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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이해' 2주 차 수업 참여 안내
시간: 2025년 1월 13일 19:00-21:50
수업 참여: https://us06web.zoom.us/j/87520846476?pwd=aP7HKDNKjaADt0E3W5b6GHJpBwGtw5.1
아이디: 875 2084 6476
비밀번호: 627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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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 학 의 본 질
1. 1. 언어
1) 과학의 언어
「이상적인 과학의 언어는 순전히 ‘외연적’이다. 즉 그것은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1 대 1 대응을 목표로 한다. 기호는 완전히 자의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기호들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 기호는 또한 투명하다. 다시 말해서 기호는 그 자체로 주목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를 곧바로 그것의 지시 대상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하여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나 상징 논리와 같은 기호들의 체계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르네 월렉, 오스틴 와렌, 이경수 역, 문학의 이론, 문예출판사, 1987, 25쪽.)
2) 일상 언어
3) 문학의 언어
언어의 모든 자질(뜻, 모양, 소리)에 의식적인 주의를 기울인다. 함축(내포), 뜻겹침(「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한토막의 말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미묘한 차이」(Empson, Seven Types of Ambiguity.)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고도로 ‘내포적’이다. 게다가 문학의 언어는 단순히 지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것의 표현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나 글 쓰는 사람의 어조와 태도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단순히 서술하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독자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그를 설득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변화시키기를 또한 원한다. 문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구분이 있다. 즉 전자에서는 기호 자체, 즉 언어의 음향적 상징이 강조된다. 운율이라든가 두운이라든가 음향의 유형들과 같은 온갖 종류의 기법들은 그 자체로 주목을 끌기 위하여 고안돼 왔다.」(웰렉, 와렌, 25-6쪽.)
언어의 정서적(emotive) 사용(I. A. Richards)―「언어가 가지고 있는 연상 작용에 의하여 주관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환기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한다. 지시적(referential) 언어의 가장 명백한 실례는 과학적 산문인데, 여기에서는 감정의 환기가 최대한으로 배제되고 필자나 독자의 관심은 오로지 사물 자체에만 집중된다. 정서적 언어의 가장 명백한 실례는 시인데, 이것은 감정이나 태도의 환기만을 주안점으로 하고 필자나 독자의 관심은 말과 사물 사이의 어떠한 객관적 관계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삼아서도 안 된다. 시는 의사 진술(pseudo-statement)이라고 리차즈는 주장했다. 즉 우리가 올바르게 시를 읽을 때 ‘지적인 의미에서의 신뢰나 불신의 문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시의 지시적 기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하략)」(데이비드 로우비, 「영, 미 신비평」, 앤 제퍼슨, 데이비드 로우비, 최상규 역, 현대비평론, 형설출판사, 101쪽.)
「시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로만 야콥슨)―언어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낯설게 하기
*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예술의 목적은 사물에 대한 느낌을 알려져 있는 대로가 아니라 그것이 지각되는 대로 느끼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만들고, 형식을 어렵게 만들며, 지각을 힘들게 하고, 지각에 걸리는 시간을 길게 연장시키는 기법이다. 왜냐하면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과정 자체가 미적 목적이며, 이 과정을 오래 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방법이며,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은 예술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쉬클로프스키,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 조주관 옮김, 러시아 현대비평이론, 민음사, 24쪽.)
1. 2. 허구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상황은 현실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작품에는 나온다. 즉 작가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것이다→개연성(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음, 있음 직함)
「일반적으로 말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에 의하여 시적 효과가 증가되거나, 혹은 그것이 더 좋은 것(이상형)이거나, 혹은 세인의 통념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는 가능성보다 믿을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을 택하여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1977, 25쪽.)
개연성의 개념을 이해하면 문학의 허구적인 성질과 모방론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을 활용한 현실의 변형과 창조
1. 3. 표현론
작가의 감정과 사상의 표현
워즈워드―「시는 강렬한 감정의 저절로(자연스러운, 자발적인) 흘러 넘침(유출)」(“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Preface to Lyrical Ballads of 1800.)
「감정만을 지침으로 삼아 …… 여러분의 확신을 따르라. 다른 화가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 진실로 감동을 받았다면 여러분 정서의 성실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19세기 중엽의 화가 코로의 말. 제롬 스톨니쯔, 오병남 옮김, 미학과 비평철학, 이론과실천, 1991, 181쪽에서 재인용.)
1) 개성의 표현
2) 정서의 표현과 전달
* 예술가의 성실성―「진정한 감정을 지닌 예술가는 그 자신의 정서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응분의 상찬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베론의 말, 스톨니쯔, 201쪽에서 재인용.)
3) 상상력의 작용
「워즈워드 씨와 내가 서로 이웃간이 된 첫해에 자연의 진실에 충실히 집착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일으키는 능력과, 상상의 변형적 색채에 의하여 신기성의 흥미를 주는 능력이라는 시의 2대 요체를 우리들은 자주 거론하였다. (중략)
한편 워즈워드 씨는 정신의 시선을 습관의 무감각 상태에서 일깨워 우리 앞에 전개된 세상의 놀라움에 눈뜨게 함으로써 매일매일의 사물들에다 신기감의 매력을 불어넣고 초자연에 비슷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정하였다. 이 세상의 놀라움이란 무진장한 보물이지만 일상적 친숙의 막으로 덮이고 이기적 탐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있어도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다.」(코올리지, 이상섭 역, 문학적 자서전, 세계평론선, 177-8쪽.)
1. 4. 모방(반영)론
1) 단순한 모방(복사)
플라톤―시인은 「진리(이데아)에서 3단계 떨어진 제작물의 제작자」(국가 10권, 천병희 역, 세계평론선, 삼성출판사, 52쪽.)
「“그러니까 화가, 목수, 신, 이 셋이서 세 종류의 침대를 관장하네.”
“네, 그 셋이서요.”
“그런데 신은 자연 속에 하나 이상의 침대를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하나 이상을 만들어서는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든지 저 침대 자체를 하나만 만들었네. 아무튼 신에 의해서는 둘 또는 둘 이상의 침대가 만들어진 적도 없고 또한 없을 것이네.”
