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차가운 철문을 열자 눈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난 저 끝에 있는 난간으로 가고 있다. 저 멀리 한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왔는지 내 눈앞에는 많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걱정하
는 부모들이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니 나에게는 오히려 그 아이들이 부러
운 풍경이었다. 나에게는 저 아이들과 같은 기억이 없다. 아니 있어도 난 기억하지 못할 것
이다. 어린 시절 그 어둠의 시간들이 다시 나의 머리 속에 그려진다.
'쨍그랑, 쿵, 쾅'
그릇 깨지는 소리와 물건 부서지는 소리. 또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고 오신 것 같다. 어머니
의 매맞는 소리가 들기고 아버지의 매질 소리가 들린다. 너무 무서웠다. 난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이불 밖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어 보니,
아버지께서 혼자 자리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엄마!'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난 집밖으로 뛰어 나가 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난 동네
여기 저기를 살피며 뛰어 다녔다. 점점 불안해 졌다. 불안감에 휩싸여 정신없이 뛰어 다녔
다. 나의 눈에게는 점점 눈물이 고여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들로 차있었고, 나의 눈에는 눈물로 가득 차있었다. 얼마나
헤매었는지 숨이 가빠왔다. 난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을 어디로 갔
는지 보이질 않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 차있었다. 누군가 날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
다. 난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려 보았다. 저 어두운 골목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잠시 후, 난
그 모습이 엄마란 것을 확신하고 그곳으로 뛰어 갔다. 엄마의 눈에도 역시 눈물이 고여 있
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안아 주었다. 난 서서히 잠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
는 계속 울고만 계셨다.
다음날, 내가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아버지께서는 한없이 담배를 피우고 계셨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주저앉아만 계셨다. 난 책가방을 챙기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준비를
다 하고 막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오백원을 쥐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가는 길에 빵이라도 사먹어라."
난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계속 불안한 느
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안한 느낌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
로 돌아 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생의 가방 위에 내 가방을 던져놓고 내 동생을 기
다리고 있었다.
'따르릉~'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명준 이니?"
"예"
"잠시만, 엄마 바꿔줄게."
"여보세요. 명준아."
"엄마, 어디야?"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엄마가 없어도 밥 잘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
"응? 엄마 왜 그래?"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전화가 끊어지고, 난 방금 전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생은 또 흙장난을 하고
온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이다. 동생에게 밥을 챙겨주고, 멍하니 창밖에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또 술에 취해서 늦게 오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말씀하셨
다.
"너희 엄마는 너희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라 갔다.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엄마를 잊어
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생은 울음을 참고 있는 듯 했고, 나 또한 애써 울음을 참
으며 앉아 있었다. 우리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기
에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계속 되었다.
"낮에 엄마 한데서 전화 왔었니?"
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버지께서는 약간 언짢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이제 전화 오면 끊어 버려! 알겠지?"
난 아무런 대답도, 물음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우리 세 명만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침은 아버지가, 점심과 저녁은 나와 동생이 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머니
에게는 아주 난폭하고 위협적인 남편 이였지만, 우리에게는 한없이 인자하고 좋은 아버지이
셨다. 그러했기에 나의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은 생활은 그러게 힘들지 않았고, 나의 가치관
들이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
답한 무엇인가가 싹트고 있었다.
난간의 모서리에 기대어 서서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짝지어 날아다니는 강변의 새들을 바라
본다.
'저 새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다시 철문을 열고 어두운 계단을 지나, 그 건물을 빠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마냥 걸었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들,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들. 여러 사
람들 사이에 난 혼자다. 한참을 걸었다. 눈부신 네온사인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
들을 유혹하는 남성과 술집 아가씨들. 저 끝에는 사창가도 보인다. 인간의 본능 그리고 이
성. 그 중에서 인간은 무엇을 중시하며 살아야 할까? 지금까지 모든 철학자들은 이성의 완
성 또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람의 성이 하나의 육체적 쾌락의 수단으
로, 상업의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나의 두 번째 어머니. 그녀는 왜 그랬
을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아버지께서는 재혼을 하셨다. 집안 일을 하는 내가 가여웠는지 아
버지께서는 설날에 새어머니를 데리고 오셨다. 그날 이후, 난 더 이상 집안 일을 하지 않았
고, 나의 생활은 점점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점 새어머니 문제로 가족간의 다
툼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 모두가 우리를 멀리했다. 몇 달 뒤 아버지께
서는 일본으로 출장을 가셨고, 세 달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밖에 뵐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없어도 나와 동생은 새 어머니와 잘 지내고 있었다. 별다른 다툼도, 말썽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새어머니와 산지 1년을 며칠 남겨 둔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집에 오셨는데, 기
분은 그렇게 좋아 보이시지 않았다. 또 다시 이상한 긴장감속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야기
를 나누고 계셨다. 나와 동생은 방의 한 구석에 둘이 꼭 붙어서 옛날의 그 기억을 되살리며
겁에 질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려 할 때쯤, 동
생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옛날의 그 기억이 동생의 머리 속에 너무도 오래 자리 잡고 있
었나 보다. 난 동생을 달래기 시작했고, 나의 그런 모습과 동생의 우는 모습을 본 아버지께
서는 어머니를 데리고 박으로 나가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 다녀봐도 아무도 없다. 난 아침을 먹지 않고,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머리 속에는 옛날의 그 시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새어머니와 즐거웠
던 기억, 싸웠던 기억, 그리고 친어머니와 헤어지던 때의 기억.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나의 책상 위에는 작은 종이가 하나 놓여있다. 그 편지에는 작은 글씨들이 하나둘 적
혀 있었다.
'명준아! 동생 잘 돌보고 건강히 지내거라. 너희와 지냈던 시간은 정말 잊지 못할 꺼야. 다
음에 길에서 만나면 우리 서로 인사나 하고 지내자. 그럼 잘 지내. 안녕.'
짧은 글의 편지였다. 난 이 편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답답했다. 그리고 이런 편
지 한 장만 남겨두고 우리의 곁을 떠나 간 사람이 싫어졌다. 난 아버지를 기다렸다. 이번에
는 왜인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술을 마시고 오실 것이기에 그 기다림의
시간은 두렵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11시쯤, 아버지께서 오셨다.
"아직 않자니?"
난 말없이 그냥 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시며 이
야기 하셨다.
"거기 좀 않아 보거라."
난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하실 지 알고 있었다. 나의 꿈을 묻고, 아버지의 희망을 말하시고,
앞으로 살길을 이야기하시고 서야 새어머니와 헤어진 이유를 말씀하셨다.
"너의 새어머니는 술집에 나갔단다......"
그러시고는 말끝을 흐려버리셨다. 그때는 단지 그런 곳이 나쁜 곳이란 것만 알았을 뿐. 그것
이 헤어진 이유가 되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차츰 지나 내가 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알게되었다. 왜 이혼을 하셨는지....... 나의 두 번째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우리는 또다시 집안 일을 해야만 했다. 예전과 같이.......
유흥가를 지나서 택시를 잡아탔다.
"대방동으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는 조심스런 말투로 나에게 대답했다.
"예, 이것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는 나의 앞에 하나의 큰 노트를 건네어 주었다.
"이게 뭡니까?"
나의 택시 기사는 다시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예, 일기장입니다. 오늘 일기를 여기에 한번 적어 보시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며 나에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읽어 봐도 되나요?"
나의 조심스런 질문에 택시시가는 당연한 듯 대답하였다.
"예, 읽어보십시오."
난 다른 사람의 일기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온갖 이야기가 있었다. 부모의 구타와 시달림
에 지쳐 가출하는 소년의 이야기, 이혼 신청을 하러 가는 어느 유부녀의 이야기 등등, 나의
눈시울을 적시기에는 충분한 이야기들이 종종 눈에 띠였다. 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왜, 이런 글을 모으십니까?"
나의 질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전 4년쯤 전에는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실 된 모습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택시 기사를 했고, 손님들에게 일기를 이 노트에 적어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 택시기사가 부러웠다. 인간
의 소박하고 진실 된 삶, 난 그 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안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택시 기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야기를 했다.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이 어쩜 정확한 답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난
그 일기장에 간략하게 적었다.
