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법을 중심으로
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꼭 필요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읽어내는 문자해독을 넘어 오래된 사상들과 접속하고 소통하는 창이기 때문이다. 기술 없이 단순히 읽어내는 것이라면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독서에 대한 논의는 끝이 났어야 한다. 시중에는 독서에 대한 책들로 가득하다. 실상 필자의 경우도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책을 100권 넘게 소장하고 있다. 독서에 애로를 느끼기 때문이고, 더 알아갈 필요를 느끼는 까닭이다. 독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책 또한 마찬가지다. 대화하는 상대에 대한 에티켓이 필요하듯 책을 대하는 태도역시 중요하다. 피아노의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칠 수 있다고 해서 피아노를 다룰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독학을 하거나 학원을 가서나 피아노 연주의 기법을 배워야하고 많은 연습의 시간을 들여야 원하는 만큼의 피아노를 다룰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다. 절도 있는 동작들과 기술들은 기본 품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먹 지르기와 발차기의 기술과 더불어 반복되면서 기술이 몸에 배여가면서 제대로 태권도를 시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독서라고 다를까?
모티머 애들러가 독서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이유는 당시 미국의 대학교육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책 읽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절대다수의 졸업생들을 보면서 미국의 교육이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혁명 이후 계몽주의 사조 속에 등장한 근대교육은 국가를 위한 학교, 사회와 산업의 역군을 길러내는 인재공장이었다. 전체를 위한 분자와 큰 기계의 부속으로는 기능하는 기술자는 배출되었으나, 공동체 전체와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일에 한계를 보았다. 사고(思考)하고 반성(反省)하는 인간의 부재는 결국 생각 없는 삶, 반성 없는 사회라는 개인‧사회적 문제를 낳게 되었다.
미국대학교육 정책에 대한 실패를 선언한 애들러는 고대 교육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교육의 시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교육의 방법론을 탐색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읽기와 쓰기 즉, 독서와 작문을 교육의 기본이라는 점이다. 독서와 작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분석하고 종합할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라 진단했다. 기껏해야 책만 읽는 멍청이들을 양산할 뿐. 애들러는 독서가 단순한 읽기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말한다.
애들러의 독서법은 3단계로 나눈다. 1~3단계까지의 독서법을 10대 때에 형성해야 일평생을 통해서 통합적 학습과 사고로 역량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10대의 파릇파릇한 학창시절에 애들러가 말한 독서법들을 완숙하게 익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독서가 기술인 이유는 이론적으로 알아서는 의미가 없고, 연마하고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애들러는 독서의 심급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독서의 기술을 책을 통해 전수하고 있다. 독서의 단계와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1단계는 개관독서다. 체계적으로 훑어보는 기술이다, 초보적인 읽기이자 읽기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개관독서의 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다.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의 서문과 속표지를 살펴보면 책이 어떤 분야에 속하는지,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빠르게 간파할 수 있다. 이어 목차를 살필 때 책의 골격과 구조를 볼 수 있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목차구성에 뼈를 깎는 수고를 들인다. 목차와 구성을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건너뛰는 일은 저자를 서운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고도서와 색인을 살핌을 통해서 책의 핵심을 얻을 수 있다.
개관독서는 말 그대로 개관하며 읽는 방법이다. 꼼꼼하게 읽어나가지 않는다. 꼼꼼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탐색하는 독서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대충 읽으라는 말이다. 대충이라고 해서 무성의하게 읽으라는 말이 아니라, 전체를 훑으면서 지나가라는 얘기다. 개관독서의 단계가 빠지면 분류 없는 독서가 되고, 많은 양의 시간을 탕진하는 손실을 보게 된다. 속독으로 빠르게 읽어가야 할 책인지, 지독하게 천천히 탐색하며 읽어낼 책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바보독서가가 되고 마는 까닭이다.
