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컴플렉스는 없다" 관습적인 극의 룰을 거부하며 배우 방은진이 감독이 되어 돌아왔다. 5년 동안 현장에서 구르며 뼈 밖에 안 남았다. 그런 그녀 뒤에 <박하사탕><오아시스>의 제작사 이스트 필름이 서있다. 엄정화, 문성근를 전면에 내세운 스릴러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겐 뭔가 특별한게 있다.
선머슴아 같이 짧게 자른 머리, 가늘게 태워문 담배 만큼이나 가녀린 어깨, 그 어깨에 들쳐 맨 작은 가방, 그리고 그 가방에 무심코 찔러넣은 흔적이 역력한 콘티 뭉치. 파주 헤이리의 <오로라 공주> 촬영 현장에서 만난 방은진은 더 이상 여배우 방은진이 아니었다. 여배우 방은진은 사라지고 감독 방은진만 남았다. 여배우의 향취를 벗고, 단편영화 <장롱>의 조감독을 거쳐 <떨림>과 <첼로>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렇게 영화 연출을 준비하는 동안 온몸에 짙게 밴 현장의 고뇌는 그녀의 앙상한 얼굴에 그대로 투영됐다.
"정화야, 너가 휘청해도 될 것 같아. 확 쳤지? 그럼 약간 휘청해도 돼." 모니터 앞을 지키던 방은진이 카메라 앞의 엄정화에게 다가선다. "정화야 이리 와봐. 너라면 (스탠드를) 놓고 갈것 같아?" 방은진 감독이 엄정화의 눈을 보며 아이 달래듯 의견을 묻는다. 자기 키 보다도 한 뼘이나 더 큰 전기 스탠드을 내려치던 엄정화가 거칠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인다. "빨간 의자가 저 각도가 아니었어." 날카롭게 현장을 주시하던 방은진 감독이 맨 발에 슬리퍼를 신고 고급 아파트 모형의 세트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 뼈밖에 안남았는데, 깡이 느껴진다. 씬 넘버 81번. 연쇄살인범으로 변신한 엄정화와 곧 있으면 또다른 희생자가 될 변호사 김우택 역할의 장현성이 온 몸을 던져 격투씬을 연기하고 있다.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강남의 90평 규모 고급 아파트. 1억여 원이 투여된 세트는 말 그대로 '럭셔리'하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와인 바에는 두 사람이 마신 것으로 보이는 와인 잔 두 개와 먹다 남은 와인 병이 놓여 있다. 거실 중앙에는 복층 구조의 아파트임을 드러내는 계단이 들어서 있고, 거실 옆에는 희고 검은 얼룩말 무늬의 쇼파가 놓여 있다. 그 가운데, 검은 대리석 바닥제 위에 어지럽게 흩으러진 유리 파편과 드문드문 보이는 혈흔이 심장치 않다. 홈 씨어터가 놓여있는 거실. 빔 프로젝트가 쏘는 광선이 맞닿은 스크린 위에는 'KILL ZONE'이라는 노란색 글자가 선명하게 번쩍거린다. 한창 집에서 슈팅 게임을 즐기던 찬라, 엄정화가 스크린을 보며 게임에 몰두하던 장현성의 뒷통수를 전기 스탠트로 가격한다. 장현성이 머리에서 붉은 피를 쏟으며 텅 소리를 내고 쓰러진다. 머리에 피범벅 분장을 한 장현성은 벌써 몇 번째 머리부터 쓰러지는 '맨땅에 헤딩' 테이크를 연기중이다. "대구리(머리) 괘안나(괜찮나)?" 모니터를 하러 온 장현성에게 방은진이 묻는다. "이제 어지간한건 굳은살이 생겨서..." 장현성이 슬며시 웃으며 대꾸한다. "따가워..." 장현성의 조용한 혼잣말에 방은진이 화들짝 놀란다. "어디? 어디? 어디가 따가워?" 배우를 챙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엄마'같다.
