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함을 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다. 우리는 갖가지 방법들을 시도해보면서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 인도함을 받는 것은 일종의 점괘나 미래를 알고 싶을 때마다 두드리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단순한 의사소통인 것이다.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대개 성경에 이미 계시되어 있다.
인도함을 받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렇게만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열린 마음과 순종을 드리는 것이다.
정지된 것보다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방향 바꾸기가 한층 더 쉽다. 자동차를 닦고 있는 아이에게 심부름을 보내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아이를 심부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열심을 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우리는 한층 더 쉽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플로이드 맥클랑, '당신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수사적인 종교적 잡담을 버리자
세상에서 말은 많이 하고 행동은 아주 적게 하는 기관을 들라면 교회 말고 다른 것이 없다. 어떤 공장이라도 원자재는 그렇게 많이 쓰면서 완제품은 그처럼 적게 낸다면 6개월도 못가서 파산할 것이다. 우리는 수백만 마디의 말을 퍼부어 대지만 그 기도들이 응답되는지 어떤지에 결코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으며 만일 그 기도들이 응답된다면 오히려 우리 자신이 실망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라고 해도 심한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 늘 장황하게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간청을 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그것을 가장 바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간청들을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하신다는 암시를 받기만 하면 즉시로 자기들의 요구를 취소해버릴 일이 말 많은 형제들에게는 많이 생길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말하는 데 안주하는 까닭은 행위들이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기보다는 "주여 내가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가 더 쉽다. 실제로 행하려고 뜻하지 않는 가운데 단순하게 그것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종교적인 위로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말들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함이 없는 말의 함정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쉽지는 않지만 단순하다. 첫째로 우리의 진심을 담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도록 하자. 수사적인 종교적 잡담을 하는 습관을 버리자. 오직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자.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자. 진리를 실천하자. 그러면 우리는 적절히 진리만 말하게 될 것이다. 행함이 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능력있는 행동들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말이 권위를 갖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에이든 토저, '거듭난 자의 생활'
영적 전쟁에도 우선 지식이 중요하다
씨름에 적용되며 또한 우리의 전투에서도 적용되는 기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붙잡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씨름 경기는 힘을 바탕으로 해서만이 아니라 지식의 직접적인 결과로도 승리할 수 있다. 만약 나와 같은 체급의 씨름장사가 나에게 씨름경기를 하자고 한다면 그는 의심할 것도 없이 씨름할 때 붙잡는 기술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가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것은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경기 도중 씨름을 멈추고 씨름 교본을 참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씨름에서 움직임과 붙잡는 지식은 미리 그에게 제2의 천성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영적 전쟁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실로 강하나 영적 전쟁에서 붙잡는 기술을 알아야 한다.
만약 씨름장사가 정말로 나와 씨름을 하려 한다면 그는 아마도 겉옷을 벗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의 경기는 빨리, 고통 없이(그에게 있어서), 힘을 조금도 쓰지 않고 치르게 될 것이다. 그의 승리는 경기 시작 전부터 보장된 것이었고, 그에게는 약간의 생각과 노력만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승부를 겨룰 때는 아니더라도 경기 전이나 후에는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평안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반응할 필요가 없는, 영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은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귀들과 싸울 책임이 있는데, 우리가 붙잡는 법을 안다면 그것은 커다란 짐이 아니라 일상적인 훈련-그 안에서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인식하는 것은 붙잡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적을 붙잡는 법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전쟁을 빨리 끝내게 하는 되받아 붙잡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가 원수들의 궤계를 인식할 때 그들은 실패한다. 그것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무지와 약함으로 강탈하지만 우리의 강함과 그의 궤계를 아는 것에 맞닥뜨리면 실패한다.
-딘 셔만,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전쟁'
우리가 점점 거룩해지는 것은
거룩함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나 조지 뮬러 같은 과거의 신앙 위인들이나 우리와 동시대를 산 마더 테레사와 같은 믿음의 거인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거룩함이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상사이다. 그것은 매일 매순간 우리가 하는 결정들, 우리가 하는 일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배치될 때에도 순종하는 것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불편이 따르더라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가 말했듯이, "우리가 점점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의 은총과 거룩해지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찰스 콜슨, '러빙 갓'
몸으로 보여주는 사랑
열여섯 살 난 소녀인 한 환자가 약 50킬로미터나 떨어진 시골에서 가마를 타고 왔다. 소녀는 몇 년 전에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이 소녀는 성격이 밝고 아름다웠는데도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손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소녀를 입원시킨 후 수술을 했다. 수술한 손가락마다 붕대를 따로 감고 즉시 손가락들을 펴서 부목을 대어 단단히 맸다. 방부 처리를 하고 시술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매우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남아 있는 피부를 늘려서 상처를 덮었으나 피부가 모자라서 보기 싫은 흉터가 남게 되었다. 식피수술을 하기로 했지만 통역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내 몸에서 피부를 떼어낸 다음 환자의 몸에서 필요한 피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환자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 몸에서 피부를 더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 여자는 한사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말렸다.