2단계는 분석독서다. 개관독서의 과정을 거쳐서 선별된 책들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도움이 되는 책은 훑어 볼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씹고 소화시켜야 할 책이다. 분석독서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주제파악이다.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길어내는 일이다. 좋은 책은 책 전체가 일관되게 흐르는 중요한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흘러가는 책의 핵심을 한 문장 혹은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책의 주제를 파악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논문을 심사하는 교수들이 빼놓지 않고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이 논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전체를 흐르는 핵심이 무엇인지, 중요한 사상이 무엇인지 주제가 정렬되어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몇 문장으로 된 주제문을 한 단어 혹은 몇 단어로 요약하면, 그 단어가 책의 제목 내지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될 것이다.
주제라는 내용은 구조를 통해 표현된다. 책이 건물이라면, 구조는 설계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개집을 지어도 계산을 하고 짓는다. 건물을 지을 때처럼, 글을 짓는 일도 설계도면이 필요하다. 구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글을 지어가는 저자가 설계도에 근거하여 건축해 나간다면, 독자는 거꾸로 지어진 건축물을 펼쳐서 분석을 통해서 설계도를 파악하여 핵심으로 역 추적해 가야한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독해작업은 X-ray찍기에 비유한다. 책을 꿰뚫어보는 통찰을 위해서는 구조파악이 필수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분석독서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4가지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이 책은 무엇에 관한 책인가? 주제가 뭐냐는 질문이다. 둘째, 저자의 주장과 논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주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파악하는 일이다. 셋째, 저자의 주제에 대한 주장에 대해 나는 찬성하는지 아니면 반대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저자의 의견에 함몰되어 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서 읽어나가야 찬성과 반대가 가능하다. 넷째,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정보를 다루는 책이든, 삶의 문제나 사상에 대한 내용이든지 이 책이 주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정돈하는 일이다. 분석 작업을 통해서 저자가 해결하려하는 물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읽어내기 힘든 문장은 꼼꼼하게 반복해서 읽어내고, 책 전체가운데서 핵심적인 문장들을 길어내고 발췌하여 반복하는 일도 병행하면 좋겠다.
3단계는 종합독서다. 독서의 꽃이자 열매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고급단계의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독서는 달리 표현해서 ‘주제별 독서’라고도 부른다. 분석독서처럼 한 권의 책을 분석하고 해체하며 독파하는 방식과 달리 연관된 여러 책들을 종합해서 읽어내는 기술이다. 한 저자가 아니라 여러 저자들의 의견들을 비교하여 함께 다루기 때문에 ‘비교독서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개관하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분석해서 읽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따라 읽어내는 독자가 주인이 되어 여러 책들을 배열하는 작업이다. 책의 저자들마다 다른 의견들을 소주제들 안에 분류하여 배열하고, 찬성과 반대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드러내는 심급단계의 독서법이다.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찬반을 따지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저자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단계다.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의 단계는 실상 고대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관된 방식이다. 내용들을 흡입하는 문법단계를 지나 논리단계에서는 분석하고 찬반을 따지고 질문하게 되고, 수사단계에서는 여러 의견들과 주장들을 종합하여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주장하게 된다. 책을 짓거나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종합독서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대학으로 가기 위한 기본적인 단계로 트리비움의 목표 즉, 종합독서를 통한 수사단계로 보았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의견을 상대와 교환하며 토론할 수 있고, 보다 깊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한가? 그렇다. 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대화하고 소통하는 삶을 정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독서의 기술, 저자와의 대화법을 배워야 한다. 이론적으로 「독서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별반 차이를 내지 못한다. 독서법이 실제로 적용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술이 존재해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독서에 기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라면, 독서법을 알아가고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분석의 단계 없이 종합의 단계, 수사의 단계로 나갈 수는 없다. 분석의 단계를 건너뛰게 되면 편견에 사로잡힌 책이 되거나 졸작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만나고 참여하는 일이나 독서를 위한 강의에 참여하는 일은 긴요하다. 책을 읽고 나는 단계, 심급단계에 해당되는 토론으로 진행되는 모임이 있다면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저자를 만나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책들(human-books)이 만나 어우러져 서로를 날카롭게 벼루어가는 아고라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깊어가는 가을, 독서모임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어갈 모임이 있다면 더 없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