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序) 5편
1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는 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를 전송하는 서(序)
2 원(元) 나라에 가는 신 원외(辛員外)를 전송하는 서
3 정혜사(定慧寺)로 떠나는 대선사(大禪師) 호공(瑚公)을 전송하는 시의 서 호공은 중이다.
4 금분(金粉)으로 쓴 밀교대장(密敎大藏)의 서
5 회암 심선사(檜巖心禪師)의 도호(道號)인 당명(堂名) 뒤에 쓰다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는 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를 전송하는 서(序)
동남지방의 주(州)ㆍ군(郡) 중에 경주(慶州)가 가장 크고 상주가 그 다음인데, 그 도(道)를 경상도라고 일컬음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使命)을 띤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친 뒤 경주에 이르기 때문에 교화(敎化)가 상주를 통하여 남으로 전파되었고, 일찍이 경주를 통하여 북으로 전파된 적은 없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3년(1343, 고려 충혜왕4) 봄에 근재 안후(安侯)가 감찰대부 우문관 제학(監察大夫右文館提學)으로 있다가 상주목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진 진신(搢紳)들과 훌륭한 종유(從游)들이 모두 서로 경하(慶賀)하여 말하기를,
“안후는 속은 강하면서 겉은 온화하고, 말은 간략하면서 행동은 민첩하다.
강하고 간략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범하지 못할 것이고, 온화하고 민첩하니 사람들이 심복하여 잘 따를 것이다. 저, 사명을 띤 안후를 예전부터 명성을 흠모(欽慕)했는데 이제 그의 덕행을 보게 되었으니, 비록 범 같은 영성(甯成)과 매 같은 질도(郅都)가 있더라도 거의 그 혹독(酷毒)함을 늦출 것이요, 상양(桑羊)처럼 관각(筦榷)을 하던 자도 또한 그 가혹함을 중지할 것이니, 자못 상주 백성들이 부담을 덜게 되지 않겠는가? 예전부터 교화가 상주로부터 남으로 전파되었으니, 상주 한 고을만 그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온 경상도의 복일 것이다.”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제군(諸君)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른다. 대범 부귀와 영달은 세상 사람이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임금에게 깊이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중한 촉망을 받으면서도, 능히 겸손하여 휘말리는 세파 속에서도 멈출 곳을 아는 사람으로 말하면 예와 지금에 찾아보더라도 대개 천 명이나 백 명 중에 열 명이나 한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에 있는 백발의 늙은 부모를 연약한 아우와 어린 자매에게 공양하도록 맡기고는, 천 리 먼 길을 분주히 다니며 요행히 귀한 벼슬을 하여 하루아침의 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을 세상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안후는 중국에서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동국(東國: 우리나라를 가리킨다)에선 문장을 독점하여 화려한 요직을 지내고 과장(科場)으로 시관(試官)을 맡아보았고, 지난해에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려고 했었는데 절반 길도 채 못 가서 역마(驛馬)를 달려 소환하여 풍헌(風憲)의 직책을 맡겼다.
임금의 알아줌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촉망이 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힘써 구한 것은 어머니 섬기기에 편케 하려 함이었으며, 형제들에게도 중외(中外)에서 벼슬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염퇴(廉退)와 독실한 효우(孝友)는 족히 당시를 고무시키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니, 어찌 한 고을만 복되게 하고 한 도만 교화시킬 뿐이겠는가?
임금의 알아줌이 장차 더욱 깊어지고 사람들의 촉망이 장차 더욱 중해져, 영각(鈴閣)에서 황각(黃閣)으로 올라가 김정숙(金貞肅)의 뒤를 잇는 것을 발돋움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군들이 ‘그렇다’ 하기에 이것을 그대로 적는다.
[註解]
[주C-01]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 : 안축(安軸)을 가리킨다. 근재는 안축의 호.
[주D-01]범 같은 영성(甯成) : 영성은 전한(前漢) 시대의 혹리(酷吏). 아랫사람을 혹독하게 휘어잡았으므로, 제리(諸吏)들은 “차라리 돼
지 새끼를 끌고 가다가 맹호(猛虎)를 만날지언정 영성의 노함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 했다. 《蒙求 上》
[주D-02]매 같은 질도(郅都) : 질도는 전한 시대의 까다롭고 혹독했던 법관. 중위(中尉)가 되어 너무 까다롭게 법을 다루어 귀척(貴戚)도
꺼리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창응(蒼鷹: 흰 매인데 곧 공격을 잘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漢書 酷吏傳 郅都傳》
[주D-03]상양(桑羊)처럼 관각(筦榷) : 상양은 상홍양(桑弘羊)의 약칭, 관각은 전매(專賣)하는 것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상홍
양이 대농승(大農丞)으로 있으면서 천하의 염철(鹽鐵)을 전매하여 재물을 많이 모아 국가에는 이익이었으나 백성들에겐 원성이
많았다. 《漢書 食貨志》
[주D-04]풍헌(風憲) : 관리의 기강(紀綱)을 맡은 관원, 곧 관리들의 비위(非違)를 규찰(糾察)하는 관리.
[주D-05]영각(鈴閣)에서 …… 잇는 것 : 영각은 장수나 지방관들이 정무를 보는 아문(衙門)을 말하며, 황각(黃閣)은 의정부(議政府)의
별칭. 정숙(貞肅)은 고려의 문신 김인경(金仁鏡)의 시호인데, 그는 일찍이 상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승진되어 재상인 중
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므로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원(元) 나라에 가는 신 원외(辛員外)를 전송하는 서
선비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마치 배 타기와 같아서 재주로 노[楫]를 삼고 천명(天命)으로 순풍(順風)을 삼은 연후에야 가기가 편리한 법이다. 재주와 천명을 받았더라도 의지가 혹 비열하면 마치 노가 완전하고 바람이 순하여도 배를 조정하는 사람이 합당하지 못한 것과 같으니, 어찌 만곡(萬斛)의 무게를 싣고 만 리의 먼 곳에 이르러, 통하지 못하는 곳을 건널 수 있겠는가?
원의 신후(辛侯)는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되 민첩하고 묻기를 좋아하여 문장을 다루는 곳에서 이름을 날렸고, 문서를 취급하는 부서에서 솜씨를 보였으니 재주가 있다 하겠고, 벼슬을 한 지 몇 해 안 되어 제학(提學)ㆍ대언(代言)을 거쳐 밀직 첨의(密直僉議)로 전임하였다가, 이어 동성(東省)의 성랑(星郞)으로 나갔으니 천명을 받았다 하겠으며, 벗들을 데려다가 함께 조정에 벼슬하고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 자문하여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엄정한 안색으로 임금을 바로잡고, 성의를 다하여 빈려(賓旅)를 접대하니 의지가 있다 하겠다.
이번에 조관(朝官)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행장을 꾸려 장도(壯途)를 떠나게 되었으니, 그의 기발한 재주, 장원한 천명, 웅대한 의지가 장차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권찬선(權贊善) 이하 28명이 정우곡(鄭愚谷)의 사연시(謝宴詩)를 분운(分韻)해서 연장(聯章)하여 장도를 찬미하고는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잔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 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대범 강하(江河)와 명발(溟渤)이 대소는 다르나 그 속에서 배를 타기는 마찬가지다. 돛대에 돛을 다는 것은 전진하려는 것이요, 닻줄과 닻을 다는 것은 정박하려는 것이요, 또한 반드시 의여(衣袽)를 지님은 물이 새는 것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왕국(王國)은 강하와 같고 천자의 나라는 명발과 같은데, 신후의 배가 강하에서 명발로 가게 되었으니 진실로 능히 의(義)로 돛대를 삼고, 신(信)으로 돛을 삼고, 예(禮)로 닻줄을 삼고, 지(智)로 닻을 삼고, 경신(敬愼)과 염근(廉勤)으로 의여를 삼는다면, 어느 무거운 짐인들 감당하지 못하겠으며, 어느 먼 곳엔들 가지 못하겠으며, 통하지 못하는 어느 곳엔들 건너가지 못하겠는가?
옛적에 전숙(田叔)과 한안국(韓安國)은 양(梁)ㆍ조(趙)의 신하로서 한(漢) 나라 조정에 들어가, 당시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명예를 남겼으니, 내가 이번에 신후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노라.”
[註解]
[주D-01]동성(東省)의 성랑(星郞) : 동성은 원 나라가 일본을 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한 관청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약칭. 성
랑은 정동행중서성 낭관(郎官)의 별칭.
[주D-02]분운(分韻)해서 연장(聯章)하여 : 분운은 운(韻)자를 정한 다음, 각자가 운자를 나누어 한시(漢詩)를 짓는 것. 연장은 한 작품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짓는 것.
[주D-03]의여(衣袽) : 배 안에 물이 샐 것에 대비하여 마련해 두는 헌 옷가지를 말한다.
[주D-04]전숙(田叔)과 한안국(韓安國) : 전숙은 조(趙) 나라 사람으로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무협을 좋아하였는데, 뒤에 천자국인 한
(漢) 나라에 들어와 명성을 떨쳤다. 한안국은 양(梁) 나라 사람으로 효왕(孝王)을 섬기다가 오(吳)ㆍ초(楚)의 모반(謀叛) 때 오
나라군사를 저지하여 공을 세운 다음 장안(長安)에 들어와 무제(武帝)의 신임을 받았었다.《漢書 田叔傳ㆍ韓安國傳》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정혜사(定慧寺)로 떠나는 대선사(大禪師) 호공(瑚公)을 전송하는 시의 서 호공은 중이다.
옛날 선(禪)을 배우는 인사(人士)들이 세 차례나 투자산(投子山)에 오르고 아홉 차례나 동산(洞山)을 찾아, 천 리 길을 왕복하느라 스스로 쉬지 못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신이 터득한 바를 선각(先覺)에게 질정(質正)하여, 제멋대로 하여 비뚤어진 것을 제거한 다음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에, 이처럼 수고로왔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옛사람과 짝이 되어도 족히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우리 호공 대선사가 아니겠는가? 공은 이미 승선(僧選)에 올라 명망이 총림(叢林 불교계(佛敎界))에 드날렸고, 곧 풍악(楓岳 금강산)으로 가 자신에 대한 공부를 정수(精修)하였다.
이때 서역(西域)의 지공사(指空師)가 우뚝이 스스로를 보리달마(菩提達磨)에 비하니, 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제자(弟子)의 예절을 차리자 공도 또한 찾아갔었는데, 지공은 말하기를,
“내가 불[炷] 하나를 피울 터이니 자네가 그 속으로 빠져나갔다가, 내가 한 번 소리를 지르거든 자네가 도로 그 속으로 오라.”
하므로, 선사는 대답하기를,
“청컨대, 화상(和尙)께서 먼저 나아가십시오. 제가 삿갓을 들고 따라가겠습니다.”
하니, 그의 제자들이 불손하다고 지목하여 예 아닌 짓을 가하려고 하자, 공은 소매를 떨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마침내 북으로 경사(京師 원 나라 서울)를 관광하고, 남으로 강소(江蘇)ㆍ절강(浙江)ㆍ광동(廣東)ㆍ광서(廣西)ㆍ사천(四川)ㆍ감숙(甘肅)ㆍ운남(雲南)ㆍ대주(代州) 등지를 유람하느라, 몇 해의 더위와 추위를 넘기며 가보지 않은 데가 없으니, 본 바가 확연(廓然)했으므로 세운 바가 우뚝하였고, 경험한 바가 작연(灼然)했으므로 지키는 바가 확실해졌다.
이에 유연(悠然)히 돌아와 담담하게 지내자, 전일에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의아하고 조롱하던 자들을 과연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부끄러워하고 복종하는 자들을 과연 옳다 할 수 있겠는가? 옳다 그르다 함이 모두 남에게 달렸으니 나 자신은 알 바 아니다.”하였다.
임금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는 더욱 중하게 여겨, 정혜사를 주관하도록 하니, 제학사(提學士)가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이 몸은 만 리 길 행하여 천하를 반이나 돌았는데 / 身行萬里半天下
암자에 누운 중의 머리는 희어지기 시작했네 / 僧臥一庵初白頭
한, 두 구(句)의 운자(韻字)를 가지고 시 14편을 연장(聯章)하여 그가 떠나는 선물로 주었는데, 공은 다시 익재 거사(益齋居士)에게 그 앞에다 몇 마디 말로 써 줄 것을 청하였다.
거사는 늙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당(唐) 나라 문창(文暢)이 매양 유명한 공경(公卿)들에게 자기 뜻을 시로 노래하여 줄 것을 청했었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두 사람의 서(序)뿐이며, 사마 승상(司馬丞相 사마광(司馬光)을 말함)이 또 한유의 몇 마디를 취한 것은 정대(正大)하였기 때문에 몇 마디 쓴다.
문창은 문사(文辭)만 좋아한 사람이니 공이 어찌 문창의 유(類)이겠으며, 여러 학사들이 각기 시를 지어 노래했지만 어찌 능히 그의 뜻을 나타냈겠으며, 익재의 글도 능히 그의 요청에 부응되겠는가? 사마 승상은 진실로 이 세상에 없지만, 가령 있다 하여도 익재의 글과 말 중에 취할 것이 있을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이래서 한바탕 웃고 이것으로 서문을 쓴다.
이모(李某)는 서한다.
[註解]
[주D-01]투자산(投子山)에 …… 동산(洞山) : 투자산은 안휘성(安徽省) 서주(舒州)에 있는 산인데, 송(宋) 나라 때의 중 의청(義靑)이
대양 경현(大陽警玄)의 종풍(宗風)을 편 곳이며, 동산은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으로 조동
종(曹洞宗)의 발상지이다.
[주D-02]승선(僧選) : 승려에게 보이는 과거(科擧). 교종선(敎宗選)ㆍ선종선(禪宗選) 두 과가 있는데, 합격한 사람에게는 대선(大選)이
란 초급 법계(法階)를 부여했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금분(金粉)으로 쓴 밀교대장(密敎大藏)의 서
불서(佛書)가 중국에 들어가서 번역된 경(經)이 수천만 권인데, 이른바 다라니(陀羅尼)란 글은 중국에서도 번역하지 못하였다. 오직 중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축역(竺域 서역) 사람들도 또한 해설하지 못하고,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능히 안다고 한다.
대개, 글뜻이 오묘하고 말이 신비하다. 신비하기 때문에 알 수 없고 오묘하기 때문에 해설할 수 없는 것이니, 해설할 수 없으면 사람들이 더욱 공경하고, 알 수 없으면 사람들이 더욱 존숭하게 된다. 존숭이 지극하고 공경이 돈독하면, 사람들에게 감명됨이 반드시 깊으며, 영이(靈異)한 일이 또한 많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러함을 알고 수집 편찬하여 90권을 만들고는 《밀교대장》이라 이름하여 세상에 반포하였으니, 이 90권이 곧 수천만 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만기(萬機 온갖 정사)의 여가에 정신을 불전(佛典)에 쓰셨는데, 더욱 밀교에 믿음이 간절하여 궁중의 보화를 내 주며 금분으로 쓰게 하시니,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상호군(奉翊大夫判內府寺事上護軍) 나영수(羅英秀)가 실로 그 일을 주관했다.
이에 구본(舊本)을 가지고 여러 경(經)과 대교하여, 빠진 데를 써넣기도 하고 틀린 데를 고치기도 하여 수정하고, 또한 미처 수집하지 못한 것을 더 찾아내어 40여 권을 만드니, 구본과 합하여 1백 30권이 된다. 이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시켜 부문(部門) 별로 쓰게 하니, 뭇별이 서로 찬연(粲然)히 광채를 발하고 모든 화초가 꽃 피는 듯하여, 참다운 법보(法寶 보배로운 불경)이었다.
완성하게 되자, 신(臣) 이제현(李齊賢)에게 서문을 짓도록 명하셨는데, 신은 부유(腐儒)로서 문장이 족히 그 취지를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윽이 생각건대,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근본으로 삼으니, 자비는 인(仁)하는 일이고, 희사는 의(義)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지(大旨)를 또한 대개는 알 수 있다. 수천만 권이나 되는 것을 임금의 세력으로 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글이 이처럼 많고 비용이 또한 많이 들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서 비용에 충당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부처의 본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주상 전하께서는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의 힘을 허비하게 하지도 않고서,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얻고 신속하면서도 정밀하게 하였으니, 부처의 본의에 알맞는 것으로서 그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감탄하고도 남을 일이다. 배수(拜手) 계수(稽首)하며 삼가 쓴다.
치화(致和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1328, 충숙왕 15) 5월 일.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회암 심선사(檜巖心禪師)의 도호(道號)인 당명(堂名) 뒤에 쓰다
글씨는 마음의 표현으로서, 옛적 진신 군자(搢紳君子)들의 필적을 보면, 삼엄(森嚴)하게 법도가 있으니, 족히 그의 인품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성조(聖祖)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으로 말하면 한묵(翰墨)의 뛰어난 솜씨는 단지 한 가지 일에 불과한 것으로서 규모와 기상(氣像)을 신자(臣子)들이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주상 전하께서 ‘직지당 월담(直指堂月潭)’이란 다섯 자를 대자(大字)로 써서 회암 심선사에게 내리셨는데, 마치 천 년 묵은 곧은 줄기를 베어다 집을 짓고, 만금(萬金)짜리 좋은 구슬을 쪼아 그릇을 만든 듯하여, 적삼 소매를 검게 물들이며 수염이 희도록 배운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으로 논할 수 없으니, 어찌 하늘이 낸 솜씨로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심공(心公 심선사)은 북으로 연조(燕趙) 지방을 유람하고 남으로 호상(湖湘)에 이르러 존숙(尊宿 덕이 높은 연장자)을 두루 방문하였는데, 천암(千巖) 무명 장로(無明長老)에게 인가(印可)를 받았고, 한림(翰林) 구양승지(歐陽承旨)가 게문(偈文)을 지어 찬미했었다.
내가 일찍이 그의 집을 찾아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질문하자, 그의 설명이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남이 듣기 싫지 않게 하였으니, 우리 임금에게 중한 대우를 받아 친히 보찰(寶札)을 띠고 산문(山門 절을 가리킨다)에 빛을 냄이 요행이 아니다.
지정(至正) 기해년(1359, 공민왕 8) 임종(林鍾 6월) 초하루에 치사(致仕)한 시중(侍中) 이모(李某)는 쓴다.
[註解]
[주D-01]연조(燕趙) 지방 : 전국 시대의 연 나라와 조 나라가 있던 지역.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부와 산서성(山西省) 서부. 고래로 비
분 강개(悲憤慷慨)한 선비가 많이 난다는 고장이다.
[주D-02]호상(湖湘) : 호는 호남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 동정호(洞庭湖)이며, 상은 동정호 부근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경치가 좋아 ‘소상팔경(瀟湘八景)’으로 유명하다.
[주D-03]인가(印可) : 사승(師僧)이 제자에게 오도(悟道)했음을 인증해 주는 것.
[주D-04]《육조단경(六祖壇經)》 :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의 약칭. 당(唐) 나라 중 육조대사(六祖大師) 혜능(惠能)이 설법(說
法)한 불경.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제6권
서(書) 3편
기(記) 6편
비(碑) 1편
서(書)
1 원(元) 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서(書)
2 승상(丞相) 백주(伯住)에게 올리는 서
3 최송파(崔松坡)와 함께 원 낭중(元郞中)에게 보낸 서
원(元) 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서(書)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3년(1323, 충숙왕 10) 정월 모일(某日)에, 고려국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모등(某等) 여러 사람은 삼가 재계 목욕하고 백배(百拜)하며 중서 재상 집사(中書宰相執事)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장차 싹틀 일을 역탐(逆探)하여 미리 말함은 광(狂)에 가깝고 답답한 심정이 있으면서도 말하기 어려워함은 은휘(隱諱)에 가까우니, 만일 부득이하다면 차라리 광이 될지언정 은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경솔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가엾게 여겨 살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홉 가지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를 시행해가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폐망하는 나라를 거들어 주며, 혼란을 다스려 주고 위기를 돌보아 주며, 가는 사람에게 후히 대접하고 오는 사람에게 박하게 받음은, 제후(諸侯)들을 감싸주는 일이다.’ 하였는데, 해설하는 사람은 ‘후손이 없는 자를 이어주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봉(封)해 주어, 상하가 서로 안정되고 대소(大小)가 서로 돌보게 하면 천하가 모두 충성과 힘을 다하여 왕실(王室)을 옹호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옛날 제 환공(齊桓公)이 형(邢)을 옮겨 주자 백성이 마치 집에 돌아가듯 하였고, 위(衛)를 봉해 주자 멸망을 잊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규합하고 바로잡아 오패(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패자(覇者)도 오히려 이를 힘쓸 줄 알았는데, 더구나 큰 중국을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한 집안으로 삼는 자이겠습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 소방(小邦)의 시조 왕씨(王氏)가 나라를 창설한 지 무릇 4백여 년이었는데, 성조(盛朝 원 나라 조정을 높인 말)를 복종하여 섬기며 해마다 조공을 바쳐온 지 또한 1백여 년입니다.
지난 무인년(1218, 고종 5)에 요(遼)의 잔당(殘黨)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중국의 백성을 몰아 약탈하다가 동쪽으로 도서(島嶼)에 들어와 방자하게 날뛰자,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는 합진(哈眞)ㆍ찰라(札剌)ㆍ두 원수(元帥)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므로,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이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를 명하여 군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원조하여, 발광하는 도적을 마치 대나무 쪼개듯 쉽게 섬멸하였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를 맺어 만세토록 잊지 말기를 맹세했었습니다.
또 기미년(1259, 고종 46)에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강남(江南)에서 회군할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천명의 돌아감과 인심의 복종함을 알고는 6천여 리를 발섭(跋涉)하여 변량(汴梁 개봉(開封)) 지방까지 가서 영접하였고, 본국에서 조어산(釣魚山)까지 와 거기서 변량까지 돌아가는 거리는 대개 6천여 리이다.