'나에게는 세 명의 어머니와 한 명의 아내가 있다. 그러나 이제 모두 날 떠났고, 날 떠나려
한다. 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삶을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겹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되었을 때, 그때 다시 만나 뵐 수 있길 기원합
니다."
란 말을 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서서히 나의 집 대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다. 거실의 소파 위에는 노란 봉투가 아직도 놓여져 있다. 아침의 그 일들이 다
시 머리 속에 그려진다.
나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던 아내의 그 무표정한 모습. 난 그 서류를 그냥 던져 놓고 집을
나셨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은 하였지만 나의 마음은 온통 그 서류에 모아져 있었다. 답답했
다. 내 인생이 왜 이래야만 하는지. 내 삶 또한 나의 아버지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 내 자신
에 대한 원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숨이 막혔다.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난
사무실을 나서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정신없이 뛰어. 옥상으로 오르는 어두운 마지막 계단에
서서, 왜, 어떻게, 여기 까지 오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때의 아름다운 추
억들이 머리 속에 다시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채팅 할거니?"
나의 짝은 오늘도 나에게 변함없이 물어본다. 내가 채팅을 시작한지도 벌써 10개월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중학교를 마치고 나서부터 시작해서 이제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면 겨울방학
이니, 그 정도 될 것이다. 난 오늘도 수미를 만나길 기원하며 하교를 준비하고 있다. 내 짝
은 채팅을 통해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신기한지, 아님 부러운지 나에게 매번 물어보곤 한다.
난 그런 짝에게 통신을 하는 방법이랑 필요한 것들을 소개해준다. 채팅을 처음 접했을 때,
나 또한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고 매일 컴퓨터 앞에만 붙어서 채팅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
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러다 수미를 만났다. 난 언제나 같은 제목의 방을 개설했었다.
'바다가 그리운 오늘......'
어린 나이였지만 외로움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
람. 아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고민까지도 같이 들어주고 해결책을 찾거나 같이 슬퍼
해 주곤 했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미
를 만났다. 그 아이와 나는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이상하게도 많았다. 우린 서로에 관
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같이 기뻐하고, 슬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미는 나에게 물었다.
"넌, 바다가 왜 좋으니?"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위해서
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편안하다는 느낌 이외에는 복잡한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음~, 편안하잖아."
수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혹시 통신연결이 끊긴 것은 아닌지 다시 말을 걸어 봤다.
"뭐하세요?, 아가씨?"
"별거 아니에요. 아저씨!"
"뭐?, 아저씨? 내가 왜 아저씨야?"
그녀와 나의 말장난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서로에게 약간의 웃음을 준 뒤 살며시 끝
을 맺곤 했었다. 말장난이 끝나자 그녀는 나에게 약간은 슬픈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넌, 언제나 슬퍼 보여. 나처럼......"
난 마치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다.
"내가 뭐가 왜 슬퍼 보여?"
나의 물음에 그녀는 나를 이미 다 알고있는 것처럼 나에게 대답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난 너 머리 위에 앉아 있다니까?"
그녀의 진지함 속에서 다시 말장난을 걸어왔다. 아니 내가 말장난으로 이어 가는 듯 했다.
"야~!, 목 아파 어서 내려와!"
"*^^*"
그녀는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고, 나 또한 웃음으로 답을 했다.
"d^^b"
채팅장의 위쪽을 보았다. 방금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난 한 문장을
발견하고 수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아까 말이야. 나처럼 너도 슬프다고 한 것 같은데, 왜인지 물어봐도 되니?"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수미가 답을 해왔다.
"난, 엄마가 없어, 날 놓다가 돌아가셨대......"
그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지금 슬퍼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난 그녀에게
조금이남아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난 생각 끝에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음, 안됐구나. 난 왜 슬픈지 아니?"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다고 했잖아."
"목 아프다고 해서 내려 왔지."
우린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끝난 후 난 나의 이야기를 수미에게 상세
하게 들려주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남아 위로가 되게 해주기 위해 난 나 스스로를 아주 불상
한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 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난 지금
그녀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은 아
닌지 내가 너무 나의 이야기를 슬프게 해준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난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 자고 있어요?"
"아저씨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자요."
"난 무서운 사람 아닌데......"
"우리 아빠가 그러시는데요. 남자는 다 늑대래요."
그녀의 천진난만한 성격과 말투가 난 너무도 좋았다. 마치 아주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아니 어쩜 수미는 밝은 영혼을 진인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
다. 내가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말장난이 어느 정도 끝나
자, 수미는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줄 모양이다.
"난 아까 너 이야기 듣고 사실 울었어. 난 네가 약간 힘든 상황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누구에게나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짐은 하나씩 있는 거야. 난, 단지 그 짐이 좀 무거울 뿐
이고."
"역시...... 아저씨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뭐야? 내가 아저씨는 넌 아줌마야!"
"아저씨 화났나봐?"
그녀는 나에게 언제나 웃음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갔고 어
느덧 겨울방학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난 변함없이 채팅을 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방을 개설한지 얼
마 있지 않아 수미가 들어 왔고,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안녕? 일주일동안 잘 지냈어?"
우린 일주일에 한번 통신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고, 시험이 있거나 하면 그 남아 보지 못
하곤 했었다.
"그럼! 우리 아저씨, 예쁜 나 보고싶지 않았어?"
오늘은 유난히 닭살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많이 했다.
"잠시만, 닭살 좀 긁어내자!"
"내가 대패 빌려줄까?"
"ㅡ.ㅡ;;;;"
난 문자로 답을 했고 그녀 역시 문자로 답을 보내어 왔다.
"^.^;;;"
난 그녀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닭살을 많이도 불어 일으키는지......
"너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
"그렇구나. 넌 그날 뭐할 꺼야?"
"글세? 이브 날에는 아빠랑 같이 있을 건데, 크리스마스날에는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네
가 가까이 있으면 만나서 같이 놀고 싶은데......"
"내가 갈까?"
"정말? 올 수 있어?"
아직까지 그녀를 직접 만나 본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손은 조금 긴장을 한 듯 떨리
고 있었고, 나의 마음 또한 알 수 없는 기대와 기쁨과 걱정으로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린 아마 오늘 만나서 무엇을 할지 이야기를 한다고 시간을 다 보낼 것 같다. 어느덧 시간
을 많이 흘렀고, 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수미에게 작별의 말을 이끌어 낼 시간이
온 것 이였다. 작별의 말을 하고서도 30분 정도는 더 이야기를 하는 우리들 이였기에 미리
작별의 인사를 이끌어 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수미는 마치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는 아이처럼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나 또한 그런 수미를 쉽게 잠재우고 싶
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은 자야만 하고 통신할인 마감시간은 점점 다가 오고있었다.
"수미야, 이제 몇 일 있으면, 너와 만날 수 있겠구나."
"너, 나 못생겼다고 구박하거나, 도망치기 없기다!"
"걱정하지마. 도망은 안치고, 구박만 할게!"
"뭐? 아저씨 미워!"
"오늘은 그만 자고 우리 다음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요. 우리 공주님!"
"으~,닭살 돋아!"