“왜 그렇지요?” 하고 그가 물었네.
그래서 내가 대답했네. “그것은 신이 두 개만 만들었다 해도 이 두 침대의 형상인 하나의 침대가 다시금 나타나, 두 침대 대신 침대 자체가 되기 때문이네.”
“옳은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신은 이런 사실을 알고 특정 침대의 특정 제작자가 되는 대신 실재하는 침대의 실재하는 제작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연 속에 하나뿐인 침대를 만들었던 것 같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자네는 우리가 신을 침대의 창조자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 부르기를 원하는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신은 침대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창조자이기도 하니까요.”
“목수는 무엇이라고 할까? 침대의 제작자라고 하면 안 될까?”
“그렇게 불러야겠지요.”
“화가도 침대의 제작자 또는 제작공이라고 부를까?”
“그건 안 돼요.”
“그렇다면 자네는 화가를 침대의 무엇이라고 부를 텐가?”
“제 생각에는 그를 앞서 말한 제작자들이 만든 것의 모방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좋네. 그러니까 자네는 본질(physis)에서 3단계 떨어져 있는 제작물의 제작자를 모방자라고 부른단 말이지?” 하고 내가 말했네.
“물론이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이 점은 비극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그도 모방자라면 말일세. 그는 본성상 왕과 진리에서 3단계 떨어져 있으니까. 이 점은 다른 모방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일세.”」(플라톤, 천병희 옮김, 국가 10권.)
2) 본질(보편성, 전형)의 모방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정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극히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4장, 41쪽.)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중략)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여차여차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여차여차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이를테면 알키비아데스는 무엇을 행하였는가, 또는 무엇을 당하였는가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시학 9장, 72-3쪽.)
② 신고전주의자의 보편성 강조
「세익스피어는 모든 작가보다도, 적어도 모든 현대작가보다도 자연의 시인이다. 그야말로 그의 독자들에게 인생의 면모와 삶의 모습을 충실하게 비추어주는 거울을 들어보이는 시인이다. 그의 인물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특수한 지역의 관습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소수에게만 관계되는 특이한 연구나 직업에 좌우되지도 않으며 일시적 유행이나 의견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언제나 공급할 수 있고 관찰이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인류의 진정한 자손들이다. 그의 인물들은 모든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의 온 조직을 지속시키는 보편적 감정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말한다.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인물은 한 특정한 개인의 경우가 너무 많으나 세익스피어에서는 인물은 대개 하나의 부류이다.」(사무엘 존슨, Preface to Shakespeare, 이상섭,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비평, 민음사, 260쪽에서 재인용.)
3) 당위적인 것의 모방
신고전주의의 도덕적 이념의 모방
「세익스피어는 편의를 위해 덕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교훈을 주는 일보다도 쾌를 제공하는 일에 더욱 몰두한다. 그는 아무런 도덕적 목적도 없이 글을 쓰는 것 같다. …… 그는 선 혹은 악에 대해 정당한 배분을 전혀 하지 않는다. …… 그는 자신의 등장인물들을 무심하리만치 냉정하게 옳은 방향으로도 그른 방향으로도 끌고 가며, 말미에 가서는 더 이상의 배려 없이 그들을 가혹하게 없애 버린다.」(사무엘 존슨, Preface to Shakespeare. 스톨니쯔, 145쪽에서 재인용.)
1. 5. 효용론
1)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
2)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3) 교훈과 즐거움을 주는 것: 유익함과 즐거움(호라티우스), 당의정
「시인은 이익을 주고자 하거나 또는 쾌감을 주고자 하거나 또는 쾌감과 인생에 유익한 것을 동시에 주고자 합니다.」(호라티우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1977, 225쪽.)
4) 프로이트―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충족
5) 톨스토이의 감염(전염)론
1. 6. 존재론
문학작품을 작가, 세계, 독자 등의 요인들에서 분리하여, 내적 관계를 이루는 부분들로 구성된 자족적 실체로서 분석하려는 관점
문학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다른 어떤 것과 관련 없이 결정되는 자립적인 전체로 보려는 것―언어로 이뤄진 구조
1) 칸트의 무목적의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iveness)
공리적인 목적은 없지만 그 자체로 통일적인 구조를 이루는 것(R. Wellek, Discriminations, p. 131.): 유기체(자연)와 예술의 유추(130-1쪽.)
2)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플롯의 통일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한 사람을 취급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그 중에는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된 행동을 이룰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중략)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하였든 천분에 의하였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오뒤세이아를 씀에 있어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이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뒤세이아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다른 모방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오리는 행동의 모방이기 때문에,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 놓거나 빼 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 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시학 8장, 68-9쪽.)
「단순한 플롯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도 없이 계기(繼起)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시학 9장, 74쪽.)
「그런데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여만 하며, 따라서 선행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시학 10장, 79쪽.)
*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
작품을 해석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중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사용하고자 하는 의미에 있어서 <의도>는 <그가 의도한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어느 정도 명확하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공식의 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한 시인의 실제 작품을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의도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도란 작자의 정신 속에 있는 들어 있는 구상이나 계획이다. 의도는 작자의 자기 작품에 대한 태도, 그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하였는지와 분명히 친밀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자명한 공리의 형태로 요약하고 압축한 일련의 명제들을 가지고 논의를 개시한다.