이렇게 해서 성공한 소녀의 수술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내가 한 일이 그들에게 좋은 가르침이 된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이런 교훈적인 의미에서 피부를 떼어준 게 아닌데도 말이다. 소녀는 입원하고 있는 동안 여학교의 기도시간에 매일 저녁 참석했고 주일학교에도 나갔으며 누가복음은 두 번이나 통독했다. 퇴원하는 날, 그녀는 우리와 함께 번역한 누가복음과 다른 책자들을 가져갔다. 하나의 좋은 결실을 가져올 씨가 심어진 것 같다.
-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웃음의 리더십
유머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곤란하고 비참한 상황을 잊게 만드는 도구로 유머를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명한 동기 부여 강연자인 지그 지글러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이러한 접근 방법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 웃으면서 동시에 화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웃어줄 때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다. 유머란 배우거나 연습할 수 있는 태도이다. 그리고 일단 한번 배우면 이 태도는 당신의 자아 형성이나 목표 설정, 인간관계 등을 다루는 데 있어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웃는 일은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사물을 바른 시각으로 보게 하고 그것을 지켜나감으로써 당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머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주의를 끈다. 웃음은 청중들에게 재미를 준다. 유머는 비관적이고 비판적이 아니라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다. 20대 때부터 나의 친구였던 빌 힌슨은 유머의 대가이다. 나는 그가 논쟁을 중재할 때나 민감한 상황을 설명할 때, 그리고 누군가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려 할 때 유머를 사용하는 것을 옆에서 보아왔다. 그의 유머와 웃음을 볼 때, 그가 일생동안 영향력 있는 리더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빌이 방으로 걸어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웃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그와의 전화 통화는 늘 용기를 불러일으키며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사람들의 영혼이 깨어난다. 그가 주위에 있으면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처럼 느껴진다.
솔로몬은 말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나는 그것을 웃음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웃음의 힘으로 그를 일으킬 것이다. 웃음은 우리의 좋은 시간들을 빛나게 해주고 우리의 어려운 시간들을 밝혀준다.
-폴 J. 마이어,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
용서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과정
제가 용서의 결단을 하라고 말했더니 어느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지금 용서할 마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용서의 결단을 내립니까? 그런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저는 최소한 위선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지만 용서의 결단을 내리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가식도 위선도 아닙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이렇게 고백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 이 고백은 위선이나 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변화시켜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용서는 결단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주 수동적으로 기도합니다.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만 기도합니다. 물론 용서하기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 몇 달 동안 계속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만 기도해온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용서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제 강의를 듣고 그날로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라고 바꿔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몇 달 동안 앓아오던 어깨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나니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진리의 주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자유케 됩니다.
용서는 한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했는데 그 사람이 또 밉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용서했다고 그 마음이 다 풀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이미 용서한 사람인데도 자꾸 떠오르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안 좋은 감정이 솟아난다면 그때마다 다시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할 때 상처의 껍질은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꺼풀씩 벗겨져나갈 것입니다.
-크리스티 김,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기도하라
우리가 기도제목으로 마약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고 하자. 먼저 우리는 마약 밀매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발생하는 온갖 마약 문제들을 놓고 기도한다. 도시를 묶고 있는 마약의 영을 대적한다. 그러고 나면, 솔직히 마약에 대해 더 이상 기도할 거리가 없어져 다음 기도제목으로 넘어가고 동일한 형태로 기도는 반복된다.
5년이 지난 지금, 주님은 한 가지 기도제목이 응답의 기로에 있을 때 우리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다른 기도로 옮겨갔음을 깨닫게 하셨다. 어떻게 1,300시간이나 기도했는데도 우리 지역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까? 한 가지 이유는, 무엇에 대해 기도하는지조차 모르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평가할 방법조차 없었다.
걸프전을 통해 볼 수 있는 한 예를 생각해보자. 연합군은 정확한 목표를 향해 폭탄을 투여했고 절대 빗나가지 않았다. 소위 '스마트 폭탄'이라 부르는 이 폭탄은 공격 지점에 대한 좌표가 폭탄 안에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연합군은 어떤 좌표를 사용해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정찰대원들이 적의 전선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중보기도의 방법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마트 폭탄 기도는 그 지역을 묶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모아 탄두로써 장착시킨 기도다. 그 사실을 이해한 후에 전략적 차원의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스마트 폭탄 기도를 정확한 지리적 위치에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교회가 정확하게 전략적 차원의 기도를 하면서부터 우리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문제 지역이 어디며 왜 그곳이 더 큰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았기에 우리의 기도가 어떤 목표물을 때리고 있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기도 후에는 응답의 여부를 평가했다. 만약 분명한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다시 동일한 주제로 돌아가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우리 도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밥 베킷, '지역을 바꾸는 기도'
디모데 키우기
나의 스승은 내게 한 가지 원칙을 각인시켰다. 그것은 "사역을 절대로 혼자 하지 말라. 항상 너의 사역의 관계 속에 바울과 디모데를 가지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당신보다 앞서가고 있는 노련한 안내자이다. 디모데는 당신이 계발하거나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키우고 있는 사람이다. 부서 리더들은 코치들을 디모데처럼 대하여 정규적인 사역 활동에 포함시켜야 한다.