우린 만날 장소와 시간을 이야기한 다음 서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다. 내일이면 난 수미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갈 것이다. 나의 마음
은 점점 더 큰 기대에 휩싸여 갔다. 그 기대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
만, 난 수미를 만난다는 기대로 여기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밤 혹시
수미가 통신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통신에 접속해 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수미
는 나의 방에 오지 않았고, 나도 내일을 위해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다음날, 난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서울에 가는 기차표를 왕복으로 예매하
고, 기차가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걱정과 기대가 교차되고 있
었고, 그 속에서도 나 스스로는 기뻐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기차는 서서히 다가 오고있었
고, 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수미를 만난다는 생각 때문
일까?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고, 난 그 지루함 속에서 창밖에 풍경만을 보았다. 점점 서
울에 가까워질수록 하얀 세상으로 변해 가고있었다. 서울에는 눈이 많이 왔었나 보다. 수미
는 그 눈을 보며 얼마나 기뻐했을 지를 잠시 생각해 본다. 기차는 곳이어 서울역에 도착했
고, 나는 내릴 준비를 했다. 기차 밖으로 서서히 첫발을 내밀었다. 처음 서울에 오는 것이기
에 내가 알고 있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있었고, 난 수미 앞에서 그 불안감이 표나지 않도록 행동해야겠다고 마
음먹었다. 난 서서히 발길을 재촉하여 약속장소로 향하였다. 약속장소는 그렇게 멀지 않았
다. 바로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플렛홈의 끝이었다. 저 끝에서 표를 건네어주고 나면,
난 수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나의 발길을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저 끝을 향해 걸었
고, 수미에를 만난다는 기대에 나의 마음 역시 벅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표를 건
네어주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거나, 나에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을
없었다. 난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외딴곳에 있어서라기보다는 수미와의 만남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일 것이다. 난 다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난
지금 수미라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몸짓이라도 하듯 사방을 헤매고 있다. 혹시 약속장소를
잘못 안 것은 아닌지 다른 플렛홈으로 가보았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난 혹시 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돌아봤다. 예쁘게 차려입은 여인이
었다. 난 그녀가 나에게 나의 이름을 묻고, 자신이 수미이란 것 밝혀주길 기다렸다.
"저, 부산에서 오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나와요?"
나의 마음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니 이전보다 도 깊은 혼란의 늪에 빠져갔다. 난 다시 처
음의 자리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벌써 1시간정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
도 수미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의 마음속에서는 수미에 대한 기대나 환상보다는 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난 서서히 발길을 옮기려고 한다. 이 자리를 떠나 서울을 조금이
남아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를 나 홀로 걸어 다녀본다.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가 않는다. 지금 난 서울에서 본 것들보다는 수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미에 대한 걱정으로 나의 마음과 머리 속은 혼란에 따져있다. 해는 이미
많이 저물었고, 시계는 밤9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의 약속 장
소로 갔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다시 실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내가 살
던 곳으로 떠야할 시간이 왔다. 난 탑승구로 향했고, 기차에 올랐다. 끝끝내 수미는 만나지
못한 체로...... 그 어느 크리스마스보다 나에게 있어 쓸쓸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난 통신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난 다시 통신 속에서 채팅을 통하여 사
람을 사귀지 않을 것이다. 난 한동안 통신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난 통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내가 고3이 되던 때, 난 집을 나와 큰아버지 댁에 얹혀 살
게 되었고, 그리하여 더 이상 통신을 할 수도 없게 된 것이었다.
내가 다시 통신을 시작한 것은 대학에 진학을 한 후였다. 난 호기심에 수미와 만났었던 곳
에 접속을 해 보았다. 그곳에는 2개의 편지가 있었다. 하나는 수능시험을 무사히 치르라는
메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녀와의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이유를 적어놓은 메일이었
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크리스마스 3일전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스키장에 갔었다고
한다. 갑자기 결정 난 거라 나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도 모르고있었고, 그리고
약속 전날에는 아버지를 설득시켜 집으로 향했지만, 교통사고가 나서 그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야 했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하고
말을 덧붙이고있었다. 난 기쁨에 휩싸였다. 그리고 내가 그 시절 그녀를 나쁘게 생각한 것이
미안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며,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만날 것을 권했고, 나의 연락처도 같이 건네어 주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오늘 난 이 장소에서 그녀를 만날 것이다. 우리가 서
로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렸는가? 난 다시 옛날의 그녀와의 추억 속에 잠시 빠
져든다. 얼마 있지 않아 나에게로 한 여성이 다가 오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살며시 웃으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혹시, 이호주씨 입니까?"
"예, 제가 이호주입니다."
우리 대답은 서로 간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이어 옛날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으로 돌
아가고 말았다. 우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통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내가
지금 살고있는 모습까지. 그리고 그녀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의예과
에 진학을 했고, 많은 남자들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고 있다는 것까지 난 알게되었다. 그녀와
난 정다운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녀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서로 힘든 일은 같이 고민하며, 슬픈 일은 같이 슬퍼했고, 기쁜
일은 같이 기뻐하며, 우리의 우정은 날로 두터워졌다. 그러나 그녀와의 우정도 서서히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지금 나의 아내를 만나면서부
터 이었던 것 같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그녀였고, 나의 결
혼식이후 한번도 볼 수가 없었던 그녀였다.
결혼을 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난 심하게 감기에 걸렸다. 하는 수 없이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는 만남을 가졌다. 수미와 만난 것이었다.
"독감이 심하게 걸렸군요."
"예."
나의 대답을 들으며 그녀는 차트를 한 장식 넘기더니 다시 첫 장을 보곤 나에게 물었다.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난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수미였다.
"수미......?"
"그래, 맞아. 어떻게 잘 지내니?"
그녀와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또다시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그녀 역
시 결혼을 한 후였고, 갓 돌이 지난 아이도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작은 슬픔 또
한 있었다. 지금 아버지께서 많이 위독하시고,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드
는데 남편이 반대한다는 것까지 나에게 상세히 말해주는 수미였다. 그리고 끝에는 이혼을
하기로 결정을 냈다는 것까지도...... 그녀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마음을 굳히
고 있었고, 지금의 남편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이야기
가 길어지자 우린 같이 식사나 할까해서 병원근처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녀
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가끔 우리의 웃음소리에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우릴 보기까지 했
다. 참으로 오랜만에 갖는 수미와의 식사였다.
수미를 다시 만난 것은 그후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리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호주니?"
"나, 수미인데, 지금 좀 와줄 수 있니?"
"무슨 일 있어, 왜 울고 그래?"
간간이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고, 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 그래서 병원으로 후송 중인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네가 좀
와줄 수 있니?"
"응. 알았어 지금 갈게."
그녀에게 만날 장소를 받아 적고. 난 그곳으로 향했다. 아내가 없었기에 열쇠를 경비실에 맞
기고 허겁지겁 난 그곳으로 향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라면 나 말
고도 친구들이 있을 터였다. 난 그녀가 나에게 조금이남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리고 조금은 마음이 편했으며 기뻤다. 허겁지겁 달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녀를 만났
고, 아버지의 검사가 끝날 때까지 난 그녀의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녀
가 왔고, 우린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좀 어떠시니?"
대답 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그녀였다.
얼마 있지 않아, 수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난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기로 마
음먹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참아, 수미를 다시 만났고, 그녀의 아
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와야겠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대충 선배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장례식장으로 갔다.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가끔 수미
아버지의 친구라는 분들이 다녀갈 뿐. 그 누구도 오질 않는 슬슬한 장례식 이였다. 저녁 무
렵 난 집으로 갈려고 했으나. 수미가 안타까워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린 일단 저녁이라도 먹
기로 하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좀처럼 먹지도 움직이지도 하지 않으려는 그녀였
다. 단지 그녀의 아버지의 흑백사진 앞에서 앉아있기를 원했다. 난 그런 그녀를 간신히 설득
시켜 식당으로 향했다. 통 먹지를 못하는 수미였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 달래며, 그날 밤을 그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말았다. 쉼 없이 우는 수미였고, 엄마의
울음소리에 따라 우는 아이였다. 난 그 둘을 돌보며 달랜다고, 집에 전화를 하는 것조차 잊
고 있었다.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내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아내
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아내
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 그만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나의 물음에 그녀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제 어디 갔었어?"
"선배 초상집에......"
나의 대답은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비꼬는 말투로
"정말이지?"
라고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그녀를 쫓아갔다.
"왜, 그래?"
나도 짜증을 내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
"응!"
약간 피곤한 탓이었는지 나 역시 금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 친구 상미 알지?"
"응, 알지."
"걔가 어제 병원에서 당신이랑 한 여자가 같이 있는걸 봤데."
순간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작은 거짓말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거짓말로 발전하듯 난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선배 초상집에 온 친구야. 같이 밥 먹으로 간 거구."
"그래?"