1. 한 편의 시는 우연히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구상하는 지능을 시의 <원인>으로 고집하는 것이 비평가의 구상이나 의도를 시인의 실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기준으로 삼아야 된다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2. 우리는 비평가가 의도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을 어떻게 구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비평가는 시인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어떻게 알아 낼 수 있는가? 만일 시인이 그것에 성공했다면, 그 경우에 그 시 자체가 시인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알려 준다. 그런데 만일 시인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하므로, 비평가는 그 시에서 실현되지 못한 어떤 의도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그 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중략)
3. 한 편의 시를 판단하는 것은 푸딩이나 기계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시가 제 구실을 하기를 요청한다. 우리가 그 제작자의 의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제작물이 제 구실을 하는 까닭이다. (중략) 그러나 어떤 부분이 의도되었던가 또는 뜻해졌던 것인가를 물을 수 없다는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즉, 단지 존재할 뿐이다. 시는 의미의 복합체를 한꺼번에 다루는 문체의 재간이다. 시는 그 속에서 말해지던가 내포된 것 모두가, 또는 그 대부분이 적절한 까닭에 성공하는 것이다. 적절치 못한 것은 푸딩 속의 풀리지 않은 덩어리나 기계의 결함처럼 제거되었다. (중략)
4. 시는 개성이나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의미가 <사과> 같은 물체보다는 확실히 더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시의 생각과 태도를 직접 극적 <발언자>의 것으로 취급해야 하며, 작자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경우에는 개인으로서 그에 대한 추론에 의거할 뿐이다.
5. 어떤 의미에 있어서 작자는 수정에 의해 자기의 본래 의도를 더 잘 성취할 수도 있다. (중력) 그러나 그의 애초의 구체적 의도는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모순된 결론이 나온다. (중략)
우리는 관점은 (중략) 시는 비평가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시는 탄생하자마자 작자로부터 분리되어 작자가 어떤 의도를 갖는다든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서 세상에 떠돌게 된다는 생각이다. 시는 사회에 속한다. 그것은 사회의 특정한 소유물인 언어로 구현되어 있고, 사회적 지식의 대상인 인간에 관한 것이다.」(윔서트․버어즐리, 이상섭 역, 「의도주의의 오류」, 아리스토텔레스 외, 김용권 외역, 세계평론선, 삼성출판사, 1979, 364-5쪽.)
「Intentional fallacy identifies what is held to be error of interpreting or evaluating a work by reference to the intention, the conscious design or aim, of the author who wrote the work. It is claimed that whether the author has expressly stated what his intention was in writing a poem, or whether it is merely inferred from what we know about his life and opinions, his intention is irrelevant to the literary critic because meaning and value reside within the text of the finished, free-standing, and public work of literature itself. Reference to the author's supposed purpose or state of mind in composing is a harmful mistake, because it distracts us to “external” matters of the author's biography or psychological condition or creative process, which we substitute for proper critical concern with the “internal” constitution of the literary product.」(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4th ed. 1981, p. 83.)
「윔샛과 버어즐리는 시(문학 예술 작품을 의미하는 약칭)란 개인의 사적 창조물이 아니라 공공 소유의 객체이며, 따라서 그러한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작자의 경험이나 작품의 쓸 때의 의도는 순전히 역사적 관심거리에 불과하며, ‘의도론적 오류’와는 반대로 그것은 결코 작품의 의미나 효과나 기능을 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자의 경험이란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비평의 입장에서 보아 중요한 것은 텍스트 내에 구체화되어 있는 것뿐이며, 이것은 그 텍스트가 속하는 문화나 언어에 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또 작자의 의도란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그가 한 편의 시를 성공적으로 썼느냐 못 썼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며, 그것 역시 텍스트에만 의존하여 판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학문적 연구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거의 모든 것, 즉 작가의 생애나 직접적인 환경이나 창작에 관한 작자의 견해나 작품의 연원 등에 관한 연구는 비평의 영역에서 제외된다. 비평가가 알고 있어야 할 유일한 역사는 말의 역사다. 즉 비평가는 그 텍스트에 쓰여진 언어의 역사적 의미를(그 연상적 의미까지도 포함하여)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로우비, 111쪽.)
2) 영향의 오류(affective fallacy)
작품을 평가하면서 작품이 독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중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In an essay published in 1946 W. K. Wimsatt, Jr., and Monroe C. Beardsley defined the affective fallacy as the error of evaluating a poem by its effects―especially its emotional effects―upon the reader. As a result of this fallacy “the poem itself, as an object of specifically critical judgement, tend to disappear,” so that criticism “ends in impressionism and relativism.” Beardsley has since modified the earlier claim by the admission that “it does not appear that critical evaluation can be done at all except in relation to certain types of effect that aesthetic objects have upon their perceivers.” So modified, the doctrine becomes a claim for objective criticism, in which the critic does not describe the effects of a work upon himself, but concentrates upon the analysis of the specific attributes and devices of the work by which such effects are achieved.」(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4th ed., 1981, p. 4)
「그들(윔샛과 비어즐리―인용자)은 (중략) 엘리어트의 뒤를 따라 리차즈에 정면으로 의의를 제기한다. ‘감정적(영향의―인용자) 오류’란, 리차즈처럼, 시는 언어의 감정적(정서적―인용자) 사용으로 성립되고 따라서 비평가가 주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시가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말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즉 윔샛과 버어즐리의 견해는 시란 단순히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변별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 독립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 자체보다도 대상의 효과를 연구하는 것은 말 앞에 마차를 놓는 격이다. 왜냐하면 효과의 원인은 대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대상의 효과가 읽을 때마다 다르고 독자마다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는 것(상대주의―인용자)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한 편에는 효과, 또 한 편에는 의미 또는 ‘인식적 구조’로 분명히 구분해 놓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문학비평의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야 할 것은, 공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객관적인 텍스트의 내용물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효과란 가변적이고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탐구의 영역 밖으로 치워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비평이 전통적인 학문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객관성과 엄밀성을 기할 수 있다고 신비평가들이 주장한 것은 이러한 근거에서다.
여기까지 윔샛과 버어즐리의 주장을 따라오게 되면, 비평의 대상은 텍스트 자체여야 한다는, 지금까지 문학비평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역할을 해온 입장에 다다르게 된다.」(로우비, 111-2쪽.)