"사역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바쁘기 때문에, 혹은 무계획 때문에 디모데후서 2장 2절의 바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기회를 놓치고 혼자서 간다.
90년대 후반에 우리를 섬겼던 존 버크는 "디모데를 데려오라"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부서 리더들에게 허들을 방문하거나 리더를 만날 때 코치를 동반하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소그룹 방문이나 리더들과의 일대일 만남에 동참할 때 코치는 어떤 것이 지혜로운 행동인지 '체득'할 수 있다. 코치는 부서 리더가 잠재적 리더를 인터뷰하거나 갈등을 해소시키거나 허들 모임을 인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코치도 견습 코치를 데려옴으로써 "디모데가 디모데를 데려오고, 또 그 디모데가 다른 디모데를 데려올 수 있다."
-빌 도나후, 러스 로빈슨, '소그룹 사역을 망치는 7가지 실수'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물질주의자들이나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은 '기도'라는 말을 창조적 통찰력이나 초월적 명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또한 기도라는 말은 소원이나 기원, 또는 도움을 부르짖는 행위를 표현하는 일상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있어서 기도란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기도는 예배이자 교제이며, 또한 탄원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예배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분과 대화를 나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교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금식하며 영적 싸움을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탄원이다.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에 앞에서 말한 기도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기도는 신비적 체험이나 명상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란 오히려 삶을 살아가면서 배우게 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기도를 배우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앞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 잭 헤이포드, '삶을 은혜로 채우는 기도'
은사가 없어도 행해야 할 것들
영적 은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 가운데 다수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복음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 전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전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영적 은사를 적절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내 아내 도리스와 나는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은사'를 받지 못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집에 아무도 없이 단둘만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외향적이지도 사교적이지도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역할을, 그것도 규칙적으로 수행한다. 저녁식사에 사람들 초대하기, 손님들 재워주기, 손님에게 자동차 빌려주기 등 우리 부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을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일을 썩 잘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도 포함된다고 믿는다. 십일조 혹은 그 이상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영적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역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바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헌금한다.
기도 또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이다.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책임이다. 기도생활을 영위하는 데 특별한 은사는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데 반드시 중보기도의 은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아,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매일 서너 시간씩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는 분명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 피터 와그너, '은사를 발견하라'
물고기의 입, 예수님의 유일한 주머니
예수는 작은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평생 동안 한번도 경계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유일한 주머니가 물고기의 입이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 탔습니다. 다른 사람의 배를 빌려 호수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예수는 왕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남긴 말씀으로는 조그만 책조차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해 쓴 글들을 모두 모은다면 국회도서관이 1,000개가 있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생각을 이 땅에 영원히 남기려고 대학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2,000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분은 칼을 든 적도 없었고 군대를 모은 적도 없었습니다. 해군은 물론이고 공군도 만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커다란 제국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충실한 신도가 수백만 명이나 됩니다.
예수는 의학을 공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환자를 치유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뜨셨을 때 태양이 얼굴을 가렸고 온 하늘이 슬픔에 젖었습니다.
- 빌리 그레이엄,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
꽃병 안에 공기가 채워지듯
자연계 안에 진공상태는 없습니다. 물이 들어 있는 아름다운 꽃병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꽃병을 거꾸로 하면 꽃병 속의 꽃과 물은 쏟아지게 됩니다. 꽃병 속에 있던 물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져버리면 "보십시오. 그 꽃병은 빈 것입니다"라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꽃과 물이 꽃병에서 빠져나온 순간 꽃병 안에 공기가 들어가 그곳을 채웁니다. 왜냐하면 자연계에는 진공상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인간의 마음, 혹은 생명으로부터 자기(self)가 비어지고, 자신의 지성도, 또 살아있는 제물로서 육신도 하나님께 양도해 드릴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께서 사용하는 그릇으로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즉 우리가 이기적인 동기와 이기적인 원함을 넘겨드리고, 자기의 의지도 그분께 넘겨드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지(will)를 아무것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되며, 성령으로 충만케 된 그릇이 되어, 그분께서 들어오셔서 우리의 지성, 우리의 혀, 우리의 손, 우리의 몸을 사용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세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는 것은 믿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넘겨드리고 항복함에 의해서입니다.