그녀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 더 있는 듯 했다.
"근데, 상미가 그라는데 당신이랑 그 여자랑 다른 병원에서 한 아이를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봤다고 했어. 그리고 그 여자는 울고 있었고. 다른 얘는 당신이 한 여자와 같이
식당에서 즐거워하며 식사를 하는 것을 봤다고 했어. 어서 설명해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앉아서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했
다.
"사실은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야. 그리고 어제는 그 아이의 아버지 초상이었고."
차마 수미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왜인지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지만, 왼지 수미라고 말하
면 안될 것만 같았다.
"왜, 그것을 나에게 숨기려고 했어?"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
"지금까지 나 모르게 몇 번을 만난 거지?"
"다시 만난 적은 얼마 되지 않아."
"그럼 옛날에는 많이 만났다는 거야?"
"아냐! 그런 적 없어."
"아냐!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냐! 정말이야! 날 좀 믿어죠!"
그녀의 눈빛은 날 믿고 있는 듯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사사건건 토
를 달고, 억지를 쓰는 아내였다. 난 내가 의심을 받을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는
것이 싫었다. 너무도 화가 났다.
'철썩~~'
나도 모르게 그만 나의 아내의 빪을 때려 버렸다. 미안했으나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방을
뒤쳐 나왔었다. 그리고 옆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바닥에 누워서 나의 세 번째 어머
니를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 말이 많고, 짜증을 내던 나의 세 번째 어머니를......
내가 살던 창원이란 도시는 고입에 있어서 비 평준화 지역이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2
학년이 될 때쯤. 아버지께서는 내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는 또 재혼을
결심하셨고, 2학년이 끝날 무렵, 아버지께서는 또 새어머니를 대리고 오셨다. 이젠 엄마라는
소리도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고, 새로운 엄마에 대해 적응하는 시간도 빨랐다. 그러나 이번
의 새어머니는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지. 말이 입에서 멈추는 순간이 없었고, 나에게 단
한번의 칭찬도 하지 않는 분이었다. 난 서서히 새어머니가 싫어 졌고, 끝에는 몇 달 있지 않
아 말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야단치시고, 잘못을 빌라고 하셨다. 난 억지
로 용서를 빌었다. 새어머니에 대한 반발은 그 일 이후 더욱 커졌으며, 난 새어머니가 야단
을 치기 시작하거나 짜증을 내면,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이 되었다. 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서 창 밖을 보고 있었
다. 세수를 하고 옥을 입고, 출근을 하려고 할 때, 아내가 내 앞에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이혼 서류......"
그녀의 대답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봉투를 던져놓고
집을 나와 버렸다.
나는 방금 나의 남편에게 처음으로 빪을 맞았어요. 너무도 놀라운 일이고, 너무도 황당한
일 이였기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내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답니다. 남편은 방을 나가 건너편에 있는 서재로 간 것 같아요. 남편의 뒷
모습은 너무도 안쓰러웠습니다. 꼭 무슨 일이 또 벌어질 것 같았죠. 넌 남편을 쫓아 서재로
갔습니다. 그리곤 서재 앞에서 문가에 귀를 대어 무슨 일을 하는지 들어 봤어요. 아무런 소
리도 나지가 않는군요. 무엇을 하는 것인지....... 난 내 남편을 너무도 사랑한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고요. 남편은 수미를 만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난 수미에게
남편을 빼앗기기가 싫습니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이것은 나의 이기
적인 욕심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마음일수도 있습니다. 남편은 나에게 새로
운 희망을 주었고 새로운 길을 나에게 열어 준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니까요. 나에게
희망을 가져준 사람이 아니더라도 난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요. 벌서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그 동안 난 소파에 앉아 남편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시계는 5시, 그리고 6시를 넘기고 있어요. 난 얼마 전에 친구가 해준 말
이 머리 속에 떠올랐어요.
"남편에게 가짜이혼서류를 한번 내밀어봐. 그럼 남편이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르겠다고 할
테니까."
난 그 아이의 말을 따라 해보기로 했답니다. 노란색의 봉투에 남편에게 작은 편지를 적어
넣은 뒤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남편이 이 봉투를 열어보고, 편지를 읽고 나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전 기다리고 있습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남편이 나왔어요. 난 소
파에 앉아서 창 밖을 보고 있는 척했고요. 남편은 아무런 말없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출근을 준비하고 있어요. 난 남편에게 이혼서류로 위장된, 편지가 담긴 노란 봉투를 내밀었
답니다. 남편은 조금 혼란스러워 했어요. 그런 남편이 안쓰러웠어요. 남편은 이네 그 봉투를
소파 위에 던져 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남편은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하긴,
나중에 열어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남편을 조금은 골탕먹이고 싶거든요. 근데 왜 일까
요? 전 남편이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무한 것은 아닌지...... 남편이 많이 화가 난
것일까요? 전 두려웠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친구는 만나자고 했어요. 화장대에 앉
아 작은 액자를 들여다봅니다. 남편과 신혼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 더욱 아름답게만 보입
니다. 벌써 남편이 그리워집니다. 정말 남편은 괜찮을까요? 난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답니다. 새벽에 만든 그 노란 봉투는 그대로 둔 채 그만 나가고 말았어요. 그리곤 아주
늦게 집에 들어오고 말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수미와 관련된 나의 기억들. 난 그 기억들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갔으
나 아무도 없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내 아내의 화장대. 그 위에 놓여 있는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 그 사진을 찍었던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내 삶을 마치고 싶
었다. 아내에게 한 장의 편지를 적기로 했다. 한 장의 편지를 그녀의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화장대 위의 사진을 들고 그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푸른바다가 보인다. 달빛은 바다를 더 고요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밤하늘의 저 별
빛, 그리고 잔잔한 파도 소리. 모래사장에 누워 이 편안함에 젖어 본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나의 옷깃과 나의 빪을 스쳐가고 있다. 그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차가운 모래를 꼭지며,
나의 아내 김영미를 생각해 본다.
내 아내와의 만남은 어쩜 나의 세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
다. 내가 고3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세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또 이혼을 하셨다. 나
에게는 너무도 힘든 상황이었다. 세 번째 이혼. 난 내 아버지가 더 이상 이혼을 하지 않길
바랬고, 그래서 새어머니가
"너 때문에 이 집안의 싸움이 시작된다. 너만 없으면 정말 조용할 꺼야!"
라고 말했을 때, 난 집을 나와서 큰아버지 댁으로 가서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혼이라니. 난 나의 아버지가 더 이상 나와 동생에게 얽매이지 않고 아버지만의 인생을 살아
가기 바랬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혼이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신호탄이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에 난 너무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르지 않는 성적과 아버지의 계
속되는 이혼, 그리고 불투명한 나의 미래. 두려움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 난 컴퓨터
에 점점 더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컴퓨터에 빠
져갔고, 학교의 성적은 점점 더 떨어져 갔다. 결국, 난 4연재 대학에 떨어졌고, 서울의 한 전
문대 컴퓨터학과에 야간으로 다니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의 대학에도 갈 수는 있었
지만, 난 그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좀 더 큰 세상에서 날 알고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에서 나만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난 먼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녔다. 내가 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컴퓨터뿐이었고, 난 그에 관련된 직장을 얻고 싶었다.
그러던 중 컴퓨터 판매와 통신을 중심으로 하는 C&I 라는 벤처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지낼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전세도, 월세도, 사
글세조차 구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돈을 구하려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날 부르셨다.
"너, 지금 돈 필요하지 않니?"
"예, 필요합니다."
나의 대답은 작고 자신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난 나의 아버지 앞에선 자신 있게, 나의 의
견을 말하지 못했다. 마치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이 돈 받거라."
아버지께서는 통장과 도장을 내게 내밀었었다.
"이게......"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독립할 때 주려고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것밖에 없구나. 부디 넌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바란다."
