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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30권 / 묘지(墓誌)
유명조선국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수문전대제학 겸 판호조사 잉령치사 시 정숙공 안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崇祿大夫判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兼判戶曹事仍令致仕諡靖肅公安公墓誌銘 幷序)
남수문(南秀文)
판중추(判中樞) 잉령치사(仍令致仕) 시 정숙(諡靖肅) 안공(安公)을 장사한 지 다음해 여름에 관찰사로 있는 둘째 아들이 공의 행실을 써서 무덤의 명(銘)을 구하였다. 내가 욕되이 계가(契家 집안끼리 사이가 돈독함을 말함)가 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순(純)이요, 자는 현지(顯之)니, 본관은 순흥(順興)이었다. 증조는 고려 도첨의찬성사 흥령부원군(興寧府院君)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이니 원조(元朝) 제과(制科)에 합격하였으니, 호는 근재(謹齋)요, 도덕과 문장이 당세에 스승이 되었고, 일찍이 관동에 안렴사가 되었고 《와주집(瓦注集)》을 저술하였는데 세상에 있다.
조부는 특진보국 숭록대부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集賢殿大學士) 문간공(文簡公) 휘 종원(宗源)이요, 아버지는 추충익대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령부원군(推忠翼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 양도공(良度公) 휘 경공(景恭)이었다.
어머니는 의정택주(懿靜宅主) 정씨(鄭氏)니, 정당문학 오천군(烏川君) 휘 사도(思道)의 딸이었다. 홍무(洪武) 4년 신해 10월 18일에 공을 낳았다. 경신년에 공의 나이 10세에 음직으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보직되었고, 계해년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정묘년 전의시(典儀寺)에 녹(錄)하였다.
무진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오년에 성균학유(成均學諭)로 직학(直學)을 지내고, 임신년에 사재주부(司宰注簿)가 되고, 계유년에 사헌감찰(司憲監察)로 자리를 옮겼다. 갑술년에 좌습유(左拾遺) 지제교(知製敎)로 있으면서 정사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어겨 병자년 가을에 김해판관(金海判官)으로 나갔는데 치적이 제일이기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였다.
정축년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 소환되었고, 무인년 여름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가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이 되었을 때, 궁녀가 죄를 범하자 태조가 대사헌 조박(趙璞)에게 명하여 곧 죽이게 하였더니 조박이 공에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사헌부는 형관(刑官)이 아니요,
또 그 죄목을 바로잡지 않고 죽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조박이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강행하려 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인명이란 지극히 중하여 죽이면 다시 살리지 못하니, 갑자기 극형에 처하면 의리에 어떠할지 응당 유사에 붙여 국문하여야 합니다.” 하니, 조박이 노하여 공의 말한 내용을 아뢰었더니, 태조가 곧 깨닫고 공의 말대로 따랐다.
또 어느 날 백관이 경복궁 문밖에 모여서 동서로 나누어 앉았을 때, 어떤 한 권귀(權貴)가 말을 타고 곧장 대궐에 도착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이 곧 그 종자(從者)를 잡아서 탄핵하여 권귀를 귀향보내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유쾌히 여겼다. 그때 태종(太宗)이 세자로서 그 일을 목격하였으니, 왕위에 오른 뒤에 공을 보고 여러 차례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경진년에 서북면 경력(西北面經歷)으로 나갔다가, 신사년에 통덕병조정랑 겸 형조도관정랑(通德兵曹正郞兼刑曹都官正郞)이 되었고, 임오년에 조봉내자소윤(朝奉內資少尹)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종부 봉상(宗簿奉常)의 부령(副令)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었다.
계미년에 사평부 경력(司平府經歷)을 겸하였으니, 이해로부터 사헌부 장령, 형조의 도관(都官) 의랑(議郞), 내자윤(內資尹), 봉상 종부의 두 영(令)이 되었고, 다시 판내자(判內資) 판통례(判通禮)가 되었으나, 모두 관직(館職)을 띠었으며, 여러 차례 직계가 올라서 통정대부가 되었다.
