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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7권 / 비명(碑銘)
의정부 좌참찬 윤공 신도비명 병서(議政府左參贊尹公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훌륭한 자질과 온전한 덕을 갖춘 인물을 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고, 그런 인물이 나와도 또한 때를 만나지 못할까 걱정이니, 항상 세도에는 한(恨)이 남는 법이다. 고(故) 공조 판서(工曹判書) 파평(坡平) 윤공(尹公) 휘(諱) 국형(國馨)과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휘 의립(毅立)은 연달아 부자(父子)가 중망(重望)을 받아 재상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도에 차질을 빚어 높은 지위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많은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여 오행가(五行家)는 타고난 운명을 탓하고, 감여가(堪輿家 풍수가(風水家))는 묏자리를 탓하기까지 하였으니, 여기에서 여론(輿論)을 볼 수 있다.
참찬공(參贊公)이 운명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아들 세헌(世獻)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신도비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니, 나는 이 글을 지음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겠다. 살피건대 공의 초명(初名)은 의립(義立)이었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중간에 고쳤고, 자(字)는 지중(止中)이다.
그의 선조 신달(莘達)과 관(瓘)은 국운을 열고 영토를 개척하여 나란히 훈열(勳烈)에 기록되었고, 덕을 심고 경사를 열어 삼한(三韓)에서 으뜸가는 집안을 이룩하였다. 후세의 돈녕부 정(敦寧府正) 휘(諱) 지숭(之崇)은 공의 고조(高祖)이다. 이분이 이성 현감(利城縣監) 휘 정림(廷霖)을 낳았으며, 이분이 경산 현령(慶山縣令) 휘 희렴(希廉)을 낳았다.
이분이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국형(尹國馨) 부군(府君)을 낳았는데, 경력(經歷) 평양 조씨(平壤趙氏) 수(琇)의 딸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혼후하고 기백이 온전하여 표리(表裏)가 완전하고 순수하였다.
성실하고 화려하여 쇠처럼 강직하면서도 옥처럼 엄숙하였다.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익혔다. 만력(萬曆) 갑오년(1594, 선조27)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 겸 춘방설서(翰林兼春坊設書)에 선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옮겼다.
경연(經筵)에 있을 때, 임금께서 입으신 옷이 예법에 맞는 복장이 아니라고 논하였는데, 선조(宣祖)께서 곧바로 명나라 사람의 서첩을 가져다 하사하셨다.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여 춘방 사서(春坊司書)를 겸직하였다. 신축년(1601)에 운판(運判)의 임기가 만료되자,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교리(郊理),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가장 먼저 중사(中使 환관)가 열병(閱兵)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호남 방백 이홍로(李弘老)가 많은 뇌물을 보내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을 탄핵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공의 굳세고 바른 태도를 칭찬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을 때, 영남(嶺南) 사람 문경호(文景虎)가 최영경(崔永慶)의 원통한 죽음을 추론(追論)하여 장차 한 무리의 관련자들을 쓸어내려고 하였는데, 공은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였다. 체직(遞職)되어 연달아 장령(掌令),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춘방 필선(春坊弼善)과 사성(司成)을 겸직하였다.
이듬해에 어사(御使)가 되어 바다의 경비를 순찰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는데, 3년 만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강화 부사(江華府使)가 되었는데, 3년 만에 또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1608)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임명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임기를 마쳤을 때, 판서공(判書公 윤국형)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외직으로 나아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3년 뒤에는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
정사년(1617)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조정에 들어가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나갔다. 세 번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모셨는데, 극진하게 뜻을 받들어 어린이를 보호하듯이 하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사모하듯이 하였다.
대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 공은 54세였는데, 노쇠한 몸으로도 건강을 잃을 정도로 슬픔을 다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친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서 서도(西島)에서 모 도독(毛都督)을 접반(接伴)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이르러 서질(庶姪) 하나가 죽은 것처럼 조작한 뒤에 적당(賊黨)에 가담하였다가 반역죄로 사형되니, 공은 법에 따라 마땅히 유배를 가야만 했다.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이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적얼(嫡孼) 간에 원수처럼 사이가 나쁜 흔적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풀려나 불문에 부쳐졌다. 공이 세 번이나 소장을 올려 연좌(連坐)의 법률을 따르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특별히 따뜻이 위로해 주셨다.
