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연 교수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지배와 노동(Herrschaft und Arbeit)> (1991)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현재까지 동·서양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으며 ‘국민 사관’으로 다시 보는 역사 연구와 함께 동서고금의 정치철학을 융합하는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은 동국대 황태연 교수가 펴낸 책이다. 그런데 책 제목이 어색하다. 갑오개혁, 아관파천이라는 명칭으로 배운 역사, 게다가 갑진왜란은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말.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게다가 사학자가 아닌 정치철학자의 역사 이야기라니. ‘동서고금’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인정받는 정치철학자는 왜 대한제국의 역사를 파헤쳤을까?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의 시작
황 교수는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는 대한제국이 사실은 치열한 항일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일본의 식민 사관이 아닌 독립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민족 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를 다시 밝혀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한제국은 현재 우리의 삶, 대한민국의 정통성과도 직접 연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조선 근현대사는 ‘개혁의 실패’ 또는 ‘패배’의 느낌이 짙어요. 반면 일본이 저지른 행동은 두루뭉술하게 표현돼 있죠. 이는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일본의 태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는 한국사 교과서에 ‘일본은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로 서술되어 있는 을미사변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여러 사료와 자료를 보면 명성황후 살해는 일본의 조직적 계획 아래 일본군 장교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밝혀졌어요. 일본군이 한 나라의 궁궐에 침입한 행위는 엄밀히 말하면 전쟁(War)이므로 ‘을미왜란’이라 해야 함에도 사변으로 축소한 것이지요.”
의식 속으로 스미는 식민 사관을 경계하라
또한 고종이 겁에 질려 처신없이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굴욕의 역사로 알려진 아관파천은 경복궁에 주둔하기 시작한 일본군과 친일파를 물리치고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한 망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아관망명에 관한 역사 기술은 국왕의 처신과 나라의 체면만을 말하고 고종이 경복궁에 억류 유폐된 상황에서 치외법권 지역으로 긴급 망명해야만 했던 긴박한 역사 현장을 지워버렸어요. 당시 서양의 자료들은 이 사건을 망명으로 표현한 반면 파천이란 말은 일본의 자료에만 등장한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황 교수는 이처럼 역사적 사실 곳곳에 숨어 있는 식민사관이 교육과정을 통해 의식 속에 스미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역사는 사료로 증명한다
황 교수의 얘기를 듣다 보니 학창 시절 대한제국 부분을 배울 때 의기소침했던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다른 역사 관점은 여전히 낯설다. 그는 어떻게 이런 관점을 주장하게 되었을까? 또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역사는 사료로 증명합니다. 당초의 사료는 물론 해외의 기록물, 고종의 마지막 밀지, 무명 유생의 상소문까지 샅샅이 찾아내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지요. 내 연구 결과가 99% 확실하다 해도 반대하는 1%의 견해도 다시 검증해서 연구 결과가 옳다는 확인을 한 뒤에야 역사적 자료로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문득 예전과 다름없는 내용으로 역사를 배우는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역사관으로 인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을지염려스러워졌다.
역사관은 역사적 사실을 담는 그릇
황 교수는 역사를 보는 관점은 역사를 담는 그릇과 같다며 역사 교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교과서 내용을 바꿀 수 없더라도 ‘역사적 사실’ 뒤에 놓여 있는 배경을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고 학생들이 여러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학생들도 역사를 등급과 시험 점수에만 국한시키거나, 스타 강사의 강의만을 맹목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이고 다양한 시각으로 쓰여진 역사서를 골고루 읽을 것을 권했다.
공부,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대한제국과 관련한 이야기부터 고려와 조선의 역사, 독일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 공자의 사상, 다윈의 진화론까지 황 교수가 들려주는 지식의 세계는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 다른 영역의 주제가 만나는 지점들. 서양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준 공자의 사상, 간디의 무저항·비폭력 투쟁의 모델인 우리나라 33인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등 많은 주제가 씨실과 날실로 만나 ‘역사’라는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간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 우물을 파기에도 힘들다는 공부. 그는 어떻게 여러 우물을 그리 깊이 파 내려가고 있는 걸까?
“공부는 사막에서 작은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아요. 하나를 찾아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못 찾더라도 다시 찾아 헤매는…. 하하하.”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아시스를 만날 때까지 걷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황 교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독서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지만 학자는 나의 지식이나 견해와 반대되는 모든 자료도 분석하고 검증하며 나의 이론과 주장을 세워가는 사람이라는 것.
“학자의 공부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해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죠.”
황 교수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고통스럽고 지루한 길이 계속되겠지만 기꺼이 그 길을 걸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황 교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연구비 지원이 확정되었다며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은 새로운 여행을 앞두고 들뜬 아이처럼 밝았다.
미즈내일
첫댓글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아시스를 만날 때까지 걷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공부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가슴에 와닿아요.
오늘은 내용을 읽지는 못했지만 담에 정독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