아버지는 이 말씀을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나 또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
고 말았다. 아버지의 그 말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아픔과 시련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아버
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나에게 만들어 주었다. 난 서울에서 16평 남짓
하는 원룸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소형 승용차를 구입했다. 낮으로는 회사에 나가 일
을 하고, 밤으로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나의 생활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작
은 꿈이 있었다. 작고 행복한 나만의 가정을 꾸미는 것. 이것이 그 시절 날 이끌어 가는 원
동력이었다.
아주 무더운 여름날 이였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은 물가와 산으로 떠나고 그 시끄러웠던
도시가 한산하게 느껴졌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는 아지랑이 치듯 열기가 피어오르고,
나와 여러 직장 동료들도 더위에 지쳐 넋을 놓고 에어컨 밑에 모여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어디로 갈까? 누구 계획 있는 사람?"
과장님의 질문에 한 명씩 자신의 여름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 이번에 산으로 갈까 합니다. 공기도 좋고, 운동도 되고, 더구나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
고 있으면 어디 천국이 따로 있겠습니까?"
내 옆에 있던 기사 아저씨가 이어서 이야기했다.
"그것보다는 그냥 집에 누워서 선풍기틀고 대자리에 누워서 수박이나 먹으면서 노는 것이
최고지. 안 그렇습니까?"
"아저씨는 어떻게 매년 계획이 똑같아요?"
모두들 소리내며 웃었다. 아저씨도 우리들을 따라 웃기만 한다. 과장님은 나에게 물었다.
"명준이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예? 전......"
'따르릉~'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에 전화가 걸려왔다.
"먼저 전화부터 받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받으러 가고 그들은 계속 모여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 C&I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 집에 컴퓨터가 이상해서 그라는데, 빨리 좀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급하신가 봐요?"
"예, 내일까지 해야하는 것이 있어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지금 얼마나 급한지를 알 수 있었다.
"예,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여기는 의정부 ○○동 ○○아파트 ○동 ○○○호입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시간쯤......"
난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럼 빨리 와주세요."
전화를 끊고 과장님에게로 갔다.
"무슨 일인가?"
"예, 컴퓨터 수리를 해달하고 합니다."
"그래? 어쩌지? 지금 이태근씨도 없고...... 어쩔 수 없군 내일 이태근시 오면 말하게."
A/S를 맞고 있는 태근이는 오늘 몸이 많이 아파 회사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일까지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급하다고......"
"그래? 음, 어쩌지? 자네 컴퓨터 수리 할 줄 아나?"
"예, 조금은......"
"그럼, 자네가 좀 다녀오게."
"예, 잘 알겠습니다."
"더운데, 미안하네......"
"아니, 괜찮습니다."
사무실을 나서자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안에서 느껴지지 않던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차가운 에어컨바람을 느끼기 위해 목마른 개처럼 헉헉거리며 에어컨 스위치를
올린다. 에어컨 바람을 조금씩 느끼면서 나의 짜증도 조금씩 가라앉고, 서서히 종이에 적힌
주소로 차를 움직여 갔다. 이상하게도 그 종이에 적힌 주소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난 점점
긴장이 되었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생겼다. 꼭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고, 그 느낌은
맞아 떨어 졌다. 그 주소에 적인 집에 도착하고 벨을 누르고, 잠시 후 나온 사람. 바로 지금
의 나의 아내를 난 그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 열린 문틈사이로 세어 나오는 아늑한 향기
와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 그리고 그 문안 현관에 서있는 아름다운 한 사람. 난 정신이 멍해
졌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오직 그녀만이 보였다.
"뭐하세요? 들어오시지 않고."
난 애써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예."
난 그녀를 따라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무엇이 안되고, 어디가 이상하다며 이야
기했지만 나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그녀의 이 말에 정신을 다시 한번 차리고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어디가 이상하다고요?"
난 그녀의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컴퓨터가 커지지 않아요."
몇 가지 테스트 후, 난 윈도우 프로그램에 손상이 간 것으로 단정하고 윈도우 재 설치를 시
작했다. 설치가 시작되자 난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급하신 일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
"아까 전화로 급하다고 하였잖아요."
"예. 내일까지 정리해야하는 보고서가 있어서요."
지금은 분명히 여름이고, 대학은 방학중이였다.
"방학 아닌가요?"
"계절학기를 듣고 있어서요."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조금......"
그녀의 말은 나 역시 작은 미소를 보여줬다. 나의 미소를 본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리나요?"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커피한잔 하시겠어요?"
"예, 그르죠."
잠시 후 그녀는 예쁜 컵에 커피를 담아서 왔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계속되었고, 난 커피의
맛이 어떤지 못 느낄 만큼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지 얼
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컴퓨터는 이미 다 고쳐져 있었고, 난 마무리 설정을 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다 고치면 그녀와 헤어져야만 했고, 언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지 몰랐
기에 나의 손놀림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느리게 한다고 해고, 컴퓨터는 이미 다
고쳐진 상태였고, 난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와야 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부디 좋은 하루 되시고요."
난 말을 늘려가며 이어갔다.
"보고서 잘 쓰시길 바랍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난 그녀의 배웅을 등지고 그녀의 집에서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다신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영원히......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난 여러 동료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나 혼자서 여기 바닷가에 왔
었다. 처음에는 수미와 같이 올려 고했으나 아버지 생신이 있어서 올 수가 없었다. 어쩜 혼
자 온 것이 다행 이였는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난 다시 그녀를 만났으니까...... 저기 보이는
바위에서 그녀가 먼바다를 보고 있었다. 난 처음에는 그저 한 여자가 시련을 당하고 저 먼
바다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그 여자가 왜 그러는지 궁금해 졌고, 그래서
그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호기심 속에 숨어 있는 기대감과 긴장이 극도에 도달했을
때, 난 그녀가 얼마 전에 본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알 수 없이 터질 것 같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난 길게 심호흡을 하고 그녀의 곁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나의 말끝은 흐려졌다. 그 때문인지 바다 바람 때문인지 그녀는 나의 목소리를 못들은 것
같았고, 난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았다. 내가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 다시 마을 쪽으로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마을에 도착하고 여관을 잡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여관방을 구했을 때, 하늘에서는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꿍~~꽝~~!'
하늘을 가르는 불빛과 천궁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다시 그녀가 있는 곳
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 그 바위 위에 있었다. 난 서둘러 마을의 작은 슈퍼로 갔다. 그리곤
우산을 하나 구입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어 줄 것을 생각하
며, 큰 기대감을 안고 그녀에게로 뛰어 갔다. 그러나 내가 그 바위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난 실망감을 안고 마음 한쪽에 있는 주황색의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안
을 돌러 보았다. 연인인 듯한 한 쌍의 남녀와 한 할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있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드릴까?"
"소주하나 주세요."
"안주는?"
"아무거나 맛있는 걸로 주세요."
"그럼 장어구이로 하고, 우선 이것으로 먼저 드세요."
아주머니는 뚜껑이 따져있는 소주와 작은 유리잔 그리고 어묵꼬치국물을 한 사발 떠서 주었
다. 난 소주를 따라 한잔을 마시고 국물을 조금 마셨다. 그때 누군가 들어왔다.
"어! 아저씨 여기 무슨 일이에요?"
"어! 반갑습니다. 그냥 휴가 왔어요."
"예, 저번에 감사했어요."
"아니, 별말씀을...... 근데, 저 아저씨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무 살인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작아졌다.
"나랑 동갑이네......, 우리 서로 말 놓고 지내자. 난 김명준 이라고 해. 넌?"
"난 김영미......"
"응, 근데 아까 저 바위 위에서 뭐했니?"
나의 질문에 그녀는 약간은 놀란 듯했다.
"응? 그냥 바다보고 있었어."
"응."
난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한잔할래?"
그녀는 약간 주저 하다가 내가 권하는 잔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한잔을 마시고 기침을 하
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 너 술 못 마시는구나!"
"응. 나 처음 마셔봐. 나 한잔만 더 줄래?"
"괜찮겠니?"
"응."
