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5) 주시경 '국어문법'을 펴내다
주시경(1876~1914)의 '국어문법(國語文法)'이 1910년 4월 15일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국어와 국문에 대한 근대적인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획기적인 업적으로 손꼽힌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등을 펴낸 바 있는데, 이러한 학문적 축적을 거쳐 국어의 문법체계를 근대 언어학의 방법과 관점에서 확립한 '국어문법'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주시경은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11살 때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국문신문의 제작에 종사하면서부터 국문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신문 제작에서 국문 표기의 통일을 해결하기 위해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국문 연구에 진력하였다. 이때 주시경은 "자국(自國)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도(道)는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도는 국어와 국문을 숭용(崇用)함이 최요(最要)하다"고 주장하면서 국어 국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학부(學府) 안에 세워진 국문연구소(1907)의 주임위원으로서 국어에 대한 연구 활동과 함께 개인적으로 국어 강습소를 열어 대중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 한문 폐지와 함께 국문 글쓰기를 대중적으로 확대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뒤에 최현배(崔鉉培)·신명균(申明均)·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식민지 시대 '조선어학회'의 국어국문 연구에 기초가 되었다.
'국어문법'('국어문법'의 원고로 추정되는 필사본)은 우리 국어의 특성에 따라 '국문의 소리(음운론)' '기난갈(품사론)' '짬듬갈(문장론)' '기갈래의 난틀(개별 품사론)' '기몸박굼(품사전성론)' 등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체재로 본다면 이 책은 국어 문법 연구의 중심 영역에 해당하는 음운론, 품사론, 문장론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주시경은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한다. 특히 근대 언어학의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은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의 한문이나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한자어를 배격하고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실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이라는 말도 주시경이 처음 사용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표제가 '조선어(朝鮮語)문법'(1911)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시경의 한글 연구는 후학들에게 이어져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
조선일보 2009.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