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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 자손의 시, 악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어를 가진 본 시는 하나님의 전을 갈망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레위의 증손이며 고핫의 손자였던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켰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비의 어리석은 범죄에 동참치 않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독립된 개체라는 원칙에 따라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이후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 레위의 후손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지파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모세 편에 섰던 조상들과 같이 장차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왕이 될 다윗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숨어든 다윗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직접 칼을 들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4천명의 성가대원을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반차에 맞추어 스물 네 개로 개편할 때에는 무려 열 네 명이나 최고 수장으로 참여했던 그들은 또, 여호사밧 왕 때까지 최고의 궁중 음악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악장 가운데 하나인 “헤만”이 바로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9:17-19절은 “문지기는 살룸과 악굽과 달몬과 아히만과 그 형제들이니 살룸은 그 두목이라 이 사람들은 전에 왕의 문 동편 곧 레위 자손의 영의 문지기며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 열조도 여호와의 영을 맡고 그 들어가는 곳을 지켰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성전 안 여러 문들의 입구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던 레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무는,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닫는 것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영(營) 곧 “성막”의 문지기였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성전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으며,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가장 먼저 돌아와 성전 문을 지킨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라 자손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일과 예루살렘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지킬 수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을 통해 그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금지 당한 자들의 애끓는 마음이 어떠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보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더 행복하다는 소중한 사실까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극히 자유로운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눈들로 인해 숨죽인 채 마음대로 예배드리지도, 찬양하지도 못하는 우리는 시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본 시를 시작합니다. 1-2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帳幕)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여기서 “사랑스러운지요”(예디드 : yedeed')는 “가장 사랑하는, 참으로 사랑 받은, 반할 만큼 아름다운” 등의 뜻으로, 장막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달피 가죽으로 만든 장막은 시인의 고백과는 달리 전혀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중충하고 허름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며 극찬한 이유는 장막(帳幕)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 주권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장막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쇠약하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사랑하여 병들 정도로, 참으로 간절한 마음과 영혼으로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과 육체 곧 전 존재로 살아 계신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을 갈망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채우지 않고서는 도무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매를 맞고서야 겨우 찾고 나가는 하나님과 교회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권을 얻기 위해 울고 탄식하며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3-4절입니다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祭壇)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여기서 “나의 왕”이란 이스라엘의 참된 왕과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에 총 3번 언급되는 “참새”를 싼값에 팔리는 하찮은 존재로 비유하셨습니다. 제비 또한 참새와 유사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이렇게 가치 없는 미물들조차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사모하는 자신은 성전에 갈 수 없는 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장막에 보금자리를 틀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성전에 살며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만큼 크고 놀라운 복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뻐합니다. 비록 문지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 자체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셀라”가 나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할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던 시인은 참된 예배자의 심령을 소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려는 거룩한 열정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것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주 하시는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예배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형제와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고, 사모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 곧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서로를 뜨겁게 사모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또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심령을 가진 것이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5-8절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 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시지 않는 한 결단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나갈 마음과 힘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찾아나갈 힘과 마음을 허락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은혜를 부으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오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까지도 주실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울음의 골짜기”(the valley of Weeping), 혹은 건조한 지대에서 자라면서 나무 자체에서 눈물과 같은 물을 떨어뜨린다는 “발삼나무”(balsam tree)로 해석되는 “눈물 골짜기”는 거칠고 물이 부족하여 크게 고통스러운 곳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殿)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신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원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께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도록 구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 마음의 소원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하고 예배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셀라”가 나옵니다. 잠시 쉬면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베푸실 놀라운 은혜와 복을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 깊이 새기고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현재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과 하나님께서 만민 가운데 구별하여 세우신 이스라엘의 처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하나님을 향해 외치기 시작합니다. 9-12절입니다.
“우리 방패(防牌)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宮庭)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帳幕)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恩惠)와 영화(榮華)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해요, 방패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정직히 행하는 자들에게는 각종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복은 물질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전에 거하며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집에서 호사(豪奢)를 누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현재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마음껏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새나 제비 같은 미물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방패이신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들의 얼굴이 어떤지 한번 살펴 봐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결론 엘리바스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면”으로, “하나님”이 직접목적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라”(솨하르 : shawkhar')는 “하나님을 찾다. 경외하다. 섬기다”등의 뜻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 한 분만 구하고, 섬기는 삶을 살면 창대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처음 남편 될 사람을 만났을 때, 조종사인 동시에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설교자와는 대단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 역시 설교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거듭남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일한 지 이주일 만에 남편의 사업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이동식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었습니다. 남편이 고등학생 때 만든 탁자와 흑백 텔레비전 한 대가 가구의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냉장고와 가스레인지조차 없었던 그들은 커피포트와 전기 후라이팬으로 음식을 요리했고, 남은 음식들은 상하지 않도록 종이박스에 넣어 바깥에 내놓아야 했습니다. 완전한 빈털털이에, 실업자로, 빚만 잔뜩 지고 있었던 그들은 마땅히 갈 곳도, 미래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어머니가 남편의 생일 선물로 주신 성경책 맨 앞장에 쓰여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시 찾아 읽은 마6장에는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여주신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난생 처음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면 틀림없이 자신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텅 빈방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드리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께 드린 고백은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이후 남편은 이주만에 새로운 직장을 구했습니다. 곧 새 가구가 있는 아파트로 집을 옮긴 그들은 좋은 차까지도 새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까지도 거듭나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완전히 실패자였던 그들은, 하나님을 구하겠다는 고백과 함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구하고 있습니까? 톨스토이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대들 앞에 나타나리라.”고 말했습니다.
또 “마음 도둑”의 저자인 론 허치크래프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복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은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시105:3)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또 하나님의 성전인 서로를 사모하며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한 분만을 즐겁게 찬양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