충렬왕(忠烈王)께서는 또한 몸소 조근(朝覲)을 하여 한 번도 태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주(公主)를 하가(下嫁)하여 대대로 부마(駙馬)를 삼았으며, 구속(舊俗)을 고치지 않고 종사(宗社)를 그대로 보존해 왔으니, 곧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에 힘입은 것입니다.
천하의 각 지방에 행성(行省)을 둘 때에도 유독 우리 소방에만은 두지 않았으며, 뒤에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일 때문에 비록 명액(名額 명목과 인원수)은 두었지만, 항시 선용(選用)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 成宗)의 연호』 무렵에 활리길사(闊里吉思)를 이목관(耳目官)으로 삼았는데, 그의 진언(陳言)에 따라 도성(都省)에서 의논하여 상주(上奏)하기를 ‘본국(本國)은 일찍이 세조황조의 성지(聖旨)를 받아, 옛 본속(本俗)을 고치지 않고 단지 관명(官名)만 바꾸었는데, 이제 전부 고침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성종황제(成宗皇帝)께서는 아뢰는 말대로 재가하여, 곧 활리길사를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서아년(鼠兒年) 4월에 성지 내리기를,“고려의 땅에 성(省) 두는 것을 분별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문제삼지 말라. 주자(奏者)는 이를 명심하라.”
하였으니, 열성(列聖)들께서 돌봐주신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소방(小邦)에 행성을 두어 제로(諸路)와 같게 한다고 하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와 열성들의 돌보시던 뜻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지난해 11월에 새로 내리신 조서의 조목을 읽어보건대, ‘사정(邪正)이 길을 달리하며 사해(四海)가 편안히 다스려지도록 하여, 중통(中統)ㆍ지원(至元 원 세조(元 世祖)의 연호) 시절의 훌륭한 정치를 회복하게 하라.’ 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이런 덕음(德音)을 발표하셨음은 실로 천하와 사해의 복입니다.
더구나 소방은 여러 대의 공로가 저와 같고, 열성들의 돌봐주신 은혜가 이와 같은데, 이번에 4백여 년이나 된 왕업(王業)을 일조에 없애어 끊어버린다면, 조정에 한 치의 공로도 없는 다른 나라들을 조정에서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중통ㆍ지원의 체통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생각건대, 소방은 지역이 천 리에 불과한데도 산ㆍ내ㆍ숲 등의 쓸데없는 땅이 10분의 7이나 되어, 토지에 대한 세금을 받더라도 조운(漕運)의 삯에도 부족하고 백성에게 과세하더라도 봉록(俸祿)이 충당되지 못하니, 국가의 용도에 있어 마치 태산(泰山)의 먼지와 같아 만분의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역이 멀고 백성이 우매하며, 상국(上國)과 언어가 같지 않고 중화(中華)와 취향이 너무도 달라, 이런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의구하는 마음이 생길 터인데, 집집마다 가서 설득하여 안정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왜인(倭人)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데, 왜인들이 만일 듣는다면, 어찌 우리를 경계로 삼아 중국에 복종하지 않은 자기들의 행동을 잘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집사 각하께서는 역대 조정이 공로를 생각하던 의리를 체득하시고, 《중용》의 세상을 훈계한 말을 생각하시어, 나라를 그들의 나라로 내버려 두고 사람을 그들의 백성으로 내버려 두며, 정사와 공부(貢賦)를 닦아 번방(藩邦)이 되도록 하여, 우리가 한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다면, 어찌 오직 삼한(三韓)의 백성들만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며 훌륭한 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사(宗社)의 영혼들도 모두 감격하여 지하(地下)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삼가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충격되는 간절한 마음이 절박함을 견딜 수 없어 존엄(尊嚴)을 간독(干黷)하였기로 삼가 대죄(待罪)하옵니다. 모등은 백배(百拜)합니다.
[註解]
[주D-01]제 환공(齊桓公)이 …… 되었으니 : 제 환공은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우두머리로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어진 관중(管仲)을
정승으로 삼아, 제후들을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잡았다. 노 민공(魯閔公) 원년에 형(邢) 나라가 적(狄)의 침략을 받자, 환공은 구
원병을 보냈으며, 희공(僖公) 원년에 패전한 형 나라의 국도(國都)를 이의(夷儀)로 옮겨 주니, 형 나라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
듯 하였다.
또한 민공 2년에 위(衛) 나라가 적(狄)에게 멸망되자, 환공은 다시 위 나라 유민(遺民)을 모으고 대공(戴公)을 세웠으나 곧 죽
자, 문공(文公)을 세우고 초구(楚丘)에 봉해주니, 위 나라 백성들은 멸망했던 과거를 잊게 되었다.《春秋左傳 閔公 元年~二年
ㆍ僖公 元年》
[주D-02]이목관(耳目官) : 천자의 이목이 되어 국가의 치안을 보호하는 관원, 곧 어사대부(御史大夫).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역) ┃ 1979
승상(丞相) 백주(伯住)에게 올리는 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목욕 재계하고 백배하며 승상 집사께 글을 올리나이다. 우(禹)는 천하의 물에 빠진 사람들을 자신이 빠뜨린 것처럼 여기고 직(稷)은 천하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자신이 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천하의 물에 빠진 사람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우가 자기 손으로 밀치거나 직이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그들의 마음에 단연코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사양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이 대인(大人)들에게 책임을 내린 것은 본래 이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니, 진실로 곤궁하여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을 보고도 심상히 여겨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이 책임을 내린 본의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손발에 못이 박히는 고생을 잊었으며 구주(九州)를 살 수 있게 만들었고, 몸소 가색(稼穡)을 돌보아 만백성이 밥먹도록 하여, 요(堯)ㆍ순(舜)을 도와 혜택이 만세에 미치게 했던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불행히 구렁에 딩굴고 파도에 휘말리게 되었을 경우 우와 직이 보았다면 장차 잠시만 살게 해주고 말겠습니까? 나는 반드시 계책을 세워 다시는 주리거나 빠지는 것을 근심하지 않도록 해준 다음에야 그의 마음이 편안했으리라고 여깁니다.
삼가 생각건대, 승상 집사께서 성천자(聖天子)를 빛나게 보좌하되, 성색(聲色)을 움직일 것도 없이 천하를 태산(泰山)처럼 안정되게 조치하시어 머리가 센 노인들이 ‘중통(中統)ㆍ지원(至元) 시대의 훌륭한 정치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하니,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큰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데도 한 사람은 곤궁한 사세가 주림이나 물에 빠진 것보다도 심한데, 집사께서는 어떻게 조처하여 주시렵니까? 지난해에 우리 노심왕(老瀋王)이 천자의 진노(震怒)를 사 몸 둘 곳이 없었는데, 집사께서 애처롭고 가엾게 여겨 뇌정(雷霆 천자의 위엄을 뜻함) 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백골(白骨)에 살이 생기게 하시어 가벼운 법을 적응하여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하도록 하셨으니, 다시 살린 은혜가 부모보다도 더합니다.
그러나 지역이 너무 멀고 궁벽한데다 언어마저 같지 않고 풍습이 아주 다르며, 도적을 헤아릴 수 없고 기갈(飢渴)이 서로 침해하므로, 신체가 여위고 머리가 다 세었으니, 신고하는 상항을 말하려면 눈물이 나오는데, 집사께서는 차마 보고만 계시렵니까?
친속으로 말하면 세조황제(世祖皇帝)의 친 생질이요, 공로로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이며, 또한 그의 조고(祖考)들이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가 창업(創業)할 때부터 의리를 사모하고 솔선하여 복종해서 대대로 근왕(勤王)한 공로를 세웠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집미(執迷)하고 깨닫지 못해 더할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 본심을 따져 보면 진실로 딴 마음이 없었는데, 귀양간 이래 이미 4년이 되었으니,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뉘우친 것이 또한 이미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집사께서 일찍이 당초에 극력 구출해 주셨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마시고, 천자께 진달(進達)하여 천택(天澤)을 베푸시도록 인도하여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신다면, 그 감격됨이 어찌 구렁에 딩굴던 자가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파도에 휘말리던 자가 탄탄한 길을 걷게 될 뿐이겠습니까?
만일, 시기가 합당치 못하니 아직 천천히 하겠다고 하여 날마다 연기하고 달마다 끌다가, 현명하고 유력한 사람이 먼저 구원하게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이 장차 집사께서 일을 봄이 특히 더디다 할 것이고, 우리 소국(小國) 사람들은 장차 집사께서 덕을 행하다 마치지 못했다 할 것이니, 그윽이 집사를 위해 애석해 합니다.
[註解]
[주D-01]우(禹) : 고대 하(夏) 나라의 첫 번째 임금으로 삼왕(三王)의 하나. 일찍이 순(舜)의 신하가 되어 9년의 홍수를 다스리느라 손발
에 못이 박혔으며,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구주(九州)의 백성들이 살 길을 얻었으므로
순(舜)은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마침내 제위(帝位)를 물려줬는데, 맹자(孟子)는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우(禹)는 마
치 자신이 빠뜨린 것처럼 여겼다.” 하였다.《書經 益稷》 《孟子 離婁下》
[주D-02]직(稷) : 이름은 기(棄). 주(周) 나라의 시조였는데, 농사에 큰 관심이 있어 순(舜)의 후직(后稷)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경종
법(耕種法)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홍수 피해로 곡식을 못먹던 백성들이 다시 곡식을 먹게 되었는데 맹자는 “천하에 굶주린 자
가 있으면 직(稷)은 마치 자신이 굶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다.” 하였다.《書經 益稷》 《孟子 離婁下》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최송파(崔松坡)와 함께 원 낭중(元郞中)에게 보낸 서
최모(崔某)ㆍ이모(李某)는 재배하고 낭중 원공(元公) 족하(足下)께 글을 올립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바닷가에 살며 방명(芳名)을 흠모하고 하풍(下風)을 우러른 지 오래되었습니다. 뛰어난 인품을 보고 유창한 언론을 듣고 싶었지만 돌아보건대, 소개(紹介)하여 먼저 찾아뵙게 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세월만 보내고 소원을 이룰 수 없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간담을 피력하여 앞에 바치게 되었으나 교분(交分)은 얕으면서 말이 심각하여, 족히 존청(尊聽)을 감동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폐읍(弊邑)은 족하께서 공경(恭敬)해야 할 상재(桑梓)의 땅입니다. 비록 유곡(幽谷)에서 나와 교목(喬木)으로 옮기고, 진흙에 서렸다가 구름으로 날아가, 중국에서 살고 중국에서 벼슬하시지만, 선영(先塋)과 친척은 본래부터 폐읍에 있으니 우리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대해 또한 어떤 인정이 없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천자(聖天子)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시는데, 대승상(大丞相)께서는 불세출(不世出)의 재략(才略)을 지닌 분으로, 말마다 들어주고 계책마다 써주어, 묘당(廟堂)에서는 하나도 실책(失策)이 없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 곳을 얻지 못하고 한 물건이라도 공평함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진발(振拔)시켜 안정되게 해주고야 그만두시니, 진실로 만세에 한 번이나 있는 좋은 때입니다.
족하께서는 단정하고 성실하며 웅심(雄深)한 자품에다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문채내어, 높은 관에 큰 띠를 띠고 동각(東閣)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이주(伊周)를 윤색(潤色)하고 방두(房杜)를 미봉(彌縫)하니, 벼슬길에 지기(知己)를 만나 도(道)를 행하게 된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폐읍이 대국(大國)을 섬겨온 지 백여 년 동안에 해마다 조공을 바쳐 일찍이 조금도 해이됨이 없었고, 지난번에 요(遼)의 잔당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중원(中原) 백성을 약탈하고 바다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합진(哈眞)ㆍ찰라(札剌)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할 적에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보급(補給) 길이 끊기고 군사가 전진하지 못하여 거의 흉도(凶徒)들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는데, 우리 충헌왕(忠憲王)께서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를 명하여 군량을 운반하고 군사를 후원하게 하여 앞뒤에서 쳐 멸망시키고는 두 나라 군사가 서로 형제가 되어 만세토록 잊지 말기로 맹세하였으니, 이는 폐읍이 태조황제(太祖皇帝) 때에 힘을 다한 일입니다.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남쪽을 정벌하러 갔다 돌아와 장차 대통(大統)을 잇게 되었었는데 이때 아우 하나가 삭방(朔方)에서 변란을 선동하므로 제후(諸侯)들이 우려하고 의구(疑懼)하여 도로가 매우 삼엄하였는데도, 우리 충경왕(忠敬王)께서는 세자(世子)로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양초(梁楚) 지방의 들에서 영접하시자, 이에 온 천하가 먼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함을 보고는 천명이 돌아옴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폐읍이 세조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일입니다.
충경왕이 습작(襲爵)되어 동으로 돌아오자, 충렬왕(忠烈王)이 다시 세자로서 천자를 입시(入侍)하러 갔었는데, 세조께서 그의 공로를 생각하고, 그의 의리를 아름답게 여겨 대우를 극진히 하여 천하에 미칠 사람이 없었고, 공주(公主)를 시집보내어 특별한 은혜를 보였으며, 누차 조지(詔旨)를 반포하여 구속(舊俗)을 고치지 말도록 하시니, 사해(四海)의 안이 미담(美談)으로 삼았습니다.
노심왕(老瀋王)은 곧 공주의 아들이요, 세조의 친생질인데다 세조황제 때부터 성대(盛代)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다섯 조정에 벼슬하여 이미 친근하고도 정다운 터입니다. 다만 공을 이루고서 물러나지 않다가, 소홀히 여긴 곳에서 변이 생기게 되어 머리를 깎고 복장을 달리한 채, 멀리 토번(土蕃)으로 귀양가니, 고국과 만여 리의 거리에서, 혁선(革船)으로 하(河)를 건너고 소달구지에서 노숙(露宿)하며 어렵게 반 년이 되어서야 그 지역에 도달하여 보릿가루를 먹으며 토굴에서 살고 있어 갖은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들도 혹시 듣게 되면 오히려 슬퍼하는데, 하물며 그의 신하가 된 자이겠습니까?
창합(閶閤 궁궐 정문)은 구름을 헤치고 외칠 길이 없고, 낭묘(廊廟)에는 심왕(瀋王)을 위하여 말해주는 신하가 없으니, 비록 애처로운 마음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힘찬 소리로 급하게 외친들 누가 들어주고 누가 가엾이 여기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희들은 밥상을 대했다가도 먹기를 잊고, 누웠다가도 도로 일어나 허둥지둥 헤매며 눈물이 말라 피가 나게 된 것입니다.
대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고 족속(族屬)들과 돈목(敦睦)함은 선왕들의 정사였으며, 공로를 들어 허물을 덮어줌은 《춘추(春秋)》의 법입니다. 족하께서는 어찌 조용히 대승상에게 말씀드려 지난날 다른 뜻이 없었음과 오늘날 스스로 착해졌음을 밝히지 않게 하십니까?
천자에게 입주(入奏)하여 금계(金鷄)의 은택을 내려 사환(賜環)해서 동으로 돌아와 다시 태양을 보게 해주시어, 성천자의 세상에 다시는 구석을 향하여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해주신다면, 대승상의 아름다운 덕이 더욱 원근(遠近)에 나타나게 될 것이요,
족하는 근본을 잊지 않는 의리와 사람을 잘 구원하는 인(仁)을 천하 사람들이 장차 모두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폐읍의 군신(君臣)만이 살과 뼈에 새기며 만분에 일이라도 갚으려고 할 뿐이겠습니까? 거듭거듭 황송하여 다 말하지 못합니다. 모등은 재배합니다.
[註解]
[주D-01]폐읍(弊邑) : 자신의 나라나 고을을 낮추어 칭하는 말.
[주D-02]상재(桑梓)의 땅 : 고향 또는 고국이란 뜻. 옛날에 집 둘레에 뽕나무와 노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전하여 생계의 밑천이 되게 하여
서 생긴 말.《詩經》 小雅 小弁에 “뽕나무와 노나무를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 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심어
놓은 나무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3]유곡(幽谷)에서 …… 옮기고 : 유곡은 깊숙한 골짜기이며 교목(喬木)은 높은 나무로 사람이 출세함을 뜻한다.《詩經》 小雅 伐
木에 “꾀꼬리의 울음소리 영영하도다. 유곡에서 나와 교목으로 옮아가도다[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말에서 나온 것
이다.
[주D-04]진흙에 …… 날아가 : 용(龍)이 진흙 속에 묻혀 있다가 시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말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벼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5]동각(東閣) : 동쪽의 소문(小門). 전한(前漢)의 공손홍(公孫弘)이 동각을 열어놓고 현명한 빈객을 맞아들인 고사에서 생긴
말. 재상(宰相)의 귀빈(貴賓)이 됨을 뜻한다.
[주D-06]이주(伊周)를 …… 미봉(彌縫)하니 : 이(伊)는 상탕(商湯)의 어진 정승이었던 이윤(伊尹)을 가리키며 주(周)는 주공(周公)으
로 주 성왕(周成王)의 숙부인바 어린 성왕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켰다. 방두(房杜)는 당(唐)의 명재상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
(杜如晦)를 가리킨다.
[주D-07]양초(梁楚) 지방 : 중국 남방 양자강 하류 좌우 일대의 범칭. 양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여현(臨汝縣) 동쪽 지역, 초는 지금
의 호남성(湖南省)ㆍ호북성(湖北省) 지역.
[주D-08]혁선(革船) : 가죽을 꿰매어 연결하여 만든 배.
[주D-09]금계(金鷄) : 사면(赦免)을 뜻한다. 옛날 사죄(赦罪)하는 조서(詔書)를 내릴 때, 장대 끝에 금계를 달되, 황금으로 머리를 장식
하고 입에다 붉은 기를 물린 고사에서 생긴 말.《隋志 刑法志》
[주D-10]사환(賜環) : 죄를 용서하여 소환(召還)하는 것. 옛날 죄 지은 신하가 국경으로 나가 3년을 대죄(待罪)하고 있다가, 임금이 고리
[環]를 내리면 돌아왔기 때문에 한 말이다.《儀禮 喪服》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제6권
기(記) 6편
1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김공(金公) 행군기(行軍記)
2 개국률사(開國律寺) 중수기(重修記)
3 건동선사(乾洞禪寺) 중수기
4 백화선원 정당루(白華禪院政堂樓) 기(記)
5 운금루기(雲錦樓記)
6 묘련사(妙蓮寺) 석지조(石池竈) 기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김공(金公) 행군기(行軍記)
공의 휘(諱)는 취려(就礪)인데, 뒤에 취려(就呂)라고 고쳤으니, 계림(鷄林) 언양군(彦陽郡) 사람이다. 젊었을 때 아버지의 공로로 정위(正尉)에 기용되었다가 동궁위(東宮衛)에 뽑혔고, 중랑장(中郞將)으로 전임하여 우림군(羽林軍)을 거느리다가 몇 해 안 되어 장군으로 발탁되어 동북(東北) 국경을 진수(鎭守)하였는데, 말갈(靺鞨)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그 공로로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강종(康宗) 2년(계유)에 국경을 순무(巡撫)하자 변방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모했으며, 고종(高宗) 3년(병자) 8월에 거란(契丹)이 국경을 침범하자,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使) 독고정(獨孤靖)이 ‘이달 12일에 쳐들어왔다.’고 계문(啓聞)하므로, 왕은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오응부(吳應夫)를 우군(右軍)으로 삼고, 공을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후군(後軍)을 삼고는 13일 순천관(順天館)에서 크게 열병(閱兵)하고, 22일 우군은 서보통(西普通)에, 중군은 누교원(樓橋院)에, 후군은 과전(苽田)에 진을 쳤다가 이틀 밤을 지내고 길을 떠났다.
당초에 원(元) 나라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가 군사를 일으켜 금(金) 나라의 연도(燕都)를 치자, 금 선종(金宣宗)은 변경(汴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성무황제는 북으로 돌아가며 군사를 남겨두어 연도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연도 사람들이 연향을 베풀어 술이 취하자 섬멸하였다.
이에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 왕자(金山王子)ㆍ금시 왕자(金始王子)는 그의 당인 아아걸노(鵝兒乞奴)를 장수로 삼아, 하북(河北) 지방의 백성을 위협하고는 스스로 ‘대료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컬었다. 성무황제는 몹시 화를 내어 크게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자, 두 왕자는 무리를 모두 데리고서 동으로 와서 우리에게 땅과 식량을 요청했으나, 우리가 허락하지 않자, 두 왕자는 본래부터 노리는 마음이 있는데다 또한 유감을 가져, 아아걸로로 하여금 먼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게 하고, 처자(妻子)는 모두 자신이 데리고 진융(鎭戎)ㆍ영삭(寧朔)을 거쳐 아사천(阿史川)으로 나왔었다.
우리 삼군(三軍)은 조양진(朝陽鎭)에 이르러, 중군은 성 안에 진을 치고 우군과 후군은 성 밖에 진을 쳤는데, 조양 사람들이 달려와 적(賊)이 이미 가까이 왔다고 고하므로, 삼군은 각각 정예 군사를 뽑아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군후원(軍侯員) 오응유(吳應儒)와 신기장(神騎將) 정순우(丁純祐)가 단독으로 머리를 벤 것이 80여 급(級), 사로잡은 것이 20여 명이며, 우마(牛馬) 수백 필과 부인(符印)ㆍ기장(器仗)을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오응유는 다시 보병 3천 5백 명을 이끌고 귀주(龜州) 직동촌(直洞村)에서 적을 만나 머리 2백 급을 베고 35명을 사로잡았으며, 우마ㆍ전구(戰具)ㆍ은패(銀牌)ㆍ동인(銅印)을 매우 많이 노획했고, 장군 이양승(李陽昇) 역시 장흥역(長興驛)에서 적을 깨뜨리니 이들은 모두 공의 휘하(麾下)였다.