그러나 공은 이미 세상에 뜻이 없었고, 모 도독이 한창 노여움을 품고 심하게 무함(誣陷)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형조 참판(刑曹參判), 개성 유수(開城留守), 경상 감사(慶尙監司), 연안 부사(延安府使), 길주 부사(吉州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공에게는 추호의 잘못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마땅히 모 도독의 이목(耳目)을 고려해야 했으므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옮겨 임명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간(臺諫)에서 근거 없는 말로 공을 배척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이르러 비로소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3년이 지나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말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공이 오랫동안 시의(時議)에 미움을 받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임금께서 알고, 특별히 형조 참판(刑曹參判)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한다는 명이 있었다. 공이 더욱 위축되고 불안하여 간절한 소장으로 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더욱 권면하며 강력히 나오게 하여 사대(賜對)한 뒤에 임지로 보내셨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자 형조(刑曹)에 임명되었다.
호남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나간 지 몇 달 만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갑술년(1634, 인조 12)에 병조(兵曹)에 있다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어 임기를 마치고, 예조(禮曹)와 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이 되었다.
정축년(1637)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가(扈駕)한 공로로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발탁되었다. 공은 허리가 심하게 구부러졌고 또 노쇠하고 병들었다고 굳게 주장하였으나 한 달이 넘도록 사직을 윤허 받지 못하였는데, 대신(大臣)이 변론해 주어 겨우 체직되었다.
이때부터 5년 동안 병이 날로 심해지기만 하고 차도가 없어서, 예조 판서(禮曹判書),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으나 감당할 힘이 없었다. 오직 좌우 참찬(左右參贊)만은 관리의 일이 조금 적었으므로 직무를 보면서 요양하였다.
두 번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두 번 모두 병으로 면직되었다. 당시에 청나라 사람이 육경(六卿)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간관(諫官)이 마침내 공이 사적인 정에 이끌려 공적인 일을 저버린 것으로 의심하여 삭출(削黜)하려 하였다.
임금께서 평소 공의 충성을 믿었으므로 파직(罷職)만 윤허하였다가 몇 달 만에 다시 서용(敍用)하셨다. 그러나 공은 너무 지쳐 조알(朝謁)조차 못하고, 마침내 계미년(1643, 인조 21) 9월에 운명하였다. 적성(積城) 경신동(庚申洞) 임좌(壬坐)의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아아, 공은 내면에 아름다운 덕을 축적하여 행위로 드러나, 몸을 단속하고 집안을 유지하는 데 한 점의 하자도 없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와 종당(宗黨)을 우애하였으며, 아래로 노복(奴僕)에게까지도 은택을 극진히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 멀리서 먼 친족이 만약 일이 있어 찾아오면, 그 위급하고 곤란한 일을 도와서 곡진히 은의(恩意)가 있었다.
평소 생활할 때 진실하여 남들과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니, 언행을 살펴보면 간절함과 진실함이 한결같았다. 정책을 시행함에 재주를 두루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성의도 독실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여덟 번 주군(州郡)을 다스렸고 세 번 관찰사가 되었을 때, 지키는 것은 간략했지만 일마다 거행되었고, 명령을 내리면 백성들이 믿어서 모두들 공을 마치 부모처럼 사랑하고 받들었다.
공이 임지를 떠난 뒤에는 곧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 공이 경기 지역을 순행할 때, 양주(楊州)의 백성과 부로(父老)들이 도로에서 환호하며 말하기를 “우리 공께서 오셨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세상일에 연루되어 연이어 곤경에 처하였는데, 후진(後進) 중에 새 귀인들은 줄줄이 이어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재상 최명길(崔鳴吉)이 일찍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동료인 나 이민구에게 이르기를 “윤공은 낭묘(廊廟)의 크게 쓰일 인재인데, 나이가 많아 안타깝다.”라고 하였다. 당시 노성(老成)한 사람들 가운데도 정승 자리에 오른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비록 지극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또한 공론이 같음을 볼 수 있다.
공은 사정(私情)에 이끌려 부정하게 된 일을 밝히고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씻어내며, 큰 성은(聖恩)에 감복하고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었다는 뜻으로 《회은록(懷恩錄)》을 지었다. 한 근원에 뿌리를 두었고 한 기운에서 나누어졌으며, 조상의 공렬을 생각하고 대를 이어나감에 감격한다는 뜻으로 《내외세보(內外世譜)》를 지었다.