- 캐트린 쿨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성령의 권능'
남의 말을 들어주라
자신의 듣는 기술을 평가해보라.
1. 나는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그 얼굴을 쳐다보는가?
2. 상대방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가?
3.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가?
4.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의도를 헤아리는가?
5. 항상 내 감정을 점검하는가?
6. 이야기의 전말을 듣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하는가?
7. 상대방이 말할 때 가끔씩 그 말을 정리해주는가?
8. 필요할 때마다 확인을 위한 질문을 하는가?
9. 대화할 때 먼저 들으려고 노력하는가?
- 존 맥스웰, 짐 도넌, '영향력'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이유
왜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어려워진다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 혹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보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문제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또 한 가지 의미가 숨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전보다 더 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사실 잘 하지 못하면 어려운 문제를, 더 높은 단계를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더하기 빼기도 못하는 아이에게 곱셈 나눗셈을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결국 곱셈 나눗셈을 가르친다는 말은 이미 더하기 빼기를 잘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오히려 자신의 성장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기뻐한 비밀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였을 때 오히려 그 채찍 자국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성장을 증명하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정말로 믿고 있다고 하는 증거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하정완, '청년'
셀프 리더십
한때 나는 골프에 흠뻑 빠졌었다. 나는 이 어려운 스포츠를 배워 마스터하기 위해 열심히 레슨을 받았고 집에서와 동네 골프 연습장에서도 연습을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나는 이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스포츠를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스윙하는 자세는 언제나 어색하고 서툴러 보였다. 나는 동료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스윙하는 것을 보면서 내 모습에 실망을 느끼곤 했다. 그 친구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골프를 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하여 온갖 상황을 다 경험하면서 기술을 연마해온 결과 골프에 노련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골프를 배우기 시작해놓고서는 친구들의 그 노련한 수준을 기대했다. 그러다가 금방 좌절했고 포기해버렸다. 나는 게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훈련과 연습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의 영혼 관리를 위한 영적 훈련도 골프와 매우 유사하다. 평생 동안 영혼 관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들은 마치 기도, 성경 읽기를 비롯한 여러 훈련 영역들이라는 영적 골프 클럽을 내팽개쳐 버린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영혼 관리를 시작했다가 서너 달이 지나서 아무 열매도 없고 즐거움도 없자 그냥 포기해버린 것이다. 골프가 자연스럽게 되어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끈기 있게 연습하지 못하고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처럼, 수많은 영적 리더들도 영적 훈련을 즐길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해버린다.
연습이라는 말을 흔히 쓰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영적인 부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쉽게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연습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 하여 그것이 습관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어떤 것을 연습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을 하기를 그것이 완벽하게 되어 제2의 성품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새뮤얼 D. 리마, '셀프 리더십'
한 모금 한 모금씩
언젠가 여름 캠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 시간마다 무척 은혜로웠고 특히 밤에 호숫가에서 진행된 헌신의 밤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매 시간마다 '할 수 있는가?'라는 곡을 찬송했고, '당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가?'라는 가사를 생각할 때 "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께 헌신된 갖가지 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음침한 벽을 등진 채 서 있는 나를 향해서 몇 명의 군인들이 위협합니다. "자, 마지막 기회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주마!" 하지만 나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마침내 군인들이 외칩니다. "사격, 준비! 조준! 발사!" 내 몸은 힘없이 쓰러지고, 조기가 게양되고, 남편을 잃은 아내는 흐느껴 웁니다. 훗날 순교자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지고 사람들은 아이들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겠지요.
그때의 저는 순수했고 그 이후로 55년 동안 내내 그랬습니다. 저는 생명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길에 들어서면 거액의 수표는 절대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55년을 살면서 지금껏 제가 써본 수표의 액수는 정말 적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약 제가 걸어야 할 이 길에서 제 목숨을 순식간에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어요. 인생이란 그렇게 한순간에 끝내버리고 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잔은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 적은 모금들이 모두 합쳐진 것과 같습니다.
- 프래드 크래독,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설교자들'
혼자 출세할 생각은 그만둬!
하나님이 리더의 삶에 명확한 비전을 부어주시면 모든 것이 변한다. 먼저, 리더는 비전을 보게 된다. 심장이 고동치고 인생을 뒤흔드는 미래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가, 혹은 인생 역전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리고 대부분은 이미 다른 사람이 이룬 하나님의 사역을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 비전을 본다.
리더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에 내 인생을 바쳤습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비전은 때로 단번에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한 퍼즐을 맞추듯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그 윤곽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리더는 어느 지점에서든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뚜렷하게 보는 사람이다.