삼군이 신기장을 보내어 적의 뒤를 밟아, 신리(新里)에서 적을 만나 싸워서 머리 1백 90급을 베고, 연주(延州)에 진군한 다음 광유(光裕)ㆍ연수(延壽)ㆍ주민(周民)ㆍ광세(光世)ㆍ군제(君悌)ㆍ조웅(趙雄) 여섯 장수로 하여금 사자암(師子巖)을 지키게 하고, 영린(永驎)ㆍ적부(廸夫)ㆍ문비(文備) 세 장수로 하여금 양주(楊州)를 지키게 하여, 9월 25일 아홉 장수가 적의 머리 7백 급을 베었으며, 노획한 말ㆍ노새ㆍ소ㆍ패인(牌印)ㆍ병장(兵仗)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이 다시는 군사를 나누지 못하고는 개평역(開平驛)에 집결하니, 삼군이 이미 당도하였으나 모두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우군은 서산(西山)의 기슭에 웅거했고, 중군은 들판에서 적을 받게 되자 조금 후퇴하여 독산(獨山)에 주둔했는데, 공은 칼을 빼들고 말을 달려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곧바로 적 속으로 돌격하여 출입하면서 분격(奮擊)하니 적이 붕괴되었다. 추격하여서 개평역을 지나는데, 적이 역 북쪽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갑자기 중군을 공격하자, 공은 군사를 돌려 반격하니 적이 또다시 붕괴되었다.
밤에 노공(盧公)은 공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데다 우군도 오지 않고, 또한 당초 사흘 양식밖에 가져오지 않아 이제 이미 다 되었으니, 후퇴하여 연주성(延州城)에 웅거했다가 뒤를 기다림만 못하다.”
하자, 공은,
“우리 군사가 누차 승전하여 투지(鬪志)가 아직 강하니 이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한 번 싸운 뒤에 의논하자.”하였다.
적이 묵장(墨匠)의 들에 포진(布陣)하였는데, 군사의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노공은 기병을 달려보내어 공을 부르고, 한편 검은 기치(旗幟)를 날려 신호를 하니, 사졸들이 칼날을 무릅쓰고 다투어 전진하여 하나가 백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문비(文備)와 함께 적진을 가로막으며, 가는 곳마다 휩쓸어 세 번 싸워 세 번 이겼으나, 공의 장자는 전사하고 말았다.
추격하여 향산(香山)의 남강(南江)에 이르자, 적은 빠져 죽은 자가 1천 명이나 되니, 부녀자들이 모여 우는 소리가 마치 천만 마리의 소가 고함지르는 것과 같았다. 한 사람이 무기를 버리고 관원이라 자칭하며 앞으로 다가와 청하기를, “우리들은 귀국의 국경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지만, 부녀자들이야 무엇을 압니까? 다 죽이지 마시고 또한 우리를 너무 궁박(窮迫)하게 마십시오. 우리는 하루바삐 스스로 돌아가겠습니다.”하니, 공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너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하고, 술을 주니 통쾌하게 마시고 갔는데, 조금 있다가 아아걸노가 부문(符文)을 보내어 소원을 말했는데, 그의 말과 같았다.
삼군은 각각 2천 명씩 보내어 그들의 뒤를 밟아 보니, 적들이 버린 군량과 기장(器仗)이 길에 낭자(狼藉)하였다. 소와 말을 혹은 허리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혹은 뒷부분을 찌르기도 하니 이는 노획하더라도 다시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이었다. 보낸 6천 명이 청새진(淸塞鎭)에서 싸워 생포하고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고, 평로진 도령(平虜鎭都領) 녹진(祿進)도 또한 공격하여 7천여 급을 죽이니, 적들은 마침내 청새진을 넘어 도망갔다.
창주 분도장군(昌州分道將軍) 김석(金碩)이 보고하기를, “거란의 뒤에 오는 군사들이 지난달부터 많이 국경으로 들어왔는데, 이들은 곧 금산(金山)ㆍ금시(金始)의 군사입니다.”하므로, 삼군이 연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직 내상군(內廂軍)만 남겨 자위(自衛)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출발했으나, 후군만이 홀로 양천(楊川)에서 적을 만나 수백 급을 사로잡거나 죽였으며, 양군(兩軍)은 먼저 박주(博州)로 돌아갔다.
공은 치중(輜重 군수물품)을 호송하느라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당도하자. 적들이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므로 공은 양군에게 위급함을 알렸으나, 양군은 편리한 데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공은 역전(力戰)하여 물리치고 마침내 치중을 호송하여 오니, 노공은 서문 밖까지 나와 맞이하여 축하하기를, “졸연히 강한 적을 만났으나 능히 그 예봉(銳鋒)을 꺾어, 삼군의 짐을 진 군사들을 조금의 손실도 없게 한 것은 공의 힘이오.”하고, 말 위에서 술을 따라 축수(祝壽)하였으며, 양군의 장졸과 모든 성(城)의 부로(父老)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번에 강한 도적과 대치하여 그 자리에서만 싸우기도 어려운 일이라 하였는데, 개평(開平)ㆍ묵장(墨匠)ㆍ향산(香山)ㆍ원림(元林)의 전쟁에 후군이 매양 선봉이 되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쳐부수어, 우리 노약(老弱)들이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보답할 길이 없으니 단지 축수만 할 뿐입니다.”하였다.
공은 엄격히 군율을 지켜 사졸들이 백성의 물건을 조금도 범하지 못했으며, 술이 있으면 곧 잔 하나를 가져다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고루 마시기 때문에 그들이 죽도록 힘을 써주었으며, 전공을 세우게 되면 반드시 모든 장수들과 회의하고는 연명(聯名)하여 계문(啓聞)하고, 한번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
10월 20일, 삼군이 밤에 군사를 보내어 흥교역(興郊驛)에서 적을 습격하고, 이튿날 밤 홍법사(洪法寺)에서 싸웠으며, 그 다음날 다시 고을의 성문 밖에서 싸워 모두 이기고는 우리 군대가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휴식시키니, 적들이 밤에 청천(淸川)을 건너 서경(西京 평양(平壤)으로 갔다가, 일기가 추워지자 얼음 위로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서해도(西海道 황해도)로 들어갔다.
국가에서는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을 원수로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조충(趙冲)을 부원수로 삼아, 앞의 삼군(三軍)과 합하여 오군(五軍)을 만들고는, 다시 승선(承宣) 김중귀(金仲龜)를 보내어 남도(南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 원수와 만나도록 했는데, 정 원수가 머뭇거리며 군율을 잃자, 추밀원사(樞密院使) 정방보(鄭方甫)로 대신하였다.
정축년 2월에 공을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 제배(除拜)하고, 3월에 5군이 안주(安州) 대조탄(大棗灘)에 주둔하였는데, 싸워 이기지 못하니 적은 기세가 당당하게 돌진(突進)해 왔다. 공은 문비(文備)ㆍ김인겸(金仁謙)과 함께 반격하다가 인겸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공은 칼을 날려 혼자 막아내다가, 창과 화살에 온 몸이 찔려 상처가 심하여 서울로 왔는데도 분개하는 충의의 기색이 오히려 말과 안색에 나타나니,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었다.
5월에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로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으로 전군(前軍)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대장군 임보(任甫)로 새로 정한 오군(五軍)을 거느리도록 하되, 가발병(加發兵)이라 이름하여 충주(忠州)로 보냈는데, 공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아픔을 참고 명을 받았다.
7월에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의 남쪽 시냇가에 이르렀는데, 오군이 서로 먼저 건너려 하자 공은 물러나 모든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탔는데, 충주성이 물에 파괴되어 나무와 돌이 무너져 내려왔다. 공이 타고 있던 배가 큰 돌에 부딪혀 키와 노가 모두 부서지고, 갑판이 새어 물이 솟으니, 같이 탄 사람 3백여 명이 모두 사색(死色)이 되었으나, 공은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정신과 기색이 여전하였다. 조금 있자 사람 셋이 떼를 타고 물을 가로질러 구원해 주려 하므로 배에 있는 사람들이 끊어진 새끼를 연결시켜 던지니 세 사람이 언덕으로 끌어올렸는데, 물어보니 원주(原州)에 사는 사람의 종들이었다.
그 중에 특히 건장한 사람과 동행하여 이틀밤을 자고, 본군(本軍)을 법천사로 모았다가 독점(禿岾)으로 옮겨 주둔하였는데, 최공(崔公)이,
“내일 갈 길이 두 갈래니 우리가 어디로 가면 좋은가?”하자, 공은, “군사를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니, 최공은 따랐다.
맥곡(麥谷)에 모여 적과 싸워 3백여 급을 베고, 제주(堤州)의 냇가로 추격하니 시체가 내를 덮어 떠내려갔다. 산골짜기를 수색해서 노약(老弱) 남녀를 찾아내어 충주로 보내고, 우마(牛馬)와 노획한 것을 가지고 박달재[朴達峴]에 이르니, 최공이, “고개 위에는 대군이 머무를 수 없으니 산 아래로 물러나 주둔하려 한다.”하자, 공은, “작전하는 방법이 비록 인화(人和)를 앞세우지만, 지리(地利)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적이 먼저 이 고개를 점령하고 우리가 그 밑에 있게 되면, 원숭이처럼 빠른 재주로도 또한 지나갈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하였다. 마침내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로 올라가 잤다. 날이 새자, 과연 적의 대군이 고개 남쪽으로 진격해 오는데, 먼저 수만 명을 좌우 봉우리에 나누어 오르게 하여 요충(要衝)을 차지하려 하자, 공은 장군 신덕위(申德威)ㆍ이극인(李克仁)으로 왼쪽을, 최준문(崔俊文)ㆍ주공예(周公裔)로 오른쪽을 맡게 하고, 공은 중앙에서 지휘하니, 사졸들이 모두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삼군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또한 크게 외치며 다투어 올라오자, 적은 크게 무너졌다. 이 때문에 적은 남쪽으로 내려오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모두 동으로 도망갔다. 추격하여 명주(溟州)에 이르러, 추령(杻嶺)ㆍ대현(大峴)ㆍ구산역(丘山驛)ㆍ등대양(燈臺壤)ㆍ악판(惡坂)ㆍ등주(登州)의 동양(東壤)에서 싸워, 무릇 여섯 차례를 싸우니, 적은 지탱할 수 없어 여진(女眞) 땅으로 도망하였다.
9월에 공이 중군(中軍)의 통첩에 따라 군사를 정주(定州)로 옮기고, 적을 엿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이 함주(咸州)에 있는데 우리와 지경이 연해 있어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하므로, 공은 녹각(鹿角) 담을 해자(垓字) 밖에 세 겹으로 쌓고는, 이극인(李克仁)ㆍ정순우(丁純祐)ㆍ신덕위(申德威)ㆍ박유(朴蕤) 등 네 장수를 남겨 지키도록 하고, 흥원진(興元鎭)으로 옮겨가 있었다.
10월에 적이 여진의 구원병을 얻어 다시 떨쳐 깊이 쳐들어왔다. 공은 군사를 돌려 예주(豫州)의 생천(栍川)에서 대치하였다가 서로가 후퇴하여 물러왔었는데, 갑자기 병이 나 낫지 않자, 장좌(將佐)들이 돌아가 치료할 것을 청했으나 공은, “차라리 변방 성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수레에 실려 집으로 가서 편히 있겠는가?”하였다.
병이 도져 물도 마시지 못하고, 사람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므로 서울로 돌아와 병을 치료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병마녹사(兵馬錄事) 홍창연(洪昌衍)과 장군 이중립(李中立) 등이 공을 가마에 싣고 서울로 와 여러달 만에 나았다. 이때 적은 수십 개의 성을 부수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하였고, 이달 29일에는 남아 있던 군사가 적과 위주(渭州)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이양승(李陽升)이 전사하였다.
무인년 7월에 수사공(守司空) 조충(趙冲)을 원수로 삼고, 공을 병마사(兵馬使) 겸 상장군으로 삼았으며,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으로 삼고, 신선주(申宣冑)를 우군으로, 이임(李霖)을 후군으로 삼았으며, 이적유(李廸儒)를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삼았다.
9월 6일에 원수가 관복 차림으로 명을 받고 나가, 융복(戎服 군복)을 갖춘 다음 다시 대관전(大觀殿)에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부월(斧鉞)을 받았으며, 장단(長湍)을 거쳐 동주(洞州)로 가다가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모극(毛克) 여진의 벼슬 이름 고연(高延)과 천호(千戶) 아로(阿老)를 사로잡았다.
성주(成州)에 머물러 제도(諸道)의 군사를 기다리는데,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 이적(李勣)이 군사를 인솔하고 오다가 적을 만나 전진하지 못한다 하므로, 장군 이돈수(李敦守)ㆍ김계봉(金季鳳)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여 이적의 군사를 맞이했는데, 벌써 적이 큰 길을 따라 모두 중군에게 향하므로, 우리 군사를 좌우익(左右翼)으로 배치하고 지휘하여 전진하니, 적의 이군(二軍)은 풍문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패주하였다.
이돈수 등이 이적과 모이게 되자, 녹사(錄事) 신중해(申仲諧)가 그 군사를 나누어 군량을 수송하였는데, 적이 또다시 요격하므로, 장군 박의린(朴義隣)이 독산(禿山)에서 패전시켰다. 적은 흩어졌다가 다시 기병 수만 명을 모아 예기(銳氣)를 다해 쳐들어오므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시키니, 아장(亞將) 탈라(脫剌)는 도망해 가고, 적의 괴수도 역시 군사를 끌고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리가 그의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할까 염려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 있었다.
12월에 황원(皇元)의 합진(哈眞)ㆍ찰라(札剌) 두 원수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완안 자연(完顔子淵)의 군사 2만 명과 함께 거란적(契丹賊)을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강동성(江東城)으로 갔는데, 이때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 길이 막히자, 적은 성벽(城壁)을 굳게 지키며 그들을 지치게 하니, 합진은 근심하여 사자(使者) 12명과 우리나라 덕주(德州) 진사(進士) 임경화(任慶和)를 보내어 군사와 식량을 청하고, 또 황제가 ‘적을 부순 다음에는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다.’고 말하므로, 우리 원수가 계문(啓聞)하니, 왕이 허락하고 김양경(金良鏡)ㆍ진석(晉錫)에게 군사 1천 명을 딸려 보냈었다.
합진이 누차 군사를 더 보내라고 책하자, 제장들은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국가의 이해가 바로 지금에 달렸는데, 만일 그의 뜻을 어기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니, 조공이, “나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일이니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보낼 수 없소.”하였다.
공은,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분수이니, 내가 비록 재능은 없지만 공을 위해 한 번 가 보겠소.”하니, 조공은,
“군중(軍中)의 일을 오직 공만 믿고 있는데, 공이 가면 되겠소?”하였다.
기묘년 2월 공이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10장군의 군사와 신기(神騎)ㆍ대각(大角)ㆍ내상(內相)의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니, 합진은 통사(通事) 조중상(趙仲祥)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과연 우리와 우호를 맺게 되었으니, 마땅히 먼저 몽고 황제께 요배(遙拜)하고, 다음으로는 만노 황제(萬奴皇帝)께 요배해야 한다.”하니, 만노란 대개 동진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은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는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는가?”하고는, 이에 성무황제에게만 요배하고 만노에게는 요배하지 않았다. 공은 키가 6척 5촌이나 되며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가 매양 성복(盛服)을 할 때에는 반드시 두 계집종을 시켜 수염을 나누어 들도록 한 다음에야 띠를 띠었었는데, 이때 합진은 용모를 보고, 또 말하는 것을 듣고는 참으로 훌륭하게 여겨 인도하여 한자리에 같이 앉으며 나이를 물었다.
공은, “60세에 가깝소.”하자, 합진은, “나는 아직 60이 못 되었습니다. 이미 한집안이 되었으니, 당신은 형이고 나는 아우가 아니겠습니까?”하며, 공에게 동향(東向)하여 앉게 하였다. 다음날 또 그의 군영에 나아가니, 합진은,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면서 귀인(貴人)을 많이 보았는데, 형의 모습은 어찌 그리 훌륭하십니까?
내가 형을 중히 여기므로 휘하(麾下)의 사졸들도 또한 한 가족처럼 여기겠습니다.”하였으며, 작별할 때는 손을 잡고 대문까지 나와 부액(扶腋)하여 말에 태웠다. 며칠 뒤에 조공도 갔었는데, 합진은, “원수와 형은 누가 나이가 위입니까?” 물으므로, 공은, “나보다 위입니다.”하자, 합진은 곧 조공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히면서, “내가 한 말씀 하려는데 예가 아닐까 두렵습니다만, 친한 정리에 따로 앉음은 마땅치 않으니, 내가 두 형의 사이에 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므로, 공은, “이는 진실로 우리들의 소망이었는데, 다만 감히 먼저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하였다.
좌정(坐定)하자 술자리를 베풀고 무악(舞樂)을 하였다. 몽고의 풍속은 날카로운 칼 끝으로 고깃점을 꿰어 빈주(賓主)가 서로 먹여주기를 좋아하는데, 삽시간에 빠르게 왕복하니, 우리 군사 중에 평소 용맹이 있다고 이름난 자들도 모두들 난색을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과 조공은 꿇어앉았다가 일어나 수작하기를 매우 익숙하게 하니, 합진 등은 몹시 좋아하며 다음날 새벽에 강동성 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는 성에서 3백 보쯤 떨어진 거리에 주둔하였다. 합진은 남문에서 동남문에 이르기까지 너비와 깊이가 열 자씩 되게 땅을 팠는데, 서문 이북은 완안 자연(完顔子淵)에게 맡기고, 동문 이북은 공에게 맡겨, 모두 도랑을 파 적이 도망할 길을 막도록 하였다.
이달 14일에 적은 세(勢)가 궁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왕자(王子)는 스스로 목매 죽었다. 그들의 괴뢰 승상(丞相) 이하를 모두 베고는 합진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 리나 되는 먼 곳에 와서 귀국과 힘을 합쳐 적을 멸망시켰으니, 천추(千秋)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의가 마땅히 국왕에게 가서 뵈어야 하는데, 우리 군사가 자못 많아 멀리 가기 어려우니, 다만 사자(使者)를 보내어 진사(陳謝)하겠습니다.”하였다.
20일에 합진과 찰라가 조 원수와 공을 청하여 함께 맹세하고는,
“두 나라가 길이 형제가 되었으니 만세의 자손들은 오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호군(犒軍)하는 잔치를 마련했습니다.”하고는, 합진이 부녀자와 동남(童男) 7백 명과 적에게 약탈되었던 우리 백성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 주었으며, 원수와 공에게 15세 전후의 여자 각각 9명씩과 준마(駿馬) 각각 9필을 주었다. 원수는 합진 을 의주(義州)까지 전송하고, 공은 찰라와 조양(朝陽)에 이르렀는데, 마침 서경 재제사(西京齋祭使)로 임명되었으므로 오수기(吳壽祺)가 공을 대신해서 전송했다.
9월에 의주(義州) 낭장(郎將) 다지(多知)와 별장(別將) 한순(韓珣)이 지키는 장수를 죽이고 여러 성(城)과 연합하여 모반하자,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극수(李克修)는 중군을, 이적유(李迪儒)는 후군을, 공은 우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공을 추밀원 부사(副使)로 삼아 이극수를 대신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다지 등이 요양(遼陽)의 온지한(溫知罕)에게 군사를 청하자, 온지한은 두 사람을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 우리에게 보내왔다. 삼군은 반역에 따른 모든 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자, 공은,
“《서경(書經)》에 ‘괴수만 죽이고 위협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대군이 임하는 곳에는 마치 벌판의 불길과 같아 죄없이 화를 입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거란적 때문에 관동(關東)이 텅 비었는데 이제 또 이곳에 군사를 풀어놓아 스스로 변방 울타리를 잔해(殘害)해서야 되겠는가?”하며, 오직 다지와 한순의 도당만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다.
거란의 잔당들이 영원(寧遠)의 산 속에 숨어 살며 수시로 나와 노략질하므로 백성의 근심거리였는데, 의주 사람 창명(昌名)이 또한 수보(秀甫)ㆍ공리(公理)와 함께 모반하였다. 공은 이경순(李景純)ㆍ이문언(李文彦)을 보내어 영원 도적을 토벌하고, 문비(文備)ㆍ최공(崔珙)을 보내어 창명을 토벌하였다.
창명은 이때 철주(鐵州)를 침략하고 있었는데, 관군(官軍)이 오자 적당이 무너지므로 마침내 창명ㆍ수보ㆍ공리를 베었으며, 경순ㆍ문언도 또한 영원 성에 있는 적을 깨뜨리니, 북쪽 변경(邊境)이 안정되었으므로 5월에 개선(凱旋)하였다.
그 뒤에 공은 마침내 고종(高宗)을 도와 8년 동안이나 총재(冢宰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별칭)로 있었는데, 그 공덕은 모든 신사(信史 믿을 만한 확실한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단지 5년 동안 행군(行軍)한 사적만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국가의 덕이 쇠퇴하지 않았는데도 혹 화란의 얼(孽)이 싹트게 되면, 반드시 재지(才智)가 뛰어난 신하가 나와 임금의 신임을 받으며 시국의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니, 대개 사직(社稷)의 신령이 남모르게 돕기 때문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이었는데, 최씨(崔氏) 부자가 대대로 정권을 잡아, 안으로는 강한 군사를 두고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되 지모가 깊은 사람은 반드시 써주지 않았고, 밖으로는 병약한 군사를 주어 싸우게 하면서 공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여도 또한 어렵다.
그런데 금(金) 나라가 망하게 되자, 요(遼)의 남은 종자들이 화근을 조성하여 우리 강토를 저들의 소굴로 만들려고 노리므로 궁해진 적들과 멀리 가서 싸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성원(聖元 원 나라를 높인 말)이 용흥(龍興 제왕이 되는 것)하자, 먼저 먼 길에 장수를 보내어 국경을 위압하고 구원병을 요구하면서 적을 토벌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순응하자니 그 심정을 알 수 없고, 거부하자니 반드시 딴 변이 생겨서 안위가 매우 긴박하였다.