다음 테이크는 장현성의 반격. 서둘러 정신없이 현장 수습을 하는 엄정화 뒤로 검은 그림자가 보이고, 그 순간 장현성이 엄정화를 뒤에서 낚아채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엄정화의 입에서 한숨섞인 괴성이 터져나오고 머리카락이 뽑힌다. "몸을 날리네 아주..." 함께 모니터를 하던 스텝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벌렁 넘어졌네". 격투씬을 막 마친 엄정화가 웃음 띈 얼굴로 모니터 앞에 있는 방은진 감독에게 다가온다. "순식간이었어." 방은진 감독이 웃으며 말한다. "아우, 서운해. 하나도 안나왔어." 모니터를 마친 엄정화가 특유의 애교섞인 목소리로 감독에게 투정을 부린다. 첫 격투를 마친 안도감 때문인지 내내 조용하던 엄정화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다음 씬 촬영을 위해 저녁무렵 현장에 도착한 형사 역할의 문성근과 권오중이 자리에 합세한다. 왁자한 배우들과 감독의 수다가 이어진다. 이제 끝난건가? 멀었다. 두 사람이 벌일 한밤의 난투극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오후 4시 경 시작된 촬영은 밤 11시가 훌쩍 넘어서까지 끝날줄 모르고 계속됐다. "엄마같은 무언가가 있다." 문성근이 평하는 방은진 감독이다. 자기 역할에만 충실하면 됐던 여배우 방은진은 <오로라 공주>를 잉태한 순간 감독 방은진이 됐다. 현장에서 그녀는 부드러운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안을 일구는 억척스런 엄마가 되어 <오로라 공주>를 이끌어 간다.
<오로라 공주>는 연쇄살인범 용의자 정순정(엄정화 분)과 유일한 단서인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발견하고 정순정이 범인임을 직감하는 형사 오성호(문성근 분)의 이야기. "형사이면서 목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해서 "처음엔 많이 생소했다"는 문성근이 입을 열었다. "범인을 감추는 영화가 아니라 범인이 처음부터 제시된다. 그리고 그 범인을 열심히 쫓는다. 예전에 좀 알던 사람이긴 한데... 그걸 추적해 가다가 나중에 뒤집으며 보여주는..." 문성근이 말을 줄인다. '목사가 되고 싶어하는 것에는 정순정을 구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가'라며 이어지는 질문에 "있으니까 목사가 되고싶어하겠지(웃음)..."라고 답하고는 영화에 대해서는 더이상 함구한다. 그리고는 "엄정화와는 극중에서 거의 만나지 않는다"며 엄정화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정순정은 여자라면 한번씩 해보고 싶은 역할인것 같다."
"엄정화에게는 이 역할 자체가 모험이었을 것이다." 방은진 감독이 말한다. "엄정화가 나오는 <오로라 공주>라는 제목의 영화라고 하니까 코미디로 착각하시는 분도 많다(웃음). 그러나 기존의 엄정화의 이미지와는 다를거다." 방은진 감독의 말이 자신에 차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온 영화의 여자 캐릭터 중에서 표현이 가장 주체적이고 센 역할일 것이다. 자신의 밑바탕에서 끄집어내서 토해내야 하는 대사가 많다. 또한 그것을 토해내기 위한 심리 표현도 많다." <결혼은, 미친짓이다>와 <싱글즈>에서 이 시대 여성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줬던 엄정화는 스릴러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서 이야기의 축으로 되살아난다.
방은진 감독의 <오로라 공주>는 그녀를 둘러싼 '지원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 감독이 데뷔하는데 응원하고픈 마음이 절대적이었다"는 문성근을 비롯해,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날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예전엔 통통했는데 5년 동안 연출부에서 고생하더니 뼈만 남았더라. 노력의 결실을 맺지 않을까 한다"는 최종원, "역할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때문에 처음엔 출연을 망설이다가, 방은진 감독의 '입봉작'인 것을 알기에 '내가 뭐라고 저렇게 소중한 사람의 순정을 모른척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출연을 결정했다"는 장현성까지. 한 테이크의 촬영을 마치고는 왁자하게 둘러앉아 수다를 떨다가 슛이 들어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강렬하게 연기를 하고, 날카롭게 모니터를 응시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모였다. "콘티에 있는대로 그림이 나오면 신기하기도 하고, 찍으면서는 아쉽기도 하다"는 '입봉' 감독 방은진의 <오로라 공주>에는 '진짜 배우'들의 왠지 모를 '광끼'가 묻어있다. 현재까지 70% 가량 촬영을 마친 <오로라 공주>는 10월에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사진 서지형 기자
김수진 기자
첫댓글 어제 오빠가 말하시던 그 장면인가 보네요~
아 기억난다 정말 힘들게 찍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