정해년 겨울에 승정원 우부대언에 뽑혔으며, 무자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이르러 임금을 도운 것이 많았고, 겨울에 이조 우참의에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좌참의에 옮겼고, 기축년에 가선좌군 동지총제 보문각직제학 동지춘추관사(嘉善左軍同知摠制寶文閣直提學同知春秋館事)에 오르고, 가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신묘년에 좌군총제 집현전제학(左軍摠制集賢殿提學)이 되었고, 갑오년에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기해년에 공안부윤(恭安府尹) 보문각 제학이 되었고, 가을에 호조 참판이 되었다.
경자년 겨울에 공조 판서 자헌대부가 되고, 계묘년에 아버지 상사를 당하였는데, 함길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많이 유리방황하자, 임금이 대신을 보내어 구휼을 하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특별히 공을 기복하여 그 도의 관찰사를 삼으려고 하였다.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착하자, 굶주린 백성들을 함흥부(咸興府)에 모아 직접 진휼하는 정사를 보살펴 백성들이 힘을 입어 살아났다. 겨울에 병으로 사직을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갑진년에 호조 판서가 되어 전곡(錢穀)을 맡은 지가 17년이나 되어 경비가 많으며 출납이 정확하고 밝아서 털끝만큼도 차실이 없었다.
정미년에 정헌(正憲)의 직계에 올랐고, 기유년 의금부 제조가 되었으니, 전후 무릇 8년 동안 송사가 너그럽고 공평하였다. 때마침 왜적이 길에 통역하자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여, 본부에서 집이 시체 곁에 있는 자에게 죄목을 씌웠다. 공이 이를 원통히 여겨 옥사를 늦추고는 많은 현상금을 걸었는데 과연 진짜 적(賊)을 잡아 그 원통함을 씻어 주니, 사람들이 공의 현명함에 탄복하였다.
또 어떤 과부가 무고로 난언죄(亂言罪)를 당하여 국문에도 불복하자 옥관이 매질을 하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커다란 옥사인 만큼 어찌 매질로써 그 실정을 알겠느냐. 응당 대질을 하여 아뢰라.” 하였더니, 임금이 공의 말을 따라 과부가 풀려 나왔다.
공이 판결을 뒤집는 경우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경술년에 숭정대부에 오르고, 다음해에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고, 임자년에 판중추(判中樞)로서 호조 판서를 겸하였으며, 을묘년 가을에 의정부 찬성으로 호조 판서 보문각 대제학이 되었다. 병진년 여름에 임기가 찼으므로 두 차례나 사양하여 다시금 판중추가 되고,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해에 충청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으며 다음해 봄 정월에 임금이, 공이 예전에 함길도의 진휼하는 정사를 맡아서 효과가 있었다고 하여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를 삼았다. 조정에 올라 사양할 때 임금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대개 사람이 재주와 덕이 있으면 하늘을 호응하여 백성을 보전할 것이니, 옛날 당 태종이 인의(仁義)를 힘써 행한 지 4, 5년이 못 되어서 곧 한 말 쌀값이 서돈되는 효과가 있었으니, 내가 매우 사모한다.
왕위를 이어 받은 뒤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이룩하여 풍년을 기약하였으나, 해가 거듭 장마지고 가물어서 백성은 먹을 것 조차 없도다. 이 허물은 나의 부덕에 있는 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닦고 반성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기를 바란 지가 2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경상ㆍ전라ㆍ충청 모든 도가 재앙을 입음이 근래에 드문 경우이고 충청도가 더욱 심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돌보아 주심도 다시 희망할 수 없고, 이에 대한 구황정책을 역시 어찌할 줄을 모르니 경(卿)은 곧 가서 삼가할지어다.” 하였다.
공이 다방면으로 진휼하여 온 도가 온전히 살아났다. 여름에 숭록대부의 가자를 받았고, 기미년에 본직으로 수문(修文)이 되고 얼마 안 되어 병으로써 굳게 사양하여 이내 치사(致仕)를 받았다. 공이 병이 들자 글을 써서 여러 아들에게 보이기를, “내 나이 70에 벼슬이 1품(一品)에 이르고 자손이 아무 탈이 없으니, 비록 죽더라도 영광이다.