그러나 공은 능히 이리저리 주선하고 먼 곳과 사귀면 가까운 곳을 공격해서 경륜(經綸)하는 첫머리에 맹약(盟約)을 정하고, 국기(國基)를 순식간에 안정시켰으니, 어찌 재지(才智)가 뛰어난 신하를 사직의 신령이 남몰래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어서 군사들이 사력을 다하게 되고, 금령(禁令)이 잘 행해져 조금도 범하는 일이 없었음을 보건대 옛적 명장들의 풍도가 있다 하겠다. 관평(關平) 싸움에는 그가 두 차례나 중군을 구원했고, 사현(沙峴) 싸움에서는 노공(盧公)이 서로 협조하지 않았지만,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아 혐의를 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공을 돌렸으니, 이는 대인(大人) 군자(君子)만이 갖는 마음이다.
먼저 합진에게 나아가 여국(與國 우호국(友好國))의 마음을 굳히고, 만노(萬奴)에게 요배(遙拜)하지 아니하여 존왕(尊王)하는 의리를 밝혔으며, 다지(多知)ㆍ한순의 머리를 베게 되자, 군사를 거두어 변방 백성을 편안케 하였으니 원대한 계책과 큰 기절(氣節)이 더욱 가상하다. 사씨(史氏)는 그의 충의(忠義)를 찬양하였고, 태상(太常)은 ‘위열(威烈)’이라고 시호(諡號)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註解]
[주D-01]우림군(羽林軍) : 왕을 호위하는 군사, 곧 근위병.
[주D-02]녹각(鹿角) 담 : 대나무와 목재로 사슴의 뿔처럼 삐죽삐죽하게 만들어, 적병의 접근에 대비하는 담장.
[주D-03]부월(斧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출정(出征)하는 대장 또는 중요한 군직(軍職)을 띠고 나가는 사람에게 임금이 손수 주어, 생
살권(生殺權)의 임무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주D-04]만노 황제(萬奴皇帝) : 금(金) 나라 선무(宣撫)이던 포선 만노(蒲鮮萬奴). 요동(遼東)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이라 자칭하
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했었다.
[주D-05]태상(太常) : 태상부(太常府)의 약칭. 제사(祭祀)ㆍ증시(贈諡)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개국률사(開國律寺) 중수기(重修記)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시자, 왕실과 나라에 유익한 일들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셨는데, 석씨(釋氏)는 다스리는 도를 협찬(協贊)하고 포악한 무리를 감화시킨다 하여, 승도(僧徒)들은 일반 백성에 넣지 않고 그 교리(敎理)를 천명하도록 하였으며, 무릇 탑(塔)이나 묘(廟)를 세울 적에는 반드시 그 산천(山川)의 지형이 음양(陰陽)의 이치와 부합되는지를 살펴 알맞게 조화되고 훌륭한 곳이라야 지었고, 양씨(梁氏)처럼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 부처에게 아첨하지는 않았다.
도성(都城) 동남쪽에 보정문(保定門)이 있는데, 그 길에는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ㆍ강릉(江陵) 네 도에서 도성으로 오는 사람과 도성에서 네 도로 가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끊이지 않고 왕래한다. 내가 있는데, 성 안의 멀고 가까운 시내와 크고 작은 도랑물이 모두 모여 동으로 빠지기 때문에 매양 여름과 가을 사이 장마로 큰 물이 지게 되면, 세찬 물결이 마치 삼군(三軍)의 행진과 같아 참으로 두렵다.
산이 있는데, 곡봉(鵠峯)에서 시작하여 굼틀굼틀 내려오되, 누웠다 일어섰다 달리다 멈추었다 하는 듯하여 마치 용이나 범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기세가 웅장하니, 세상에서 이곳을 삼겸(三鉗)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청태(淸泰) 18년에 태조께서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그 안에 절을 세워 율승(律乘)을 배우는 승려들을 거처하게 하고는 개국사(開國寺)라 명명하였다. 이때 전쟁이 겨우 안정되어 만사가 초창기였으므로 군사들을 모아 공사를 시키고, 무기를 부수어 자재에 충당했으니, 전쟁을 끝마치고 백성을 휴식시키려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임진년에 화재가 났는데 중수하지 못하여 승방과 불당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계단(戒壇)은 빈터가 되었고 강당[講肆]은 황무한 채 날마다 달마다 퇴락하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은 언제까지나 쇠퇴하기만 하지는 않아 때를 만나 번영하고, 도는 끝내 비색하기만 하지는 않아 사람을 기다려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 남산종사(南山宗師) 목헌 구공(木軒丘公)이 변론을 잘하여 경의(經義)를 통하여 정혜묘원자행대사(定慧妙圓慈行大師)라는 호를 하사받아, 오직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삼았다.
하루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국가에 발 붙이고 살면서 길쌈하지 않고 농사짓지 않아도, 의복은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고, 음식은 아침저녁을 지낼 수 있으니, 이는 우리 임금의 은덕과 우리 정승의 은혜가 또한 너무도 지극하다.
지금 국가 형편이 전일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전례처럼 우리들 집을 중수해 주기를 바라기 어려울 뿐더러 또한 내집 울타리가 무너졌는데 이웃에게 보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의리가 아니며, 내 밭이 묵었는데 남에게 김매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하니, 무리들은 이 말을 듣고는 뜻을 알아차려 팔을 걷어붙이며 종문(宗門)의 여러 사찰에게 권유하여 역부(役夫)를 배정 동원하여 땅의 높고 낮은 것을 고르고 우거진 숲들을 베어낸 다음 먹줄로 재고, 연궤(筵几)를 알맞게 만들며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걸었으며, 백토(白土)를 칠하고 단청(丹靑)을 하였는데, 위쪽에는 높다란 전(殿)이 세워지고, 그 양편에는 긴 무(廡)가 연결되었으며, 양쪽 무 끝에는 누각(樓閣)이 세워지고 두 누각 사이에는 행랑이 세워졌으며, 대문이 달렸다.
그 서쪽에는 학도(學徒)들의 학사(學舍)와 감사(監師)의 당(堂)이 있고, 주방과 창고도 각각 제자리에 있어 간략하면서도 주밀하고 검박하면서도 견고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을 참작하고 장구할 것을 헤아려 적당하게 증감한 것이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계해년(1323, 충숙왕 10)부터 시작해서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에 이르러 3년 만에 공사가 끝났는데, 연회를 열어 낙성을 축하하니, 듣고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그의 무리 중에 늙은이들이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나의 집에 찾아와 매우 간절히 기문(記文)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근세에 부도(浮圖)들은 일을 경영하려면 반드시 권력가의 힘을 빌리며,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국가에 피해를 주어 빨리 완성하려고만 하고, 복을 심는다는 것이 결국 원망을 사는 길임을 모르는데, 목헌대사(木軒大師)는 그렇지 않아 말이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대중들이 즐겁게 일을 하여 털끝만치도 국가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한 참도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 이룬 사업이 이처럼 훌륭하니 이것은 마땅히 기록하여야 한다.
이 절을 창건한 것은 대개 태조께서 왕실과 나라에 이롭도록 하려 한 것이요, 양씨(梁氏)처럼 아첨한 것이 아니니, 또한 후세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략히 대강을 서술하는 바이다.
율승(律乘)의 도(道)로 말하면, 잘못을 억제하고 선(善)을 추구하게 하여 마치 요순(堯舜)의 정사에, 구요(咎繇)가 형벌할 때에 형벌을 없애려고 한 것과 같을 뿐이며, 그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에 있어서는 일찍이 배우지 않았으므로 감히 억지로 말할 수 없다. 태정 3년 병인 9월 어느 날, 동암 후인(東庵後人) 이모(李某)는 기한다.
[註解]
[주D-01]양씨(梁氏) :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가리키는데, 그는 불도를 신봉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다.
[주D-02]구요(咎繇)가 …… 한 것 : 구요는 순(舜)의 신하 고요(皐陶). 형벌을 맡아 공평하게 다스렸으므로 순(舜)은 그의 공을 칭찬하
여 “형벌할 적에 형벌을 없애려고 하여 백성들이 모두 중도(中道)에 맞는다.” 하였다.《書經 大禹謨》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건동선사(乾洞禪寺) 중수기
경원(慶原)은 양광도(楊廣道)에서 가장 궁벽한 고을이다. 그러나 시중(侍中) 장화공(章和公) 이하 유명한 재상, 큰 선비와 귀척(貴戚)의 공경이 많이 났으니, 대개 그 지형이 산과 내가 연결되고, 창해(滄海)를 끌어 당기고 있어 모여드는 기세가 특이하고 발산하는 기운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고을에서 서북으로 5리쯤 거리에 산이 우뚝이 솟고 국(局)이 열렸으며, 그 안에 옛날 절터가 있는데, 그 고장 사람들이 ‘건동(乾洞)’이라고 서로 전해오니, 실로 온 고을에서 제일 기이하고 빼어난 곳이다. 시위호군(侍衛護軍) 하씨(河氏)는 이름이 원서(元瑞)이며 이 고을의 사족(士族)인데, 젊은 나이에 궁중[宮掖]에서 급사(給事)로 있으면서 조심[謹愿]스럽다는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에 이르러 무너진 담장과 부서진 주춧돌이 떨기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개연(慨然)하여 황폐한 터를 다시 일으키기로 스스로 맹세하니, 때는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갑진년(충렬왕 30, 1304)이었다.
지금까지 20여 년이 쌓이는 동안 주머니에 저축한 것을 털고 의식(衣食)값을 절약하여 비용을 충당한 다음, 숲에서 재목을 베어내고 산에서 돌을 다듬어오며, 자갈을 담아오고 흙을 실어 나르기를 역부(役夫)들보다 앞서서 하였고,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비록 다 만들어졌더라도 반드시 고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하여 조금도 태만한 기색이 없었다.
기둥을 단청하고 동자 기둥을 조각하여 웅장하고도 화려한 것은 불상을 안치한 곳이요, 동방(洞房)과 온돌이 그윽하면서도 탁 트인 것은 중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당(堂)을 높게 무(廡)를 넓게 하여 창 앞에서는 쭈뼛한 산이 잡힐 듯하고, 정호(庭戶)에서는 큰 파도를 굽어보게 되었으며, 층층 담이 둘러 싸여 있고, 푸른 소나무가 삥 둘러 있었다.
오르내리며 둘러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합당하게 된데다가 종(鐘)ㆍ어(魚)ㆍ발(鉢)ㆍ나(螺) 등 염불하는 물건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기(錡)ㆍ부(釜)ㆍ정(鼎)ㆍ당(鐺) 등 음식을 만드는 기구가 완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상(牀)ㆍ궤(几)ㆍ인(茵)ㆍ점(簟) 등 좌와(坐臥)에 필요한 시설이 주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또 장획(臧獲 노비)을 희사하여 부리기에 족하도록 하였으니, 이런 것들을 들어 말하건대,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바윗돌을 깎아내 원천수를 먹으므로 물 긷는 노고가 덜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양전(良田)의 수확을 거두어 공양하는 비용이 넉넉하니, 이는 신명이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은연중 와서 돕는 듯하다.
금년 10월에 서역(西域)의 지공선사(指空禪師)가 화산(華山)으로 가는 길에 지나다가 일일이 둘러보고는 크게 감탄하며 드물게 있는 일이라 칭찬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무리 천 수백 명과 함께 와서 그대로 머물렀었다.
어떤 손님이 익재(益齋)에게 묻기를,
“옛적에 양(梁) 나라 소씨(蕭氏)는 만승(萬乘)의 국세(國勢)를 가지고 사해(四海)의 힘을 다하여, 탑(塔)을 만들고 묘(廟)를 세우기를 이루 셀 수 없이 하였으니, 그의 공덕을 헤아린다면 어찌 절 하나를 세운 하씨의 백배만 될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달마(達磨)는 이것을 기롱했는데, 이번에 지공은 하씨를 찬탄하였으니 이는 그 까닭이 무엇인가?”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일이란 사세는 같으면서도 사리는 다른 것이 있으니, 흉중(胸中)에 권도(權度)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능히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옛 성인이 천하를 갖는 것도 자기에게 상관이 없이 여긴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니, 진실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공덕으로 여긴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공덕이 된다.
내가 보건대, 하씨는 힘을 쓰되 자신의 힘을 다하고 남에게 빌리지 않았으며, 마음가짐이 남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았으니, 조약돌과 한 줌의 흙은 공로가 수미산(須彌山)보다 높고, 한 줄기 향과 한 치의 초는 혜택이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으니, 이는 사세는 같지만 사리는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공과 달마가 다른 점에 대하여는 자네가 특별한 식견을 갖추기를 기다렸다가 곧 말하여 주겠노라.”하였다. 유원(有元) 태정 4년 12월에 기한다.
[註解]
[주D-01]종(鐘)ㆍ어(魚)ㆍ발(鉢)ㆍ나(螺) : 종은 범종(梵鐘), 어는 목어(木魚 : 길이 1미터 가량의 나무로 잉어처럼 만든, 불경 읽을 때
두드리는 것), 발은 발우(鉢盂 : 승려들의 밥그릇), 나는 바라(嘙囉).
[주D-02]기(錡)ㆍ부(釜)ㆍ정(鼎)ㆍ당(鐺) : 기는 세 발 달린 솥, 부는 발이 없는 큰 솥, 정은 세 발과 두 귀가 달린 큰 솥, 당은 두 귀와 세
발이 있는 남비 비슷한 것.
[주D-03]상(牀)ㆍ궤(几)ㆍ인(茵)ㆍ점(簟) : 상은 침상(寢牀), 궤는 안석(案席), 인은 왕골이나 부들로 짠 자리, 점은 대나무를 엷게 쪼개
어 엮은 자리.
[주D-04]양(梁) 나라 소씨(蕭氏) : 주 20) 참조.
[주D-05]수미산(須彌山) : 불가의 말로 사주(四洲)의 중앙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산. 둘레에 칠산(七山)ㆍ팔해(八海)
가 있고 또 그 밖에 철위산(鐵圍山)이 둘러 있어 물 속에 잠긴 것이 8만 유순(由旬), 물 위에 드러난 것이 8만 유순인데, 꼭대기
에는 제석천(帝釋天),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있다 한다.
[주D-06]항하(恒河) : 인도(印度)의 갠지스강.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 1979
백화선원 정당루(白華禪院政堂樓) 기(記)
묵암 탄사(黙菴坦師)가 용궁군(龍宮郡) 천덕산(天德山)에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두 개의 누각(樓閣)이 있었다. 서쪽은 ‘관공루(觀空樓)’라 하는데, 승려 중에 운수(雲叟)라는 노인이 기(記)를 지었고, 동쪽은 ‘정당루(政堂樓)’라 하는데, 정당 한 재상(韓宰相)이 일찍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이 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정당이 돌아올 적에 탄사는 나에게 글을 받아 누각이 영광되게 해줄 것을 부탁했고, 얼마 후 탄사가 또 왔기에 나는 서로 만나보고 묻기를,
“보리달마(菩提達磨)는 탑을 만들고 절을 세우는 것을 인위로 복을 만드는 일로 여기고, 혼자서 깨닫고 늘 아는 것을 참다운 공덕(功德)으로 여겨 비록 존귀한 천자(天子)에게 용납되지 않더라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탄사는 달마를 배우면서 도리어 토목(土木)에 노심하여 집을 웅장하게 짓고는 달관(達官)의 명칭을 빌어 호화롭게만 하니, 할 말이 있는가?”
하니, 탄사는 말하기를,
“지금 여기 누가 있다고 하자 천 리를 가야 할 참인데, 태만한데도 통솔하는 사람이 없어 중도에서 주저앉고, 우매한데도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지름길로 가다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지금 세상의 우리 무리들을 보건대, 도 배운다는 것이 옛사람의 남은 찌꺼기만 얻게 되면 버젓이 스스로 방자해져 명성이나 공리(功利)에 빠지고 마니, 중도에 주저앉는 태만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혹은 산 속에서 추위와 주림을 견디며 각심하여 닦고 깨닫되, 소견이 좁고 미혹하여 바로잡아 가지 못하니, 지름길로 가는 우매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분발하여 결사(結社)하니, 다소나마 우리 무리들을 규합하여 명예나 공리의 함정에서 벗어나고, 산 속의 추위와 주림을 면하도록 하여 태만한 사람을 통솔하고, 우매한 사람을 인도하게 된다면 우리 스승의 이른바 ‘혼자서 깨닫고 늘 안다’는 이치를 반드시 묵계(黙契)하여 환히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장차 우리 스승의 도를 넓히려는 것이지 짐짓 인위로 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휘로(暉老)와 배 상국(裵相國), 만공(滿公)과 백 소부(白少傅)가 주고받으며 문답한 일은 총림(叢林 불가를 가리킨다)에서 성대한 일로 전해오는데, 어찌 일찍이 달관(達官)이라고 피혐(避嫌)했었는가?
우리 누각 이름을 한공(韓公)에게서 딴 것이 고금의 세대 차이는 있지만, 그 취지는 한 가지이다.”
하였다. 나는 듣고난 다음 사례하고, 그의 말을 써서 기(記)를 만들었다. 산천의 경치나 지형의 좋음, 또는 건축의 시작과 낙성한 연월에 대해서는 운수(雲叟)가 말했기에 여기서는 다시 말하지 않는다.
[註解]
[주D-01]휘로(暉老)와 …… 백 소부(白少傅) : 휘로는 당(唐) 나라 때의 중이며 배 상국(裵相國)은 당 헌종(唐憲宗)의 정승이었던 배도
(裵度), 만공(滿公)은 중 여만(如滿)을 가리키며, 백 소부는 백거이(白居易)로 여만과 함께 향산사(香山社)를 결성하고 향산
거사(香山居士)라 호했었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운금루기(雲錦樓記)
올라가 볼 만한 산천의 경지는 반드시 모두 궁벽하고 거리가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자(王者)의 도성이나 대중이 모인 도회지에도 본래 좋은 산천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명성을 노리는 사람은 조정에, 이익을 노리는 사람은 시장에 묻혀, 비록 형(衡)ㆍ여(廬)ㆍ호(湖)ㆍ상(湘)이 굽어보고 쳐다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널려 있어 장차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슴만 쫓느라 산을 보지 못하고, 돈만 움키느라 사람을 보지 못하고 아주 작은 것은 살피면서도 수레의 짐은 보지 못하니, 이는 마음에 쏠리는 일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좋아하는 세력 있는 사람들은 관(關)을 넘고 진(津)을 건너 터를 잡고는 산수놀이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고매한 체하지만, 강락(康樂)이 길을 내자 주민들이 놀랐고, 허사(許汜)가 집터를 묻자 호사(豪士)들이 꺼렸으니, 그러지 않는 것이 도리어 고매하다.
서울 남쪽에 너비가 1백 묘(畝)쯤 되는 못이 있는데, 살림하는 여염집들이 빙 둘러 있어 즐비하고, 이거나 지고 타거나 걸어 그 옆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앞뒤에 연락부절한다. 어찌 뛰어나게 그윽하고 훤칠하게 넓은 지역이 이 안에 있을 줄 알랴?
후(後)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정축년(충숙왕 6, 1337) 여름 연꽃이 만발했을 때에 현복군(玄福君) 권겸(權廉)가 보고는 사랑하여 바로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누각을 세웠다. 높이는 두 길이나 되고, 연장(延長)은 세 발[丈]이나 되는데, 주추가 없이 기둥을 마련하였음은 썩지 않도록 한 것이요, 기와를 덮지 않고 띠로 이었음은 새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서까래는 다듬지 않았지만 굵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며, 벽토는 단청(丹靑)하지 않았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대략 이러한데, 온 못의 연꽃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이에 그의 아버지 길창공(吉昌公)과 형제ㆍ인아(姻婭)들을 초청하여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화평하고 유쾌하게 놀아 하루 해가 지는데도 돌아갈 줄 몰랐는데, 대자(大字)를 잘 쓰는 아들이 있으므로 ‘운금(雲錦)’ 두 자를 쓰도록 하여 누각 이름으로 걸었었다.
나는 한 번 가보니 향기로운 붉은 꽃과 푸른 잎의 그림자가 가없이 펼쳐져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며, 연기 낀 파도에 일렁이어 소문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푸르른 용산(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처마 앞에 몰렸는데 밝은 아침 어두운 저녁이면 매양 형상이 달라지며, 건너편 여염집들의 집자리 모양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으며, 지거나 이고 타거나 걸어 왕래하는 사람들 중의 달려가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손짓해 부르는 사람과 친구를 만나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 존장을 만나자 달려가 절하는 사람들이 또한 모두 모습을 감출 수 없어 바라보노라면 즐겁기 그지없다.
저쪽에서는 한갓 못이 있는 것만 보이고 누각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 또한 어찌 누각에 있는 사람을 알겠는가? 진실로 올라가 구경할 만한 경치가 반드시 궁벽하고 거리가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조정이나 시장에만 마음이 쏠리고 눈이 팔려 우연히 만나면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며, 또한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 경솔히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侯)는 허리에 만호후(萬戶侯)의 병부(兵符)를 띠고 외척(外戚)의 권세를 누리면서, 나이는 아직 옛날 강사(强仕)하던 나이(40세를 뜻함)가 채 못 되니, 부귀와 이록(利祿)에 빠져도 취하기 십상인데도 능히 인자(仁者)와 지자(智者)들이 좋아하던 바를 좋아하며, 주민들에게 놀라움을 주지도 않고 호사(豪士)들에게 꺼림을 받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뛰어나게 그윽하고 훤칠하게 넓은 지역을 시장이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찾아내어 소유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손님에게까지 미치며,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까지 미치니, 이야말로 가상하다. 익재 거사(益齋居士) 아무는 기한다.
