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石花)의 추억
국어책에 종종 나오는 이름을 쓰는 내 친구가 자연산 굴로 손수 굴전을 부쳤다고 카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섬에서 올라와 자취 생활을 시작했으니 요리 솜씨야 물을 것도 없으리니 사진만으로도 벌써 맛있어 보였다. 자연산 굴전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내 상념이 나를 50년 전 그 친구 자취방으로 데려간다.
1975년(76년이던가?) 1월, 구정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아침이었다. 2월이었던가(?). 전날 아마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 이야기(?)로 밤샘을 하다시피하고 좀 늦게 일어났다. 친구가 조간신문에서 놀라운 소식을 먼저 보고 내게 건네주었다. 내 고향 마을 바다에서 배가 뒤집혀 서른 명이 죽고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비보였다. 폭풍을 무릅쓰고 굴 종패가 자랄 바위를 바다에 뿌리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사한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조그만 호수 같은 그 좁고 얕은 바다에서? 이웃 마을에는 내 중학교 동창이 둘이나 살았다. 나는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내 고향에서는 굴을 석화(石花)라고 한다. 얕은 뻘밭에 흩뿌려진 작은 바윗덩이에 종패가 달라붙어 자라면 마치 꽃처럼 피어나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어머니는 굴을 꿀이라고 부르고는 하셨다. 고향 뻘밭에서 피어난 석화는 기름지고도 꿀처럼 달았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고향 바다 뻘밭에 바윗덩이를 뿌린 것은 일정시대 우리 마을에 살던 일인 교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우리 마을 뻘밭에 석화가 많았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했다.
고향 마을에 들어가니 만나는 사람마다 눈덩이가 퉁퉁 불어 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당숙 댁에는 마을 남정네들이 가득 모여 꽃상여를 손보고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가 이웃 아주머니 몇 분과 모여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누런 상복이었다. 50여 가구가 사는 이웃 마을 청장년 30명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고 말았으니 누가 있어 상복을 지으며 장례를 치를까. 장례 준비는 고스란히 우리 마을 몫이었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는 다시 당숙 댁으로 내려갔다. 막내 당숙에게 사연을 들었다. 이웃 마을 출신으로 내 사촌 형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다. 우리 마을 뻘밭 바윗덩이가 항상 부러웠던 이웃 마을 사람들은 중앙정보부 직원의 바로 아래 동생에게 새마을지도자를 맡겼다(그 막내동생이 내 중학 동창이다). 그는 형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대통령 하사금 100만 원을 받아냈다. 당시 100만 원은 상당한 액수였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그 돈으로 우선 바윗덩이를 사다가 바닷가에 쌓아놓았다. 울력에 나올 청장년들에게 노임 몫으로 공평하게 상당한 돈도 분배했다. 이제 해가 가기 전에 배에다 바윗덩이를 싣고 바다에 나가 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 시절 농촌 마을에서 추수가 끝난 겨울에 손에 돈을 쥔 남정네들이 무엇을 했을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노름판뿐이었다. 연말까지 사업을 마치고 상부에 보고해야 하건만, 노름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마칠 수 있는 놀이인가. 사업 보고에 일차 책임이 있던 면장은 안달이 났다. 설이 다가오자 양력으로는 해가 지났어도 음력으로라도 해를 넘겨서는 안 된다고 날마다 재촉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면장은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하소연했다. 중정 직원은 득달같이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다. 형님의 호통을 들은 새마을지도자는 갑자기 급해졌다. 날씨가 궂어져 물살이 심상치 않아 마을 어른들이 말렸음에도 망설이는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바다로 나갔다. 과적에 물살마저 거센 바람에 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해병대 출신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막내 당숙은 노름판에서 딴 돈을 골고루 부좃돈으로 내면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날 장례식을 치렀다. 이웃 마을로 들어가는 신작로로 나갔더니 신작로 양쪽으로 검정 승용차들이 꽉 차 있었다. 면사무소 다니던 마을 친구에게 들으니 도지사, 부지사, 해남군수, 국회의원, 경찰서장 등 전라도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다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꽃상여가 30번을 들고나고 하고 나서야 장례식은 끝났다. 남자들은 모두 별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울부짖던 아낙들도 나중에 지쳐서 무표정하게 메마른 곡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깔다 만 바윗덩이의 덕을 이웃 마을 사람들은 끝내 볼 수 없었다. 종패가 붙어 석화를 피우기도 전에 뻘밭은 사라지고 말았다. 박정희가 김대중을 떨어뜨리려 공약했던 간척사업이 느리지만 실현되어 그 풍요롭던 뻘밭은 황량한 논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농게, 달랑게, 칠게, 털게, 방게, 맛, 바지락, 고동, 꼬막, 갯지렁이, 운저리, 짱뚱어, 낙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개펄. 개펄 위에 흩뿌려진 바윗덩이에 피어난 석화. 밀물이 밀려오면 개펄 위로 넘치는 바닷물에는 전어, 숭어, 놀래미, 농어, 우럭, 돔, 갯장어, … . 바닷물 위를 성큼성큼 뛰다시피 걸어 다니며 긴 부리로 먹이 사냥을 하는 두루미, 황새, 왜가리, 청둥오리, ….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저 황량한 논바닥 밑으로 한정 없이 내려가면 혹시 석화가 피어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이 가면 그 꽃이 지상으로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 서른 명의 혼령이 함께 그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