난 그녀가 서서히 걱정되었다. 그녀는 네 잔 정도를 마신 뒤, 내 옆에 기대어서 나에게 간신
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만약에 이 세상에 너 혼자 남는다면 어떻게 할거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바로 잡아 주었다. 순간 손에 따뜻한 물기
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 포장마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로 눈을 돌렸다. 갑자기 낮이 뜨거워졌다. 비는 그치고 밖은 벌서 어둠이 깔려있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업고 내가 잡은 여관방에 가서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고, 그
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잠들은 모습을 잠시 살펴보았다. 세상살이에 많이 지쳐 있는 듯 했
다.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에게 관한 나의 관심과 걱정은 점점 늘어가
기만 했고, 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바닷가로 나왔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누웠었다. 밝
은 달빛은 바닷물을 더 푸르게 하였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나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 있던 외로움과 슬픈 기억들을 시원하게 청소해주듯...... 점점 한
기가 느껴져 옆에 있는 숲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와서 모닥불을 피우자, 매운 연기가 푸른 바
다와 저 빛나는 별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난 사라져 가는 연기와 파도소리를 느끼며, 모래사
장에 누워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에 집중해있었다. 그녀였다. 술이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듯 그
녀는 약간 비틀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뛰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어! 고마워."
"더 자지 왜 나왔어?"
"해뜨는 것이 보고 싶어서......"
그녀의 말속에는 간절한 소망이 있는 듯했다. 그녀를 모래사장 위에 앉히고, 서서히 밝아오
는 동쪽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 그녀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왜 저 바다를 보고있었는지 물었지?"
"응."
"알고 싶니?"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니냐. 해줄게. 내 이야기......."
그녀는 나에게 아픈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했다.
"작년 이때쯤 이였어. 이 바다에 우리 가족은 피서를 왔었어. 난 지겨운 고3의 생활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지. 그래서 수영을 잘 할 줄도 모르면서 물에 뛰어 들어갔고. 난
물에 휩쓸려 그만 발이 닫지 않는 곳까지 가게 됐어. 나의 비명소리에 나의 아버지는 날 구
하러 물속에 뛰어 드셨고, 아버진 날 구하시고는 돌아 가셨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
머니는 위암 판정을 받았고, 병원에 입원해 계셔. 그때 내가 물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울기 시작했다. 난 그녀의 옆에 가서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살며시 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지금가지 살아온 시간들을 들려주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나에게 말했다.
"나, 너 한번 안아봐도 되니?"
난 그냥 미소만을 보였다. 그녀를 나의 품에 안고 난 해가 돋아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
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고 믿으며......
여름 휴가가 끝난 뒤 그녀와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난 바쁜 시간 가운데에서도 그녀에게
매일 전하를 해주었고, 가끔은 만나서, 서로 마주 앉아서 밥을 먹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나는 놀이 공원에 놀러 가게되었다.
오늘은 영미와 놀이 공원에 놀러 가기로 했다. 난 서둘러 약속장소로 나갔지만, 이미 약속
시간을 넘긴 뒤였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영미는 나무아래의 의자에 앉아 작은 분수를
보고 있었다. 난 장난 끼가 발동했다. 조심조심 그녀의 뒤로 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뒤
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 숙녀 분께서 홀로 이런 곳에 왜 계십니까?"
영미는 놀란 듯 했으나 이네 나 임을 짐작했는지, 장난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애인이 나오기로 했는데, 안나오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난 서서히 그녀의 옆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만약 그 사람이 지금 오면 이렇게 코를 잡아서 빨기 코로 만들어 줄 거
예요."
그녀는 나의 코를 잡으면서 말했다.
"아야!"
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가을날씨 치고는 매우 추운날 이였다. 난 그녀의 손
을 꼭지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
"응, 아주, 아주 많이 기다렸어."
그녀의 애교 서러운 모습에 난 다시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미안, 어제 밤에 보고서 좀 쓴다고......"
그녀는 아직 화가 다 안 풀린 것 같았고, 난 그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본다.
"놀이 공원에 가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만 화 풀어."
"정말 맛있는 거 사줄 꺼야? 비싼 건데......"
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끼손가락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야 화가 풀린 듯 했다. 우린
서둘러 놀이 동산으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입구를 지났을 때 그녀가 나에게 살며
시 말했다.
"아까 약속 기억나지?"
"무슨 약속?"
"벌써 잊어 버렸어?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했잖아."
"아, 뭐가 먹고 싶으세요? 공주님!"
"저기 보이는 아이스크림이 먹고싶구나."
"알았어. 금방 사줄게."
"어허! 공주에게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뭐라고?"
우린 서로 큰소리로 웃으면서 아이스크림 가계 앞으로 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우린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다.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마냥 즐겁기만 했다. 놀이 기구를 하나
둘 타고는 배가 고파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우린 음식을 주문했고, 조금 있자 음
식이 나왔다. 난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살며시 살펴보았다. 그녀가 음식을 먹다가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말했다.
"안 먹고 뭐해? 나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그녀의 천진난만한 말에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리곤 나도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우린
음식을 다 먹고, 유령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무서워서 싫다고 했으나 난 그녀를 설득했다.
"내가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정말 옆에 있을 거지?"
"그럼."
우린 유령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역시 눈을 뜨지 못하고, 나의 손에 의지한 채 따라
오기만 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귀신소리와 갑자기 나타나는 형상들로 인해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았을지도 모를 그 거리가 얼마나 길게만 느
껴졌다. 그녀 역시 겁에 많이 질려 있는 듯했다. 출구에 거이 다 나왔을 때는 나의 품에 안
겨 있었고, 눈에는 작은 물기가 서려있었다. 출구에서 나와 그녀와 나는 나무 아래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잠시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낙엽이다."
나무에서 약간 노란 나뭇잎이 하나 떨어졌다. 아직 가을의 빛깔을 담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
만 그녀는 이미 가을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낙엽을 주워서 자신의 작은 손
가방에서 꺼낸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 우리가 낙엽에 집중해 있는 동안 사람들을 우리들
앞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여들지?"
그녀의 질문에 난 주위를 살펴보았다. 길을 따라 줄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을 그 줄 밖에서
하나둘 모여 저 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행렬이 있나봐."
"나 화장실 좀 갔다가 올게 여기 그대로 있어."
"응. 빨리 갔다가와."
그녀는 나를 홀로 두고 저 멀리 사라졌다. 얼마 있지 않아. 가장행렬이 시작되었다. 요란한
음악소리를 앞세우고 여러 분장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서서히 인파 속에서 가장행렬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 봤을 때, 난 이미 약속한 자리에서 많이 떠나 있었
다. 난 서둘어 처음 그 자리로 갔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은 듯 했다. 난 자리에 앉아서 기
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난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기 저기를 헤매며 돌아 다녔다. 심지여 가까운 여자 화장실 앞에서 들어가거나 오는
사람에게 그녀가 안에 있는지 물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
나 정신없이 여기 저기를 돌아 다녔는지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난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
을 취했다. 그때, 나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김영미라는 분이 김명준이란 분을 찾습니다. 이 방송을 듣는 김명준님께서는 출입구 안내
실로 와 주십시오."
난 서둘러 안내 실로 갔다. 그곳에는 그녀가 초라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치 엄마
를 잃어버린 아이들처럼......
"영미야!"
나의 목소리에 그녀는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그리곤 울음이 석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갔었어?"
"미안."
난 그녀에게 '미안'이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와 놀이 공원을 나왔다.
그리곤 조용한 술집에 들어갔다.
"여기 분이기 조용하고 참 좋다."
"응."
그녀는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듯 했다. 난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사람들에 휩쓸려서 그만....."
"아냐, 괜찮아."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 졌다.
"무슨 일 있니?"
"응, 사실은......"
그녀는 조금 망설이더니 곧이어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널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으셔야 하거든. 그래서 내일부터
입원하셔 난 어머니를 간호 해야할 것 같아."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참으로 눈물이 많은 그녀였다. 난 그녀의 눈가를
나의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걱정마, 어머니도 금방 건강해지실 거야."
"응, 고마워."