선달(先達)과 명공(名公)들 가운데 아름다운 명성이 있어서 실로 금석(金石)에 해당하는 분들은 그 자료를 수집하여 《읍훈록(挹薰錄)》을 지었다. 장고(掌故)와 요속(謠俗) 가운데 뒤죽박죽 섞이거나 잘못된 소문이 맞는 것도 있고 와전된 것도 있었으므로, 취사(取捨)하여 《야언통재(野言通載)》를 지었다.
조정에서 핍박 받아 신세는 좌절되고 도는 펼 수 없었으므로, 구학에 마음을 두어 감회를 일으키고 영탄한 작품들을 모아 《산가청사(山家淸事)》를 지었다. 이상의 모든 글들이 전부 세교(世敎)에 관련되니, 그 말들이 참 맛이 있도다.
첫 번째 부인은 군기시 정(軍器寺正) 죽산(竹山) 박문영(朴文榮)의 딸이다. 아들 인적(仁迪)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딸들은 목사(牧使) 황수(黃滫), 군수(郡守) 안정(安鋌), 시직(侍直) 박이장(朴以章), 현감(縣監) 이효승(李孝承)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은 양주 목사(楊州牧使) 초계(草溪) 정약(鄭爚)의 딸이다. 아들은 현령(縣令) 세헌(世獻), 세량(世亮), 세익(世翊)이고, 딸은 지평(持平) 오정원(吳挺垣)에게 시집갔다. 황수(黃滫)의 아들은 대사성(大司成) 호(㦿)와 책(策)이고, 딸들은 윤준경(尹濬慶), 진사(進士) 조상한(趙相漢), 진사(進士) 박천영(朴千榮), 도사(都事) 심서견(沈瑞肩), 박신규(朴信圭)에게 시집갔다.
안정(安鋌)의 아들은 수성(壽星), 오성(五星), 필성(弼星)이고, 딸은 신익경(辛益慶)에게 시집갔다. 박이장(朴以章)의 아들은 지현(之顯), 지석(之碩)이다. 이효승(李孝承)의 아들은 부사(府使) 동성(東星), 동원(東垣)이고, 딸들은 참판(參判) 신유(申濡), 최태제(崔泰齊), 남두징(南斗徵)에게 시집갔다.
세헌(世獻)의 아들은 이건(以乾), 이곤(以坤)이고, 딸들은 김홍명(金洪命), 김익하(金翊夏)에게 시집갔다. 오정원(吳挺垣)의 아들은 시수(始壽), 시대(始大)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파평에서 시작하여 / 爰始坡平
근원 깊고 줄기 길었으니 / 源濬派長
대대로 이어 오며 / 聯延代序
그 영광 사라지지 않았네 / 不泯其光
상서가 중간에서 분기하고 / 尙書中奮
참찬이 아름다움 계승하여 / 參贊襲媺
능히 닮고 능히 번창시키니 / 克類克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네 / 是父是子
저 종묘 바라보매 / 相彼淸廟
둥근 그릇도 있고 모난 그릇도 있어 / 其器圜方
향기로운 제물 가득 담으니 / 其盛苾芬
신께서 흠향하시네 / 神所享之
어찌 높은 벼슬 없으랴만 / 豈無高位
정승 자리 인색했고 / 而靳三事
어찌 현달하지 않았으랴만 / 豈無顯庸
큰 베풂 막혔어라 / 而閼大施
덕을 몸에 쌓아 / 蓄德自躬
남은 경사를 후손에게 돌렸고 / 歸餘於後
많이 거두고 적게 발하였으니 / 多收寡發
대대로 복록 있을 줄을 알겠노라 / 卜世其有
감악산 바라보니 / 粤詹紺嶽
군자가 묻힌 곳이라 / 君子攸藏
아아 천만년토록 / 於千萬年
견고하고 보존되기를 / 旣固旣臧
<끝>
[註解]
[주01] 윤국형(尹國馨) : 1543~161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부(粹夫), 소자(小字)는 국형(國馨)이다. 본명은 선각(先覺)이었는데,
후에 피휘(避諱)하기 위해 소자를 이름으로 삼았다. 《愚伏集 卷17 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尹公神道碑銘
幷序》
[주02] 윤의립(尹毅立) : 1568~1643. 본관은 파평,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 초명은 의립(義立)이다. 《順菴集 卷21 資憲大
夫議政府左參贊兼春秋舘事月潭尹公墓碣銘 竝序》
[주03] 재상의 자리 : 정축(鼎軸)의 정(鼎)은 종묘(宗廟)의 제례(祭禮)에 쓰이는 귀중한 도구이므로,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재신(宰臣)에 비
유하고, 축(軸)은 수레바퀴의 한가운데에 있는 구멍에 끼우는 긴 나무 또는 쇠를 말하는데, 역시 중요한 지위를 말한다. 따라서 정축
은 일반적으로 재상(宰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주04] 윤세헌(尹世獻) : 1608~? 본관은 파평, 자는 회경(誨卿)이다.