30여 년 전 빌지키언 교수가 성경적인 공동체에 관한 자기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동안, 나는 전에 느끼지 못한 강한 감동을 경험했다. 어떤 때는 기분이 매우 좋다가도 어떤 때는 울고 싶었다. 이따금 동료들 앞에 서서 소리치고 싶었다.
"이봐, 친구들, 이거야! 너희들은 안 보이니? 느껴지지 않니? 교회가 이 세상의 희망이야.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 기관이며 온 인류의 생명이 달려 있는 곳이야. 혼자 출세할 계획은 그만둬. 너 자신과 너의 인생을 위해 진짜 중요한 일을 하라구.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위해서 말이야!"
이 말을 하며 느꼈던 감정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처럼 생생하다.
- 빌 하이벨스, '리더십의 용기'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어떻게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가? 나는 그날 밤 그것을 시도해보았다. 나는 무엇이든지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기도했다. 그것이 유혹하는 생각이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 나의 유혹의 연약한 부분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날의 분주함이 내 마음에 걸릴 때는 하나님과 그날의 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생각나는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다루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나의 생각이 나를 다스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철저하게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켰다. 만일 내 생각이 속이는 생각이나 악한 생각을 즐기고 있을 때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정직하게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갔다.
나의 개인 기도생활에 있어서 나는 악한 생각을 처리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별로 성공하질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빛 가운데 가지고 나아갈 때 내가 얼마나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 가운데 내가 무시하려고 애썼던 모든 문제들은 사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다루시길 원하셨던 문제들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해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원하셨다. 이제는 유혹하는 생각들이 찾아올 때면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고, 나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닐 앤더슨,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받는 삶'
지혜로운 리더의 12가지 특징
리더들은 위험을 무릅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모하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리더들은 결코 무모하지 않다. 하지만 좋은 리더들은 안전한 길만 선택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안전하게 해낼 수 없다. 리더는 종종 사람들을 낯선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스스로 행군하게 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는 지혜로운 리더들은 다음과 같은 12가지 특징들을 보여준다.
1.정보를 지혜롭게 모은다.
2.힘있게 감행한다.
3.철저히 준비한다.
4.성공적으로 실패한다.
5.유연성을 보인다.
6.타이밍을 잘 파악한다.
7.얻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한다.
8.문제점을 발견한다.
9.사명을 잊지 않는다.
10.올바른 동기들을 갖고 있다.
11.따르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12.확신을 갖고 전진한다.
-존 맥스웰, '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
그분 자신이 우리의 시야다
우리의 온 시야가 거룩하신 분으로 충만할 때 째째한 이기심은 자취를 감춘다. 지속적인 하나님 의식은 필연적으로 자의식을 몰아낸다. 토마스 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겸손은 거룩한 눈멂에 기초한다. 계속 해를 쳐다보다가 눈이 먼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 사람은 지상 어디를 쳐다보나 해밖에 안 보인다.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눈먼 영혼은 조금도 자아를 보지 않으며 조금도 자신의 낮아짐이나 높아짐을 보지 않으며 오직 거룩하신 그분만 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자신의 자기기만과 도도한 교만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 적이 얼마나 많던가. 남들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살아왔던가. 우리는 조금이나마 주위를 끌어보려고 우쭐대며 과시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허영심을 한탄한다. 남들의 겸손을 보면서 그 여유와 자유가 궁금하고 부러워 몸이 달기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성경말씀에 순종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다. 여기서 겸손과 순종의 연관성을 보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셨다. 겸손으로 가는 길이 여기 있다. 바로 거룩한 순종을 통해서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혼은 한 가지 뜻, 한 가지 목표, 한 가지 소원밖에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시야에서 때로는 흐려졌다 때로는 선명해졌다 하는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시야다. 우리 눈은 하나님만 응시하는 단일 초점이다. 그래서 온 몸이 밝다. 이기심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다.
- 리처드 포스터, '심플 라이프'
오늘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내가 알고 있는 한 목사님이 테레사 수녀와 시간을 함께하도록 초대받았다. 이 목사님이 켈커타의 빈민가에서 사역하던 첫날, 테레사 수녀가 그에게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단지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나는 거리에서 전도하는 팀원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예정하신 바로 그 사람에게 신실함을 보일 것을 당부하곤 했다.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이들이나 혹은 잘 차려입은 중산층의 사람들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그들은 부랑자거나 혹은 나그네일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이 이들을 대해야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요사이 교회들은 거의가 중산층의 신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회를 돋보이게 할 사람들에게만 전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최하층의 사람들을 찾아가셨으며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들은 우리가 함께 휴가를 가기 원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고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 원하시는 바다.