그녀와 나는 간단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와의 짧지만 긴
헤어짐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놀이공원에서의 그녀와이 만남 이후 한동안 그녀와의 연락도 만남도 힘들었다. 난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도 어색할 것 같고
해서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적고 고치기를 여러 번한 뒤
난 아무리 읽어도 나의 마음에 드는 하나의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다시
금 나의 머리 속에서 뚜렷하게 읊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벗 영미에게.
안개 속의 숲을 지나 밝은 햇빛이 비치는 푸른 들판에서 전 클로버 꽃을 보았습니다. 그리
고 이 꿈에서 깨어, 전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과의 소중한 만남을 위해 꾸었던 그 꿈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동안......
이제 전 당신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관계로 지내길 원
하는지. 당신이 이슬을 다 읽은 후, 느끼게 될 나에 대한 감정을 전 알 수 없지만 나의 마음
은 당신을 향해 뻗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전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힘들어 할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큰 고목처럼,
당신이 슬퍼할 때, 당신을 안아주던 엄마의 품처럼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
다. 이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내가 이 편지를 그녀에게 줄 때는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떠돌아 다녔다.
'그녀가 이 글을 읽고 많이 혼란스러워 하면 어쩌지?'
'이 편지를 주지 않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것일까?'
나의 걱정 속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
해 있는 병원에 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침대에 몸을 기대어 잠시 잠들어 있는 듯했다. 그녀
의 곁으로다가 갈수록 그녀의 어머니께서는 나를 주시하셨고, 나 또한 그녀의 어머니를 바
라보고 있었다. 내가 침대 옆에 다가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물었다.
"누구세요?"
"예, 전 영미 친구입니다."
"반가워요. 근데 어쩌죠? 영미가 방금 잠이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몸은 좀 어떠신 지......"
"수술을 하면 다 나을 수 있다고 하던데......"
"예, 빨리 건강을 되찾으시길 기원합니다."
"고마워요."
"저, 영미가 일어나면 이 편지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르죠."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냥 가세요?"
"영미에게 그 편지 보여 주면 알 겁니다. 그럼 이만......"
난 그녀의 어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병실에서 나왔다. 이렇게 그녀에게 편지를 전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의 집으로 답장이 왔었다. 그녀의 작은 필체로 적힌 그 예쁜
글씨와 그녀의 향기가 나는 듯한 그 종이. 난 아직도 그녀의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
고 기억하고 있다. 사랑이 가득한 그 편지의 내용을...... 그녀의 답장으로 서로에 대한 우리
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난 그날 이후 그녀의 집으로 그리고 병실로 편지를 쓰기 시작
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걱정이
대단했으므로 어머니의 병과를 나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울음이 가득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전화이었다. 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주고 그녀를 달래주었다. 나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의 어머니
초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난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고 있었다. 영미는 오늘도 나에게
집에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난 못이기는 척 집으로 왔다. 그러나 날 기다리고 있는 것
은 아버지의 죽음 소식이었다. 난 영미에게 전화를 해 나의 사정을 말했다. 영미는 다시 울
기 시작했다. 난 영미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나의 고향으로 향했다. 집은 벌써 초상중이였
고,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방문해 있었다. 난 내 아버지의 영전에서 울이 않겠노라 다짐했
다. 그런 나이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수
많은 기억들이 나의 머리 속을 다시금 수놓았고, 그 기억들 중에서 난 행복했던 기억을 찾
아내려고 노력했다. 어쩜 이것이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의 행복했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마지
막 시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미는 나에게 청혼을 해 왔다. 그녀가 나에게 청혼을 하던 그 순간을 난 잊지 못할 것
이다.
아버지의 49제를 마친 뒤, 난 그녀를 어느 술집에서 만났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정말 이세상에 나만 남았구나."
"내가 있잖아."
"응, 네가 있지."
난 점점 술에 취해 갔다.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나의 차안에 있었다.
"여기가 어디니?"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놀라며 대답했다.
"응? 너의 집 앞......"
"응. 네가 운전했구나."
"응."
"몇 시니?"
"새벽 두 시."
"벌써?, 나 아까 실수 한 것 없니?"
"응? 응. 없어."
"근데, 너 왜 그래?"
"아니냐. 나 그만 갈게."
"어떻게 갈려고?"
"택시 타지 뭐."
"그냥 이차 타고 가."
"너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고?"
"전철 타지 뭐."
"아니냐. 그냥 택시 타고 갈게."
"그냥 타고 가."
"너 집 열쇠도 여기에 있잖아."
"난 지갑 속의 비상키를 보이며 말했다.
"여기도 있어."
그리곤 재빨리 차에서 내렷다. 차에 기대어 차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조심해서가."
"응, 잘자."
차 문을 닫고 난 그녀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도 나의 집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잠이 쏟아졌다. 난 옷을 하나둘 벗어 던지고는 안경을 책상 위에 두고, 침대에 뛰
어 들어 잠을 청했다. 오늘밤에는 왠지 영미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내 귓가에 우리고 있다. 난 놀라
서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의 집은 분명했다. 그런데 저쪽에 한 여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듯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위를 다시
둘러본다. 그때 그녀가 날 보고 말했다.
"이제, 일어났니?"
"누구니?"
나의 집에 와본 사람은 수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수미가 나의 집에 올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수미의 것이 아니었다.
"어! 나도 못 알아보다니, 실망인걸?"
목소리만으로는 분명 영미였다.
"영미니?"
"이제 알아보겠니?"
"나 안경 좀 찾아 줘."
"응, 여기."
안경을 쓰고도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만났지만, 나의 집에는 들어 울려고
도, 들어 온 적도 없는 그녀였다. 그런 영미가 지금 내 앞에서 아침밥을 하고 있었다.
"근데, 너 살림 어떻게 하는 거니?"
"냉장고에 먹을 거라곤 계란뿐이잖아."
"응? 내가 계란을 좋아해서 말야."
난 웃으며 말했다. 나의 웃음을 본 그녀는 곧이어 나에게 한마디를 더 했다.
"너, 어제 안 씻고 잤지?"
"응? 어제 좀 피곤해서....."
갑자기 부끄럽기 시작했다. 나의 모습을 스스로 상상해 보며, 그녀의 앞을 피해 화장실로 뛰
어 갔다. 머리는 하늘을 향해있었고, 눈에는 눈곱이 붙어있었다. 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
고서야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
"와서, 아침 먹어."
"응."
난 영미가 한 밥을 한술 먹으면서 말했다.
"보기 보단 맛있네."
"보기가 어떠해서?"
"아니, 예쁘다고."
"정말이지? 고마워."
"근데, 무슨 일이니?"
"응? 그냥."
그녀는 웃으며 내 앞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
고 있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우리 이러니까 정말 부부 같다. 그치?"
난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 당황한 목소리로 기침을 한 후 이야기했다.
"응? 응."
내가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나서 그녀를 마주 보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정말 맛있는 아침 먹었어."
"그래?"
"응."
"그럼 매일 맛있는 밥 먹게 해 줄까?"
난 그녀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나에
게 다시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난 그녀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며칠전까지 아니 내가 수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는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있었다. 난 어쩜 그 행복이 있었기에 수미의 불행을 그냥 볼 수만
은 있을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배려는 나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이제는 이
세상이 싫어진다. '이혼' 이 짧은 두 음절의 말이 한 사람을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요즘 사
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혼이란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요즘 세대들은 그 한 단어
가 자신의 아이와 그리고 서로의 기억 속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다. 단지 그 결혼이란 그 순간의 실수를 만회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혼, 이 단어는 나에게 있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단어이지만. 이 단어 역시 사회에
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내가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은 이 이혼 이 한 단어를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좀 더 크고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르고 있다. 난 이제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
도 단, 한 순간의 오해로 이혼이란 단어를 생각하고, 나의 곁을 떠나 간 것이다. 난 서서히
저 태양을 향해 걸어간다. 점점 시원한 바닷물이 내 몸에 느껴지고, 저 태양은 점점 나에게
다가 온다. 난 이제 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영원한 그리고 영원할 이 바다에 나
의 몸을 던진다. 이젠 아무 것도 아무런 느낌도 없다. 나의 의식은 서서히 흐려지고 나의 기
분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간다. 점점 흐려 가는 정신 속에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난 그 영상에 집중했다. 그 영상은 나의 친어머니를 나타내고있었다. 나의 어머니
와 10년의 재회의 순간을......