* 뜻풀이의 이단 heresy of paraphrase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 자세히 읽기의 중요성 강조
「사실, 나는 이런 패러프레이즈나 어떤 다른 패러프레이즈도 고집하고 싶지 않다. 정말 나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패러프레이즈를 의심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시가 무엇을 전달하는가”라는 우리의 최초의 질문은 잘못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시가 전달하는 것이 너무나 많고, 또 그것은 너무 풍부하게, 너무나 섬세한 제한을 가하면서 전달하기 때문에 시 자체보다 덜 섬세한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전달하려고 한다면 전달되는 내용이 상처를 받아 찌그러지고 말 것이다. (중략)
요약하면, 이 시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시인이 어떤 알맞은 장식을 가하여 전달한 하나의 사상 또는 일련의 사상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분석을 통하여 탐색의 과정에서 점점 더 깊이 시 자체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이러한 탐색을 하는 사이에 시는 전달되는 내용을 가장 “시적”으로 전달하는 언어 수단일 뿐 아니라, 전달되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유일한 언어 수단이다. 사실상, 정확히 말하려 한다면, 시 자체야말로 전달되는 그 특수한 “무엇”을 전달하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재래의 전달 이론들은 우리의 의미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시는 시가 말하는 것을 말한다”라는 이 맵시없는 동어반복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클리앤스 브룩스, 이명섭 옮김, 잘 빚은 항아리, 종로서적, 1984, 81-3쪽.)
「시가 전체적으로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리고 시의 전체적 효과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목적으로 충분히 서술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중략)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패러프레이즈를
지침으로(안내로―인용자), 그리고 속기적 지시(速記的 指示)로(as short-hand references, 쉽게 참고할 수 있는 것으로―인용자) 사용하는 것은 아주 온당하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고, 패러프레이즈가 시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의 진정한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와 리듬은 패러프레이즈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상상된 의미의 핵심을 직접 표현해 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시의 “의미”를 엮어 넣은 진술이라고 생각하고 꽉 붙잡은 것이 무엇이건 간에 곧 이미지와 리듬은 그 진술을 마주 잡아당겨 팽팽히 하고 뒤틀고 비틀며, 제한한다.」(위의 책, 204-5쪽.)
「이처럼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원론은 시가 한 진술, 또는 시에 들어 있는 진술(실제로는, 시의 패러프레이즈, 시 자체가 아닌)의 진리에 시를 두게, 또는 일종의 용기, 일종의 미화된 봉투로 여겨진 “형식”에 시를 두게 우리를 강요함으로써 비평을 정지시킨다. 필연적 귀결로서, 심상의 역할은 논리적 기능과 장식적 기능으로 분리된다.」(위의 책, 230쪽.)
2. 문 학 의 기 능
2. 1. 심리적 기능―쾌락적 기능
1)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시학 6장―「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57쪽.)
카타르시스의 해석―정화(purgation)론, 조정(순화 purification)론, 명징화(명확화 clarification)론(리온 골든(영어 번역), O. B. 하디슨, Jr.(해설), 최상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예림기획, 2002, 212-9, 237-44쪽.)
① 정화(purgation, 연민과 공포를 몰아낸다는 것)론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킨 뒤에 이들 감정을 몰아내는 것으로 파악한다. (중략)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어떻게 이러한 <정화>가 작동하느냐는 것이다. 벌써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학의 해석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고대의학에서 쓴 동류요법(동종요법—인용자)의 개념이었다고 설명한다. 즉 열병을 열기로 다스리고 한기는 한기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이 그것이다. (중략)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최면하에 회상함으로써 신경증의 증상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이러한 요법을 처음 <정화요법>이라 부른 것은 시사적이다. 뒷날 프로이트는 환자 치료에서 최면술을 배제했지만 그의 정신분석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불러모아 몰아내는 정화와 연관되어 있다. (중략) 이 점 프로이트는 카타르시스가 설사와 같은 배설적인 정화라는 생각을 보강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89, 273-4쪽.)
「이 동종요법론에 대한 반대 견해의 하나는 이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치게 플라톤 의존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감정(“passion”)이란 지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은 감정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감정이 지성과 똑같은 비중을 갖는 인간의 일부다. 감정이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르게 통어가 되지 않을 때에만 해로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훈련되어야 하고 조절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사고 방향에서 순화 이론이 생겨났다.」(리온 골든, 하디슨, 241쪽.)
② 조정(순화, purification)론
「조정이론의 장점은 감정의 몰아내기라는 개념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민은 흔히 <좋은> 감정으로 파악되게 마련이며 또 적절한 공포는 건강한 것이 아닌가. 연민이나 공포는 제어되고 조정되어야 할 것이지 몰아내야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중략) 비극을 구경하면서 구경꾼들은 연민이나 공포와 같은 감정의 적절한 효용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조정이론에는 여러 가지 변종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에 카스텔베트로를 위시한 몇몇은 비극이 감정을 단련시켜 준다고 시사하였다. 싸움터에서 병사들이 죽음의 빈번한 목격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되듯이 구경꾼들은 비극 속에서 끔찍하고 보기 딱한 사건을 구경함으로써 가파로운 삶의 실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가 소량의 독을 계속적‧누진적으로 섭취하여 독에 대한 면역을 길러냄으로써 독살 모의에도 끄떡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빌어 미국 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은 비극의 기능을 지적한 것이 있다. 비극은 삶의 고통에 대한 길들이기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것을 <미트라다테스적 기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세목에서 차이가 있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조정이론과 설명의 모형을 같이하고 있다.」(위의 책, 275-6쪽.)
㉠ 트릴링의 설명―「이 기능은 면독성의 기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이 기능에 의하여 비극은 인생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더 큰 고통에 우리 자신을 익숙게 하기 위하여 고통의 동종요법을 시행하는 것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사태에 대한―인용자) 적극적 통제의 의식”(라이오넬 트릴링, 양병탁 역, 문학과 사회, 을유문화사, 1960, 207쪽.)
