에서 3층 임대료를 받고 학원에 와서 어제에 이어 오늘 화,목,토반 중등부 수업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장원장이 수학선생이라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지인의 아들을 얼마 전 개인수업 맡겼는데 제대로 하지를 않아 학부모의 원성이 나에게 와서 황당했고 저녁에는 오늘까지 새학년 O.T를 마친 중등부 선생들과 처음으로 회식을 하고 돌아왔다.
17일 늦게 들어와 잠을 자고 일어나 어제 받은 임대료와 여동생이 준 고춧가루값 6만원을 아내에게 전달했다. 오전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요양원으로 가는 중에 부산에 있는 영식이에게 전화하여 사업에 대하여 물었더니 잘 진행이 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라고 한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여동생이 와 있고 흰 떡가래를 가지고 와서 간병인들과 환자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고 있다. 어머니를 뵙고 어제 과외 문제 건으로 장원장과 신설동에서 보자고 전화를 하였더니 학원근처로 와 달라고 한다. 길 건너 커피숍에 들어가 내 입장을 봐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비싼 과외비 받고 대충 시간을 보내면 어떻하느냐고 화를 냈다. 장원장 입장을 생각하여 배려를 한 나지만 매몰차게 오늘은 목소리 나오는대로 이야기를 했다. 결국은 사과를 받고 과외비를 돌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서로 최선을 다하자고 화해를 했다. 5시에 중등부, 6시30분에는 고등부 수업이 있어 교실로 갔는데 고등부는 수강생이 급격히 줄어 강의실이 휑하다. 1년 중에서 기말고사를 마치는 12월의 수강생 숫자가 가장 저조하고 방학 중에 조금 나아지다가 3월 개학을 하면 다시 채워지는 흐름이지만 어느 사업이든 고민이 없이 술술 잘 풀리는 일은 없다.
18일 어제 늦은 밤 잠을 잘 상황에 아내가 말하기를 요즘 우리 집이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4명이 각각 다른 삶을 산다며 우울해 한다. 술마시고 늦게 오는 남편, 날마다 컴퓨터만 하는 아들, 방안에 들어가 꼼짝도 안하는 딸 서운하고 고민스러울 만하다. 살면서 누구라도 대화가 필요한데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니 나의 무능함이고 내 탓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아침에도 인사도 없이 학교에 가는 아들,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일어서는 딸 모두가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가는 딸을 안아주고 잘 다녀오라고 하니 오히려 인상을 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간다. 오전에 아내가 경기도 마석근처 호평동에서 대학 친구들 모임이 있다기에 차에 태우고 가서 내려주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어머니한테 갔다. 오늘은 말씀도 잘 하시고 기력도 좋아 이렇게만 된다면 퇴원을 시켜 고향으로 모시고 가고 싶을 정도다. 2시경 고려대 근처에서 점심을 사 먹고 학원에 도착하여 열심히 강의를 했다. 강의를 하는 순간은 잡념이 사라져서 좋지만 경기학원의 존폐가 나에게 달려 있어 하루가 마지막이라는 비장함으로 보낸다. 집에 11시경 들어가니 학원에 갔던 아들이 친구들하고 1시간이나 이야기를 했다며 12시가 지나서 오는데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
19일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 아들에게 어제 늦게 온 이유를 물으니 친구를 바래다 주고 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요즘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더라도 아직은 이른 시기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아들을 학교에 태우고 갔다가 다시 돌아와 체육관에 가서 런링 40분하고 벤치프레스를 조금 했다. 점심쯤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학원에 가려고 나서는데 아들과 딸이 돌아오고 아내는 에어컨 환풍기를 실내로 이동한다고 A/S센터에 신청하여 마침 업자가 왔다. 우리 집이 19층이라 처음부터 실외기를 옥상에 두었는데 주민들이 불공평하다고 지적을 하여 어쩔 수 없이 6만원 비용을 주고 실내로 옮기는 것이다. 학원에 도착하여 수업을 하고 저녁에 종로5가 이화예식장에서 중학교 동문 모임을 한다는 영식이 전화가 와서 집으로 오면서 들렀다. 그의 동창들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했는데 우리들 동창에 비하여 직책이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함께 청진동 해장국으로 이동했다. 