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100대 명반]78위 안치환 '안치환 4집'
ㆍ통찰력 있는 가사·절정의 편곡 위력
안치환의 4집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97년 겨울이었다. 지금도 그 겨울, 차 안에서 넋 놓고 이 앨범을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무 기대 없이 들었던 노래들은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민중음악 뮤지션들에 대한 선입관을 한 방에 날렸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음반을 한 번 더 들을 정도였다. 본 앨범이 발표된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의아했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 폭넓은 경험과 정보, 그리고 통찰력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내가 왜 유독 안치환에 대해 그리도 무지했을까? 이유는 음악 마니아의 관점에서 민중음악의 음악적 특성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90년대 중반 천지인 이후 생겨난 민중음악과 록음악의 교배 작업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공공연히 보여준 ‘대안적 대중음악’을 실천하는 인텔리겐차의 이미지에 공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재발견한’ 안치환 이전의 ‘대안적 대중음악’의 다수는 동시대 음악 마니아가 듣기에 다소 ‘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민중음악 관련 대중음악 뮤지션들에겐 어느 순간 이후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안치환은 노찾사 2집(1989)에 참여하면서 데뷔했다. 90년 솔로 1집을 발표했고, 93년 록음악을 투영한 3집 ‘Confession’을 내놓았다. 그는 이 음반부터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여타 ‘대안적 대중음악’을 고민한 민중음악가들과 달랐던 점은 고민을 ‘제대로’ 했다는 점. 이는 “3집을 만들기 전에 내 노래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음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중략) 록은 리듬의 음악이지만 록 하는 사람들은 ‘한국적인 어법’을 고민했어야 했다”라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안치환 4집의 위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혁명적 노랫말의 지존’인 정태춘의 ‘386세대 후계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가사는 한국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다. 80년대 군사정권과 6월항쟁, 90년대 구소련 붕괴와 문화의 시대로의 전환을 겪은 당사자가 당시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는 동세대 청자들을 향해 쏟아내는 노랫말은 매우 직접적이고 아렸다.
일례로 ‘수풀을 헤치며’의 가사 “수풀을 헤치며 물길을 건너 아무도 가려 하지 않은 이 길을 왔는데/ 아무도 없네 보이지 않네 함께 꿈꾸던 참세상은 아직도 머네/ (중략)/ 떠나가는 자 남아 있는 자 울며 웃고 마시며 취해서 떠드는 사람들 속에/ 그댄 없는가 그댄 없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자신의 안위를 즐기는가”는 이념적인 공허함을 겪은 386세대의 자조감을 대변하는 노래인데, 록음악으로 매우 훌륭하게 엮어내는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둘째, 본 앨범에선 3집 작업에도 참여했던 조동익이 절정의 편곡, 세션 감각을 보여줬다. 90년대 명반들 다수에서 편곡, 세션으로 참여했던 조동익에게 있어서도 안치환 4집은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2’(1995),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1997)와 함께 반드시 기억될 만하다. 이 앨범은 안치환의 창작 감각이 절정일 때 역시 절정의 조동익을 만난 결과다. 이는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다시는 재현하기 어려운 소중한 추억이다. |
첫댓글 난 이런 노래가 참 좋습니다.난 이런 가수가 참 좋습니다.난 한국에 이런 가수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저 가수 무지 좋아합니다.
특히 '내가 만일'이란 곡은 가사가 시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럼 김광석도 좋아하시겠네요?
오늘도 이 노래 듣으려 왔습니다.
케빈님이랑은 통하는 것이 있군요.
김광석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시보다 더 많은 열정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죠.
시를 써서 곡을 만들고
또 자신의 가창력으로 펜에게 공감을 전달해야 하기에
시를 쓰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