㉡ 리차즈의 설명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장에서 가장 문제로 삼고 있는 상상력의 의미를 들어보기로 하자. 코올리지가 이것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은 비평이론에 대한 그의 최대의 공헌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를 빼면 그의 말에 덧붙여야 할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특히 적용하는 통합적 마술적 힘은 …… 상반되는 성질이나 부조화한 성질의 밸런스 혹은 화해로 나타난다. …… 신기하고 신선한 감각과 낡고 익숙한 사물, 이상한 정서의 상태와 이상한 질서, 늘 각성한 판단력과 확고한 냉정과 열광이나 깊은 혹은 격한 감정’ ‘음악적인 즐거움의 감각 ……과 다수의 것을 하나의 효과로 환원하는 힘, 혹은 하나의 지배적인 사상 혹은 감정에 의해서 일련의 사상에 변화를 주는 힘’―이러한 것이 상상력이 지니는 힘이다. (중략)
서로 결합되지 않고 혼동된 충동의 군이 예술 작품 속에서 이러한 해결을 받고 하나의 질서 있는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이처럼 하여 상상력은 온갖 예술 작품 속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중략)
상상력의 특징은 경험에서의 돌연한 커다란 위기에 동반되는 효과와도 유사한 효과를 그것이 낳는 점에 있다. (중략) 다만 틀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상상력에 의한 통합은 이러한 극점―이를테면 비극―에 가장 접근했을 때에 가장 분석하기 쉽다고 하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성질이나 부조화한 성질의 밸런스 혹은 화해’를 어디서 비극에서보다 훨씬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일까. 애련―접근하려는 충동―과 공포―물러서려고 하는 충동―가 비극 속에서는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하나의 조화에 달한다. 이것과 마찬가지의 부조화한 어떠한 충동의 결합이 달리 있는 것인가. 이 두 개의 충동이 결합하여 질서 혹은 반응을 구성한다. 그것이 곧 비극을 비극으로서 인정하는 기준이 되는 카타르시스이다.」(리차즈, 김영수역, 문예비평의 원리(1924), 현암사, 1977, 32장 상상력, 325-36쪽.)
③ 명징화(clarification) 이론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사건들의 재현을 통하여, 그러한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는 사건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리온 골든, 하디슨, 최상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6장, 24쪽.)
「비극의 시인은 본래적으로 연민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먼저 선택한다. (중략) 그 다음에 시인은, 그 사건들을 단일한 행동 속에 통합하고 그 사건들이 이 행동과 처음부터 끝까지 갖게 되는 관계를 결정하는 개연성과 필연성의 원리가 드러나도록 그 사건들을 제시한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9장—인용자) 그래서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본 관객을 무언가를 배우게 되며—이것은 사건들이 일반 원리에 의해 그 관계가 명백히 밝혀진다는 의미에서 명확화(clarify)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학습의 행위는 재미있는 것이 된다(시학 4장—인용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하디슨, 215쪽.)
「제4, 6. 9장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가 비극의 체험을 일종의 “통찰 체험”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1) 비극적 체험은 “실생활”에 있어서 경험되는 사건들과는 달리,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다. (2) 그 즐거움은 학습으로부터 결과되는 종류의 즐거움이다. (3) 학습은 특수 사항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일반 개념에 의하여 특수 사항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일과 연관되는 것이다. (4) 비극의 기능을 나타내는 용어는 카타르시스인데, 이것은 “명확화”(claritication)와 같은 것이다.」(하디슨, 216쪽.)
2) 프로이트의 승화
문학예술은 억압된 욕망을 위장된 방식으로 충족시킨다
쾌락 원리(이드)와 현실 원리(에고)―인간은 무조건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지만 현실의 조건이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에 맞게(현실이 허용할 수 있도록) 욕망을 억압하거나 변형해야 한다
예술은 현실 원리에 맞게 욕망을 승화하여 간접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
「예술가는 신경증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은 내향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강한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명예, 권력, 부귀, 명성, 그리고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고 합니다만 그것을 충족시킬 길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불만의 경우와 같이 이들 예술가도 현실을 버리고 그들의 관심의 전부를, 그들의 리비도까지도, 신경증의 시초가 될 수도 있는 공상 생활에서 그들의 원망을 달성하게 됩니다. 예술가의 발전의 종착역이 신경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마 여러 가지 요인이 협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신경증 때문에 훌륭한 재능을 부분적으로 제지당하여 괴로워하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마 그들의 체질에는 승화에로의 능력이 강하고 갈등을 결정짓는 억압의 힘이 꽤 신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술가가 현실로 되돌아가는 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발견됩니다. 예술가만이 공상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공상이라는 중간적인 세계는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시인된 것으로 굶주린 영혼들은 여기에서 위안과 만족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은 공상의 원천에서 쾌락을 얻는 데는 많은 제한을 받습니다. 그런데 참된 예술가에게서는 이것 이상의 것이 마음대로 됩니다. 우선 먼저 백일몽이 손을 대서 너무 개인적이라 남의 반감을 사는 점은 다듬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들이 금지된 원천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모르도록 예술가는 백일몽을 변형시키는 재주를 가집니다. 더욱이 어떤 특정 재료가 자기의 공상을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게 그 재료를 주물러 빚어내는 신비한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예술가는 자기의 무의식적 공상의 이러한 표현에 크게 쾌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 억압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그 표현에 압도되어 포기되어 버립니다. 만일 예술가가 이들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때 타인에게 자기 자신의 쾌락의 무의식적 원천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그들의 감사와 찬탄을 얻게 되며 또 처음에는 공상 속에서만 얻을 수 있던 명예, 권력, 여자의 사랑을 이번에는 공상을 통해 현실에서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331-2쪽.)
「상상의 영역은 실생활에서 포기해야 했던 본능 충족에 대한 대상물을 얻기 위하여 쾌락 원리에서 현실 원리로 넘어가는 고통스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안전지역(sanctuary)임이 분명했다. 예술가는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불만스런 현실로부터 이 상상의 세계로 후퇴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와는 달리 그곳에서 되돌아와서 현실 속에 굳건한 발판을 마련할 줄을 알고 있었다. 예술가의 창작물인 예술품들은 꿈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원망의 상상적 충족이었다. 또 예술 작품들은 꿈과 마찬가지로 타협적인 성격을 갖는데 이는 이들도 억압의 힘과 노골적으로 갈등을 빚는 것은 피하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비사회적이고 자애적인 꿈과 다른데 그 이유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도록 일부러 만들어졌고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 속에 있는 무의식적 원망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예술 작품은 형식적 미가 주는 지각적 쾌락을 내가 말하는바 선동 보상(유인하기 위한 보너스 incitement premium, incentive bonus)으로서 이용했다.」(프로이트, 차재호 역, 프로이트 자서전, 탐구당, 1989, 125-7쪽.)