영식이가 주선한 장소에서 나를 소개하며 박수를 보내고 음식을 권했지만 시끄러운 경상도 사람들 속에서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20일 어제 광화문 청진동 해장국집에 차를 두고 와서 새벽에 택시를 타고 나가서 가지고 왔다. 아침 식사를 하고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가 체육관으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오전에 겨울코트 하나 사려고 아내와 킴스클럽에 갔는데 마음에 차는 것이 없어 고기와 라면만 사 가지고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선릉역 근처로 김성만 딸의 결혼식에 지하철로 갔는데 핸드폰을 두고 나오고 결혼식장도 잘 몰라 한참 애를 먹었다. 축의금을 접수하고 갈비탕으로 식사를 한 뒤에 학원으로 4시에 돌아왔다. 얼마 전에 장원장이 제주도에 갔었는데 거기서 주문한 귤 4박스가 도착하여 1박스를 차에 실어주어 고맙게 받았다. 저녁에 아내의 신사임당 모임에서 송년회를 하고 남편들도 함께하기로 사전에 통보되어 참석하기로 했다. 학원에서 동네에 있는 갈비집으로 7시에 들어가니 아이들까지 25명 정도가 모여 있고 식사와 함께 어른들은 술까지 마셨다. 서로 직장도 다르고 나이도 달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가족같은 분위기로 좋은 자리였고 밖으로 나와 길 건너 노래방으로 이동하여 새벽 2시까지 보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 가족이 송년회라고 모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고마운 시간이었고 새해를 맞이해서는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었으면 한다.
21일 어제는 신사임당 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왔고 모두가 순수함이 있는 선한 사람들이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늦게 식사를 마치고 안산에 11시에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엊그제와 달리 오늘은 기온이 올라 추위가 누그러졌지만 겨울산이라 정상근처 바위에는 물이 하얗게 얼음으로 변하여 있다. 집으로 내려와 아직도 잠을 자는 아들을 깨워 함께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고 식사를 마친 아들은 혜화동에 위치한 과학관에 친구들 6명과 함께 간다고 준비를 한다. 과학관은 일요일에도 문을 열어 두는지 학원으로 가는 길에 아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불통이라 행선지가 궁금해진다. 일요일이라 학원강의는 없어 선생들 강사료만 정산하고 요양원으로 이동하여 어머니와 2시간을 함께 보내다 저녁에 집으로 출발했다. 돌아오면서도 과학관 옆을 지나게 되어 아들을 태우고 올까 연락을 해 보았는데 아직도 불통이고 저녁에 돌아온 아들은 묻는 말에도 아무 소리를 안 한다. 점심에 나가서 하루 종일 과학관에 있었다니 미래에 과학자가 될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밤에 가게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뭐가 기분이 상했는지 가지 않겠다고 하여 내가 내려갔다.
22일 잠은 잘수록 느는 것 같다. 어제 초저녁에 잤는데 날이 새고 아침이 왔어도 또 잠이 쏟아진다. 오늘은 영하 7도까지 내려갔고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이하로 매서운 한파다. 아들은 선생님들이 건강검진 하는 날이라고 11시까지 등교한다고 하여 태우고 갔다가 학교에 내려주고 바로 체육관에 들어가 운동을 했다. 힘은 들어도 땀을 흘리는 시간은 강의할 때와 마찬가지로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 그래서 좋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원에 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딸이 돌아왔는데 조만간 방학은 하겠지만 등교하는 과정에 날이 추워서 힘이 들 것 같다. 학원에 2시에 도착하여 장원장을 만나니 오늘은 혈압기까지 가져다 두고 측정까지 하면서 금전의 압박으로 그만 살든지 학원을 매매하든지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허둥지둥이다. 그 동안의 적자를 많이 줄였는데 밀린 임대료 등 금전적 압박이 심하고 강사들까지 불만이 많아 현재는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다. 조그만 사업이라도 처음 생각한 것보다 보이지 않는 비용 발생이 많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학원같은 경우는 20%정도 살아남고 그 중에서 넉넉하게 수익을 올리는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강사료를 넉넉하게 주면 좋은 학원이고 그렇지 않으면 원장이나 대표가 무슨 말을 해도 힘이 실리지 않는 야박한 현실이다. 수업을 마치고 밤 10시에 밖으로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리고 미끄러운 길을 엉금엉금 운전하며 집에 도착했다.