더구나 삶에 있어서 죽음이란 자연의 이치인 만큼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고, 상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르고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일이 많다. 나는 죽음으로써 산 사람을 상하지 않을 것이니 선영(先塋) 곁에 죽어서 장사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하고는, 곧 나가 금천(衿川) 별서(別墅)에 거처하였다.
임금이 연이어 내의(內醫)를 보내 진찰하고 반찬을 계속 내렸다. 경신년 11월 28일에 정침에서 졸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애도하여 조회를 이틀 동안이나 중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과 치제(致祭)를 하고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었다. 다음해 신유년 2월 초 3일 경오에 본현(本縣) 북쪽 백사동(栢寺洞) 언덕 선영 밑에 장사하였으니, 공에 대한 사후 영화에 유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은 천품이 깊고 밝고 겸손하고 엄숙하여 어릴 때부터 말과 웃음이 적고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보(公輔)의 그릇이 될 것을 알았었다. 선(善)을 드러내고 하자를 덮어주며 친인척에게 더욱 도타웠고, 혹 질병과 사상(死喪)이 있으면 미천한 종복까지도 지닌 것을 기울여 구제하였다.
무진년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을 죽일 때 공이 진사 때의 좌주(座主)가 이에 연좌되어 교외에 시체를 버렸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쌓은 시체가 표류되었다. 당시 공의 나이가 18세였는데 종 하나를 거느리고 물색하여 장사를 지내니 식자들이 큰 그릇임을 알았고, 원대한 포부를 이룰 것으로 기대를 하였던 것이다.
집에 거처할 때는 이익을 말하지 않고, 방안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응접을 하지 않으며, 관아에서 일을 처리함에는 올바름을 잡고 흔들리지 않았다. 정승이 되자 힘써 대체를 따르고 어지럽게 고침을 기뻐하지 않으며, 우뚝 옛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임금이 삼공(三公)을 불러 비밀히 회의를 하되 오직 공과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참여하였다.
부인 정숙부인(貞淑夫人) 청성 정씨(淸城鄭氏)는 정당문학 청원군(淸源君) 휘 정권(鄭權)공의 딸인데, 곧고 고요하여 부도(婦道)를 지녔으며, 공보다 6년 앞서 죽자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 숭직(崇直)은 통정대부 판내자시(通政大夫判內資寺)로 두 차례나 주목(州牧)이 되었고 모두 은혜로운 선정이 있었다.
다음 숭선(崇善)은 가정대부(嘉靖大夫) 경기도 관찰사이며, 경자과(庚子科)에 장원 급제하여 장은대(長銀臺)를 맡았고, 다음 숭신(崇信)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인순부 소윤(仁順府少尹)이니, 공보다 1년 뒤에 병으로 죽었고, 다음 숭효(崇孝)는 조봉대부(朝奉大夫) 평안도경력(平安道經歷)이니, 역시 단아한 선비였다.
딸 셋 중에 맏딸은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이숙치(李叔畤)에게 시집갔으니, 일찍이 대사헌과 세 도의 관찰사가 되었고, 다음은 가선대부 공조참판 조혜(趙惠)에게 시집갔으니, 맑은 벼슬을 역임하여 인재로 칭찬을 받았고, 다음은 승훈랑(承訓郞) 현풍 현감(玄風縣監) 김준례(金遵禮)에게 시집갔다.
판사(判事)는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연(趙涓)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대호군 박강(朴薑)에게 시집가고, 관찰사는 상호군 송천우(宋千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훈(訓)은 돈녕부 판관 이후(李厚)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 의(誼)는 전(前) 녹사(錄事) 윤효동(尹孝童)의 딸에게 장가갔다. 맏딸은 사헌부 감찰 김숙(金潚)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이조 정랑 조석문(曹錫文)에게 시집갔으니, 갑인년 과거에 2등으로 합격되었었다.
소윤(少尹)이 광주 목사 이숙야(李叔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 전(銓)은 공조 정랑 권택지(權擇之)의 딸에게 장가갔고, 맏딸은 돈녕부승(敦寧府丞) 최민(崔旼)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幼學) 조정규(趙廷圭)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유학 박봉손(朴鳳孫)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경력이 지돈녕부사 이숙모(李叔畝)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겸(謙)은 공보다 1년 뒤에 병으로 죽었고, 다음은 눌(訥)이요, 맏딸은 진사 강희맹(姜希孟)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참찬(參贊)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병조 정랑 이계현(李繼賢)에게 시집갔으니, 을묘년 병과(丙科)에 합격하였으며,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었다.