[주05] 나는 …… 없겠다 : 가장(家狀)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훌륭한 사실이므로, 그대로만 쓰면 된다는 말이다.
[주06] 신달(莘達)과 …… 기록되었고 : 윤신달(尹莘達)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삼
한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태관(太官)에 올랐다. 윤관『尹瓘, 1040년(정종 5)~1111년(예종 6)』의 본
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107년(예종2)에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하여 9성을 쌓아 침범
하는 여진을 평정하였다. 영평현 개국백(鈴平縣開國伯)의 작위를 받았다. 《屛溪集 卷55 先祖文肅公墓表》
[주07] 윤정림(尹廷霖) : 본관은 파평, 자는 은경(殷卿)이다.
[주08] 윤희렴(尹希廉) : 1517~1574. 본관은 파평, 자는 중간(仲簡), 호는 매고(梅皐)이다. 《一松集 卷8 慶山縣令尹公墓碣銘 幷序》
[주09] 중사(中使)가 …… 일 : 이홍로(李弘老, 1560~1612)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보(裕甫), 호는 판교(板橋)이다. 여기서 말하
는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이란, 1601년(선조34)에 주상이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삼남 지방의 병정(兵政)을 살펴보게 했을 때, 전
라도 관찰사 이홍로가 조사를 나온 관리에게 뇌물을 준 사건을 말한다. 《順菴集 卷21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春秋舘事月潭尹
公墓碣銘 竝序》
[주10] 문경호(文景虎) : 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군변(君變), 호는 역양(嶧陽)이다. 《樊巖集
卷39 嶧陽文公行狀》 정여립이 모반했을 때에 최영경(崔永慶)이 반란자의 수괴 길삼봉(吉三峯)으로 오인되어 옥에서 억울하게 죽
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북인(北人) 측에서는 성혼(成渾)이 정철(鄭澈)을 사주하여 죽인 것이라고 여겼다.
1597년(선조30) 4월에 처음 박성(朴惺)이 이 문제를 제기하여 성혼을 공격하는 소장을 올렸고, 1601년 12월에 문경호가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소장을 올렸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宣祖實錄 34年 12月 20日》
[주11] 최영경(崔永慶) : 1529~1590.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己丑錄 守愚堂先生崔公行
狀》 290쪽 각주50 참조. 정여립이 모반했을 때에 반란군의 수괴 길삼봉(吉三峯)으로 오인되어 옥에서 억울하게 죽었는데, 정인
홍(鄭仁弘)을 비롯한 북인(北人) 측에서는 성혼(成渾)이 정철(鄭澈)을 사주하여 죽인 것이라고 여겼다.
1597년(선조 30) 4월에 처음 박성(朴惺)이 이 문제를 제기하여 성혼을 공격하는 소장을 올렸고, 1601년 12월에 문경호가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소장을 올렸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宣祖實錄 34年 12月 20日》
[주12] 고을 …… 받들어 : 고을 수령이 되어 어머니를 봉양할 때, 양지(養志)의 효도를 행했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가 부친 증석(曾晳)을 봉양할 때의 일과 증자의 아들이 증자를 봉양할 때의 일을 비교해 거론하면서, 효행은 비슷하지만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였고[養志], 증자의 아들은 부모의 몸만 봉양한 것[養口體]이라며, 진정한 효도는 뜻을 봉양하는 것이라고 하였
다.
[주13] 건강을 …… 다하였다 :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슬픈 마음을 지극히 하였다는 말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거상
(居喪)의 예법에 대해 말하면서 “50세에는 극도로 슬퍼하여 몸을 크게 훼손해서는 안 되고, 60세에는 슬퍼하는 마음을 조금 더 완
화하여 몸을 훼손하지 않게 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라고 하였다.