[註解]
[주D-01]형(衡)ㆍ여(廬)ㆍ호(湖)ㆍ상(湘) : 형은 형산(衡山), 여는 여산(廬山), 호는 동정호(洞庭湖), 상은 소상강(蕭湘江). 곧 중국의
제일 가는 명승지를 말한다.
[주D-02]강락(康樂)이 …… 놀랐고 : 강락은 남조 시대(南朝時代) 송(宋) 나라의 서화가(書畫家)이자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
(封號). 그는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수백 명을 동원하여 시령(始寧)의 남산(南山)에서부터 임해(臨海)까지 나무를 베어
내고 곧바로 길을 내니, 임해 태수 왕수(王琇)가 크게 놀라 산적(山賊)이라 하였다.《宋書 謝靈運傳》
[주D-03]허사(許汜)가 …… 꺼렸으니 : 허사는 삼국 때 위(魏) 나라 사람. 한번은 유 비(劉備)와 함께 유표(劉表)의 집에 있으면서 당시
의 호사(豪士) 진등(陳登)을 평했는데, 허사는 “내가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진등을 찾았는데, 진등은 손님 대접을
하지않고 자기는 높은 상에, 손님은 낮은 상에 눕게 했다.” 하면서 평하자, 유비는 “그대는 고사(高士)라는 명망이 있으면서 나
라에 충성할 마음은 갖지 않고 농토나 구하고 집터나 물었기 때문에 진등이 이처럼 박대했던 것이다.” 하였다.《三國志 魏志 陳
登傳》
[주D-04]인자(仁者)와 …… 좋아하며 : 산수(山水)를 좋아함을 말한다.《論語》 雍也에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智)한 자는 물
을 좋아한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묘련사(妙蓮寺) 석지조(石池竈) 기
삼장(三藏) 순암 법사(順菴法師)가 천자의 분부를 받들어 풍악(楓岳)의 불사(佛祠)에서 복을 빌고는 인하여 한송정(寒松亭)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곳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지는 몰랐다.
법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렸을 적에 일찍이 묘련사에서 두 바윗덩이가 풀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양을 상상컨대 어쩌면 이것이 아닌가 하고, 돌아오자 물색하여 찾아보니 과연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사방을 말[斗]처럼 모나게 다듬고 가운데를 확처럼 둥글게 팠으니 이는 샘물을 담으려고 한 것이며, 밑에다 주둥이처럼 구멍을 냈으니 이는 열고 찌꺼기를 씻어낸 다음 다시 막아 맑은 물을 담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 데는 물을 담는 것이고, 타원형인 데는 그릇을 씻는 것이며, 또한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 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는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백설(白雪)처럼 시원한 샘물을 끌어다가 황금빛의 움차를 끓이면서 익재(益齋)에게 하는 말이, “옛적에 최 정안공(崔靖安公)이 일찍이 쌍명(雙明)을 위하여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절 북쪽 등성이로 절과의 거리가 몇백 보(步)쯤 되니, 이는 그 당시의 물건이 아니겠는가?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머무를 때, 삼암(三菴) 같은 분이 날마다 왕래했으니, 한 번 품평[題品]받았으면 반드시 값이 몇 갑절이나 나갈 것인데, 마침내 우거진 잡초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쌍명이 있던 시대가 지금 거의 2백 년이나 되는데, 비로소 나를 위해 한 번 나타나 앞에 두고 보람 있게 쓰이니, 바라건대 기를 지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고, 나의 구득을 축하해 주오.”하였다.
나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쌍명의 기로회에는 이 학사(李學士)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자(字))가 있어서 모든 미미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진실로 담소(談笑)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문(詩文)에 실었었는데, 지금 그 문집을 상고해 보건대, 이에 언급한 것이 하나도 없음은 무슨 일이며, 그 뒤에도 또한 최 태위(崔太尉) 형제처럼 일을 좋아한 사람이 여기 와서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 돌이 지조(池竈)가 된 것은 쌍명 이전이어서 한송정과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매몰되어 불우한 지 오래니 어찌 삼암뿐이리요, 미수 역시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3백 년 전에 매몰되었다가 하루아침에 발견되어 비록 미수나 삼암은 만나지 못했지만, 법사를 만나 마치 그 사이에 소위 운수라는 것이 존재한 듯하니 물건과 사람은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이름나게 되는 것인가보다.
가정(柯亭)의 젓대[笛]와 풍성(豐城)의 칼이 채옹(蔡邕)과 뇌 환(雷煥)을 만나서야 이름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의 감식(鑑識)이 천 년토록 탄복받음도 또한 두 가지 물건 때문인 것이다. 법사는 공경(公卿) 가문의 귀족으로 비록 머리를 깎은 중이긴 하지만 본래 부귀한 분이다.
이제 천자의 사신이 되어 한 나라의 임금이 사우(師友)처럼 경애(敬愛)하는데도, 도리어 소인(騷人 문인)ㆍ묵객(墨客 서화가)과 풍월(風月)을 찾아 노니니, 그의 흉금을 알 만하다. 장차 뒷날의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만 듣고도 그의 마음에 두 덩이 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어쩌면 또한 채옹과 뇌환의 젓대와 칼일 것이다.
지원(至元) 3년 추석(秋夕)에 익재 이 아무는 기한다.
[註解]
[주D-01]최 정안공(崔靖安公)이 …… 만들었는데 : 정안공은 고려의 문신 최당(崔讜)의 시호. 그는 치사(致仕)한 후 장자목(張自牧)ㆍ
백광신(白光臣)ㆍ현덕수(玄德守)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고 시주(詩酒)로 소일하여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렀다.
쌍명(雙明)은 그 당시 학자이자 문인(文人)이었던 이인로(李仁老)의 호이며 자(字)는 미수(眉叟).
[주D-02]가정(柯亭)의 …… 칼 : 가정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남쪽에 있는 정자 이름이며, 풍성(豐城)은 강서성(江西
省) 남창현(南昌縣) 남쪽에 있는 지명. 후한(後漢) 때의 문인 채옹(蔡邕)은 회계(會稽)로 피난을 가다가 가정에서 잤는데, 서까
래로 얹은 대나무가 독특한 소리가 날 것을 알고는 이것으로 젓대를 만드니 유명한 보물이 되었으며, 진(晉) 나라 때 뇌환(雷煥)
은 풍성 원으로 있으면서 하늘의 두우성(斗牛星) 사이에 이상한 광채가 뻗치는 것을 보고 옥사(獄舍) 옛터를 파내어 용천(龍泉)
ㆍ태아(太阿)라고 쓴 보검(寶劍)을 캐냈다.《會稽記》 《晉書 張翰傳》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 1979
익재난고 제6권
비(碑)
묘련사(妙蓮寺) 중흥비(重興碑)
서울의 진산(鎭山 주산(主山))을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송(宋) 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송악(松岳)을 숭산이라고 했다. 그 동쪽 등성이가 남으로 뻗어가다 갈라져 서쪽으로 꺾어지며 조금 낮아졌다 큼직하게 솟아나고, 또 갈라져 남으로 뻗어가다 세 개의 재[峴]가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용(龍)이 서려 있는 듯하고, 가까이서 보면 마치 봉(鳳)이 우뚝 서 있는 듯한데, 용의 배에다 터를 잡고 봉의 가슴에다 세운 부처의 궁전이 있으니, 이것이 묘련사이다.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함께 부처를 존신(尊信)하였는데, 불교에 들어가는 길은 《법화경(法華經)》이 가장 심오하며, 불경의 뜻을 창달한 것은《천태소(天台疏)》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여, 좋은 땅을 가려 정사(精舍)를 세우고, 《법화경》을 번역하여 도(道)를 찾고, 《천태소》를 강론하여 경의(經義)를 연구했으니, 장차 천자(天子)에게 복을 빌고 종묘에 복이 내리게 하려 한 것이었다.
불당을 지원(至元) 20년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낙성하였는데, 개산(開山)한 사람은 사자암(師子庵)의 노숙(老宿) 홍서(洪恕)가 바로 그 사람이다. 원혜국사(圓慧國師)가 결사(結社)를 주관할 때에 홍서가 또한 차석(次席)이었으며, 삼대(三代)를 전하여 무외국사(無畏國師) 때에 와서는 배우는 사람이 더욱 몰렸다.
충렬왕 때부터 일찍이 원혜국사에게 중석(重席)하였고, 무외국사에게 경의(敬意)를 다했으며, 충선왕께서는 더욱 예절을 존중히 하여 원문(院門 사원)의 선교(禪敎)가 영광스러운 보호 받음을, 다른 절들이 감히 바라질 못했다.
무외국사 이전의 희(禧)ㆍ인(因)과 무외국사 이후의 분(芬)ㆍ연(璉)ㆍ홍(泓)ㆍ염(焰)ㆍ여(如)와 지금의 당두(堂頭 주지) 길(吉)은, 모두 석림(釋林 불교계)의 특출한 사람들인데, 서로 이어받아 유지하여 종(鍾)ㆍ어(魚)ㆍ향(香)ㆍ화(火)가 처음과 다름없이 하였으나, 기둥과 지붕이 기울고 기와와 벽돌이 썩고 이지러진 것은 대개 6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어쩔 수 없는 사세였다.
순암 선공(順菴旋公)은 원혜의 적자요 무외의 조카로 천자가 삼장(三藏)이란 호를 내려 연도(燕都 북경)의 대연성사(大延聖寺)에 있도록 하였었는데, 후(後) 지원(至元) 병자년에 강향(降香)하러 동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충숙왕에게 아뢰기를, “묘련사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기원(祇園)으로 전에 그 분들의 초상이 있던 곳이니 전하(殿下)께서 새로 수리하신다면, 선대를 받드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하였다.
왕은 듣고 감동하여 드디어 수백만의 금은과 보기(寶器)를 희사하여 상주하는 중들에게 보내니, 불도들은 서로 권면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혹은 계책을 짜고 혹은 힘을 분발하여 침실ㆍ대청ㆍ주방ㆍ행랑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것은 수선하고 기운 것은 바로잡으며, 썩은 것은 바꾸고 파손된 것은 보완하며, 불상 놓는 자리를 호화롭게 하고 재(齋) 차릴 주방의 비용을 넉넉히 하며, 소나무를 더 심고 담장을 높이 둘러 쌓았다.
선공(旋公)이 대자(大字)를 잘 쓰므로 불전(佛殿)의 액자(額字)를 금분으로 써서 처마 사이에 걸자, 광채가 해와 별과 겨루게 되니, 또한 서로 경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할 일을 다했다 하며, 마땅히 돌에 새겨 후세에 남겨야 한다 하여 합동으로 조정에 청하니, 왕은 신(臣) 아무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창건(創建)의 어려움이 지킴의 어려움만 못하고, 지킴의 어려움이 또한 복구의 어려움만 못하다. 이 절은 충선왕이 충렬왕에 대한 축원을 넓히기 위하여 건립하였는데 충숙왕이 보수했으며, 무외가 원혜의 자취를 승습(承襲)했는데 선공이 복구했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오직 마음에 있으므로 그와 같이 했다.[誰其有之 是以似之]’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국가와 자손들이 능히 조고(祖考)의 유업을 잊지 않아 퇴락하면 보수하고 전복되면 일으키기를 또한 이 절을 수리하듯 하여 비록 백대가 되더라도 추락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니, 생각하건대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렸을 때 선친 동암(東菴)을 따라 무외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또한 선공(旋公)은 나와 종유(從遊)하였으며, 더구나 우리 임금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어찌 감히 비루하고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아래와 같이 명(銘)한다.
오천축(五天竺 인도(印度)) 나라에 성인이 나시어 중생을 건지려고 병에 맞춰 약 쓰셨네. 오묘한 불법(佛法) 펼 수 없어 권도(權道)로 인간 세상에 나오셨으니, 영취산(靈鷲山) 모임의 뜻, 책 속에 엄연(儼然)하도다. 울창한 저 언덕의 고요한 정사(精舍)에 두 차례나 덕인(德人)을 청하여 자비의 도 폈도다.
도는 통합과 막힘 없지만, 기물은 이뤄지고 이지러지기도 하나니 어질고 또 지혜롭지 못하면 뉘 능히 완성하랴? 진실한 순암이여 한 말로 임금을 감동시키니 거룩한 선왕(先王)이 비부(秘府)의 돈 내리셨네. 설계하고 집을 지어 환하게 아름다우니 시내와 산, 구름과 달, 오래 되었지만 새롭도다. 제호(醍醐)를 배불리 먹으며, 담복(薝蔔 치자나무꽃)으로 분향하여 우리 황원(皇元)에 복 내리고, 종국(宗國)에도 미치게 하도다.
[註解]
[주D-01]개산(開山) : 절을 처음 세우는 것을 말한다.
[주D-02]중석(重席) : 좌석에 요와 방석을 이중으로 까는 것으로 존경하는 것을 뜻한다.
[주D-03]기원(祇園)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약칭.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왕사성(王舍城)에서 설법(說法)할 때에 급고독(給
孤獨)이라는 사람이 기타태자(祇陀太子) 의 원림(園林)을 산 다음, 정사(精舍)를 짓고 여래를 초청하여 설법한 곳.
[주D-04]영취산(靈鷲山) …… 엄연(儼然)하도다 : 영취산은 중인도(中印度)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있는 명산(名山). 산 생김새가 매와
같으며 또 매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영산(靈山) 또는 취봉(鷲峯)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석가여래가 일찍이 이 산에서 《법화경(法華經)》등을 강했는데, 즉 오묘한 불법을 인간에게 알릴 길이 없어, 권도로 석가여래가
인간세상에 나와 영취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한 내용이 《법화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이제현 1288-1367년] 제5권-제6권 서(序) 5편 외
서(序) 5편
1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는 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를 전송하는 서(序)
2 원(元) 나라에 가는 신 원외(辛員外)를 전송하는 서
3 정혜사(定慧寺)로 떠나는 대선사(大禪師) 호공(瑚公)을 전송하는 시의 서 호공은 중이다.
4 금분(金粉)으로 쓴 밀교대장(密敎大藏)의 서
5 회암 심선사(檜巖心禪師)의 도호(道號)인 당명(堂名) 뒤에 쓰다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는 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를 전송하는 서(序)
동남지방의 주(州)ㆍ군(郡) 중에 경주(慶州)가 가장 크고 상주가 그 다음인데, 그 도(道)를 경상도라고 일컬음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使命)을 띤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친 뒤 경주에 이르기 때문에 교화(敎化)가 상주를 통하여 남으로 전파되었고, 일찍이 경주를 통하여 북으로 전파된 적은 없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3년(1343, 고려 충혜왕4) 봄에 근재 안후(安侯)가 감찰대부 우문관 제학(監察大夫右文館提學)으로 있다가 상주목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진 진신(搢紳)들과 훌륭한 종유(從游)들이 모두 서로 경하(慶賀)하여 말하기를,
“안후는 속은 강하면서 겉은 온화하고, 말은 간략하면서 행동은 민첩하다.
강하고 간략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범하지 못할 것이고, 온화하고 민첩하니 사람들이 심복하여 잘 따를 것이다. 저, 사명을 띤 안후를 예전부터 명성을 흠모(欽慕)했는데 이제 그의 덕행을 보게 되었으니, 비록 범 같은 영성(甯成)과 매 같은 질도(郅都)가 있더라도 거의 그 혹독(酷毒)함을 늦출 것이요,
상양(桑羊)처럼 관각(筦榷)을 하던 자도 또한 그 가혹함을 중지할 것이니, 자못 상주 백성들이 부담을 덜게 되지 않겠는가? 예전부터 교화가 상주로부터 남으로 전파되었으니, 상주 한 고을만 그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온 경상도의 복일 것이다.”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제군(諸君)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른다. 대범 부귀와 영달은 세상 사람이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임금에게 깊이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중한 촉망을 받으면서도, 능히 겸손하여 휘말리는 세파 속에서도 멈출 곳을 아는 사람으로 말하면 예와 지금에 찾아보더라도 대개 천 명이나 백 명 중에 열 명이나 한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에 있는 백발의 늙은 부모를 연약한 아우와 어린 자매에게 공양하도록 맡기고는, 천 리 먼 길을 분주히 다니며 요행히 귀한 벼슬을 하여 하루아침의 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을 세상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안후는 중국에서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동국(東國 우리나라를 가리킨다)에선 문장을 독점하여 화려한 요직을 지내고 과장(科場)으로 시관(試官)을 맡아보았고, 지난해에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려고 했었는데 절반 길도 채 못 가서 역마(驛馬)를 달려 소환하여 풍헌(風憲)의 직책을 맡겼다.
임금의 알아줌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촉망이 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지방관이 되기를 힘써 구한 것은 어머니 섬기기에 편케 하려 함이었으며, 형제들에게도 중외(中外)에서 벼슬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름다운 염퇴(廉退)와 독실한 효우(孝友)는 족히 당시를 고무시키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니, 어찌 한 고을만 복되게 하고 한 도만 교화시킬 뿐이겠는가?
임금의 알아줌이 장차 더욱 깊어지고 사람들의 촉망이 장차 더욱 중해져, 영각(鈴閣)에서 황각(黃閣)으로 올라가 김정숙(金貞肅)의 뒤를 잇는 것을 발돋움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하니, 제군들이 ‘그렇다’ 하기에 이것을 그대로 적는다.
[註解]
[주C-01]근재(謹齋) 안 대부(安大夫) : 안축(安軸)을 가리킨다. 근재는 안축의 호.
[주D-01]범 같은 영성(甯成) : 영성은 전한(前漢) 시대의 혹리(酷吏). 아랫사람을 혹독하게 휘어잡았으므로, 제리(諸吏)들은 “차라리 돼
지 새끼를 끌고 가다가 맹호(猛虎)를 만날지언정 영성의 노함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 했다.《蒙求 上》
[주D-02]매 같은 질도(郅都) : 질도는 전한 시대의 까다롭고 혹독했던 법관. 중위(中尉)가 되어 너무 까다롭게 법을 다루어 귀척(貴戚)도
꺼리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창응(蒼鷹: 흰 매인데 곧 공격을 잘한다는 뜻)이라고 했다.《漢書 酷吏傳 郅都傳》
[주D-03]상양(桑羊)처럼 관각(筦榷) : 상양은 상홍양(桑弘羊)의 약칭, 관각은 전매(專賣)하는 것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상홍
양이 대농승(大農丞)으로 있으면서 천하의 염철(鹽鐵)을 전매하여 재물을 많이 모아 국가에는 이익이었으나 백성들에겐 원성이
많았다.《漢書 食貨志》
[주D-04]풍헌(風憲) : 관리의 기강(紀綱)을 맡은 관원, 곧 관리들의 비위(非違)를 규찰(糾察)하는 관리.
[주D-05]영각(鈴閣)에서 …… 잇는 것 : 영각은 장수나 지방관들이 정무를 보는 아문(衙門)을 말하며, 황각(黃閣)은 의정부(議政府)의
별칭. 정숙(貞肅)은 고려의 문신 김인경(金仁鏡)의 시호인데, 그는 일찍이 상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승진되어 재상인 중
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므로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원(元) 나라에 가는 신 원외(辛員外)를 전송하는 서
선비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마치 배 타기와 같아서 재주로 노[楫]를 삼고 천명(天命)으로 순풍(順風)을 삼은 연후에야 가기가 편리한 법이다. 재주와 천명을 받았더라도 의지가 혹 비열하면 마치 노가 완전하고 바람이 순하여도 배를 조정하는 사람이 합당하지 못한 것과 같으니, 어찌 만곡(萬斛)의 무게를 싣고 만 리의 먼 곳에 이르러, 통하지 못하는 곳을 건널 수 있겠는가?
원의 신후(辛侯)는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되 민첩하고 묻기를 좋아하여 문장을 다루는 곳에서 이름을 날렸고, 문서를 취급하는 부서에서 솜씨를 보였으니 재주가 있다 하겠고, 벼슬을 한 지 몇 해 안 되어 제학(提學)ㆍ대언(代言)을 거쳐 밀직 첨의(密直僉議)로 전임하였다가, 이어 동성(東省)의 성랑(星郞)으로 나갔으니 천명을 받았다 하겠으며, 벗들을 데려다가 함께 조정에 벼슬하고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 자문하여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엄정한 안색으로 임금을 바로잡고, 성의를 다하여 빈려(賓旅)를 접대하니 의지가 있다 하겠다.
이번에 조관(朝官)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행장을 꾸려 장도(壯途)를 떠나게 되었으니, 그의 기발한 재주, 장원한 천명, 웅대한 의지가 장차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권찬선(權贊善) 이하 28명이 정우곡(鄭愚谷)의 사연시(謝宴詩)를 분운(分韻)해서 연장(聯章)하여 장도를 찬미하고는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잔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 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대범 강하(江河)와 명발(溟渤)이 대소는 다르나 그 속에서 배를 타기는 마찬가지다. 돛대에 돛을 다는 것은 전진하려는 것이요, 닻줄과 닻을 다는 것은 정박하려는 것이요, 또한 반드시 의여(衣袽)를 지님은 물이 새는 것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왕국(王國)은 강하와 같고 천자의 나라는 명발과 같은데, 신후의 배가 강하에서 명발로 가게 되었으니 진실로 능히 의(義)로 돛대를 삼고, 신(信)으로 돛을 삼고, 예(禮)로 닻줄을 삼고, 지(智)로 닻을 삼고, 경신(敬愼)과 염근(廉勤)으로 의여를 삼는다면, 어느 무거운 짐인들 감당하지 못하겠으며, 어느 먼 곳엔들 가지 못하겠으며, 통하지 못하는 어느 곳엔들 건너가지 못하겠는가?
옛적에 전숙(田叔)과 한안국(韓安國)은 양(梁)ㆍ조(趙)의 신하로서 한(漢) 나라 조정에 들어가, 당시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명예를 남겼으니, 내가 이번에 신후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노라.”
