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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국 권영호
[대구문단일화] 60,70 술집과 단골 | |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발걸음을 옮겨도 어울리던 거리였다. 한잔 술에 겨워 시와 노래를 흥얼거려도 멋으로 받아주던 시절이었다. 비가 내려도 우산 없이 걸었고, 노을이 비끼면 시에 젖어 거닐었던 거리. 그 골목마다 소박한 술집이 있었고, 문인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더러는 방만한 패기에 휘청거리고, 더러는 치기어린 지적 교만에 빠지기도 했지만, 다방과 대폿집을 전전하며 문학적 감성을 토로할 때면 겨울밤도 짧았다. 그 술집에서 낭만과 열정이 강물처럼 굽이쳤고, 술잔 속에 인생과 문학에 대한 담론이 무성했다.
옛 이기영 산부인과 맞은편에 자리했던 ‘옥이집’은 60~70년대 대구 문인들의 최대 단골집이었다. 신동집·박훈산·전상렬·정석모·조기섭·박용주·서석달·권기호·이재행 등 대구 문인들과 예술인 그리고 언론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막걸리 잔을 주고 받았다.
저녁 무렵의 옥이집은 대구 문화인들의 집결지였다. 전상렬 시인은 이 집에 아예 치부책을 만들어놓고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고, 권기호 시인은 탁자 위에 올라서서 애창곡인 이태리가곡 ‘무정한 마음’을 불렀다. ‘카타리 카타리...’로 시작하는 허스키한 음색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권 시인의 주흥이 무르익었다는 신호였다.
‘메기의 추억’을 불러 좌중의 심금을 울리곤 했던 성악가 권태호도 옥이집을 자주 찾았다. 취기가 오른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고향의 봄’을 정감나게 불렀다. 이집 주인 옥이엄마는 전형적인 주모였다.
60년대에 마흔 초반의 호감이 가는 용모를 지녔던 옥이엄마는 외상술이 잦은 문인들이었지만 늘 반색을 했다. 기본 안주라곤 생고구마 썬 것과 번데기·멸치가 전부였고,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이라야 간혹 오징어무침이나 부침개를 시켰지만, 그때만 해도 대구의 ‘도가 막걸리’ 맛이 일품이었다.
문화예술인 단골들과 함께 호황을 누리던 옥이집도 옛 아카데미극장 쪽으로 옮기고 나서는 어쩐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쉬어가는 집’(옛 동인호텔 부근)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도광의 시인은 이 집에서 정석모의 시 ‘춘일한’을 나지막이 읊조렸고, 경주의 정민호와 포항의 손춘익도 가끔씩 합류를 했다. 금동식 시인은 이 집 마담과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킴이였고, ‘정대령’으로 불리던 군 출신의 정추식 시인도 단골이었다. 이재행·박해수도 즐겨찾았고, 강현국·구석본 등 당시 젊은 시인들의 모습도 어쩌다 눈에 띄었다.
문인묵객들의 단골 생맥주집으로 ‘혹톨’과 ‘가보세’를 빼놓을 수 없다. 아카데미 극장과 대구백화점 사이 골목에 있던 혹톨은 미모의 여급들이 손님을 깍듯이 맞이하던 칵테일 바였다.
출판기념회 등 공식적인 행사의 뒤풀이 때나 여유돈이 있는 날이면 혹톨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기 마련이었는데, 시조시인 김장수가 이 집 주인과 경북중(6년제) 동기라는 인연으로 자주 출입을 했고, 세익스피어를 전공한 희곡작가 김홍곤 교수(경북대 영문과)도 단골이었다.
영남중 교장으로 정년퇴임 한 윤태혁 시인은 “혹톨의 기둥 몇개는 내꺼다”라며 자칭 주인 행세를 했다. 서석달은 혹톨에서 출판기념회를 했고, 신동집·권기호·장윤익 등도 늘상 들락거렸다.
평양 서문여고 출신 마담이 운영했던 생맥주집 ‘가보세’도 문인들이 즐겨찾는 곳이었다. 혹톨에서도 그랬지만 조기섭은 이 집 맥주잔을 숱하게 날렸다. 예측불허의 고함소리와 함께 이 또한 ‘조박’ 특유의 과격성 레크리에이션이었다. 가보세는 박훈산 시인과 이재철 시인(아동문학평론가) 등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60년대 중반 대구의 대표적인 카바레였던 황금마차 골목에 있던 ‘지은옥’이란 막걸리집과 옛 자유극장 골목의 ’단골집’과 경상감영공원 인근에 있던 ’서울집’도 기억에 남는 술집이다.
대구 문인들이 어쩌다 일류 요리집이나 요정 또는 살롱에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양치상 시인(65) 덕분(?)이었다. 당시 양복점을 경영하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입상을 하기도 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양 시인은 전봉건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시집 ‘저녁 點描(점묘)’를 낸 특이한 문인이다.
김춘수·신동집·이문열·이태수 등 70년대 문인들이 양 시인의 도움으로 때깔있는 술자리를 만들 수 있었고, ‘명동 백작’으로 통했던 작가 이문구 등 경향의 문인들이 대구를 찾았을 때도 양 시인은 대구 문인을 대표해서 이들을 풍성하게 대접을 했다.
어느 근사한 요정집에서 권기호와 양치상이 어느 스님과 대작을 하게 되었다. 권기호가 문협 지부장을 하던 70년대 후반 무렵이었고, 그 스님은 후일 불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명사가 되었다.
아무튼 품격있는 술자리인 만큼 고담준론이 무르익었다. 그런데 취기가 오를수록 문학과 불교에 대한 담론도 논쟁으로 바뀌어갔다. 순간 다혈질의 권기호가 스님의 이야기에 무엇이 수가 틀렸는지 그만 술상을 뒤집어엎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스님의 장삼에 술병이며 안주 접시가 쏟아져내렸다. 스님은 태연하게 장삼을 벗어 술상 위를 쓱 훔쳐내고는 술상을 다시 봐오라고 했다. 양 시인과 스님이 다시 주거니 받거니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권기호가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가 아까 왜 나갔지?”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은 “오줌 누러 갔는거 아이가?”라고 되물었다. 양치상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 안주 새로 나왔다. 빨리 안그라마...”.
60~70년대까지만 해도 문인이 드나드는 술집에는 언제나 예술가들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70년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화가 등 예술인들이 출입하는 술집이 더욱 고급화되었다. 문인들이 독식했던 예총 회장을 문인이 아닌 예술가들이 맡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문학평론가 원형갑(전 한성대 총장) 씨는 “60년대 전반기만 해도 문화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문학이었다”며 “문인들이 모여드는 찻집이나 대폿집에는 으레 기자들과 모든 장르의 예술인들이 함께 했다”고 회고했다.
무랑루즈를 비롯해 맥심·성림·모카·금맥·보림·왕비·동문 등의 다방들도 세월따라 명멸을 거듭하며 내로라하는 대구 문인들의 낭만과 문학적 향기를 함께 누린 추억의 명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