[주14] 모 도독(毛都督) : 명나라의 도독 모문룡(毛文龍)을 가리킨다. 1621년(광해군13)에 청나라 태종이 요양(遼陽)을 공격하여 함락
시키자,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있던 모문룡이 의주(義州)로 쫓겨 들어왔다가, 이듬해에 가도(椵島)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모문룡은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명나라에 도움을 주었으나, 뒤에는 우리나라로 나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피해를 주었으며, 명나라 측
에도 피해를 끼쳤다. 이에 명나라에서 요동 경략(遼東經略) 원숭환(袁崇煥)을 시켜 모문룡을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해
죽였다.
모문룡이 죽은 뒤, 모문룡의 부하로 있던 진계성(陳繼盛)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도에 주둔해 있다가 유흥치(劉興治)에 의해 살
해되었으며, 이후로는 유흥치가 가도에 주둔하였다.
[주15] 완평(完平) 이 상국(李相國) : 이원익(李元翼, 1547~1634)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梧里集 附錄 卷2 諡狀》
[주16]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 : 1566~162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1624년(인조2)
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국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전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遲川集 卷19 贈大匡輔國崇祿大夫……玉城府院君
贈諡忠定公張公行狀》
[주17] 임기를 마치고 : 보정(報政)은 지방관이 임기를 만료하고 조정에 돌아가 자기의 정적(政績)을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백금이 노나
라에 봉해진 후 3년 만에 주공에게 정사를 보고하자, 주공이 ‘왜 늦었느냐?’라고 물으니, 백금이 ‘풍속을 변화시키고 예법을 개혁하
였으며, 3년 뒤에 상복을 벗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伯禽封魯三年而報政, 周公曰, 何遲也. 伯禽曰, 變其俗革其禮, 喪三年然
後除之.]”라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資治通鑑外紀 卷3》
[주18] 관찰사 : 번얼(藩臬)은 중국의 번사(藩司)와 얼사(臬司), 즉 포정사(布政司)와 안찰사(按察司)의 장관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관찰사를 가리킨다.
[주19] 오정원(吳挺垣) : 1614~1667.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보(仲輔)이다. 《松坡集 卷15 贈議政府領議政行黃海道觀察使吳公
墓碣銘 幷敍》
[주20] 황호(黃㦿) : 1604~1656.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자유(子由), 호는 만랑(漫浪)이다. 《星湖集 卷62 漫浪黃公墓碣銘 幷序》
[주21] 조상한(趙相漢) : 1615~?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태언(台彦)이다.
[주22] 박천영(朴千榮) : 1619~168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농아(聾啞)이다.
[주23] 심서견(沈瑞肩) : 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양(伯陽)이다.