23일 어제 밤에 눈이 많이 내려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니 눈이 그쳐 있어 그나마 다행이고 오늘 평가고사를 보는 아들을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태우고 갔다. 전국에 있는 중2 학생들이 모두 응시하기 때문에 객관적 실력을 파악할 수 있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보다 중요하니 집중하여 응시하라고 격려를 했다. 오전에 눈 덮인 안산을 올라 하얀 겨울산을 만끽하며 2시간 이상 산 속을 다녔더니 마음도 편하고 정신도 상쾌하고 좋았다. 12시가 지나자 기온이 올라 땀이 맺힌 채 집으로 내려왔고 오후에는 평소처럼 요양원에 갔다가 학원으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요양원에 2시경 도착하여 1층으로 들어서자 오늘이 어른신들 송년의 날이라고 동대문 의경들까지 합세하여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들을 휠체어로 이동을 시키고 있다. 거동도 못하는 사람들, 마치 난민의 행렬같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슬픈 장면이었는데 공연이 시작되고 흥겨운 위안잔치가 이어지면서 그나마 훈훈한 마당으로 변하여 간다. 중증 환자들과 침대에 누운 채 이동한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바로 들어가고 휠체어에 있는 환자 중심으로 공연을 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래와 손 동작을 따라 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신다. 학원에 가기 위하여 요양원을 나오면서 사무실에 들어가 더 편안하고 아늑한 유자원(요양원)을 부탁하고 오늘의 행사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렸다. 저녁에 고등부 수업을 진행하고 방배동으로 가서 영식이와 배에 투자한 3천만원 자금을 정산했는데 원금보다 2백만원이 더 입금되었다. 은행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익이라 친구가 고맙지만 언제까지 사업이 지속될지 알 수는 없고 아무튼 다음 출항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
24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전혀 성탄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겠고 특히나 금년에는 캐롤송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오늘이 아들 방학하는 날이라 7시20분에 학교에 태워다 주고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별 중요한 사항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아내의 통화시간이 1시간을 넘겨 화를 내고 지적을 했다. 시간과 요금 낭비뿐 아니라 밥을 먹는 동안 옆에서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고 어떻게 먹었는지 나도 모를 정도였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기본교양이나 매너를 배우는 것이다. 10시에 집을 나와 학원에 가서 나를 찾아온 대치동 마원장을 만나 강남학원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식사 전에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음료수 1박스와 킹크랩을 가지고 온 영식이도 만났다. 킹크랩은 먹어보지 않아서 어떤 맛인지 모르지만 크리스마스 전야에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먹으라고 친구가 선물로 주는 것이다. 점심을 김치찌개로 사 먹고 학원으로 들어와 원장과 미팅을 하고 합병을 논의해 보려고 옆에 있는 종로 M스쿨 원장을 만났다. 거기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규모가 큰 두 학원이 합하여 임대료라도 줄이면 좋을 것이란 의견을 제시한다. 건물 임대료가 양쪽 모두 수백만 원씩이라 한 번 적자로 돌아서면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워 진다는 사실이다. 원장이라는 타이틀로 겉은 화려하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편할 날이 없는 상황을 나도 학원생활을 오래하여 여기 저기에서 보아온 바이다. 그러나 말이 합병이지 수 억원이나 되는 학원을 원장은 누구로 할 것인지 명의는 누구 앞으로 신고할 것인지 이익과 책임이 동반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개 학원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은 한 사람이 아예 매수를 하는 그것 밖에는 없는데 현재도 답답한 상황에 누가 엄청난 돈을 투자한단 말인가. 동생 정환이도 동업이나 합병을 못하게 했지만 형제도 어려운 일이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부부지간 뿐이다. 밤 10시에 집에 들어와 가족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영식이가 준 킹크랩을 먹어보니 담백하고 좋다. 예수가 태어난 날 그를 추종하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이나 일반인들은 무덤덤하고 나도 일찍 잠이 들었다.