2. 2. 교육적 기능
1) 지적, 인식적 기능―인간, 사회, 역사를 알게 한다
2) 도덕적, 형성적 기능―간접체험으로 삶을 확장한다
3) 사회적, 비판적 기능―선전(사실을 알려 주는 것), 선동(독자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
「과학자의 사유의 인식 활동의 성과를 구현한 과학 논문들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사유에 호소한다. 예술 작품은 이와 달리 사유와 동시에 감정에 호소한다. 예술 작품은 우리에게 이해와 동시에 체험, 즉 우리가 오성만 가지고는 지각할 수 없으며 정신적인 기관 전체를 가지고 모든 정신력을 생생하게 통일시켜야 지각되는 현실적인 삶과 유사한 체험을 요구한다. (중략)
예술의 교육적 힘은 체험을 야기시킨다는 데 있다. 즉 어떤 사건 현상, 영향을 개인의 고유한 생활과 관련시키고 이것을 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전기적 사실로 삼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적 삶 활동에서 이러저러한 관찰들, 인상들, 사건들의 영향력은, 이 모든 현상들이 어느 정도로 내적 체험을 야기시키는가에 의해, 다시 말하면 그것이 정신의 정서적 영역을 얼마나 깊이 감동시키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러저러한 원인에서, 본 것 혹은 들은 것이 다만 보인 것 혹은 들린 것, 나아가 다만 이해된 것, 의식된 것, 합리적으로 전유된 것으로 남는다면, 인간의 마음, 성격, 세계상에 눈에 띌 만한 흔적이라고는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 현상, 영향이 인간에게 현실적으로 체험되면 이것은 그의 의식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삶과의 정서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시키고 또한 오랫동안 지속되는 활동의 자극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의 의식을 전체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이 있음이 입증된다. (중략) 그러므로 예술은 단지 소통 수단이나 교육의 도구로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동시에 사회의 이해에 규정되는 방향 내에서 인간의 삶의 경험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는 방식으로도 작용한다. 예술은 개인의 전기의 틀을 넓힘으로써, 남의 경험을 ‘내 것’으로 삼게 하여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그것을 획득하도록 자극한다. (중략)
예술은 삶을 형상적으로 모형화함으로써 내 현실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획득하며,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나와 동시대인들 그리고 후손들이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중략)
더 나아가 ‘예술 속의 삶’의 경험은 인간의 실제 생활의 경험에 도움이 된다. 인간의 삶은 대개 개인의 전기에서 순수하게 우연적인 상황들의 연쇄에 좌우된다. 그러나 예술은 이 변덕스러운 우연을 정복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가가 예견하고 목적의식적으로 계획한 경험을 제공한다.」(M. S. 까간, 진중권 옮김, 미학 강의 Ⅱ, 새길, 1991, 148-50쪽.)
* 플라톤의 시인추방론
교육적, 심리적 기능에 바탕을 둔 주장
「또한 우리는 젊은이들이 다음과 같은 아이스퀼로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되네.
신께서 어떤 가문을 송두리째 망치고 싶으시면
사람들 속에 화근을 심으신다.
위 시행이 인용된 비극에서처럼 만약 니오베의 수난이나 펠롭스가(家)나 트로이아 전쟁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그런 일들이 신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네. 또는 시인이 그런 일들이 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해석해 신의 행위는 정당하고 선하며 이들이 벌받은 것은 이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해야 하네. 우리는 시인이 벌받은 자들은 비참하며 그 책임은 신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네. 하지만 시인이 만약 사악한 자들이 비참해진 까닭은 벌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또한 사악한 자들은 벌받음으로써 신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용납해야 하네. 그러나 선한 신이 누군가에게 나쁜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우리가 온갖 방법으로 맞서 싸워야 하네. 나라가 제대로 통치되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주장을 펴지 못하게 해야 하며, 운문으로 쓴 것이든 산문으로 쓴 것이든 노소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게 해야 하네. 그런 주장은 불경하고 우리에게 유익하지도 않으며 서로 모순되네.”」(플라톤, 천병희 옮김, 국가 2권.)
「아아! 내가 사랑하는 인간이 성벽 주위로 쫓기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봐야 하다니. 헥토르 때문에 나는 마음이 아프구나.(일리아스)
또는
아아, 슬프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인 사르페돈을
운명이 메노이티오스의 아들 파트로클로스의 손으로 제압하다니!(일리아스)
여보게 아데이만토스,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시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귀담아듣는다면,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렇게 처신하는 것을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 않거나 그와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려울 걸세. 그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참을성도 없이 사소한 고통만 당해도 푸념과 비탄을 늘어놓을 것이네.”
(중략)
“그렇다고 해서 우리 수호자들은 웃음을 너무 좋아해서도 안 되네. 웃음이 헤프면 으레 심한 심적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런 것 같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따라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웃음에 제압된 것으로 묘사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용납해서는 안 되네. 신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네.”
“더더욱 안 되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러니 우리는 호메로스가 신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네.
헤파이스토스가 궁전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축복받은 신들 사이에 꺼질 줄 모르는 웃음이 일었다.(일리아스)
자네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이런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네.”(플라톤, 국가 3권.)
「그렇다면 이젠 우리는 그(시인-인용자)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영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우리가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영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꿔 주고 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건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는 반면에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방적 시인도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같은 것을 어떤 때는 크다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생각하는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영합하여, 진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개인의 영혼 속에 나쁜 국가 제도를 만들어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플라톤, 국가 10권, 천병희 역, 세계평론선, 삼성출판사, 61-2쪽.)
* 톨스토이의 감염(전염)론
「예술을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쾌락의 수단으로 보는 것을 그치고 인간 생활의 조건의 하나로서 예술을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을 그렇게 검토할 경우 우리들은 예술이 사람들 상호간의 교류 수단의 하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건 그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을 창작한 사람 혹은 창작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자기와 동시에, 자기 이전에, 혹은 자기보다 나중에 똑같은 예술적 인상을 받았거나 혹은 받을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교류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한다.
