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교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그 이전 시대의 페르시아 종교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는 다신교인 고대 인도의 종교와 상당 부분 유사점이 있었다. 가령 페르시아에서는 ‘데바’(daeva)라는 여러 종류의 신들을 숭배했는데, 이는 힌두교의 신들인 ‘데바’(deva)와 유사한 존재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페르시아의 ‘인타르/인다라’(Intar/Indara)와 ‘미트라’(Mithra), 그리고 힌두교의 ‘인드라’(Indra)와 ‘미트라’(Mitra)처럼 명칭과 속성이 상당히 유사한 신들도 있었다.
인도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에서도 불을 피우고, 동물을 제물로 삼고, 환각제를 이용하는 등의 종교 제의가 있었다. 그런데 가타를 보면 유목을 비난하고 농업을 예찬하며, 나아가 동물을 제물로 삼는 행위에 대한 반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특징이 고대 페르시아인의 생활방식이 유목에서 농업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토착민과 이주민, 또는 토착 종교와 전래 종교 간에 벌어진 갈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페르시아 종교의 개혁을 주도한 사상가라고 해석한다.
조로아스터의 생애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자료들은 분량도 많지 않고, 표현조차 암시적이라, 조로아스터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미르체아 엘리아데) 앞에서 설명한 찬송가 ‘가타’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다. 가령 어떤 연구자는 가타에 ‘가난’에 관한 언급이 등장함을 근거로 조로아스터가 가난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여타의 고대사 관련 추측들이 그러하듯 자료의 빈곤만 더욱 부각시킬 뿐이다.
‘조로아스터’(Zoroaster)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식 표기이며, [아베스타]에 나와 있는 그의 이름을 현대식으로 표기하자면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된다.(다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조로아스터’로 명칭을 통일했다). 정확한 출생 및 사망 시기는 알 수 없고, 대략적인 생존 시기에 관해서도 BC 18세기에서 BC 6세기까지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린다. 그중에서도 BC 6세기가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이 시기에 들어서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언급이 기록에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영웅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갖가지 장치를 동원해서 조로아스터의 생애를 묘사하기도 했다. 즉 그는 출생 당시와 유년기부터 여러 가지 징조와 이적을 보였고, 20세 때에 양친과 아내의 곁을 떠나 수도자가 되었고, 30세 때에 계시를 얻었다. 이후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여 각지의 왕과 귀족과 평민을 감화시켰고, 77세 때에 전쟁의 와중에 불의 제단 앞에서 적군에게 피살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 가운데 어떤 것도 역사적 존재인 조로아스터의 이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