[註解]
[주D-01]동성(東省)의 성랑(星郞) : 동성은 원 나라가 일본을 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한 관청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약칭. 성
랑은 정동행중서성 낭관(郎官)의 별칭.
[주D-02]분운(分韻)해서 연장(聯章)하여 : 분운은 운(韻)자를 정한 다음, 각자가 운자를 나누어 한시(漢詩)를 짓는 것. 연장은 한 작품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짓는 것.
[주D-03]의여(衣袽) : 배 안에 물이 샐 것에 대비하여 마련해 두는 헌 옷가지를 말한다.
[주D-04]전숙(田叔)과 한안국(韓安國) : 전숙은 조(趙) 나라 사람으로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무협을 좋아하였는데, 뒤에 천자국인 한
(漢) 나라에 들어와 명성을 떨쳤다. 한안국은 양(梁) 나라 사람으로 효왕(孝王)을 섬기다가 오(吳)ㆍ초(楚)의 모반(謀叛) 때 오
나라 군사를 저지하여 공을 세운 다음 장안(長安)에 들어와 무제(武帝)의 신임을 받았었다.《漢書 田叔傳ㆍ韓安國傳》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정혜사(定慧寺)로 떠나는 대선사(大禪師) 호공(瑚公)을 전송하는 시의 서 호공은 중이다.
옛날 선(禪)을 배우는 인사(人士)들이 세 차례나 투자산(投子山)에 오르고 아홉 차례나 동산(洞山)을 찾아, 천 리 길을 왕복하느라 스스로 쉬지 못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신이 터득한 바를 선각(先覺)에게 질정(質正)하여, 제멋대로 하여 비뚤어진 것을 제거한 다음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에, 이처럼 수고로왔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옛사람과 짝이 되어도 족히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우리 호공 대선사가 아니겠는가? 공은 이미 승선(僧選)에 올라 명망이 총림(叢林 불교계(佛敎界))에 드날렸고, 곧 풍악(楓岳 금강산)으로 가 자신에 대한 공부를 정수(精修)하였다.
이때 서역(西域)의 지공사(指空師)가 우뚝이 스스로를 보리달마(菩提達磨)에 비하니, 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제자(弟子)의 예절을 차리자 공도 또한 찾아갔었는데, 지공은 말하기를, “내가 불[炷] 하나를 피울 터이니 자네가 그 속으로 빠져나갔다가, 내가 한 번 소리를 지르거든 자네가 도로 그 속으로 오라.”하므로, 선사는 대답하기를, “청컨대, 화상(和尙)께서 먼저 나아가십시오. 제가 삿갓을 들고 따라가겠습니다.”하니, 그의 제자들이 불손하다고 지목하여 예 아닌 짓을 가하려고 하자, 공은 소매를 떨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마침내 북으로 경사(京師 원 나라 서울)를 관광하고, 남으로 강소(江蘇)ㆍ절강(浙江)ㆍ광동(廣東)ㆍ광서(廣西)ㆍ사천(四川)ㆍ감숙(甘肅)ㆍ운남(雲南)ㆍ대주(代州) 등지를 유람하느라, 몇 해의 더위와 추위를 넘기며 가보지 않은 데가 없으니, 본 바가 확연(廓然)했으므로 세운 바가 우뚝하였고, 경험한 바가 작연(灼然)했으므로 지키는 바가 확실해졌다.
이에 유연(悠然)히 돌아와 담담하게 지내자, 전일에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의아하고 조롱하던 자들을 과연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부끄러워하고 복종하는 자들을 과연 옳다 할 수 있겠는가? 옳다 그르다 함이 모두 남에게 달렸으니 나 자신은 알 바 아니다.”하였다.
임금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는 더욱 중하게 여겨, 정혜사를 주관하도록 하니, 제학사(提學士)가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이 몸은 만 리 길 행하여 천하를 반이나 돌았는데 / 身行萬里半天下
암자에 누운 중의 머리는 희어지기 시작했네 / 僧臥一庵初白頭
한, 두 구(句)의 운자(韻字)를 가지고 시 14편을 연장(聯章)하여 그가 떠나는 선물로 주었는데, 공은 다시 익재 거사(益齋居士)에게 그 앞에다 몇 마디 말로 써 줄 것을 청하였다.
거사는 늙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당(唐) 나라 문창(文暢)이 매양 유명한 공경(公卿)들에게 자기 뜻을 시로 노래하여 줄 것을 청했었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두 사람의 서(序)뿐이며, 사마 승상(司馬丞相 사마광(司馬光)을 말함)이 또 한유의 몇 마디를 취한 것은 정대(正大)하였기 때문에 몇 마디 쓴다.
문창은 문사(文辭)만 좋아한 사람이니 공이 어찌 문창의 유(類)이겠으며, 여러 학사들이 각기 시를 지어 노래했지만 어찌 능히 그의 뜻을 나타냈겠으며, 익재의 글도 능히 그의 요청에 부응되겠는가? 사마 승상은 진실로 이 세상에 없지만, 가령 있다 하여도 익재의 글과 말 중에 취할 것이 있을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이래서 한바탕 웃고 이것으로 서문을 쓴다.
이모(李某)는 서한다.
[註解]
[주D-01]투자산(投子山)에 …… 동산(洞山) : 투자산은 안휘성(安徽省) 서주(舒州)에 있는 산인데, 송(宋) 나라 때의 중 의청(義靑)이
대양 경현(大陽警玄)의 종풍(宗風)을 편 곳이며, 동산은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으로 조동
종(曹洞宗)의 발상지이다.
[주D-02]승선(僧選) : 승려에게 보이는 과거(科擧). 교종선(敎宗選)ㆍ선종선(禪宗選) 두 과가 있는데, 합격한 사람에게는 대선(大選)이
란 초급 법계(法階)를 부여했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금분(金粉)으로 쓴 밀교대장(密敎大藏)의 서
불서(佛書)가 중국에 들어가서 번역된 경(經)이 수천만 권인데, 이른바 다라니(陀羅尼)란 글은 중국에서도 번역하지 못하였다. 오직 중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축역(竺域 서역) 사람들도 또한 해설하지 못하고,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능히 안다고 한다.
대개, 글뜻이 오묘하고 말이 신비하다. 신비하기 때문에 알 수 없고 오묘하기 때문에 해설할 수 없는 것이니, 해설할 수 없으면 사람들이 더욱 공경하고, 알 수 없으면 사람들이 더욱 존숭하게 된다. 존숭이 지극하고 공경이 돈독하면, 사람들에게 감명됨이 반드시 깊으며, 영이(靈異)한 일이 또한 많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러함을 알고 수집 편찬하여 90권을 만들고는 《밀교대장》이라 이름하여 세상에 반포하였으니, 이 90권이 곧 수천만 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만기(萬機 온갖 정사)의 여가에 정신을 불전(佛典)에 쓰셨는데, 더욱 밀교에 믿음이 간절하여 궁중의 보화를 내 주며 금분으로 쓰게 하시니,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상호군(奉翊大夫判內府寺事上護軍) 나영수(羅英秀)가 실로 그 일을 주관했다.
이에 구본(舊本)을 가지고 여러 경(經)과 대교하여, 빠진 데를 써넣기도 하고 틀린 데를 고치기도 하여 수정하고, 또한 미처 수집하지 못한 것을 더 찾아내어 40여 권을 만드니, 구본과 합하여 1백 30권이 된다. 이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시켜 부문(部門) 별로 쓰게 하니, 뭇별이 서로 찬연(粲然)히 광채를 발하고 모든 화초가 꽃 피는 듯하여, 참다운 법보(法寶 보배로운 불경)이었다.
완성하게 되자, 신(臣) 이제현(李齊賢)에게 서문을 짓도록 명하셨는데, 신은 부유(腐儒)로서 문장이 족히 그 취지를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윽이 생각건대, 부처의 도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근본으로 삼으니, 자비는 인(仁)하는 일이고, 희사는 의(義)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지(大旨)를 또한 대개는 알 수 있다. 수천만 권이나 되는 것을 임금의 세력으로 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글이 이처럼 많고 비용이 또한 많이 들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서 비용에 충당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되면 부처의 본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주상 전하께서는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의 힘을 허비하게 하지도 않고서,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얻고 신속하면서도 정밀하게 하였으니, 부처의 본의에 알맞는 것으로서 그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감탄하고도 남을 일이다. 배수(拜手) 계수(稽首)하며 삼가 쓴다. 치화(致和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1328, 충숙왕 15) 5월 일.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역) ┃ 1979
회암 심선사(檜巖心禪師)의 도호(道號)인 당명(堂名) 뒤에 쓰다
글씨는 마음의 표현으로서, 옛적 진신 군자(搢紳君子)들의 필적을 보면, 삼엄(森嚴)하게 법도가 있으니, 족히 그의 인품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성조(聖祖)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으로 말하면 한묵(翰墨)의 뛰어난 솜씨는 단지 한 가지 일에 불과한 것으로서 규모와 기상(氣像)을 신자(臣子)들이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주상 전하께서 ‘직지당 월담(直指堂月潭)’이란 다섯 자를 대자(大字)로 써서 회암 심선사에게 내리셨는데, 마치 천 년 묵은 곧은 줄기를 베어다 집을 짓고, 만금(萬金)짜리 좋은 구슬을 쪼아 그릇을 만든 듯하여, 적삼 소매를 검게 물들이며 수염이 희도록 배운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으로 논할 수 없으니, 어찌 하늘이 낸 솜씨로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심공(心公 심선사)은 북으로 연조(燕趙) 지방을 유람하고 남으로 호상(湖湘)에 이르러 존숙(尊宿 덕이 높은 연장자)을 두루 방문하였는데, 천암(千巖) 무명 장로(無明長老)에게 인가(印可)를 받았고, 한림(翰林) 구양승지(歐陽承旨)가 게문(偈文)을 지어 찬미했었다.
내가 일찍이 그의 집을 찾아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질문하자, 그의 설명이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남이 듣기 싫지 않게 하였으니, 우리 임금에게 중한 대우를 받아 친히 보찰(寶札)을 띠고 산문(山門 절을 가리킨다)에 빛을 냄이 요행이 아니다.
지정(至正) 기해년(1359, 공민왕 8) 임종(林鍾 6월) 초하루에 치사(致仕)한 시중(侍中) 이모(李某)는 쓴다.
[註解]
[주D-01]연조(燕趙) 지방 : 전국 시대의 연 나라와 조 나라가 있던 지역.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부와 산서성(山西省) 서부. 고래로 비
분 강개(悲憤慷慨)한 선비가 많이 난다는 고장이다.
[주D-02]호상(湖湘) : 호는 호남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 동정호(洞庭湖)이며, 상은 동정호 부근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경치가 좋아 ‘소상팔경(瀟湘八景)’으로 유명하다.
[주D-03]인가(印可) : 사승(師僧)이 제자에게 오도(悟道)했음을 인증해 주는 것.
[주D-04]《육조단경(六祖壇經)》 :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의 약칭. 당(唐) 나라 중 육조대사(六祖大師) 혜능(惠能)이 설법(說
法)한 불경.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제6권
서(書) 3편
기(記) 6편
비(碑) 1편
서(書)
1 원(元) 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서(書)
2 승상(丞相) 백주(伯住)에게 올리는 서
3 최송파(崔松坡)와 함께 원 낭중(元郞中)에게 보낸 서
원(元) 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서(書)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3년(1323, 충숙왕 10) 정월 모일(某日)에, 고려국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모등(某等) 여러 사람은 삼가 재계 목욕하고 백배(百拜)하며 중서 재상 집사(中書宰相執事)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장차 싹틀 일을 역탐(逆探)하여 미리 말함은 광(狂)에 가깝고 답답한 심정이 있으면서도 말하기 어려워함은 은휘(隱諱)에 가까우니, 만일 부득이하다면 차라리 광이 될지언정 은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경솔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가엾게 여겨 살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홉 가지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를 시행해가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폐망하는 나라를 거들어 주며, 혼란을 다스려 주고 위기를 돌보아 주며, 가는 사람에게 후히 대접하고 오는 사람에게 박하게 받음은, 제후(諸侯)들을 감싸주는 일이다.’ 하였는데, 해설하는 사람은 ‘후손이 없는 자를 이어주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봉(封)해 주어, 상하가 서로 안정되고 대소(大小)가 서로 돌보게 하면 천하가 모두 충성과 힘을 다하여 왕실(王室)을 옹호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옛날 제 환공(齊桓公)이 형(邢)을 옮겨 주자 백성이 마치 집에 돌아가듯 하였고, 위(衛)를 봉해 주자 멸망을 잊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규합하고 바로잡아 오패(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패자(覇者)도 오히려 이를 힘쓸 줄 알았는데, 더구나 큰 중국을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한 집안으로 삼는 자이겠습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 소방(小邦)의 시조 왕씨(王氏)가 나라를 창설한 지 무릇 4백여 년이었는데, 성조(盛朝 원 나라 조정을 높인 말)를 복종하여 섬기며 해마다 조공을 바쳐온 지 또한 1백여 년입니다. 지난 무인년(1218, 고종 5)에 요(遼)의 잔당(殘黨)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중국의 백성을 몰아 약탈하다가 동쪽으로 도서(島嶼)에 들어와 방자하게 날뛰자,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는 합진(哈眞)ㆍ찰라(札剌)ㆍ두 원수(元帥)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이 공급되지 못하므로,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이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를 명하여 군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원조하여, 발광하는 도적을 마치 대나무 쪼개듯 쉽게 섬멸하였습니다. 이에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를 맺어 만세토록 잊지 말기를 맹세했었습니다.
또 기미년(1259, 고종 46)에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강남(江南)에서 회군할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천명의 돌아감과 인심의 복종함을 알고는 6천여 리를 발섭(跋涉)하여 변량(汴梁 개봉(開封) 지방까지 가서 영접하였고, 본국에서 조어산(釣魚山)까지 와 거기서 변량까지 돌아가는 거리는 대개 6천여 리이다.
충렬왕(忠烈王)께서는 또한 몸소 조근(朝覲)을 하여 한 번도 태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주(公主)를 하가(下嫁)하여 대대로 부마(駙馬)를 삼았으며, 구속(舊俗)을 고치지 않고 종사(宗社)를 그대로 보존해 왔으니, 곧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에 힘입은 것입니다.
천하의 각 지방에 행성(行省)을 둘 때에도 유독 우리 소방에만은 두지 않았으며, 뒤에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일 때문에 비록 명액(名額 명목과 인원수)은 두었지만, 항시 선용(選用)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 成宗)의 연호) 무렵에 활리길사(闊里吉思)를 이목관(耳目官)으로 삼았는데, 그의 진언(陳言)에 따라 도성(都省)에서 의논하여 상주(上奏)하기를 ‘본국(本國)은 일찍이 세조황조의 성지(聖旨)를 받아, 옛 본속(本俗)을 고치지 않고 단지 관명(官名)만 바꾸었는데, 이제 전부 고침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성종황제(成宗皇帝)께서는 아뢰는 말대로 재가하여, 곧 활리길사를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서아년(鼠兒年) 4월에 성지 내리기를,
“고려의 땅에 성(省) 두는 것을 분별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문제삼지 말라. 주자(奏者)는 이를 명심하라.”
하였으니, 열성(列聖)들께서 돌봐주신 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소방(小邦)에 행성을 두어 제로(諸路)와 같게 한다고 하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세조황제의 조지(詔旨)와 열성들의 돌보시던 뜻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지난해 11월에 새로 내리신 조서의 조목을 읽어보건대, ‘사정(邪正)이 길을 달리하며 사해(四海)가 편안히 다스려지도록 하여, 중통(中統)ㆍ지원(至元 원 세조(元 世祖)의 연호) 시절의 훌륭한 정치를 회복하게 하라.’ 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이런 덕음(德音)을 발표하셨음은 실로 천하와 사해의 복입니다.
더구나 소방은 여러 대의 공로가 저와 같고, 열성들의 돌봐주신 은혜가 이와 같은데, 이번에 4백여 년이나 된 왕업(王業)을 일조에 없애어 끊어버린다면, 조정에 한 치의 공로도 없는 다른 나라들을 조정에서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중통ㆍ지원의 체통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생각건대, 소방은 지역이 천 리에 불과한데도 산ㆍ내ㆍ숲 등의 쓸데없는 땅이 10분의 7이나 되어, 토지에 대한 세금을 받더라도 조운(漕運)의 삯에도 부족하고 백성에게 과세하더라도 봉록(俸祿)이 충당되지 못하니, 국가의 용도에 있어 마치 태산(泰山)의 먼지와 같아 만분의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역이 멀고 백성이 우매하며, 상국(上國)과 언어가 같지 않고 중화(中華)와 취향이 너무도 달라, 이런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의구하는 마음이 생길 터인데, 집집마다 가서 설득하여 안정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왜인(倭人)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데, 왜인들이 만일 듣는다면, 어찌 우리를 경계로 삼아 중국에 복종하지 않은 자기들의 행동을 잘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집사 각하께서는 역대 조정이 공로를 생각하던 의리를 체득하시고, 《중용》의 세상을 훈계한 말을 생각하시어, 나라를 그들의 나라로 내버려 두고 사람을 그들의 백성으로 내버려 두며, 정사와 공부(貢賦)를 닦아 번방(藩邦)이 되도록 하여, 우리가 한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다면, 어찌 오직 삼한(三韓)의 백성들만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며 훌륭한 덕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사(宗社)의 영혼들도 모두 감격하여 지하(地下)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삼가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충격되는 간절한 마음이 절박함을 견딜 수 없어 존엄(尊嚴)을 간독(干黷)하였기로 삼가 대죄(待罪)하옵니다. 모등은 백배(百拜)합니다.
[註解]
[주D-01]제 환공(齊桓公)이 …… 되었으니 : 제 환공은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우두머리로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어진 관중(管仲)을
정승으로 삼아, 제후들을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잡았다. 노 민공(魯閔公) 원년에 형(邢) 나라가 적(狄)의 침략을 받자, 환공은 구
원병을 보냈으며, 희공(僖公) 원년에 패전한 형 나라의 국도(國都)를 이의(夷儀)로 옮겨 주니, 형 나라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
듯 하였다.
또한 민공 2년에 위(衛) 나라가 적(狄)에게 멸망되자, 환공은 다시 위 나라 유민(遺民)을 모으고 대공(戴公)을 세웠으나 곧 죽자,
문공(文公)을 세우고 초구(楚丘)에 봉해주니, 위 나라 백성들은 멸망했던 과거를 잊게 되었다.《春秋左傳 閔公 元年~二年ㆍ僖
公 元年》
[註解]
[주D-02]이목관(耳目官) : 천자의 이목이 되어 국가의 치안을 보호하는 관원, 곧 어사대부(御史大夫).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승상(丞相) 백주(伯住)에게 올리는 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목욕 재계하고 백배하며 승상 집사께 글을 올리나이다. 우(禹)는 천하의 물에 빠진 사람들을 자신이 빠뜨린 것처럼 여기고 직(稷)은 천하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자신이 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천하의 물에 빠진 사람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우가 자기 손으로 밀치거나 직이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데도, 어찌하여 그들의 마음에 단연코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사양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이 대인(大人)들에게 책임을 내린 것은 본래 이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니, 진실로 곤궁하여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을 보고도 심상히 여겨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이 책임을 내린 본의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손발에 못이 박히는 고생을 잊었으며 구주(九州)를 살 수 있게 만들었고, 몸소 가색(稼穡)을 돌보아 만백성이 밥먹도록 하여, 요(堯)ㆍ순(舜)을 도와 혜택이 만세에 미치게 했던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불행히 구렁에 딩굴고 파도에 휘말리게 되었을 경우 우와 직이 보았다면 장차 잠시만 살게 해주고 말겠습니까?
나는 반드시 계책을 세워 다시는 주리거나 빠지는 것을 근심하지 않도록 해준 다음에야 그의 마음이 편안했으리라고 여깁니다.
삼가 생각건대, 승상 집사께서 성천자(聖天子)를 빛나게 보좌하되, 성색(聲色)을 움직일 것도 없이 천하를 태산(泰山)처럼 안정되게 조치하시어 머리가 센 노인들이 ‘중통(中統)ㆍ지원(至元) 시대의 훌륭한 정치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하니,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큰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데도 한 사람은 곤궁한 사세가 주림이나 물에 빠진 것보다도 심한데, 집사께서는 어떻게 조처하여 주시렵니까? 지난해에 우리 노심왕(老瀋王)이 천자의 진노(震怒)를 사 몸 둘 곳이 없었는데, 집사께서 애처롭고 가엾게 여겨 뇌정(雷霆 천자의 위엄을 뜻함) 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백골(白骨)에 살이 생기게 하시어 가벼운 법을 적응하여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하도록 하셨으니, 다시 살린 은혜가 부모보다도 더합니다.
그러나 지역이 너무 멀고 궁벽한데다 언어마저 같지 않고 풍습이 아주 다르며, 도적을 헤아릴 수 없고 기갈(飢渴)이 서로 침해하므로, 신체가 여위고 머리가 다 세었으니, 신고하는 상항을 말하려면 눈물이 나오는데, 집사께서는 차마 보고만 계시렵니까?
친속으로 말하면 세조황제(世祖皇帝)의 친 생질이요, 공로로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이며, 또한 그의 조고(祖考)들이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가 창업(創業)할 때부터 의리를 사모하고 솔선하여 복종해서 대대로 근왕(勤王)한 공로를 세웠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집미(執迷)하고 깨닫지 못해 더할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 본심을 따져 보면 진실로 딴 마음이 없었는데, 귀양간 이래 이미 4년이 되었으니,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뉘우친 것이 또한 이미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집사께서 일찍이 당초에 극력 구출해 주셨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마시고, 천자께 진달(進達)하여 천택(天澤)을 베푸시도록 인도하여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신다면, 그 감격됨이 어찌 구렁에 딩굴던 자가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파도에 휘말리던 자가 탄탄한 길을 걷게 될 뿐이겠습니까?