-R.T.켄달,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는 나의 기도를 항상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기껏해야 천장 정도 치고 내려오는 기도도 있었을 테고, 응답되지 않은 기도 또한 많다는 생각을 했다. 이사야 58장에 그 이유가 나온다. 진정한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대하 7장 14절과 15절에도 동일하게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회개할 때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전에는 단지 불신자들이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다. 바로 돌이켜야 할 필요가 있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전에는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되었다. 이사야는 믿음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권고한 것이 아니었다. 믿는 자들의 기도와 회개를 의미했다.
-준 두니,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기도'
천국에서 우리가 하는 일
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할까요? 우선 천국은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은 비단으로 만든 베개를 베고 초콜릿을 먹으며 영원히 빈둥대거나, 소파에 몸을 묻고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는 장소가 아닙니다.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휴식을 취하며 조용히 보내는 시간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영원한 사랑과 고요한 평화로 당신을 감싸며, 침묵 속에서 당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늘 새 힘과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지치지도 않고 연약해지지도 않기 때문에, 사실 땅에서와 같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에서의 휴식이란 다만 고요한 즐거움을 즐기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천국에는 당신이 성취하고 싶은 창조적인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일을 제대로 완수할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날마다 '잘했다'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들으며 살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할 일도 많고, 감당해야 할 책임도 많습니다. 하지만 천국에서의 일과 책임은 결코 세상에서 하는 일이나 책임과 같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일은 노동도 아니고, 놀이도 아닙니다. 삶 그 자체입니다.
-호프 맥도널드, '천국에서 온 편지'
예수님이 석차를 매기시는 기준
어느 고등학교 어머니회에서 예수님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듣기로 하였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부모도 많이 있었지만 제자교육에 일가견이 있으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파다해 별 어려움은 없었다. 사실 그런 이유보다도 유명한 사람을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강당에는 일찍부터 나온 어머니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식들의 성적에 있었다. 예수님은 세미나를 하시면서 학생들의 전교 석차를 다른 기준으로 매겨 발표하셨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는가. 둘째,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가. 셋째,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넷째, DDR과 노래방 점수가 어느 정도 나오는가. 다섯째, 인생의 참다운 멋을 아는가 등등이었다.
-김진국, '안녕하세요 예수님'
사실적 의심의 유익
사실적 의심은 주로 신앙의 토대와 그 토대의 근거가 확고한지와 관련된다. 신앙에도 이유가 있단 말인가? 기독교 신앙의 증거는 많은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적, 논리적, 형이상학적, 역사적, 과학적, 심지어 도덕적 영역에서도 증거들이 드러난다. 여기서 핵심 이슈는 다양하게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고, 신앙적 주장의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적 의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강력한 증거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고 해서 실험실이나 법정에서처럼 반드시 엄연한 사실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근거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특별한 논증이나 출처에서 나올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지식이라든가, 인간의 마음속 깊은 열망 같은 데서 말이다. 어떤 때는 신앙에 대한 잠재적 도전에 반격할 필요도 생긴다. 이런 반격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영역, 즉 변증론에 해당된다.
사실적 의심은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을 의문시하는 형태로 찾아올 수 있다. 그것은 성경적 주제(서로 상반되어보이는 가르침에 관한 문제), 논리적 요소(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된 쟁점들), 혹은 철학의 영역(하나님의 존재나 악의 문제)과 관련된다. 역사적 영역(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것 등)과 과학적 영역(우주에 목적이 있다는 증거나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서는 더 많은 의문이 쏟아질 수 있다.
사실적 의심의 한 가지 특징은, 이것이 의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경우 다양한 자료를 증거로 제시해야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문제에 대한 적절한 증거나 설명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의심하는 당사자가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대체로 유신론, 특히 그 중에도 기독교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증거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게리 하버마스, '의심, 믿음의 또 다른 얼굴'
깨어 있는 자, 잠들어 있는 자
외식은 고위층 사람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우리들 중 가장 하잘것없는 사람도 외식할 수 있다. "외식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비열한 부분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부랑아 복음은 예수께서 죄를 -육신의 죄를 포함하여-용서하신다는 것, 긍휼을 보일 줄 아는 죄인들과 잘 지내신다는 것, 그러나 성령 안에서 가식을 일삼는 자들과는 관계를 맺으실 수 없고 맺으려 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의 양분 현상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 혹은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와 잠들어 있는 자 사이의 현상이다. 그리스도인 부랑아들은 다음과 같은 맥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인생은 겉으로는 거들먹거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대에 설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소식도 알 수 없는 가련한 연극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부랑자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리가 늘 겸손은 아니지만 겸손은 언제나 진리이다. "나는 내 인생, 나의 존재, 나의 구원을 다른 분께 빚지고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 말이다. 이 기본적 행위가 바로 은혜에 대해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의 핵심이다.