참판이 6남 3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지당(之唐)이요, 다음은 지은(之殷)이요, 다음은 지하(之夏)요, 다음은 지한(之漢)이요, 다음은 지주(之周)요, 다음은 지원(之元)이다. 맏딸은 녹사(錄事) 조계번(趙季蕃)에게 시집갔으니, 역시 같은 조씨(趙氏)는 아니다.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사용(司勇) 우계충(禹繼忠)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현풍(玄風)이 5남 6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맹절(孟節)이요, 다음은 맹의(孟義)요, 다음은 맹치(孟恥)요, 다음은 어리다. 맏딸은 부사정 홍도상(洪道常)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용(司勇) 이세영(李世英)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공보다 1년 뒤에 죽었고, 증손은 모두 40여 명이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벌열(閥閱)을 보면 한두 번을 전하면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경우를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만, 공의 집은 문정공(文貞公) 이후로 대대로 훌륭한 재상이 있어 오직 충성과 효도가 실로 원씨(袁氏)의 4대에 다섯 공(公)을 배출한 것에 손색이 없다.
훈업과 덕망이 성대함은 더 나은 듯도 싶으니, 덕이 도타운 자가 빛을 흘렸음이 참으로 증험이 있는 것인가. 공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힌 무성한 공로는 더욱 그 자손을 창대하게 하였으므로 그 자손의 혁혁하고 번영한 것이 또 원씨(袁氏)에 비교하여 거의 차이가 없으니, 안씨(安氏)의 경사는 끊어지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느 가문이 덕문인가 / 孰爲德門
죽계에 사는 안씨라네 / 竹溪安氏
누가 그 근원을 열었던가 / 孰濬其源
문정공이 처음이었소 / 文貞伊始
아리따운 그 관면이 / 蟬聯冠冕
대대로 향내를 풍겼네 / 世播淸芬
오직 공이 계승하여 / 惟公克承
충성하고 근면했소 / 以忠以勤
네 조정을 섬기며 / 翼亮四朝
크게 은덕을 베풀었고 / 大沛厥施
사헌부에선 추상 같고 / 栢臺秋凜
은혜로운 정사는 봄볕처럼 따뜻하였네 / 棠茇春熙
백성 주린다 하소연하니 / 烝黎告飢
공이 살렸고 / 公爲活之
옥중에 원통한 일 있으면 / 犴獄有寃
공이 바로잡았네 / 公爲直之
인이 성하고 / 惟仁之盛
지혜가 밝았기 때문이네 / 惟智之明
실로 의지할 곳 마땅하여 / 允恊倚毗
은혜가 날로 무거웠소 / 恩顧日傾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 國有大議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네 / 必咨以決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니 / 引年懸車
