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03. 10(수)
▲이 건물은 현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으로 1934년에 준공 되었다.지하 1층, 지상4층 연건평 3,000여
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서울) 종로2가 거리 모습.
▲조선은행(오늘날 한국은행 자리) 앞 광장.
▲경성 태평통(太平通)
▲경복궁 집옥제(集玉薺)
▲경성역(京城驛/서울역)에서 남대문방향 전경.
▲경성(서울)의 시가지 일부 모습.
▲덕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시가 일부 전경.
▲일제(日帝)가 경성동양척식주식회사(京城東洋拓殖株式會社)를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
으로 설립한 식민지경제 수탈의 본거지(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
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 8천 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동척(東拓)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동척(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동대문 밖 조선인 마을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남산공원 야외음악당
▲종로 보신각
▲경성의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
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
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北門(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
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경성의 동대문(東大門)
▲요리집 명월관(明月館) 전경
기생 요리집 명월관(明月館)이 1918년경에 소실된 뒤 순화관(현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 분점
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했다. 이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본관 간판은 장춘관으로 옮겨졌지만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경영했기 때문에 명월관에 모
였던 명기들이 그대로 모여 전처럼 번창했다.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불려나와 우미관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1930년대 광교 부근 청계천변 유료 빨래터. 빨래하는 아낙 뒤편 석축은 영조
(英祖)때인 1773년에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