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때 지은 성 유적지 (최치원 기념관)
수나라, 당나라때 지은 성곽의 유적이 있는 곳
평원에 지은 진 고대 중국의 성들은 성 밖에 적의 칩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물로 만든 해자가 있읍니다.
수나라, 당나라때 지은 성곽의 유적이 잘 보관되어 있음.
성 내부에는 2개의 주 건물이 있는 데 하나는 연화각라는 건물로 양주의 역사와 최치원 선생의 일생을 기리는 내용물로 가득찬 건물이고, 다른 하나의 건물은 최치원 선생 기념관임. 위 사진은 최치원 선생 기념관
07년 부산 해운대 최치원기념사업위원회 등이 와서 주위의 건물들을 지었는 것 같음
최지원 선생 기념관
최치원 [崔致遠, 857~?]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경문왕 8) 12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중국 양주땅에 웬 첨성대???
연화각
중국 역대 황조때의 양주의 설명
연화각 1층에는 양주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서는 최치원 선생의 일생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의 사진들이 즐비함. 이름 있는 정치가들과 경주최씨 사람들이 방문한 사진들이 아주 많음. 경주최씨 종가집 가보질 못했지만 경주최씨 종가집보다 경주 최씨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일생 설명이 훨씬 잘된 곳이 이 곳이라 생각됩니다.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중국(특히 양주)에서 여러분야의 관리로 임명받은 많은 내용들과 당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
유명한 계원필경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 |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6두품의 천재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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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두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 | |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 |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 |
중국땅에 문을 연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 |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 |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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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 |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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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315호로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
부산 해운대(海雲臺)의 지명의 유래가 된 최치원이 남긴 글씨 |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한편,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 왕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궁예 휘하의 장수에 불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글로 표현했던 최치원이 은밀히 왕건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 * 위의 내용들은 네이버에서 가지고 온 것임. |
당나라 성 유적지는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업적을 설명한 경주최씨의 종가집이라 할 만큼 최치원 선생의 내용밖에 없는 곳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문집안이라 할 수 있는 경주 최씨를 가진 사람들은 여기 오면 아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에 있는 경주최씨 종가집 수십배 규모가 큰 경주최씨 종가집이라 생각됩니다^^
大明寺
중국 남북조 시기 南朝 劉宋 孝武帝 大明年間(457—464年)에 지었다고 하여 대명사라 불리는 약 1,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사찰로 절 내부에 천하제오천과 병령탑 등 볼만한 곳이 많습니다.
병령탑 - 수나라 양제때 자기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중국각지에 30여개의 불탑을 지으라 했는데, 그 중 대명사에 지은 9층 규모의 대규모 탑인 병령탑(栖靈塔) - 소실되어 근래에 대만의 유명한 승려가 와서 같이 지었다고 함. 돈 내면 9층까지 올라 갈 수 있음
병령탑 9층에서 바라보는 양주시 전경 - 오른쪽에 녹차밭이 보이는 데 양주의 특산인 綠揚春이라는 녹차라 함.
운하의 도시답게 많은 운하들이 보입니다.
각 층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음.
끊는 물에 사람을 던지고 화염에 사람을 던지는 그림들 - 죄를 짓지 말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그림들입니다.
감진대사 기념당 (鑒眞대사 纪念堂) - 1973년에 중국, 일본합작으로 지은 기념당
천년고찰답게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대명사이지만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당나라때 감진대사로 대명사 주지스님으로 있다가 일본 승려들의 요정으로 5차례라 일본으로 갔지만 바다의 상황으로 실패하고 6번째 출항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불학, 의학, 문학, 건축, 조각, 서법, 인쇄술을 인본에 전해 주었다고 함. 일본에도 감진대사 기념하는 사찰이 있다고 함
대명사 내부에 있는 서원(西園)이라는 정원으로 산천을 유람하기 좋아한 청나라 건륭제가 여기까지 놀러 왔는데 그때 지은 정원이라 함.
天下第五泉
西園안에 있는 우물로서(상천과 하천이 있음) 당나라 張又新이라는 사람이 이즌 전차수기(煎茶水記)에 이 샘물의 물로 차를 끊여 품평하니 천하에서 다섯번째라 했다고 하여 천하제오천이라 부른다고 함.
정원 윗부분에 있는 천하제오천 상천 - 물은 없음.
찻집
양주의 특산인 녹양춘의 녹차를 천하제오천의 물로 한잔~~ 날씨가 덮지만 달콤한 맛이 나는 신선한 녹차 맛이 일품입니다.
산중에 호수가 있고, 호수에 천하제오천이 있다라는 천하제오천의 下泉
건륭황제가 여기에 놀러 왔다는 기념비
양주의 특산인 녹양춘 녹차 판매점
장문희 줄려고 최고급 녹차(500g에 인민폐 1,200원) 100g를 구입했는데 하나의 아주 작은 잎으로 만든 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