마치 사람들의 상상과 경험을 전달하는 말(言語)이 사람들을 결합하고 있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처럼 예술도 꼭 그와 같은 작용을 한다. 다만 이 교류 수단이 말에 의한 교류 수단과 구별되고 있는 특징은 말로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다른 한 사람에게 전달할 뿐이지만 예술에 의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예술 활동은 인간이 귀나 눈으로 타인의 감정 표현을 지각하면 그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이 경험한 것과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는 능력이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예술 활동은 바로 이와 같은 능력,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감염될 수 있다는 능력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략)
예술은 개개의 인간 및 인류의 생활과 행복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위하여는 필요 불가결한 사람들의 교류 수단, 사람들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다.
(중략) 인간은 예술에 의하여 타인의 감정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의 덕택으로 감정의 세계에서도 인류가 자기를 위하여 경험한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동시대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 몇 천년 전의 타인이 경험한 감정을 알 수 있게 되며, 또한 자기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톨스토이, 박형규 역, 예술론, 동서문화사, 1977, 309-12쪽.)
「참다운 예술과 거짓된 것과 구별하는 표지로서 오직 하나의 의심할 나위 없는 것이 있다. 예술의 감염성이 그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편에서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자기의 처지를 조금도 바꿈이 없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고, 듣고, 보고 나서 자기를 그 작자, 그리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심경을 경험한다면 그러한 심경을 불러일으킨 것이 예술품이다. 대상이 아무리 시적이고 진짜를 닮고 효과적 혹은 흥미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다른 모든 감정과는 다른 완전히 독특한 기쁨의 감정, 그리고 다른 사람(작자)과 또 같은 예술적 작품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청중 또는 관객)과 정신적으로 합치되는 그러한 감정을 사람의 내부에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품이 아니다.」(위의 책, 401쪽.)
「어떤 사람이 이 감정을 경험하여 작자와 동일한 심경에 감염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자기와 합치를 느끼게 될 때 이러한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이다. 즉 이러한 감염이 없고 작자와의, 또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의 합치가 없으면 예술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감염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의 표지일 뿐 아니라 감염성의 정도는 또 예술의 가치에 대한 유일한 척도이기도 하다.
<감염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예술은, 그 내용은 차치하고, 즉 그것이 전달하는 감정의 가치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그만큼 뛰어난 예술이다.>
예술이 감염력을 가지게 되는 정도의 크고 작음은 다음의 세 조건의 결과에 따른다. 첫째 전달되는 감정의 특성이 큰지 작은지의 결과, 둘째 이 감정을 전달하는 명확함이 큰지 작은지의 결과, 셋째 예술가의 성실성, 즉 예술가 자신이 그가 전달하는 감정을 경험하는 힘이 큰지 작은지의 결과이다.」(위의 책, 402쪽.)
「나는 지금 예술의 감염성의 세 조건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기실 중요한 조건은 마지막 것 하나뿐이다. 즉 예술가는 자기에게 전달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는 내적인 요구를 경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첫 번째 조건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만일 예술가가 성실하다면 그는 감정을 자기가 받아들였던 것처럼 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인각색이기 때문에 감정 그것도 온갖 다른 사람에게는 유다를 것이고 또 그것을 예술가가 깊이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즉 그 감정이 마음속으로부터 성실한 것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유달라질 것이다. 이 성실성이 예술가로 하여금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명확한 표현을 찾아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위의 책, 403쪽.)
「내용에 의한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중략)
감정의 평가, 즉 어떤 감정이 얼마만큼 선량한가, 즉 사람들의 행복에 필요한가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 시대의 종교적 자각에 의하여 행해진다.
각각의 역사상의 그 시대와 각각의 인간 사회에는 그 사회의 사람들이 가까스로 거기까지 도달한 인생의 의의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이 있어 그 사회가 향해서 가는 최고의 선을 규정하고 있다. 이 깨달음이 어떤 시대, 어떤 사회의 종교적 자각이다. (중략)
가장 널리 실제로 응용되고 있는 오늘날의 종교적 자각은 우리들의 행복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 개별적인 것, 일반적인 것, 일시적인 것, 영구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의 형제의 생활, 우리들 상호간에 사랑에 의한 결합에 있다는 자각이다. (중략)
그리스도교적 예술, 즉 오늘날 이 말의 직선적 의미에 있어서의 카톨릭, 즉 전 세계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딱 두 가지 감정, 즉 모든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고 또 사람들은 서로가 형제간이라는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과 기쁨․감격․원기․차분함 등등과 같은 지극히 단순한, 일상적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받아들여지는 감정밖에 없다. 오직 이 두 가지 감정만이 내용상으로는 뛰어난 오늘날의 예술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404-12쪽.)
2. 3. 미적 기능
칸트의 무관심("disinterested, not directed to any immediate outside aim" R. Wellek, I. Kant's Aesthetics and Criticism, Discriminations, Yale University Press, 1970, p. 131.)의 만족―예술 유희(play)론
「벌집은 인간의 예술품에 못지않게 정교하지만 그 근저에 이성적 사려를 상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예술적인 작품이 되지 못하고 자연적인 본능의 소산으로 그치고 만다. 이와 같이 작품에 대해서는 일정한 생산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즉 예술가의 의도인 것이다. 작품의 형식은 이 의도에서 결정된다.
형식은 작품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데, 그 근거는 (중략) 자연에서 제공되지 않고 인위적인 목적의식에서 제공된다. 그것을 칸트는 미적 합목적성이라고 부른다.
(중략)
칸트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추구되는 작위 활동을 유희라 했으며, 자체 이외에 어떤 일정한 목적을 가지는 작위 활동을 업무라 했다. 예술은 유희적 활동에 속한다. 이것이 즉 예술 유희설의 기본이다.