25일 성탄절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 밑의 불빛이 추위 속에 있고 도로는 한산하여 아직도 잠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밤새 전국 교회와 성당에서는 예수 탄생을 축복하고 성탄절 새벽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들한테는 20일 전에 아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축구화를 사 주었는데 딸에게는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어 미안하다. 아침을 먹고 킴스클럽에 가기로 했으니 딸이 좋아하는 예쁜 겨울모자와 장갑 그리고 맛있는 음식도 사 주리라 생각하고 우선 청주에 계시는 장인 장모님께 성탄절 인사로 전화를 올렸다. 11시경 킴스클럽에 도착하여 쇼핑을 하고 딸에게 여러가지를 권했는데 마음에 차는 것이 없다고 아무 것도 구입하지 않는다. 성탄절 점심을 함께 하려고 용구네 집과 통화하니 용구아빠는 선생들과 터키로 여행을 갔다고 하여 남아 있는 식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오후에 퇴계원에 도착하여 처제와 조카들을 태우고 팔당댐 근처 와카리 음식점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와카리라는 음식점이 특이하여 일본집 같지만 전북 부안에 위치한 와가리 마을로 음식도 토속적이라 우리도 해물탕과 들깨수제비 누룽지탕을 먹었다. 서울로 들어와 집으로 오면서 아내와 딸을 교보문고에 내려주고 내일 고향 영덕에 간다는 영식이를 만났다가 집에 돌아오니 성탄절 밤 아들은 일찍 쿨쿨 자고 있다.
26일 영하 8도 서울의 아침기온이다. 어제 일찍 잤는데 눈을 떠도 컨디션이 좋지 않고 기분도 어둡다. 아내는 일찍 일어나 거실에서 보내고 방학을 한 아들은 늦은 시간까지 계속 잠을 잔다. 아침에 밥맛도 없고 으스스하고 계속 우울하기만 한다. 방에 들어가 누워 있어도 편하지 않아 체육관으로 가서 런링부터 기구까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다. 에어로빅 팀들은 망년회를 하는지 떡과 과일을 돌리고 체육관이 시끌벅적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니 방학 중에도 오전에 2시간씩 월,수,금에 학교에 나가서 영어를 10회 배운다는 아들이 돌아온다. 말이 2시간 수업이지 각 45분씩이라 시작하자마자 마칠 것 같은데 추운 날 오고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결코 효율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침에 늦게까지 잠만 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보내야 하고 화,목요일도 수학시간을 정하여 수업을 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나 싶다. 오후에 학원에 나가 장원장과 미팅을 하면서 더 긴축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처리해 가자고 했는데 그만의 급한 사정이 있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외부의 빚까지 많아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이라니 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평소에 경영을 철저히 못한 결과이고 현 시점에서 어떤 대안도 없어 듣는 나도 답답할 노릇이다. 설상가상 일전에 그만 둔 선생이 찾아와 아직 못 받은 강사료를 장원장한테 요구하는데 대책이 있을 리 없고 나중에라도 처리하여 달라고 나에게 일임을 하고 나간다. 녹번동에 사는 고등부 영어선생을 무악재에 내려주고 집에 와서 닭죽으로 저녁을 먹고 한 해를 정리해 보았다. 노량진학원, 인천상가, 신설동임대, 요양원어머니, 성우의죽음, 마라톤풀코스, 영식이의사업, 경기학원강의, 장원장의어려움 등 굴곡의 2008년, 이룩해 놓은 것도 없이 저물어 가는 한 해가 허무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27일 어제는 너무 추웠고 오늘은 날이 좀 풀리나 싶었는데 새벽에 뉴스를 보니 영하 7도라는 자막과 연말 특집을 알리는 광고가 홍수를 이루어 나온다. 