"내일은 어버이날이니까.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부모님에게 드릴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
보세요. 그럼 반장."
"차려, 경례"
반장의 힘찬 목소리에 우리 모두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교문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카네이션을 팔려나온 사람들로 부적 대고 있었다. 난 그 사람들 틈에서 카네이션 2송이
를 구입했다. 2송이를 사고서도 왠지 마음한구석이 서운하기만 하다. 왜일까? 난 서둘러 집
으로 향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카네이션을 탁자 위에 던져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와 처음 치를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점점 더 흘러갔고, 밤이 깊어갔다. 늦은 시각.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오늘도 술에 취해 계셨다. 그리고 나에게 천천히 말을 했다.
"명준아, 동생이랑 같이 아버지 좀 데리러 오렴."
아버지는 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신 것 같다. 난 동생이랑 같이 아버지가 계시는
아버지의 친구분 집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아미 술에 많이 취해 있는 듯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를 본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친구분께 말했다.
"재들 엄마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해."
"누구? 명준이 친엄마?"
난 순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나의 친어머니라니, 10년의 세월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기억들이 하나둘 다시금 나의 머리 속에 펼쳐지기 시작했고, 혼란 속
에 휩싸여 갔다. 얼마후 난 나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오직 나의 손을
잡고 하가지 말만을 되풀이했다. 눈물을 흘리며......
"명준아, 미안하다."
나의 마음속에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 왔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
을 잘못한 것인지 나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얼마 동안 우린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
늦은 관계로 잠을 잤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나의 옆에서 주무셨다. 나의 손을 꼭 잡고. 10년
만에 아들의 손을 잡고 잠에 드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잠에 약간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너희들 밖에 없단다. 너희를 두고 나온 것은 엄마의 큰 실수였어. 엄마는 지금도 그
랬고, 앞으로도 혼자 살 꺼야. 너희들이 엄마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말이야."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행복으로 가득했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한사람에게 행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다음
날, 난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가야만했다. 나의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난 어머니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토록 나를 잊지 못하고, 그 힘든 생활을
이어가려고 하시는지......'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고, 나의 기억 속의 혼란도 점점
사라져 갔다.
나의 어머니! 나 역시 어쩌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
에서 난 어쩜 나의 어머니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곁에 두기에는 너무 힘
든 사람이기에 난 나의 어머니를 잊으려고 한 것 같다. 이제 나의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흐려져 가는 나의 의식 속에서 나의 어머니를 애타게 불러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라고 말이다. 이제 어머니의 모습조차 보이질 않는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일까?
나는 방금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왔어요. 거실에는 아직 그 봉투가 있습니다. 난 혹시 남편이
꺼내어 보았는지, 그 봉투를 다시 집어 살펴봅니다. 아니, 꺼내어 보았기를 바라며, 봉투 안
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는 순간 전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그 안의 내 편지는 그
대로 있거든요. 남편은 아직도 펼쳐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속으로 말합니다.
'바보, 한번만 봉투 안을 들여다보지.'
난 봉투를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남편이 들어오면 남편에게 전 이 봉투 속에
든 것을 꺼내어 보이며, 남편에게 큰소리로 읽어 줄 생각입니다. 안방으로 들어와 화장대 위
에 봉투를 놓아두려고 할 때, 전 작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답니다. 그 종이에는 검고 약간은
알아보기 힘든 글씨들이 적혀 있습니다. 전 그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한 자 한 자, 한 문
장 문장을 읽어 갑니다. 그런데 점점 글을 더 읽어 가면 갈수록 남편이 떠오르고, 남편에 대
한 걱정에 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말하라면 전 바로 당신이라고 자신 있
게 말할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택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라면 그
역시 바로 당신일 것입니다. 나의 목숨으로 단 한사람만을 되살릴 수 있다면 전 과감히 당
신을 되살릴 것입니다. 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갈
라놓고 저의 세 명의 어머니와 같이 당신 역시 저의 곁에서 떠나 갈 것을 생각하니, 전 이
세상을 살아 갈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전 떠납니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당
신과 영원히 이별이 없는 인연을 기약하며, 이세상을 떠나렵니다. 부디 당신의 남은 삶이 행
복 속에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남편의 편지는 나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끝부분의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둥, 당신의 남은 삶에 행복 속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둥. 정말 남편은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적은 것일까요? 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점점
내 마음과 내 머리 속에는 공포만으로 채워집니다. 전 주위에 없어 진 것이 없는지 살펴봅
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편지가 놓여 있던 자리에 다시 시선이 가고, 그곳에서 나의
시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나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곳, 우리 신혼여행의
마지막날을 보냈던, 그곳의 사진이 없어진 것입니다. 전 서둘러 짐을 챙깁니다. 노란 봉투도
핸드백에 구겨 넣고 전 아파트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타곤, 나의 남편이 아직 아무런 나
쁜 행동도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바다로 달려갑니다. 나의 슬픔과 아름다운 기
억이 모두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창 밖으로 많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전 그 풍경들이 어떤 형상인지를 알 수
가 없군요. 저에 눈에는 이미 많은 눈물이 고여 있고, 나의 손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가 손에 쥐어 있습니다. 전 남편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편지에 남편은 나에게 '내 남은 삶이 행복 속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남
편은 정말 바보입니다. 전 남편 없이는 어느 그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남편
을 처음 만나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도 남편은 너무도 순진했죠.
전 내일까지 보고서를 적어야합니다. 그런데 도 이 고물컴퓨터는 말썽을 부립니다. 전 A/S
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곧 이어서 한 사람이 벨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사람입
니다. 계속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있거든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
니다. 어찌되었던, 저의 컴퓨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전 보고서를 무사히
마쳤고요. 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갑니다. 오늘도 의사 선생님은 같은 말만 하십니다.
이것저것 조심해야 하는 것만 잔득 알려 주였거든요. 병원 문을 나왔을 때, 어머니께서는 저
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이제 몇 일 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구나."
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떨구고 맙니다. 저의 실수로 저의 생명과 본인의 생명을 바꾸신 아
버지. 저에게는 소중하고도 그리운 이입니다. 어머니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 바다에 다시 가보지 않겠니?"
난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신 그 바다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 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서는 다시 말합니다.
"그 바다에 가서 아버지에게 너의 자란 모습이라도 보여주렴."
어머니께서는 왜 자꾸 저에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일 전에는 저에게 자신 또한 죽
으면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린 그 바다에 나신의 뼛가루로 뿌려 달라고 저에게 울음을 머금
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힘이 드신가 봅니다. 전 어머니의 손을 한번
꼭 쥐어 보고는 운전석으로 가서 안고 맙니다.
전 오늘 이 바다에 왔습니다. 나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이 바다 말입니다. 전 바닷가의
한쪽 끝에 있는 바위 위에 힘들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를 봅니다. 나의 아버지
에게 마음속으로 소리치면서 말입니다.
'아버지의 목숨으로 구한 이 딸은 이렇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아버지 보고싶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전 그만 눈물이 나오고 맙니다. 하늘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아님,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
께서 슬퍼하시는 것인지. 갑자기 어두워지곤,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전 그 비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의 옷이 조금씩 젖어 갈 때, 비를 피해서 절벽 밑의 나무사이
로 해서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우산을 들고 내가 있던 바위로 뛰어 가
고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비가 오는데 어딜 가는 거지?'
전 그냥 속으로 물으며, 다시 비를 피해 나무 사이사이로 몸을 옮겨갑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사람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걸까요? 전 낮에 잡아 놓은 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 역
시 나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방입니다. 전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한 후, 마을 한쪽에 있는 포장 마차로 갔습니다. 그리고 전 그곳에서 저번에 컴퓨
터를 고쳐 주러온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에 관
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건넨 술에 취해서 난 정신을 잃고 말았고
요.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느 한 여관방 이였고,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로 다가와서 날 부축해줬고, 난 그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