(중략)
예술은 일종의 유희니까 그 자체 이외의 특정한 목적을 갖지 않지만 본래에 이성적 사려의 산물이니까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합목적성을 그 자체 속에 갖는다. 이리하여 칸트는 “무목적의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iveness)을 예술의 기본 성격으로 정했다.」(최재서, 문학원론, 신원도서, 1976, 33-4쪽.)
「앞서 칸트는 미의 창조에 나타나는 예술의 자율성을 목적성의 조건에서 논증했지만 이번에 미의 판단에 있어서는 흥미의 조건에서 고찰한다. 대상의 실존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칸트는 관심이라 했다. 그러한 기쁨은 항상 결정 근거로서 욕망의 기능과 관련된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마당에서 그 물건의 실존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정관해서 그 물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함이 문제될 뿐이다. 만약 그때에 우리가 대상의 실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미적 판단은 편파성을 띠어 순수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인식적 판단과 실천적 판단은 개념에 지배를 받고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 끌리지만, 미적 판단은 전연 그런 관련성이 없다. 음악에 나타나는 선율의 자유로운 패턴이나 그림에 나타나는 무목적한 선들의 결합(소위 화초 무늬) 같은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따라서 명확한 개념을 갖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 쾌감을 준다. 그것은 개념 이전의 이념에 대한 반성에서 오는 쾌락이다. 그러한 판단은 정관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칸트는 정관 속에 나타나는 미적 쾌락을 “무관심의 기쁨”(disinterested delight)이라 부르고 (중략)
칸트가 “무관심의 기쁨”을 가지고 쾌락주의나 예술지상주의 같은 것을 의미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우리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에 욕망에 이끌리거나 공리적인 목적관에 어지럽혀짐이 없이 직접으로 작품을 대하여 정관해야만 그 작품의 가지는바 예술적 쾌락을 완전하게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말했을 따름이다. 그는 이와 같이 미를 도덕이나 감각적인 쾌락이나 진리나 유용성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비로소 그의 철학적 도식 속에서 예술에 대하여 독립된 정당한 지위를 마련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최재서, 37-8쪽.)
「미적 상황 속에 있는 심리적 주체의 심리적 정향은 객체의 지각과정으로부터 모든 외적 목표나 목적을 배제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지각의 목적 및 목표는 지각 그 자체, 직관행위 그 자체(굵은 글씨 원문대로-인용자)이다. 어떤 대상의 미에 대한 향유는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적 인식의 가치는 또한 학적·이론적 인식과는 달리 그 성과 내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의 향유과정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적 인식은 그 자체 외에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M. S. 까간, 진중권 옮김, 미학 강의 Ⅰ, 새길, 1989, 115쪽.)
「미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체험은, 그것이 대상에 대한 주체의 사심없는 관심, 즉 생물생리학적 차원이 아닌 정신적 차원(굵은 글씨 원문대로-인용자)의 관계를 통해서 야기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정서적 상태와 구별된다. 사심있는 관심은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욕구들—배고픔, 성적 충동, 이익욕, 명예욕 등—의 존재와 그것의 충족의 정도를 나타내는 정서를 자극한다. 그에 반해 미적 감정은 그와는 다른 기원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체험하려는 특정한 정신적 욕구(그리고 그것의 만족의 정도)를 표현하는데, 이때 그 대상의 가치는 그것이 어떤 유용함이나 이익을 가져온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본질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별밤의 아름다움과 가젤영양의 날렵한 움직임과 바다의 광활함과 젊은 처녀의 매력적인 얼굴을 향유한다.」(까간, 118쪽.)
「예술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의 형식은 이 형식에 의해 표현된 내용의 특수성에 상응하여 고도의 내적 질서, 완벽한 내적 조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굵은 글씨 원문대로-인용자) (중략)
현실 생활에서 인간의 노동 활동의 근본 가치는 당연히 미적으로가 아니라 공리적으로 측정되며, 노동 활동에 의해 주어진 정신적 만족의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실리적 이익에 따라서 측정된다. 삶을 예술적으로 모형화하는 것은 이 공리적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공상적인, 비현실적인 대상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미적 감정의 흥분 즉 인간의 창조력과 정신적으로 접촉하는 희열이 예술창조활동의 직접적 기능이 된다.」(M. S. 까간, 진중권 옮김, 미학 강의 Ⅱ, 새길, 1991, 154쪽.)
3. 문 학 의 갈 래 (장 르)
문학작품들의 공통적인 성격이나, 한 부류의 문학작품을 다른 부류의 것들과 구별하게 하는 성질에 따라 분류하면 갈래가 된다
3. 1. 갈래의 기준―주체(인간)와 세계의 관계 양상
주체가 세계와 관계를 맞는 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주체가 힘이 세서 그의 의도대로 세계를 지배한다. 주체는 세계를 동화시킨다. 둘째는 둘이 힘이 엇비슷해서 서로 싸운다. 셋째는 첫째와는 반대로 세계가 주체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3. 2. 갈래의 유형(큰 갈래―유, 작은 갈래―종)
1) 서정 갈래
세계의 자아화
다른 갈래에 비해 주관적 성격이 강하다. 길이가 짧다. 음악성(리듬)
한국 문학에서의 서정 갈래 종(작은 갈래)들―고대 가요, 향가, 고려 가요, 시조, 현대시
2) 서사 갈래
자아와 세계와의 대립
객관적이다―길이가 길다.
갈래 종―설화(신화, 전설, 민담)/ 소설(* 종을 구분하는 기준―자아와 세계 사이의 대립의 양상의 차이)
3) 극 갈래
자아와 세계와의 대립
서사 갈래와 구별하는 기준―작중 화자의 존재 여부, 갈등을 취급하는 방법(서사 갈래, 특히 장편은 갈등의 전체 과정을 다 들려 주지만, 극 갈래는 무대 상연을 전제하기 때문에 길이가 한정되어 갈등이 고조된 상황을 중심으로 플롯이 짜여진다)
4) 교술 갈래
자아의 세계화
대상의 객관성을 존중한다―따라서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인 허구라는 점과 대립되는 측면 때문에 주변적인 갈래로 취급하기도 한다
교술 갈래 종―수필, 일기,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