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강 완전을 향하여
세세대대, 인류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편지'인 성경(구약 46권, 신약 27권)을 차동엽신부와 함께 읽어오면서 오늘, 여기에 섰는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은혜로운 말씀 '레마'로 찾아주시기를 염원한 '맥으로 읽는 성경' 강좌 마지막 총정리 시간입니다.
아쉬운 이시간을 마무리 하면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이요, 눈물을 흘리시는 측은지심의 사랑이며, 질투하시는 사랑,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임을 확인합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레마'를 만나지 못한 분들은 이번 시간에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레마:Rhema
로고스와 달리 하느님께서 손수 어떤 특정인에게 주시는 말씀
37분 신앙인의 능력 / 약할 때 드러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린 1-27) " 부족한 사람을 뽑아 쓰신다. 건강이 시원찮다
신앙인의 능력 / 성령의 지혜로
"나의 말고 ㅏ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1코린 2,4)
38;48초
은총 / 상상할 수 없는 것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 코린 2,9) 꼭 이세상에서도 누리십시요.
40;47 궁극적 희망 / 지복직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느님
께서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 코린 13,12)
성인현시...성인 토마스 아퀴나스, 오상의성 비오신부님 메세지 ...대화가 필요없다. 저 위에서는 대화, 언어도 필요없다. 통하니까...
영적권고 / 허송 세월 하지 말 것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에페 5,15-16)
그래서 성경공부을 해야 합니다. 주님 나라 위해서 봉헌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은퇴하고 하면 안됩니다. 황금시간을 봉헌하십시오. 기운,정신 팔팔할 때 더 봉헌하슨 삶이 되십시요....
참조: 몇?강인지
spiritus 연료-에너지
-활력 순환의 의미
paraclitus
변호자-어떻게 말할지 모를때
위로자-침울,죄의식,무력감, 의욕잃을때 (격려해 주시는...)
협조자-붙이고, 지켜주심
견진성사는 세례의 완성 (28:03초)
인호 (29:00)
지혜 :판단,경중 최선의 선택, 주님을 경외하며, 먼저 생각하고 선택 (31:00)
지식: 신앙정보,성경, 교리 영감을 받아 기억을 잘하고 이해가 잘된다.
믿음: 무에서 유창조, 절망에서 희망,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이유가 필요없다.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 현세에서 많이 필요하다 (35:00)
제10강 갈릴래아 사람들아!
제10강 갈릴래아 사람들아!
갈릴래아!
'이방인들의 지역', '변방의 멸시받던 곳'(이사 9,1참조)으로 이스라엘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이방나라와의 빈번한 접촉으로 늘 혼혈문제, 우상숭배의 유혹과 혼합주의 신앙이 골칫거리로 대두되던 곳...
이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처음으로 만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꿈과 희망과 서로의 신의와 사랑을 키웠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실의에 차있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시 찾아주시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새로운 열정을 불어 넣으시어 새사람으로 변화시키신 곳도 갈릴래아이다. 그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쫓으며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던 갈릴래아 촌사람인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새사람으로 거듭 났듯이, 오늘 우리 모두도 그 놀라운 성령 강림의 현장으로 초대되었다...
참조 :
【4】서론을 대신하여(4) -“하느님 없는 삶은 칠흑 같은 밤” |
|
물질의 우상에 사로잡힌 현대인 노래 은총에 눈뜨고서 신앙의 진면목 고백
동시대인을 향한 노 시인의 연민 저렇듯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인간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자신의 건재(健在)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 비유한 프랜시스 톰슨에게서 구상 시인은 청년시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아주 아주 옛적에, 정확히 햇수를 따지자면 약 3000년 전 하느님 안전(顔前)으로부터 피신하려다 헛고생만 한 또 하나의 실패자가 있다. 실패한 도망자 다윗은 이렇게 실토한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그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어둠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 달라 해보아도,/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중략)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습니다』(시편 139, 7~15)
신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심정이 어찌 두 시인, 아니 세 시인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는 감미로운 유혹에 덜컹 빠져들고 있는가. 하느님의 존재를 곧잘 믿었던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동시대인들이 「그(하느님)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로 이 거리 저 골목을 헤매고 있는가. 죄가 너무 크고, 절망이 너무 깊어서 감히 하느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 마음이 너무 굳어서 불행한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부질없는 노릇인 줄 알면서도 사춘기 아이들이나 걸리는 「이유 없는 반항」병, 가출병에들 걸려서 실제적 삶에서 하느님을 등지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하느님을 살해하여 매장해 버리고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영적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헌데 구상 시인은 스스로에게도 하느님의 「실재」에 의문을 갖고 「날마다 신의 장례식을 치르며」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동시대인(同時代人)의 비극을 잘 알고 있다.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가슴 속에서는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연민(憐憫)이 울고 있다. 시인은 그 안타까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인류의 맹점(盲點)에서) 이처럼 「시방 세계」는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경합하는 가운데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온갖 도락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이 것이 노시인이 바라본 오늘날 세계의 모습이다. 시인은 이를 「칠흑」의 「어둠」이라고 잘라 말한다. 노시인이 보기에 비극은 다른데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저마다 「황금송아지」에 사로잡혀 봐야할 것을 못 보는데 있다. 사람들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심에 저 물질의 우상(偶像)안에 우주의 창조주요 역사의 섭리자인 하느님을 가두어 둔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떠느라고 저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음」에 귀기울이지 못하는데 있다. 아니 일부러 귀를 무언가로 틀어막는데 있다. 그리하여 저 톰슨 시인의 귓가에 뚜렷이 들려온 『나(하느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는 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애써 흘려버리려는데 오늘을 사는 이들의 비극이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이란 「허허-」, 「저러-ㄴ」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노 시인이 노래하는 가톨릭 신앙 그게 언제였을지는 아무도 모르되 시인께서는 「처절한 싸움」 끝에, 오랜 방황과 모진 사상적 편력을 마치고서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는 경지를 지나 「은총」에 눈을 떠서 눈물까지 흘릴만큼 되었다. 이를 시인은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제사 비로소/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그렇듯 안까까움과 슬픔이던/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사 하늘이 새와 꽃만을/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눈물로써 감사하노라 (하략)』 시인께서 「두 이레 강아지 만큼」 눈 떠서 접한 「은총」은 이렇게 시인의 세계관과 삶의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곧 냉철한 이성으로 생로병사에 깃든 영원의 편린을 꿰뚫어 보게 하였으며 천진의 감성(感性)으로 「하늘」의 보살피심에 눈물 흘리게 하였다. 이것이 노시인이 이즈음 노닐고 계신 신앙의 경지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가톨릭 신앙의 진면목이다.
사진말 -「시방 세계」는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경합하는 가운데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온갖 도락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이 것이 노시인이 바라본 오늘날 세계의 모습이다.
차동엽 신부 (인천사목연구소 소장)
|
무료 유료 평화방송(PBC) 회원 가입후 들을 수 있습니다.
차동엽신부의 맥으로 읽는 성경 - 신약 다시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