부랑아 복음의 진수는 그것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분의 순전한 온유함, 세상을 보는 그분의 시각, 그리고 그분이 당신 그리고 나와 맺으시는 관계방식 말이다. "어떤 사람을 정말로 알고 싶으면 그가 하는 말만 듣지 말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라."
-브레넌 매닝, '부랑아 복음'
하나님 만나기1: 외로움을 체험하라
나는 외로움이 우리를 주님께 주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한테 자동차를 빌린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중에 보니 라디오는 고장이 났고 CD 플레이어만 작동이 됩니다. 당연히 친구가 모아둔 CD를 하나하나 뒤적거리면서 들을 만한 노래(그냥 트로트라고 해둡시다)가 있는지 찾아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자기 취향(클래식 음악이라고 해두죠)의 CD만 잔뜩 꽂아놓았습니다.
갈 길은 멀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금방 지쳐버렸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CD에 손을 댑니다. 좋아하기로 치자면 스틸 기타 쪽이지만 높이 뽑아올리는 테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선은 그저 들어줄 만한 수준입니다. 적어도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참 듣노라니 점점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팀파니가 쏟아내는 리듬에 맞춰 심장이 뛰고 첼로 소리를 따라 고개를 흔듭니다. 얼마 뒤에는 이탈리아어로 된 아리아 소품을 따라 흥얼거리기까지 합니다. "어라, 이것도 괜찮은데!"
이제 한 가지 묻겠습니다. 클래식 음악도 듣기 좋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게 됐습니까?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달리 들을 음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침묵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순간, 평생 들어본 일이 없었던 노래를 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하시는지 아십니까?
-맥스 루케이도,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에서
하나님 만나기2: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라
캘리포니아의 산 이시드로의 한 간이음식점에서 피살된 스물한 명의 가족과 하나가 되어 몸부림칠 때, 전쟁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의 가족들과 함께 괴로워할 때,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손과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린 배와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낄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지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천부적인 가난함, 곧 우리가 진흙과 하나님의 입맞춤으로 창조되었음과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감을 깨달을 때, 남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 위해 쓰고 있는 명예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권력 따위의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게 된다(나 자신 얼마나 자주 이런 목적으로 성직자 옷을 입었으며,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복종을 강요했는지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영혼의 가난은 거짓과 허위를 부수며 얄팍한 영적 우월감과 유력한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할 필요성을 헤어나게 해준다.
가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자신의 절대적인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의 하찮은 노력으로는 영적인 삶의 그 어떤 성장이나 진보도 추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하심에서 비롯한다. 심지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가 주님이신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생명은 거저 주시는 덤이다. 우리는 참된 겸손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에 마주 서 있다. 우리 내면 저 깊은 곳의 영적인 공허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브레넌 매닝, '사자와 어린양'에서
하나님 만나기3: 감정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우리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의지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것이나 주의 것으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셨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의 여름 별장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되고 드려진 의지의 중심 성채에서 살도록 하자.
주님의 식탁에 있으면 영혼들은 때때로 거룩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 조수는 높고 떠들썩한 기쁨의 여울은 수문을 크게 두드려 넘어뜨릴 것처럼 하고,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기쁨에 넘치는 찬양의 합창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면 삶은 때묻은 회계 사무실, 더러운 상점, 소음 이는 공장, 불경건한 작업장을 대면해야만 한다. 주님과 겸손히 동행함으로 체험하는 오늘의 어려움과 어제의 기쁨을 비교해볼 때, 그것이 정말 어제와 같이 헌신된 삶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 우리의 의지가 한치도 변함없이 그 위치를 지키고 있음을 알고 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나의 하나님, 감정의 홍수는 여름의 시냇물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과 의지는 주님의 발치에서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단 둘이 있었던 축복된 순간과 마찬가지로 오직 주님께만 헌신하고 충성하며 주님만을 바라고 있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이다. 이와 같이 할 때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프레드릭 마이어, '주님의 오묘한 인도'에서
하나님 만나기4: 하나님을 집으로 삼으라
우리 집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우리는 침실이 어디 있는지 주방이 어느 쪽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힘겨운 이 세상에서 온종일 애를 쓰며 살고 난 뒤에는, 우리는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집을 절실하게 그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분이 되실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영양분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보호를 구하기 위해 어디로 피해야 할지, 인도를 받기 위해 어디에서 돌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집이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듯이, 하나님의 집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곳이다. 하나님의 집은 누구에게도 침범당한 적이 없고, 벽에는 금이 간 적이 결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지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주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주말 별장이나 휴일에 잠깐 들를 방갈로나 여름 휴가를 보낼 오두막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한 번쯤 들르는 호텔이나 노년에 이용할 양로원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지붕 아래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실제 거주지가 되길 원하신다. 그분은 신용 조회 때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는, 우리가 실제로 소유한 주택이 되길 원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의 집이 되길 원하신다. 그분의 아들이 말씀하시는 약속을 들어보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
