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부시기 2 외 4편
윤관영
……
소리가 없다
독이 소리를 빨아들이납다
독에 붙은 벌집은 먹자둣빛
사납지가 않다
고요하다 못해 적적하다
들어찬 고요로 장독은 터질 듯하다
어쩌다, 장을 터는 소리가 있었을 것이고
손끝의 장을 빠는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누름돌의 가라앉는 속도는
환장하게 느렸을 것이다
참숯은 배앝는 중이다
간장과 된장, 고추장의 삼중주
다 가라앉아
잠자리 날개 같은
마른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다
독의 퇴색은 고요의 중첩이다
독을 부시는 내내
내가 고요해졌다
찻물이 가라안고 국화꽃 떠오르듯
내가 앙금되고
…… 있었다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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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 부시기 3
윤관영
어무이를 생각했다
가라앉는 장을
단지 가생이에 묻은 장을
짚끌개로 훑으며 내려가셨다
그게
종내는 단지 바닥에 기대,
서 있었다
어무이를 생각했다
장 위에 비닐을 덮고, 그 위에 굵은소금을 놓아두셨다
그것을 한 쪽으로 밀고는
장을 뜨셨을……
쇠대가리 같은 오부자의 어머니
그런, 어무이를 은애하기로
다짐 부셨다
어무인 장단지를, 매양
부단지라 하셨다
〈시와세계〉신작소시집 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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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耕을 아시는지요?
윤관영
석회암 지대라 지표만 흙인 단양, 소를 들이대서는 밭을 갈 수가 없었다 밭 가운데 돌 자갈이 심심찮아, 소가 골 따라 움직일 수 없을 뿐더러 돌부리에 걸려 쟁깃날이 남아나지 않았다 경사까지 가팔라 그 일을 사람이 대신하게 됐는데, 때로는 여자가 소의 역할을 맡아서 쟁기를 끌었으니 女人耕이라고나 해야 할지 어린 난 그 힘든 걸 남자가 끌지 않고 왜 여자에게 시킬까 궁금했다
돌에 걸려 아내의 어깨가 뒤로 휘청할세라 쟁기를 들어 돌을 타 넘고야 쟁기를 내려놓는 쟁기잡이 남편, 밭골의 상태에 따라 쟁기를 왼녘 오른녘으로 흔들었고 가래의 깊이를 조절하였다 아내 눈치 보며 내내 밭을 갈아엎어야 했다 말 한 마디 없는 勞心과 焦思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여서 양손을 가슴골에 묻고는 쟁기가 돌에 턱! 허니 걸려도 모르쇠로 턱이 무릎 닿도록 허릴 숙였다 뒤에서 다 보는 남편은 쟁기를 밀어 골을 내었다
일 끝나기 무섭게 쇠죽 먼저 쑤듯, 소가 상전이었다 쇠죽을 내고 짚검불을 깔고 끌개로 털을 긁어주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인경이 있던 날 해시(亥時) 무렵해 끓는 콩기름장판방에선 여인의 신음이 돌을 긁으며 타 넘는 쟁깃날처럼 소쿠라졌다
남자끼리 끄는 인경도 있었는데 부부간 인경은 되우 궁하거나 형제가 없거나 금실이 좋아야 했다 뿌리를 슬쩍궁 잡아당기기만 해도 딸려 나오는 감자알처럼 애들이 조랑조랑했다 돌밭농사에도
〈시와세계〉신작소시집 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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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새끼
독에서 태어났다 거무벌건
대낮에 독을 깨고 나왔다
태어날 때 내 울음소리는 독 깨지는 소리보다 컸다 내 울음소리에 내가 놀랠 지경이었다 그날은 술래잡기하던 날이었다 엉뚱깽뚱했던 나는 야트막한 부단지를 밟고 독의 뚜껑을 연 후, 그 속에 들어가 숨었다 뚜껑을 닫은, 그 캄캄칠야 속에서 놀래킬 마음이 컸던 나는, 마른 메주와 그 위에 깐 짚가시랭이 위에서 꼬치오뎅처럼 몸을 접고는 고새 잤다 다리가 저린 순간 칠흑의 어둠에 와락 식겁한 나는 오금을 펴면서 그대로 독과 함께 넘어졌다 머리와 손, 무릎이 피칠갑이었다 밭일 하시던 어머니가 달려오셨고 나는 뭔지 모를 겁에 그악스레 울었다 메주 냄새가 살을 파고 들었다 그런 나를 동무들은 독새끼라 불렀다
안적껏 막내이모는 나를 보면 웃고는 한다
간용이가 쪼까 유달르기사 했제
나는 열 살 줄어 독생자로 다시 태어났고
사금파릴 알발로 뭉개버린 겁대가리 금이 간
독새끼 시인이 되었다
〈시와세계〉신작소시집 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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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리
쌀 안치고는 손바닥을 담근 채
쌀을 누르고는 잠시 있는다 잊는다
밥물이 손등에 무언가를 그려놓는다
밥물점 같다 아른아른
서낭당 그늘이 된다
네가 아무 말 안하고 …
나 또한 아무 말 안하고 …
그래서 우리의 이별은 간단했다
실감이 안 났고, 퍽이나 싱거웠다
여러 차례 씻은 쌀뜨물 같았다
그렇게 아무 일 없는, 수십 년이었다
한 날 몸의 저간(這間)을 풍사 맞은 듯
난 해괴한 울음을 울었다
서녘 가좌리를 향해 조막손을 맞붙였다
문둥이 울음이라 했다
〈시와세계〉신작소시집 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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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윤관영
어느 날, 시의 女神 뮤즈(Muse)가 내게 물었다.
“그대의 시에는 알콩달콩한, 무슨 재미 같은 게 있습니까?”
―저는 지금, 제 시가 얼마간은 삼삼한 재미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시를 거쳐오신 뮤즈님도 아시는 일이 아닐런지요?
“그대의 시에는 정신적이든 철학적이든 어떤 깊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별로 없군요. 다만 환부를 열고 입술을 대고, 빨아들여 뱉은 어떤 촉감 같은 것은 말할 수 있겠네요. 그 또한 뮤즈님이 다 알고 계신 일이 아닌지요?
“그대의 시는 구조적으로 기술적으로 단단합니까?
―예, 제 시는 오랜 시간 水磨된 烏石과도 같습니다. 오석의 이마를 쓸 듯 저는 제 시를 대한답니다.
“그대는 그대의 시에 대해 만족합니까?
―그렇다뿐입니까, 좋다 못해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시가 좋다는 말은 自뻑 아닙니까?”
―모든 말과 글은 그 주체를 떠나고 나면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흔적만 남깁니다. 시 또한 마찬가지, 다만 시는 그 부끄러운 흔적을 줄이려는 어떤 노력이 아닐는지요. 사세당연 후회할 말이지만, 지금의 제 기분에는 제 시가 몹시 흡족하군요. 自뻑에서 自由自在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슬슬 기분이 나빠지는군요. 되물음이 아닌 공박 같아서요. 나 자신, 시를 두고 절망스런 기분을 갚을 수 없는 빚처럼 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제 앞에서 꺼져주셨으면 좋겠네요! 이 이후가 사세난연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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