만일, 시기가 합당치 못하니 아직 천천히 하겠다고 하여 날마다 연기하고 달마다 끌다가, 현명하고 유력한 사람이 먼저 구원하게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이 장차 집사께서 일을 봄이 특히 더디다 할 것이고, 우리 소국(小國) 사람들은 장차 집사께서 덕을 행하다 마치지 못했다 할 것이니, 그윽이 집사를 위해 애석해 합니다.
[註解]
[주D-01]우(禹) : 고대 하(夏) 나라의 첫 번째 임금으로 삼왕(三王)의 하나. 일찍이 순(舜)의 신하가 되어 9년의 홍수를 다스리느라 손발
에 못이 박혔으며,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구주(九州)의 백성들이 살 길을 얻었으므로 순(舜)은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마침내 제위(帝位)를 물려줬는데, 맹자
(孟子)는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우(禹)는 마치 자신이 빠뜨린 것처럼 여겼다.” 하였다. 《書經 益稷》 . 《孟子 離婁下》
[주D-02]직(稷) : 이름은 기(棄). 주(周) 나라의 시조였는데, 농사에 큰 관심이 있어 순(舜)의 후직(后稷)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경종
법(耕種法)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홍수 피해로 곡식을 못먹던 백성들이 다시 곡식을 먹게 되었는데 맹자는 “천하에 굶주린 자
가 있으면 직(稷)은 마치 자신이 굶주리게 한 것처럼 여겼다.” 하였다.《書經 益稷》 《孟子 離婁下》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 ┃ 1979
최송파(崔松坡)와 함께 원 낭중(元郞中)에게 보낸 서
최모(崔某)ㆍ이모(李某)는 재배하고 낭중 원공(元公) 족하(足下)께 글을 올립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바닷가에 살며 방명(芳名)을 흠모하고 하풍(下風)을 우러른 지 오래되었습니다. 뛰어난 인품을 보고 유창한 언론을 듣고 싶었지만 돌아보건대, 소개(紹介)하여 먼저 찾아뵙게 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세월만 보내고 소원을 이룰 수 없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간담을 피력하여 앞에 바치게 되었으나 교분(交分)은 얕으면서 말이 심각하여, 족히 존청(尊聽)을 감동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폐읍(弊邑)은 족하께서 공경(恭敬)해야 할 상재(桑梓)의 땅입니다. 비록 유곡(幽谷)에서 나와 교목(喬木)으로 옮기고, 진흙에 서렸다가 구름으로 날아가, 중국에서 살고 중국에서 벼슬하시지만, 선영(先塋)과 친척은 본래부터 폐읍에 있으니 우리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대해 또한 어떤 인정이 없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천자(聖天子)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시는데, 대승상(大丞相)께서는 불세출(不世出)의 재략(才略)을 지닌 분으로, 말마다 들어주고 계책마다 써주어, 묘당(廟堂)에서는 하나도 실책(失策)이 없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 곳을 얻지 못하고 한 물건이라도 공평함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진발(振拔)시켜 안정되게 해주고야 그만두시니, 진실로 만세에 한 번이나 있는 좋은 때입니다.
족하께서는 단정하고 성실하며 웅심(雄深)한 자품에다 예악(禮樂)과 시서(詩書)로 문채내어, 높은 관에 큰 띠를 띠고 동각(東閣)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이주(伊周)를 윤색(潤色)하고 방두(房杜)를 미봉(彌縫)하니, 벼슬길에 지기(知己)를 만나 도(道)를 행하게 된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폐읍이 대국(大國)을 섬겨온 지 백여 년 동안에 해마다 조공을 바쳐 일찍이 조금도 해이됨이 없었고, 지난번에 요(遼)의 잔당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중원(中原) 백성을 약탈하고 바다에서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합진(哈眞)ㆍ찰라(札剌)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할 적에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보급(補給) 길이 끊기고 군사가 전진하지 못하여 거의 흉도(凶徒)들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는데, 우리 충헌왕(忠憲王)께서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를 명하여 군량을 운반하고 군사를 후원하게 하여 앞뒤에서 쳐 멸망시키고는 두 나라 군사가 서로 형제가 되어 만세토록 잊지 말기로 맹세하였으니, 이는 폐읍이 태조황제(太祖皇帝) 때에 힘을 다한 일입니다.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남쪽을 정벌하러 갔다 돌아와 장차 대통(大統)을 잇게 되었었는데 이때 아우 하나가 삭방(朔方)에서 변란을 선동하므로 제후(諸侯)들이 우려하고 의구(疑懼)하여 도로가 매우 삼엄하였는데도, 우리 충경왕(忠敬王)께서는 세자(世子)로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양초(梁楚) 지방의 들에서 영접하시자, 이에 온 천하가 먼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함을 보고는 천명이 돌아옴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폐읍이 세조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일입니다.
충경왕이 습작(襲爵)되어 동으로 돌아오자, 충렬왕(忠烈王)이 다시 세자로서 천자를 입시(入侍)하러 갔었는데, 세조께서 그의 공로를 생각하고, 그의 의리를 아름답게 여겨 대우를 극진히 하여 천하에 미칠 사람이 없었고, 공주(公主)를 시집보내어 특별한 은혜를 보였으며, 누차 조지(詔旨)를 반포하여 구속(舊俗)을 고치지 말도록 하시니, 사해(四海)의 안이 미담(美談)으로 삼았습니다.
노심왕(老瀋王)은 곧 공주의 아들이요, 세조의 친생질인데다 세조황제 때부터 성대(盛代)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다섯 조정에 벼슬하여 이미 친근하고도 정다운 터입니다. 다만 공을 이루고서 물러나지 않다가, 소홀히 여긴 곳에서 변이 생기게 되어 머리를 깎고 복장을 달리한 채, 멀리 토번(土蕃)으로 귀양가니, 고국과 만여 리의 거리에서, 혁선(革船)으로 하(河)를 건너고 소달구지에서 노숙(露宿)하며 어렵게 반 년이 되어서야 그 지역에 도달하여 보릿가루를 먹으며 토굴에서 살고 있어 갖은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들도 혹시 듣게 되면 오히려 슬퍼하는데, 하물며 그의 신하가 된 자이겠습니까?
창합(閶閤 궁궐 정문)은 구름을 헤치고 외칠 길이 없고, 낭묘(廊廟)에는 심왕(瀋王)을 위하여 말해주는 신하가 없으니, 비록 애처로운 마음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힘찬 소리로 급하게 외친들 누가 들어주고 누가 가엾이 여기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희들은 밥상을 대했다가도 먹기를 잊고, 누웠다가도 도로 일어나 허둥지둥 헤매며 눈물이 말라 피가 나게 된 것입니다.
대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고 족속(族屬)들과 돈목(敦睦)함은 선왕들의 정사였으며, 공로를 들어 허물을 덮어줌은 《춘추(春秋)》의 법입니다. 족하께서는 어찌 조용히 대승상에게 말씀드려 지난날 다른 뜻이 없었음과 오늘날 스스로 착해졌음을 밝히지 않게 하십니까?
천자에게 입주(入奏)하여 금계(金鷄)의 은택을 내려 사환(賜環)해서 동으로 돌아와 다시 태양을 보게 해주시어, 성천자의 세상에 다시는 구석을 향하여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해주신다면, 대승상의 아름다운 덕이 더욱 원근(遠近)에 나타나게 될 것이요, 족하는 근본을 잊지 않는 의리와 사람을 잘 구원하는 인(仁)을 천하 사람들이 장차 모두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폐읍의 군신(君臣)만이 살과 뼈에 새기며 만분에 일이라도 갚으려고 할 뿐이겠습니까? 거듭거듭 황송하여 다 말하지 못합니다. 모등은 재배합니다.
[註解]
[주D-01]폐읍(弊邑) : 자신의 나라나 고을을 낮추어 칭하는 말.
[주D-02]상재(桑梓)의 땅 : 고향 또는 고국이란 뜻. 옛날에 집 둘레에 뽕나무와 노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전하여 생계의 밑천이 되게 하여
서 생긴 말.《詩經》 小雅 小弁에 “뽕나무와 노나무를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 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심어
놓은 나무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3]유곡(幽谷)에서 …… 옮기고 : 유곡은 깊숙한 골짜기이며 교목(喬木)은 높은 나무로 사람이 출세함을 뜻한다.《詩經》 小雅 伐
木에 “꾀꼬리의 울음소리 영영하도다. 유곡에서 나와 교목으로 옮아가도다[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말에서 나온 것
이다.
[주D-04]진흙에 …… 날아가 : 용(龍)이 진흙 속에 묻혀 있다가 시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말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벼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5]동각(東閣) : 동쪽의 소문(小門). 전한(前漢)의 공손홍(公孫弘)이 동각을 열어놓고 현명한 빈객을 맞아들인 고사에서 생긴 말.
재상(宰相)의 귀빈(貴賓)이 됨을 뜻한다.
[주D-06]이주(伊周)를 …… 미봉(彌縫)하니 : 이(伊)는 상탕(商湯)의 어진 정승이었던 이윤(伊尹)을 가리키며 주(周)는 주공(周公)으
로 주 성왕(周成王)의 숙부인바 어린 성왕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켰다. 방두(房杜)는 당(唐)의 명재상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
(杜如晦)를 가리킨다.
[주D-07]양초(梁楚) 지방 : 중국 남방 양자강 하류 좌우 일대의 범칭. 양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여현(臨汝縣) 동쪽 지역, 초는 지금
의 호남성(湖南省)ㆍ호북성(湖北省) 지역.
[주D-08]혁선(革船) : 가죽을 꿰매어 연결하여 만든 배.
[주D-09]금계(金鷄) : 사면(赦免)을 뜻한다. 옛날 사죄(赦罪)하는 조서(詔書)를 내릴 때, 장대 끝에 금계를 달되, 황금으로 머리를 장식
하고 입에다 붉은 기를 물린 고사에서 생긴 말.《隋志 刑法志》
[주D-10]사환(賜環) : 죄를 용서하여 소환(召還)하는 것. 옛날 죄 지은 신하가 국경으로 나가 3년을 대죄(待罪)하고 있다가, 임금이 고리
[環]를 내리면 돌아왔기 때문에 한 말이다.《儀禮 喪服》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제6권
기(記) 6편
1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김공(金公) 행군기(行軍記)
2 개국률사(開國律寺) 중수기(重修記)
3 건동선사(乾洞禪寺) 중수기
4 백화선원 정당루(白華禪院政堂樓) 기(記)
5 운금루기(雲錦樓記)
6 묘련사(妙蓮寺) 석지조(石池竈) 기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김공(金公) 행군기(行軍記)
공의 휘(諱)는 취려(就礪)인데, 뒤에 취려(就呂)라고 고쳤으니, 계림(鷄林) 언양군(彦陽郡) 사람이다. 젊었을 때 아버지의 공로로 정위(正尉)에 기용되었다가 동궁위(東宮衛)에 뽑혔고, 중랑장(中郞將)으로 전임하여 우림군(羽林軍)을 거느리다가 몇 해 안 되어 장군으로 발탁되어 동북(東北) 국경을 진수(鎭守)하였는데, 말갈(靺鞨)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그 공로로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강종(康宗) 2년(계유)에 국경을 순무(巡撫)하자 변방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모했으며, 고종(高宗) 3년(병자) 8월에 거란(契丹)이 국경을 침범하자,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使) 독고정(獨孤靖)이 ‘이달 12일에 쳐들어왔다.’고 계문(啓聞)하므로, 왕은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오응부(吳應夫)를 우군(右軍)으로 삼고, 공을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후군(後軍)을 삼고는 13일 순천관(順天館)에서 크게 열병(閱兵)하고, 22일 우군은 서보통(西普通)에, 중군은 누교원(樓橋院)에, 후군은 과전(苽田)에 진을 쳤다가 이틀 밤을 지내고 길을 떠났다.
당초에 원(元) 나라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가 군사를 일으켜 금(金) 나라의 연도(燕都)를 치자, 금 선종(金宣宗)은 변경(汴京)으로 도읍을 옮겼다. 성무황제는 북으로 돌아가며 군사를 남겨두어 연도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연도 사람들이 연향을 베풀어 술이 취하자 섬멸하였다.
이에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 왕자(金山王子)ㆍ금시 왕자(金始王子)는 그의 당인 아아걸노(鵝兒乞奴)를 장수로 삼아, 하북(河北) 지방의 백성을 위협하고는 스스로 ‘대료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컬었다.
성무황제는 몹시 화를 내어 크게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자, 두 왕자는 무리를 모두 데리고서 동으로 와서 우리에게 땅과 식량을 요청했으나, 우리가 허락하지 않자, 두 왕자는 본래부터 노리는 마음이 있는데다 또한 유감을 가져, 아아걸로로 하여금 먼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게 하고, 처자(妻子)는 모두 자신이 데리고 진융(鎭戎)ㆍ영삭(寧朔)을 거쳐 아사천(阿史川)으로 나왔었다.
우리 삼군(三軍)은 조양진(朝陽鎭)에 이르러, 중군은 성 안에 진을 치고 우군과 후군은 성 밖에 진을 쳤는데, 조양 사람들이 달려와 적(賊)이 이미 가까이 왔다고 고하므로, 삼군은 각각 정예 군사를 뽑아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군후원(軍侯員) 오응유(吳應儒)와 신기장(神騎將) 정순우(丁純祐)가 단독으로 머리를 벤 것이 80여 급(級), 사로잡은 것이 20여 명이며, 우마(牛馬) 수백 필과 부인(符印)ㆍ기장(器仗)을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오응유는 다시 보병 3천 5백 명을 이끌고 귀주(龜州) 직동촌(直洞村)에서 적을 만나 머리 2백 급을 베고 35명을 사로잡았으며, 우마ㆍ전구(戰具)ㆍ은패(銀牌)ㆍ동인(銅印)을 매우 많이 노획했고, 장군 이양승(李陽昇) 역시 장흥역(長興驛)에서 적을 깨뜨리니 이들은 모두 공의 휘하(麾下)였다.
삼군이 신기장을 보내어 적의 뒤를 밟아, 신리(新里)에서 적을 만나 싸워서 머리 1백 90급을 베고, 연주(延州)에 진군한 다음 광유(光裕)ㆍ연수(延壽)ㆍ주민(周民)ㆍ광세(光世)ㆍ군제(君悌)ㆍ조웅(趙雄) 여섯 장수로 하여금 사자암(師子巖)을 지키게 하고, 영린(永驎)ㆍ적부(廸夫)ㆍ문비(文備) 세 장수로 하여금 양주(楊州)를 지키게 하여, 9월 25일 아홉 장수가 적의 머리 7백 급을 베었으며, 노획한 말ㆍ노새ㆍ소ㆍ패인(牌印)ㆍ병장(兵仗)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이 다시는 군사를 나누지 못하고는 개평역(開平驛)에 집결하니, 삼군이 이미 당도하였으나 모두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우군은 서산(西山)의 기슭에 웅거했고, 중군은 들판에서 적을 받게 되자 조금 후퇴하여 독산(獨山)에 주둔했는데, 공은 칼을 빼들고 말을 달려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곧바로 적 속으로 돌격하여 출입하면서 분격(奮擊)하니 적이 붕괴되었다.
추격하여서 개평역을 지나는데, 적이 역 북쪽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가 갑자기 중군을 공격하자, 공은 군사를 돌려 반격하니 적이 또다시 붕괴되었다.
밤에 노공(盧公)은 공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데다 우군도 오지 않고, 또한 당초 사흘 양식밖에 가져오지 않아 이제 이미 다 되었으니, 후퇴하여 연주성(延州城)에 웅거했다가 뒤를 기다림만 못하다.”
하자, 공은,
“우리 군사가 누차 승전하여 투지(鬪志)가 아직 강하니 이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한 번 싸운 뒤에 의논하자.”
하였다. 적이 묵장(墨匠)의 들에 포진(布陣)하였는데, 군사의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노공은 기병을 달려보내어 공을 부르고, 한편 검은 기치(旗幟)를 날려 신호를 하니, 사졸들이 칼날을 무릅쓰고 다투어 전진하여 하나가 백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문비(文備)와 함께 적진을 가로막으며, 가는 곳마다 휩쓸어 세 번 싸워 세 번 이겼으나, 공의 장자는 전사하고 말았다.
추격하여 향산(香山)의 남강(南江)에 이르자, 적은 빠져 죽은 자가 1천 명이나 되니, 부녀자들이 모여 우는 소리가 마치 천만 마리의 소가 고함지르는 것과 같았다. 한 사람이 무기를 버리고 관원이라 자칭하며 앞으로 다가와 청하기를, “우리들은 귀국의 국경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지만, 부녀자들이야 무엇을 압니까? 다 죽이지 마시고 또한 우리를 너무 궁박(窮迫)하게 마십시오. 우리는 하루바삐 스스로 돌아가겠습니다.”하니, 공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너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하고, 술을 주니 통쾌하게 마시고 갔는데, 조금 있다가 아아걸노가 부문(符文)을 보내어 소원을 말했는데, 그의 말과 같았다.
삼군은 각각 2천 명씩 보내어 그들의 뒤를 밟아 보니, 적들이 버린 군량과 기장(器仗)이 길에 낭자(狼藉)하였다. 소와 말을 혹은 허리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혹은 뒷부분을 찌르기도 하니 이는 노획하더라도 다시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이었다. 보낸 6천 명이 청새진(淸塞鎭)에서 싸워 생포하고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고, 평로진 도령(平虜鎭都領) 녹진(祿進)도 또한 공격하여 7천여 급을 죽이니, 적들은 마침내 청새진을 넘어 도망갔다.
창주 분도장군(昌州分道將軍) 김석(金碩)이 보고하기를, “거란의 뒤에 오는 군사들이 지난달부터 많이 국경으로 들어왔는데, 이들은 곧 금산(金山)ㆍ금시(金始)의 군사입니다.”하므로, 삼군이 연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직 내상군(內廂軍)만 남겨 자위(自衛)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출발했으나, 후군만이 홀로 양천(楊川)에서 적을 만나 수백 급을 사로잡거나 죽였으며, 양군(兩軍)은 먼저 박주(博州)로 돌아갔다.
공은 치중(輜重 군수물품)을 호송하느라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당도하자. 적들이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므로 공은 양군에게 위급함을 알렸으나, 양군은 편리한 데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공은 역전(力戰)하여 물리치고 마침내 치중을 호송하여 오니, 노공은 서문 밖까지 나와 맞이하여 축하하기를, “졸연히 강한 적을 만났으나 능히 그 예봉(銳鋒)을 꺾어, 삼군의 짐을 진 군사들을 조금의 손실도 없게 한 것은 공의 힘이오.”하고, 말 위에서 술을 따라 축수(祝壽)하였으며, 양군의 장졸과 모든 성(城)의 부로(父老)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번에 강한 도적과 대치하여 그 자리에서만 싸우기도 어려운 일이라 하였는데, 개평(開平)ㆍ묵장(墨匠)ㆍ향산(香山)ㆍ원림(元林)의 전쟁에 후군이 매양 선봉이 되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쳐부수어, 우리 노약(老弱)들이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보답할 길이 없으니 단지 축수만 할 뿐입니다.”하였다.
공은 엄격히 군율을 지켜 사졸들이 백성의 물건을 조금도 범하지 못했으며, 술이 있으면 곧 잔 하나를 가져다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고루 마시기 때문에 그들이 죽도록 힘을 써주었으며, 전공을 세우게 되면 반드시 모든 장수들과 회의하고는 연명(聯名)하여 계문(啓聞)하고, 한번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
10월 20일, 삼군이 밤에 군사를 보내어 흥교역(興郊驛)에서 적을 습격하고, 이튿날 밤 홍법사(洪法寺)에서 싸웠으며, 그 다음날 다시 고을의 성문 밖에서 싸워 모두 이기고는 우리 군대가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휴식시키니, 적들이 밤에 청천(淸川)을 건너 서경(西京 평양(平壤))으로 갔다가, 일기가 추워지자 얼음 위로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서해도(西海道 황해도)로 들어갔다.
국가에서는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을 원수로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조충(趙冲)을 부원수로 삼아, 앞의 삼군(三軍)과 합하여 오군(五軍)을 만들고는, 다시 승선(承宣) 김중귀(金仲龜)를 보내어 남도(南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 원수와 만나도록 했는데, 정 원수가 머뭇거리며 군율을 잃자, 추밀원사(樞密院使) 정방보(鄭方甫)로 대신하였다.
정축년 2월에 공을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 제배(除拜)하고, 3월에 5군이 안주(安州) 대조탄(大棗灘)에 주둔하였는데, 싸워 이기지 못하니 적은 기세가 당당하게 돌진(突進)해 왔다. 공은 문비(文備)ㆍ김인겸(金仁謙)과 함께 반격하다가 인겸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공은 칼을 날려 혼자 막아내다가, 창과 화살에 온 몸이 찔려 상처가 심하여 서울로 왔는데도 분개하는 충의의 기색이 오히려 말과 안색에 나타나니,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었다.
5월에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로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으로 전군(前軍)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대장군 임보(任甫)로 새로 정한 오군(五軍)을 거느리도록 하되, 가발병(加發兵)이라 이름하여 충주(忠州)로 보냈는데, 공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아픔을 참고 명을 받았다.
7월에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의 남쪽 시냇가에 이르렀는데, 오군이 서로 먼저 건너려 하자 공은 물러나 모든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탔는데, 충주성이 물에 파괴되어 나무와 돌이 무너져 내려왔다.
공이 타고 있던 배가 큰 돌에 부딪혀 키와 노가 모두 부서지고, 갑판이 새어 물이 솟으니, 같이 탄 사람 3백여 명이 모두 사색(死色)이 되었으나, 공은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정신과 기색이 여전하였다. 조금 있자 사람 셋이 떼를 타고 물을 가로질러 구원해 주려 하므로 배에 있는 사람들이 끊어진 새끼를 연결시켜 던지니 세 사람이 언덕으로 끌어올렸는데, 물어보니 원주(原州)에 사는 사람의 종들이었다.