[주24] 박신규(朴信圭) : 1631년~1687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봉경(奉卿)이다. 《樊巖集 卷47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
政……五衛都摠府都摠管朴公神道碑銘》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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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議政府左參贊尹公神道碑銘 幷序
天之生閎材全德也不數數。旣生矣。又患不逢時。常遺恨於世道。故坡平尹公工曹判書諱國馨。議政府左參贊諱毅立。仍父子負重望。朝夕鼎軸臨其摯。而中躓不克臻大位。世多疑之。至五行家訾祿命。堪輿家咎宅兆。此可見輿誦焉。參贊公沒旣十年。其嗣世獻以狀屬不佞神道之銘。不佞於是無愧色矣。按公始諱義立。以事中改。字止中。其先莘達,瓘開運拓境。竝載勳烈。樹德啓慶。門閥冠三韓。後世諱之崇。敦寧府正。實公高祖。生諱廷霖利城縣監。生諱希廉慶山縣令。是生工曹判書府君。聘平壤趙氏經歷琇女。隆慶戊辰生公。公質厚氣全。表裏完粹。旣實旣華。金剛而玉栗。少治家學。萬曆甲午。釋褐選翰林。兼春坊說書 。轉弘文館正字。在經筵。嘗論上所御非法服。宣廟亟取中朝人書帖以賜之。陞修撰。兼春坊司書。辛丑。滿運判考。復入玉堂 。爲校理,副應敎。首言中使閱兵之失。因劾湖南方伯李弘老饋遺豐腆爲取媚。時多其勁正。及爲司憲府持平。嶺南人文景虎追論崔永慶冤死。將以傾一隊人。公言其已甚。遞職。連拜掌令, 司諫。兼春坊弼善,司成。翌年。以御史巡海警備。還爲楊州牧使。居三年病免。乙巳。加通政階。知江華府。居三年。又以病免。戊申。拜承政院承旨。己酉。知廣州。及瓜。丁判書公憂 。制除。由戶曹參議出知春川。三年。換洪州。丁巳。進嘉善大夫。入爲判決事。知長湍府。蓋三以專城奉大夫人。備極志養。嬰兒保而赤子慕也。旣喪。公年五十四。以老能致毀自盡。服闋。以右尹儐毛都督于西島。至甲子。有庶姪詐死投賊黨。以叛誅 。公在法當配。完平李相國與玉城府院君張晩一口言嫡孼仇隙有跡。釋不問。公三疏請從坐。上特加溫慰。然公已無意於世 。而毛帥方蓄怒。厚誣不已。屢除刑曹參判,開城留守,慶尙監司,延安吉州兩邑。俱辭不赴。朝廷諒公無絲毫過。又當調毛帥耳目。移授密陽。則臺諫又以游辭擠公。至丙寅。始赴慶州。越三年。拜嶺南觀察。爲言者所持。上察公積忤時議。斤斤不可 。特除刑參左尹。繼有關北之命。公益蹙踖不安。血疏蘄解。上益敦勉強起。賜對以遣。滿歸拜秋官。辭湖南節。知仁川數月。按湖西。甲戌。自夏官按邦畿報政。貳春官, 水部。丁丑。用南漢扈駕勞增秩嘉義。擢長司寇。公俯僂滋甚。且嬰衰疾固議。踰月不准辭 。大臣爲言之乃遞。自是五年病日進不損。於宗伯,京兆,知春秋之拜。不能自力。唯左右參贊。官務稍簡。就職養安。及再長春官。再以病免。時淸人責六卿質子。諫官遂疑公牽私負公。繩以削黜。上雅信公忠藎。只允罷職。數月復敍。而公已困不任朝謁。竟以癸未九月考終。葬積城庚申洞負壬之原。嗚呼。公內積德美。發之於爲。持身持家。絶去瑕纇。孝於親 。友於兄弟宗黨 。下逮僕隷。莫不盡其施。遐方疏屬苟以事來赴。其兼濟急難。曲有恩意。平居恂恂。物與無忤。考其言行。懇實如一。措之政術。才周誠篤。凡八典方州。三更藩臬。操約而務擧。令出而人信。咸愛戴如父母。旣去。輒豎石頌德。其巡行圻邑。楊之民父老驩呼道路曰。我公來矣。然公旣坐世故。連蹇挫閼。而後進新貴衮衮升台鉉相續。崔相鳴吉嘗爲冢宰。謂其寮李敏求曰。尹公誠廊廟器。惜其年邁。時老成延登不一二數。則雖知非至言。亦以見公議所同。公以信私枉。滌群謗。服鴻渥。荷殊遇。作懷恩錄。以本一源。分一氣。懷祖烈。感似續。作內外世譜。先達名公。厥有懿問。實該金石。是裒是摭。作挹薰錄 。掌故謠俗。凌雜謏聞。有核有訛。爰取爰舍。作野言通載。偪側朝端。身蹇道屈。結情丘壑。興懷永歎。作山家淸事。凡所論譔。悉關於世敎 。有味其言之也。前夫人。軍器寺正竹山朴文榮女。擧男仁迪。早夭。女適牧使黃瀡,郡守安鋌, 侍直朴以章,縣監李孝承。後夫人。楊州牧使草溪鄭爚女。擧男縣令世獻,世亮,世翊。女適持平吳挺垣。黃瀡生子大司成㦿及策。女嫁尹濬慶,進士趙相漢, 進士朴千榮,都事沈瑞肩,朴信圭。安鋌生子壽星,五星,弼星。女嫁辛益慶。朴以章生子之顯,之碩。李孝承生子府使東星, 東垣。女嫁參判申濡,崔泰齊,南斗徵。世獻生子以乾,以坤。女嫁金洪命,金翊夏。吳挺垣生子始壽,始大。銘曰。
爰始坡平。源濬派長。聯延代序。不泯其光。尙書中奮。參贊襲媺。克類克昌。是父是子。相彼淸廟。其器圜方。其盛苾芬。
神所享之。豈無高位。而靳三事。豈無顯庸。而閼大施。蓄德自躬。歸餘於後。多收寡發。卜世其有。粤詹紺嶽。君子攸藏。
於千萬年。旣固旣臧。<끝>
東州先生文集卷之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