아침에 식구들은 어제 먹다 남은 닭죽을 먹고 나는 김을 싸서 양념간장에 먹었다. 여름에는 젓갈이 별미고 겨울에는 남해안이나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김이 제철 음식처럼 맛이 난다. 오전부터 컴퓨터를 하는 아들에게 공부좀 하라고 질책을 하고 아들 때문에 갑갑하다는 아내를 데리고 안산에 올랐다. 아파트에서 10여분을 오르면 돌탑이 여러 개 있는데 균형을 잘 잡아 아름답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몇 년 전 말없이 돌탑을 쌓던 초로의 어른이 떠올랐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무슨 일로 돌탑을 쌓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도 안하여 나도 열심히 돌을 날라 도와준 적이 있었다. 몸에 이상이 왔든 가족과의 이별 상황이든 당시에 얼굴이나 눈빛에 체념한 표정이 역력했는데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사람은 가도 그의 흔적은 오롯이 남아 있다. 중턱을 돌고 기구운동을 하면서 아내에게 운동기구 사용방법을 열심히 가르쳐 주었는데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건성으로 듣는다. 형준이는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연락이 와서 가까스로 생활하는 요즘의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이해를 구했다. 다른 친구들을 통해서 듣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살아가는 형편이 너무 어렵다고 직접 도와 달라고 하니 아무리 친구간이라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에 선배나 어른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금전거래를 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100% 맞는 소리다. 집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고 신설동 임대문제로 갔다가 주말수업을 하러 학원에 들어갔더니 썰렁한 분위기다. 일과를 마치고 영화를 보았다는 아내와 딸을 태우러 교보문고에 갔다가 함께 나와 시청 앞에서 야경을 감상하고 롯데 백화점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외출과 쇼핑을 딸하고 또 했는데도 아무것도 사 주지 못하고 집에 있는 아들에게 줄 먹거리와 내가 사용할 목도리만 구입했으니 미안하고 찜찜한 저녁이었다.
28일 일요일 아침 어제 외출을 많이 한 아들과 딸이 잠을 오래 자서 식사도 늦어졌다. 오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 거실에 있는데 아내와 딸은 독립문 목욕탕에 가고 아들은 컴퓨터 앞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에 가려다가 시간이 아까워 11시경 안산에 올라 정상을 거쳐 내려오면서 바위 중턱에 앉았다.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았던 곳인데 오늘도 여기에 앉으니 시내가 흐릿하게 보이고 일요일의 등산객까지 예전과 다르지 않은 한가한 일요일 모습이다. 1시경 집에 내려왔고 목욕탕에서 돌아온 아내와 딸은 수제비를 만들어 놓았는데 밀가루가 중국산인지 오늘은 맛이 평범하여 조금 먹다가 멈췄다. 오후에 요양원에 가 있다가 마침 도착한 형과 교대를 하고 집에 오니 6시가 되었고 밖은 이미 어두워진 연말의 시간이다. 아들은 10시에 들어오겠다며 방문까지 잠가두고 외출을 하더니 12시가 되어 들어와 행적을 물었더니 놀이터에서 왔다고 한다. 이 추운 날 무엇을 하고 왔을까 궁금했는데 이것도 아들에게는 간섭일지라도 나로서는 관심과 사랑에 비례하는 마음이다.