산과 물은 푸르렀소 / 山靑水綠
부귀하고 장수하니 / 富貴壽考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영예가 갖추었소 / 終始哀榮
모든 벼슬 중에 / 凡百有位
누가 이보다 더 크리 / 疇與之京
더구나 여러 아들 / 矧公諸子
문정공의 덕을 계승하였네 / 克肖其德
죽계수 넘실넘실 / 沄沄竹溪
경사가 흘러흘러 끝이 없어라 / 流慶無極
저 금천 언덕이 / 惟衿之原
실로 공의 무덤이라 / 實公玄宅
명으로 표시하니 / 銘以表之
우뚝히 솟은 빗돌이여 / 有巍斯石
<끝>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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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崇祿大夫,判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兼判戶曹事,仍令致仕謚靖肅公安公墓誌銘 幷序
判中樞仍令致仕謚靖肅安公旣葬之明年夏。仲子觀察使。狀公行實。徵銘其墓。予辱契家。義不敢辭。謹按公諱純字顯之。順興府人。曾祖高麗都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謚文貞諱軸。中元朝制科。號謹齋。道德文章。師範一世。甞按關東。所著瓦注集行于世。祖特進輔國崇祿大夫判門下府事集賢殿大學士謚文簡諱宗源。考推忠翼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謚良度諱景恭。妣懿靜宅主鄭氏。政堂文學烏川君諱思道之女也。以洪武四年辛亥十月十八日生公。庚申。公年十歲。以蔭補行廊都監判官。癸亥中進士擧。丁卯錄典儀寺。戊辰中司馬試。明年擢丙科第。庚午授成均學諭歷直學。壬申注司宰簿。癸酉遷司憲監察。甲戌。拜左拾遺知製敎。言事忤旨。丙子秋出爲金海判官。治爲第一。民思至今。丁丑以禮曹佐郞。世子右侍直召還。戊寅夏。除江原道都事。秋拜司憲雜端。宮娥有罪。太祖命大司憲趙璞立殺之。璞以告公。公曰憲府非刑官。且不正厥罪而殺之可乎。璞以上旨強之。公曰人命至重。死不復生。遽極刑之。於義何如。宜付有司鞫論。璞怒以公言聞。太祖乃悟從之。又一日百僚集于景福宮門外。列坐東西。有一權貴馬而過。直抵紫闥。衆莫敢何。公卽繫從者劾聞。乃流權貴。人皆快之。時太宗在潛邸自其事。及踐祚。見公屢稱不置。庚辰出爲西北面經歷。辛巳通德兵曹正郞兼刑曹都官正郞。壬午拜朝奉內資少尹。尋副令宗簿奉常。階朝散 。癸未兼司平府經歷。自是歲遷司憲掌令刑曹都官議郞內資尹奉常宗簿二令。再轉判內資判通禮。皆帶館職。累階爲通政。丁亥冬。擢承政院右副代言。戊子進至右代言。啓沃弘多。冬移吏曹右參議。俄遷左。己丑陞嘉善左軍同知揔制寶文閣直提學同知春秋館事。秋觀察慶尙道。辛卯拜左軍揔制集賢殿提學。甲午遷開城副留後。階嘉靖。丙申觀察忠淸道。己亥尹恭安府寶文閣提學 。秋參判戶曹。庚子冬。進工曹判書。階資憲。癸卯丁父憂。咸吉道歲歉。民多流冗。上欲遣大臣賑之。難其人。特起公觀察是道。辭不獲。旣至聚飢民于咸興府。躬視賑餔。民賴以活。冬辭疾不允。遂拜議政府參贊。甲辰拜戶曹判書。掌錢穀十七年。經費洁穰。出納精明。無毫釐失。丁未階正憲。己酉提調義禁府。前後凡八年。詳讞寬平。時有賊倭譯于道。擒捕未獲。本府繫家屍旁者鍛鍊具。公寃之緩獄。懸重購求之。果獲正賊。竟雪其寃。人服其明。又有寡婦被誣亂言。鞫不服。獄官欲加榜掠。公曰此大獄也。豈可杖下得情。相詰以聞。上從公言。婦得脫。公之平反。多類此。庚戌階崇政。