-맥스 루케이도, '내 영혼을 위한 맞춤공간'에서
하나님 만나기5: 하나님과 동역하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면 상승작용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같이 일할 때 나타나는 기하급수적인 힘의 증가는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이다. 버지니아 해변에 위치한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러스티 스티븐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열나게 잔디 깎는 기계를 밀면서 우리 집 마당을 돌고 있었지만, 과연 이 작업을 저녁 먹을 시간까지 끝낼 수 있을까 의심이 생겼다. 우리의 여섯 살 난 아이 마이키가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묻지도 않고 내 앞에 떡 서서는 잔디 깎는 기계에 손을 얹었다. 내 아들이 나를 돕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기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내 아들이 기계를 받자마자 기계는 털털대며 거의 멈추기 일보 직전으로 들어갔다. 그가 헤매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는 킬킬대고 웃고 있었지만 차마 '야, 내가 할게. 저리 가라, 애가 뭘 하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우리 아들 착하지, 아빠가 도와줄게' 하면서 뒤에서 같이 밀기 시작하였다. 나는 앞에서 미는 아들과 부닥치지 않으려고 허리를 꾸부정하게 하고 몸을 앞으로 불쑥 내밀고는 두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잔디를 깎았다. 우리는 계속 잔디를 깎았지만 내가 혼자 하는 것보다 속도가 나질 않았다. 마이키가 '나를 도와주신' 관계로 잔디 깎기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아!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하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도와드리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같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잃은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아버지, 그리고 내 연약한 손이 그 위대한 일을 돕고 있는 모습을 내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하나님 아버지는 은혜를 베푸사 허리를 굽히시고 내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손잡이를 꽉 잡고 밀어라! 하나님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늘 아버지는 우리와 동역하는 것을 즐기신다. 우리는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우리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신다.
-더치 쉬츠, '파수꾼 기도'에서
하나님 만나기6: 삶의 모든 현장에서 기도하라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못된 사람을 만나더라도 나의 성화에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모든 직장인의 바람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만남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 이내 직장생활이 어려워진다. 사무실에 나가기가 싫어지고 일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 먼저 기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형의 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 에서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웠을 때 그는 기도했다. 형의 손에서 구원해달라는 아주 단순한 기도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셨고 형제가 반갑게 만나 쌓인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은 직장인의 가장 큰 바람인 만큼 그것도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조국의 재건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고 먼저 왕에게 인정을 받아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의 응답으로 느헤미야는 왕에게 인정을 받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의 민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직장 상사들 중에는 별일도 아닌데 까다롭게 구는 이들이 있다. 보기도 싫고 함께 있기도 싫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해결하는 길은 역시 기도뿐이다. 까다롭게 한다고 불평하기보다 그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되며,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그 머리에 숯불을 쌓게 된다(롬 12:20).
-방선기, '크리스천@직장'에서
하나님 만나기7: 죄 사함을 받아들이라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한 채 죄 사함을 받기에 합당해지도록 자신에게 계속 벌을 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 선택은, '나는 완벽주의를 통해 하나님이 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나 자신을 혹사시켜야 한다.
반면에 두 번째 선택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분과 닮은 존재이되, 선함과 악함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신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을 용납한다. 내가 하나님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인간이면 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1,3).
나는 여기에서 그가 말한 환난이 우리가 현실에 직면할 때 마주치는 끔찍한 불안과 공포를 포함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무서움을 맞서서 뚫고 지나갈 때, 그것을 넘어선 반대편 끝에 숨어 있는 찬란한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희망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고 말한 대로,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완전함과 결함을 지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그분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시고 인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인정받고 용납받고자 애를 쓰는 인간적인 성향에 대해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데이빗 스툽, '완벽주의로부터의 해방'에서
하나님 만나기8: 은혜의 법으로 세상을 품으라
기독교는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과 관련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덕법에 대한 기독교 교리다. 전쟁과 사악함을 인간의 도덕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모두 실패했고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다 그러하듯, 법은 인간과 죄성을 공유한다. 칼빈의 말처럼 법률도 '죄의 성질에 속한 것'이다.
어떤 법이 절대적 가치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정죄와 재앙의 씨앗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악의 힘을 막아줄 울타리로만 기능해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은 은혜에 속한 영역이다. 예를 들어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평화와 의를 이룰 수 없다. 법은 언제나 금지의 역할을 할 뿐이며 인간의 내적 모순에 의해 이미 타락한 것이다.
법은 판단의 범주에 속한다. 세상의 도덕법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지적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법은 바알세불을 완전히 쫓아낼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인간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시킬 수 없다. 진정한 법은 오직 하나, 바로 우주의 법이다. 우주의 법은 심판이나 은혜의 방식으로 실행된다. 만일 인간이 심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은혜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