29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며 월요일을 시작했다. 잠을 많이 자면 시간도 아깝고 허리도 아프고 답답하기도 하다. 민정이네가 보내준 돌산 갓김치가 맛이 있어 청국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어제 12시에 들어온 아들은 여러 가지 궁금한 나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대꾸도 없이 밥을 먹더니 보충수업을 한다고 학교에 간다. 오전에 체육관에 가려고 하는데 영식이가 전화를 하여 11시경 우리 아파트에 온다고 기다리라고 한다. 부지런히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났고 김치 과일 은어 젓갈 등 푸짐한 음식을 고향에서 가져왔다며 전하고 아들에게 5만원 딸에게는 3만원 용돈까지 준다. 모래네 설렁탕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고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영식이와 헤어져 2시에 학원으로 도착했다. 동생 정환이가 찾아와 자신의 학원에 대하여 이전이나 매매를 이야기하여 진지하게 상담을 해 주고 함께 나와 요양원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저녁에 장원장과 미팅을 했는데 하소연하는 것은 역시 금전의 어려움으로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인품도 훌륭하고 학벌도 좋은 장원장이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사업의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금전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 10시에 학원을 나서 집에 돌아와 영식이가 오전에 준 김치를 먹었더니 경상도 음식도 전라도 못지않게 젓갈을 넣어 깊은 맛이 있고 시원하다.
30일 늦게 일어나 신문을 보고 식사를 마쳤다. 아들은 특별수업을 한다고 학교에 나가고 나는 11시경 안산에 올랐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체감온도가 낮아 심호흡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정상을 오르고 기구운동까지 하며 2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니 날아갈 듯하다. 집에 돌아와 미역국으로 점심을 먹고 어머니에게 가면서 마장동 우시장에 들러 엊그제 경상도에서 올라오신 영식이 어머니께 드리려고 우족과 사골을 구입하여 곧장 방배동으로 가서 큰 절을 드리고 나왔다. 차를 몰고 시청 앞을 지나 학원에 도착하니 5시가 지났고 저녁에는 수업을 마치고 고등부 선생들과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 중에서 윤종승 선생은 경희대 출신으로 실력도 있고 말도 잘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영어선생인데 흠이라면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어렵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내는 요즘 수강생이 줄어 스트레스가 많다는데 시기가 그런 때이고 그래도 논술전문가로서 자기 일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다.
31일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날이다. 내일이면 또 다른 새해가 되지만 시간은 연속된다고 생각하니 무덤덤할 뿐이다.
주변 사람들한테 새해 문자 인사가 쏟아지고 나도 일일이 답장을 하며 덕담으로 건승을 빌었다. 오늘부터는 학원 수업이 저녁에서 오후 2시로 이동하여 낮시간 활용을 조절할 필요가 있어 일찍 안산에 올랐다가 2시간을 걷고 내려와 점심을 하고 바로 학원에 나갔다. 경기학원 4층 대표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차량행렬과 사람들의 모습이 붙들어 두고 싶은 2008년의 마지막 풍경이다. 눈이 올 것처럼 날이 잔뜩 흐려 무서움까지 드는데 내가 아들 나이인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12월31일에도 꼭 이런 날씨였다. 춥고 이상하게도 무서웠던 그날 어두워진 밤 7시에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시신이 들어왔고 건너편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할머니의 모습, 그 곁에서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붙들고 울고만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고 34년이 지난 지금 그 어머니께서는 거동을 못하고 누워만 계신다. 일찍 시작한 수업을 마치니 오후 6시가 되었고 옆에 있는 종로M학원 원장을 만나 학원의 앞날에 대하여 2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쌀쌀한 날씨에 집에 9시에 들어와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자다가 비몽사몽 중에 제야의 행사를 TV를 통하여 시청했다. 다른 해에 비하여 행사가 초라해 보였는데 영하 10도의 차가운 밤 기온도 그렇고 여러운 경제도 그 이유가 된다. 어둠이 걷히는 아침이 오면 나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힘찬 출발점으로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