明年帶寶文閣大提學。壬子以判中樞兼戶曹判書。乙卯秋。復入議政府爲贊成兼判戶曹大寶文。丙辰夏。以滿盈再辭。復判中樞。餘如故。是歲忠淸道大飢。明年春正月。上以公甞賑咸吉有效。命爲都廵問賑恤使。陛辭上引見曰。大抵人之有才德。可以應天保民。昔唐太宗力行仁義。不四五年。乃有斗米三錢之効。予甚景仰。嗣位以來。勵精爲治。期至豐年。而歲比潦暵。民匱於食。咎繇不德。肆予夙夜修省。庶荷天祐。已二十年矣。今玆慶尙,全羅,忠淸被菑。近所未有。忠淸尤甚。咎至於斯。天之眷祐。無復望焉。其策救荒。罔知所爲。卿乃往欽哉。公多方賑貸。一道全活。夏階加崇祿。己未以本職改修文。未幾。以疾固辭。仍令致仕。公感疾爲書示諸子曰 。吾年登七十。位至一品。子孫無恙。雖死亦榮。况有生有死。自然之理。汝曹毋嘆。喪制一從家禮。不作佛事。且曰人死則多事。吾不以死傷生。終于先塋傍。以便襄事。遂出居于衿川別墅。上連遣醫問。賜膳絡繹。以庚申十一月二十八日。卒于正寢。訃聞。上震悼。輟朝二日。遣使弔祭。官庀葬事。越明年辛酉二月初三日庚午。窆于本縣治北栢寺洞原先塋。公之哀榮。可謂無憾矣。公資淵朗謙肅。自幼寡言笑。望之嚴然。知其爲公輔器。暴善韜瑕。於宗姻尤厚。或有疾病死喪。微至僮僕。傾倒賙恤。歲戊辰。侍中崔瑩。誅權奸。公之進士座。主連坐。屍諸郊。時適雨流漂積屍。公年十八。率一僮。物色求之以葬。識者服其大器。期以遠到。居家不言利。淸坐一室。手不釋卷。非公事未甞應接。當官處事。据正不撓。及爲輔相。務遵大體。不喜紛更。蔚有古大臣之風焉。國有大事。上召三公密議。唯公及許文敬公稠得與焉。配貞淑夫人淸城鄭氏。政堂文學淸源君鄭諱公權之女也。貞靜有婦道。先公六年而卒。祔于公墓。男四人。長曰崇直通政大夫判內資寺。再爲州牧。皆有惠政。次曰崇善。嘉靖大夫京畿都觀察使。庚子科狀元。甞長銀臺。次曰崇信。朝散大夫仁順府少尹。後公一年病逝。次曰崇孝朝奉大夫平安道經歷。亦端士也。女三人。長適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李叔畤。曾爲大司憲觀察三道。次適嘉善大夫工曹參判趙惠。敭歷淸貫。以材稱。次適承訓郞玄風縣監金遵禮。判事娶平城府院君趙涓之女。生一女適大護軍朴薑。觀察使娶上護軍宋千祐之女。生二男二女。男長曰訓娶敦寧府判官李厚之女。次曰誼娶前錄事尹孝童之女。女長適司憲監察金潚。次適吏曹正郞曹錫文。中甲寅第二人。少尹娶光州牧使李叔野之女。生一男四女。男曰銓。娶工曹正郞權擇之女。女長適敦寧府丞崔旼。次適幼學趙廷圭。次適幼學朴鳳孫。餘幼。經歷娶知敦寧府事李叔畒之女。生二男四女。男長曰謙。後公一年病歿。次曰訥。女長適進士姜希孟。餘幼。參贊生一女 。適兵曹正郞李繼賢。中乙卯丙科。非一李也。參判生六男三女。男長曰之唐。次曰之殷。次曰之夏。次曰之漢。次曰之周。次曰之元。女長適錄事趙季蕃。亦非一趙。先公歿。次適司勇禹繼忠。餘幼。玄風生五男六女。男長曰孟節。次曰孟義。次曰孟恥 。餘幼。女長適副司正洪道常。次適司勇李世英。亦後公一年而亡。曾孫揔四十餘人。竊觀自昔閥閱之家。一再傳而不復振者。何可勝數。公家自文貞以來。世有碩輔。惟忠惟孝。固無讓於袁氏之四世五公。而勳德之盛。則似過之。德厚者流光。信有徵哉 。公之忠君澤民之茂烈。尤足以克大厥後。而子孫之赫赫繁衍。又過於袁遠甚。安氏之慶。盖未艾也。銘曰。孰爲德門。竹溪安氏。孰濬其源。文貞伊始。蟬聯冠冕。世播淸芬。惟公克承。以忠以勤。翼亮四朝。大沛厥施。栢臺秋凜。棠茇春煕。烝黎告飢 。公爲活之。犴獄有寃。公爲直之。惟仁之盛。惟智之明。允協倚毗。恩顧日傾。國有大議。必咨以決。引年懸車。山靑水綠。富貴壽考。終始哀榮。凡百有位。疇與之京。矧公諸子。克肖其德。沄沄竹溪。流慶無極。惟衿之原。實公玄宅。銘以表之。有巍斯石。<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