그 중에 특히 건장한 사람과 동행하여 이틀밤을 자고, 본군(本軍)을 법천사로 모았다가 독점(禿岾)으로 옮겨 주둔하였는데, 최공(崔公)이,
“내일 갈 길이 두 갈래니 우리가 어디로 가면 좋은가?”하자, 공은, “군사를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니, 최공은 따랐다.
맥곡(麥谷)에 모여 적과 싸워 3백여 급을 베고, 제주(堤州)의 냇가로 추격하니 시체가 내를 덮어 떠내려갔다. 산골짜기를 수색해서 노약(老弱) 남녀를 찾아내어 충주로 보내고, 우마(牛馬)와 노획한 것을 가지고 박달재[朴達峴]에 이르니, 최공이, “고개 위에는 대군이 머무를 수 없으니 산 아래로 물러나 주둔하려 한다.”하자, 공은, “작전하는 방법이 비록 인화(人和)를 앞세우지만, 지리(地利)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적이 먼저 이 고개를 점령하고 우리가 그 밑에 있게 되면, 원숭이처럼 빠른 재주로도 또한 지나갈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하였다. 마침내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로 올라가 잤다.
날이 새자, 과연 적의 대군이 고개 남쪽으로 진격해 오는데, 먼저 수만 명을 좌우 봉우리에 나누어 오르게 하여 요충(要衝)을 차지하려 하자, 공은 장군 신덕위(申德威)ㆍ이극인(李克仁)으로 왼쪽을, 최준문(崔俊文)ㆍ주공예(周公裔)로 오른쪽을 맡게 하고, 공은 중앙에서 지휘하니, 사졸들이 모두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삼군은 이것을 바라보고는 또한 크게 외치며 다투어 올라오자, 적은 크게 무너졌다. 이 때문에 적은 남쪽으로 내려오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모두 동으로 도망갔다. 추격하여 명주(溟州)에 이르러, 추령(杻嶺)ㆍ대현(大峴)ㆍ구산역(丘山驛)ㆍ등대양(燈臺壤)ㆍ악판(惡坂)ㆍ등주(登州)의 동양(東壤)에서 싸워, 무릇 여섯 차례를 싸우니, 적은 지탱할 수 없어 여진(女眞) 땅으로 도망하였다.
9월에 공이 중군(中軍)의 통첩에 따라 군사를 정주(定州)로 옮기고, 적을 엿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이 함주(咸州)에 있는데 우리와 지경이 연해 있어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하므로, 공은 녹각(鹿角) 담을 해자(垓字) 밖에 세 겹으로 쌓고는, 이극인(李克仁)ㆍ정순우(丁純祐)ㆍ신덕위(申德威)ㆍ박유(朴蕤) 등 네 장수를 남겨 지키도록 하고, 흥원진(興元鎭)으로 옮겨가 있었다.
10월에 적이 여진의 구원병을 얻어 다시 떨쳐 깊이 쳐들어왔다. 공은 군사를 돌려 예주(豫州)의 생천(栍川)에서 대치하였다가 서로가 후퇴하여 물러왔었는데, 갑자기 병이 나 낫지 않자, 장좌(將佐)들이 돌아가 치료할 것을 청했으나 공은,
“차라리 변방 성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수레에 실려 집으로 가서 편히 있겠는가?”
하였다.
병이 도져 물도 마시지 못하고, 사람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므로 서울로 돌아와 병을 치료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병마녹사(兵馬錄事) 홍창연(洪昌衍)과 장군 이중립(李中立) 등이 공을 가마에 싣고 서울로 와 여러달 만에 나았다. 이때 적은 수십 개의 성을 부수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하였고, 이달 29일에는 남아 있던 군사가 적과 위주(渭州)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이양승(李陽升)이 전사하였다.
무인년 7월에 수사공(守司空) 조충(趙冲)을 원수로 삼고, 공을 병마사(兵馬使) 겸 상장군으로 삼았으며,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으로 삼고, 신선주(申宣冑)를 우군으로, 이임(李霖)을 후군으로 삼았으며, 이적유(李廸儒)를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삼았다.
9월 6일에 원수가 관복 차림으로 명을 받고 나가, 융복(戎服 군복)을 갖춘 다음 다시 대관전(大觀殿)에서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부월(斧鉞)을 받았으며, 장단(長湍)을 거쳐 동주(洞州)로 가다가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모극(毛克) 여진의 벼슬 이름 고연(高延)과 천호(千戶) 아로(阿老)를 사로잡았다.
성주(成州)에 머물러 제도(諸道)의 군사를 기다리는데,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 이적(李勣)이 군사를 인솔하고 오다가 적을 만나 전진하지 못한다 하므로, 장군 이돈수(李敦守)ㆍ김계봉(金季鳳)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여 이적의 군사를 맞이했는데, 벌써 적이 큰 길을 따라 모두 중군에게 향하므로, 우리 군사를 좌우익(左右翼)으로 배치하고 지휘하여 전진하니, 적의 이군(二軍)은 풍문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패주하였다.
이돈수 등이 이적과 모이게 되자, 녹사(錄事) 신중해(申仲諧)가 그 군사를 나누어 군량을 수송하였는데, 적이 또다시 요격하므로, 장군 박의린(朴義隣)이 독산(禿山)에서 패전시켰다. 적은 흩어졌다가 다시 기병 수만 명을 모아 예기(銳氣)를 다해 쳐들어오므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시키니, 아장(亞將) 탈라(脫剌)는 도망해 가고, 적의 괴수도 역시 군사를 끌고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리가 그의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할까 염려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 있었다.
12월에 황원(皇元)의 합진(哈眞)ㆍ찰라(札剌) 두 원수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완안 자연(完顔子淵)의 군사 2만 명과 함께 거란적(契丹賊)을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강동성(江東城)으로 갔는데, 이때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 길이 막히자, 적은 성벽(城壁)을 굳게 지키며 그들을 지치게 하니, 합진은 근심하여 사자(使者) 12명과 우리나라 덕주(德州) 진사(進士) 임경화(任慶和)를 보내어 군사와 식량을 청하고, 또 황제가 ‘적을 부순 다음에는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다.’고 말하므로, 우리 원수가 계문(啓聞)하니, 왕이 허락하고 김양경(金良鏡)ㆍ진석(晉錫)에게 군사 1천 명을 딸려 보냈었다.
합진이 누차 군사를 더 보내라고 책하자, 제장들은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국가의 이해가 바로 지금에 달렸는데, 만일 그의 뜻을 어기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니, 조공이, “나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일이니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보낼 수 없소.”하였다.
공은,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분수이니, 내가 비록 재능은 없지만 공을 위해 한 번 가 보겠소.”
하니, 조공은, “군중(軍中)의 일을 오직 공만 믿고 있는데, 공이 가면 되겠소?”하였다.
기묘년 2월 공이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10장군의 군사와 신기(神騎)ㆍ대각(大角)ㆍ내상(內相)의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니, 합진은 통사(通事) 조중상(趙仲祥)을 시켜 공에게 말하기를, “과연 우리와 우호를 맺게 되었으니, 마땅히 먼저 몽고 황제께 요배(遙拜)하고, 다음으로는 만노 황제(萬奴皇帝)께 요배해야 한다.”하니, 만노란 대개 동진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은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는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는가?”하고는, 이에 성무황제에게만 요배하고 만노에게는 요배하지 않았다.
공은 키가 6척 5촌이나 되며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가 매양 성복(盛服)을 할 때에는 반드시 두 계집종을 시켜 수염을 나누어 들도록 한 다음에야 띠를 띠었었는데, 이때 합진은 용모를 보고, 또 말하는 것을 듣고는 참으로 훌륭하게 여겨 인도하여 한자리에 같이 앉으며 나이를 물었다. 공은,
“60세에 가깝소.”
하자, 합진은,
“나는 아직 60이 못 되었습니다. 이미 한집안이 되었으니, 당신은 형이고 나는 아우가 아니겠습니까?”
하며, 공에게 동향(東向)하여 앉게 하였다.
다음날 또 그의 군영에 나아가니, 합진은,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면서 귀인(貴人)을 많이 보았는데, 형의 모습은 어찌 그리 훌륭하십니까? 내가 형을 중히 여기므로 휘하(麾下)의 사졸들도 또한 한 가족처럼 여기겠습니다.”
하였으며, 작별할 때는 손을 잡고 대문까지 나와 부액(扶腋)하여 말에 태웠다.
며칠 뒤에 조공도 갔었는데, 합진은,
“원수와 형은 누가 나이가 위입니까?”
물으므로, 공은,
“나보다 위입니다.”
하자, 합진은 곧 조공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히면서,
“내가 한 말씀 하려는데 예가 아닐까 두렵습니다만, 친한 정리에 따로 앉음은 마땅치 않으니, 내가 두 형의 사이에 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므로, 공은,
“이는 진실로 우리들의 소망이었는데, 다만 감히 먼저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하였다.
좌정(坐定)하자 술자리를 베풀고 무악(舞樂)을 하였다. 몽고의 풍속은 날카로운 칼 끝으로 고깃점을 꿰어 빈주(賓主)가 서로 먹여주기를 좋아하는데, 삽시간에 빠르게 왕복하니, 우리 군사 중에 평소 용맹이 있다고 이름난 자들도 모두들 난색을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과 조공은 꿇어앉았다가 일어나 수작하기를 매우 익숙하게 하니, 합진 등은 몹시 좋아하며 다음날 새벽에 강동성 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는 성에서 3백 보쯤 떨어진 거리에 주둔하였다. 합진은 남문에서 동남문에 이르기까지 너비와 깊이가 열 자씩 되게 땅을 팠는데, 서문 이북은 완안 자연(完顔子淵)에게 맡기고, 동문 이북은 공에게 맡겨, 모두 도랑을 파 적이 도망할 길을 막도록 하였다.
이달 14일에 적은 세(勢)가 궁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왕자(王子)는 스스로 목매 죽었다.
그들의 괴뢰 승상(丞相) 이하를 모두 베고는 합진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 리나 되는 먼 곳에 와서 귀국과 힘을 합쳐 적을 멸망시켰으니, 천추(千秋)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예의가 마땅히 국왕에게 가서 뵈어야 하는데, 우리 군사가 자못 많아 멀리 가기 어려우니, 다만 사자(使者)를 보내어 진사(陳謝)하겠습니다.”하였다. 20일에 합진과 찰라가 조 원수와 공을 청하여 함께 맹세하고는, “두 나라가 길이 형제가 되었으니 만세의 자손들은 오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호군(犒軍)하는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하고는, 합진이 부녀자와 동남(童男) 7백 명과 적에게 약탈되었던 우리 백성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 주었으며, 원수와 공에게 15세 전후의 여자 각각 9명씩과 준마(駿馬) 각각 9필을 주었다.
원수는 합진 을 의주(義州)까지 전송하고, 공은 찰라와 조양(朝陽)에 이르렀는데, 마침 서경 재제사(西京齋祭使)로 임명되었으므로 오수기(吳壽祺)가 공을 대신해서 전송했다.
9월에 의주(義州) 낭장(郎將) 다지(多知)와 별장(別將) 한순(韓珣)이 지키는 장수를 죽이고 여러 성(城)과 연합하여 모반하자,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극수(李克修)는 중군을, 이적유(李迪儒)는 후군을, 공은 우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공을 추밀원 부사(副使)로 삼아 이극수를 대신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다지 등이 요양(遼陽)의 온지한(溫知罕)에게 군사를 청하자, 온지한은 두 사람을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 우리에게 보내왔다. 삼군은 반역에 따른 모든 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자, 공은, “《서경(書經)》에 ‘괴수만 죽이고 위협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대군이 임하는 곳에는 마치 벌판의 불길과 같아 죄없이 화를 입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거란적 때문에 관동(關東)이 텅 비었는데 이제 또 이곳에 군사를 풀어놓아 스스로 변방 울타리를 잔해(殘害)해서야 되겠는가?”하며, 오직 다지와 한순의 도당만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다.
거란의 잔당들이 영원(寧遠)의 산 속에 숨어 살며 수시로 나와 노략질하므로 백성의 근심거리였는데, 의주 사람 창명(昌名)이 또한 수보(秀甫)ㆍ공리(公理)와 함께 모반하였다. 공은 이경순(李景純)ㆍ이문언(李文彦)을 보내어 영원 도적을 토벌하고, 문비(文備)ㆍ최공(崔珙)을 보내어 창명을 토벌하였다.
창명은 이때 철주(鐵州)를 침략하고 있었는데, 관군(官軍)이 오자 적당이 무너지므로 마침내 창명ㆍ수보ㆍ공리를 베었으며, 경순ㆍ문언도 또한 영원 성에 있는 적을 깨뜨리니, 북쪽 변경(邊境)이 안정되었으므로 5월에 개선(凱旋)하였다.
그 뒤에 공은 마침내 고종(高宗)을 도와 8년 동안이나 총재(冢宰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별칭)로 있었는데, 그 공덕은 모든 신사(信史 믿을 만한 확실한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단지 5년 동안 행군(行軍)한 사적만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국가의 덕이 쇠퇴하지 않았는데도 혹 화란의 얼(孽)이 싹트게 되면, 반드시 재지(才智)가 뛰어난 신하가 나와 임금의 신임을 받으며 시국의 간난(艱難)을 크게 구제하니, 대개 사직(社稷)의 신령이 남모르게 돕기 때문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 동안이었는데, 최씨(崔氏) 부자가 대대로 정권을 잡아, 안으로는 강한 군사를 두고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되 지모가 깊은 사람은 반드시 써주지 않았고, 밖으로는 병약한 군사를 주어 싸우게 하면서 공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여도 또한 어렵다.
그런데 금(金) 나라가 망하게 되자, 요(遼)의 남은 종자들이 화근을 조성하여 우리 강토를 저들의 소굴로 만들려고 노리므로 궁해진 적들과 멀리 가서 싸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성원(聖元 원 나라를 높인 말)이 용흥(龍興 제왕이 되는 것)하자, 먼저 먼 길에 장수를 보내어 국경을 위압하고 구원병을 요구하면서 적을 토벌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순응하자니 그 심정을 알 수 없고, 거부하자니 반드시 딴 변이 생겨서 안위가 매우 긴박하였다.
그러나 공은 능히 이리저리 주선하고 먼 곳과 사귀면 가까운 곳을 공격해서 경륜(經綸)하는 첫머리에 맹약(盟約)을 정하고, 국기(國基)를 순식간에 안정시켰으니, 어찌 재지(才智)가 뛰어난 신하를 사직의 신령이 남몰래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어서 군사들이 사력을 다하게 되고, 금령(禁令)이 잘 행해져 조금도 범하는 일이 없었음을 보건대 옛적 명장들의 풍도가 있다 하겠다. 관평(關平) 싸움에는 그가 두 차례나 중군을 구원했고, 사현(沙峴) 싸움에서는 노공(盧公)이 서로 협조하지 않았지만,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아 혐의를 내지 않았으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공을 돌렸으니, 이는 대인(大人) 군자(君子)만이 갖는 마음이다.
먼저 합진에게 나아가 여국(與國 우호국(友好國))의 마음을 굳히고, 만노(萬奴)에게 요배(遙拜)하지 아니하여 존왕(尊王)하는 의리를 밝혔으며, 다지(多知)ㆍ한순의 머리를 베게 되자, 군사를 거두어 변방 백성을 편안케 하였으니 원대한 계책과 큰 기절(氣節)이 더욱 가상하다. 사씨(史氏)는 그의 충의(忠義)를 찬양하였고, 태상(太常)은 ‘위열(威烈)’이라고 시호(諡號)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註解]
[주D-01]우림군(羽林軍) : 왕을 호위하는 군사, 곧 근위병.
[주D-02]녹각(鹿角) 담 : 대나무와 목재로 사슴의 뿔처럼 삐죽삐죽하게 만들어, 적병의 접근에 대비하는 담장.
[주D-03]부월(斧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 출정(出征)하는 대장 또는 중요한 군직(軍職)을 띠고 나가는 사람에게 임금이 손수 주어, 생
살권(生殺權)의 임무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주D-04]만노 황제(萬奴皇帝) : 금(金) 나라 선무(宣撫)이던 포선 만노(蒲鮮萬奴). 요동(遼東)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이라 자칭하
고,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했었다.
[주D-05]태상(太常) : 태상부(太常府)의 약칭. 제사(祭祀)ㆍ증시(贈諡)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개국률사(開國律寺) 중수기(重修記)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시자, 왕실과 나라에 유익한 일들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셨는데, 석씨(釋氏)는 다스리는 도를 협찬(協贊)하고 포악한 무리를 감화시킨다 하여, 승도(僧徒)들은 일반 백성에 넣지 않고 그 교리(敎理)를 천명하도록 하였으며, 무릇 탑(塔)이나 묘(廟)를 세울 적에는 반드시 그 산천(山川)의 지형이 음양(陰陽)의 이치와 부합되는지를 살펴 알맞게 조화되고 훌륭한 곳이라야 지었고, 양씨(梁氏)처럼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 부처에게 아첨하지는 않았다.
도성(都城) 동남쪽에 보정문(保定門)이 있는데, 그 길에는 양광(楊廣)ㆍ전라ㆍ경상ㆍ강릉(江陵) 네 도에서 도성으로 오는 사람과 도성에서 네 도로 가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끊이지 않고 왕래한다. 내가 있는데, 성 안의 멀고 가까운 시내와 크고 작은 도랑물이 모두 모여 동으로 빠지기 때문에 매양 여름과 가을 사이 장마로 큰 물이 지게 되면, 세찬 물결이 마치 삼군(三軍)의 행진과 같아 참으로 두렵다.
산이 있는데, 곡봉(鵠峯)에서 시작하여 굼틀굼틀 내려오되, 누웠다 일어섰다 달리다 멈추었다 하는 듯하여 마치 용이나 범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기세가 웅장하니, 세상에서 이곳을 삼겸(三鉗)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청태(淸泰) 18년에 태조께서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그 안에 절을 세워 율승(律乘)을 배우는 승려들을 거처하게 하고는 개국사(開國寺)라 명명하였다. 이때 전쟁이 겨우 안정되어 만사가 초창기였으므로 군사들을 모아 공사를 시키고, 무기를 부수어 자재에 충당했으니, 전쟁을 끝마치고 백성을 휴식시키려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임진년에 화재가 났는데 중수하지 못하여 승방과 불당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계단(戒壇)은 빈터가 되었고 강당[講肆]은 황무한 채 날마다 달마다 퇴락하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은 언제까지나 쇠퇴하기만 하지는 않아 때를 만나 번영하고, 도는 끝내 비색하기만 하지는 않아 사람을 기다려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 남산종사(南山宗師) 목헌 구공(木軒丘公)이 변론을 잘하여 경의(經義)를 통하여 정혜묘원자행대사(定慧妙圓慈行大師)라는 호를 하사받아, 오직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삼았다.
하루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국가에 발 붙이고 살면서 길쌈하지 않고 농사짓지 않아도, 의복은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고, 음식은 아침저녁을 지낼 수 있으니, 이는 우리 임금의 은덕과 우리 정승의 은혜가 또한 너무도 지극하다.
지금 국가 형편이 전일과 같지 않으니, 반드시 전례처럼 우리들 집을 중수해 주기를 바라기 어려울 뿐더러 또한 내집 울타리가 무너졌는데 이웃에게 보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의리가 아니며, 내 밭이 묵었는데 남에게 김매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하니, 무리들은 이 말을 듣고는 뜻을 알아차려 팔을 걷어붙이며 종문(宗門)의 여러 사찰에게 권유하여 역부(役夫)를 배정 동원하여 땅의 높고 낮은 것을 고르고 우거진 숲들을 베어낸 다음 먹줄로 재고, 연궤(筵几)를 알맞게 만들며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걸었으며, 백토(白土)를 칠하고 단청(丹靑)을 하였는데, 위쪽에는 높다란 전(殿)이 세워지고, 그 양편에는 긴 무(廡)가 연결되었으며, 양쪽 무 끝에는 누각(樓閣)이 세워지고 두 누각 사이에는 행랑이 세워졌으며, 대문이 달렸다.
그 서쪽에는 학도(學徒)들의 학사(學舍)와 감사(監師)의 당(堂)이 있고, 주방과 창고도 각각 제자리에 있어 간략하면서도 주밀하고 검박하면서도 견고하게 되었는데, 지난날을 참작하고 장구할 것을 헤아려 적당하게 증감한 것이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계해년(1323, 충숙왕 10)부터 시작해서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을축년에 이르러 3년 만에 공사가 끝났는데, 연회를 열어 낙성을 축하하니, 듣고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그의 무리 중에 늙은이들이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나의 집에 찾아와 매우 간절히 기문(記文)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근세에 부도(浮圖)들은 일을 경영하려면 반드시 권력가의 힘을 빌리며,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국가에 피해를 주어 빨리 완성하려고만 하고, 복을 심는다는 것이 결국 원망을 사는 길임을 모르는데, 목헌대사(木軒大師)는 그렇지 않아 말이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대중들이 즐겁게 일을 하여 털끝만치도 국가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한 참도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 이룬 사업이 이처럼 훌륭하니 이것은 마땅히 기록하여야 한다. 이 절을 창건한 것은 대개 태조께서 왕실과 나라에 이롭도록 하려 한 것이요, 양씨(梁氏)처럼 아첨한 것이 아니니, 또한 후세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략히 대강을 서술하는 바이다.
율승(律乘)의 도(道)로 말하면, 잘못을 억제하고 선(善)을 추구하게 하여 마치 요순(堯舜)의 정사에, 구요(咎繇)가 형벌할 때에 형벌을 없애려고 한 것과 같을 뿐이며, 그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에 있어서는 일찍이 배우지 않았으므로 감히 억지로 말할 수 없다. 태정 3년 병인 9월 어느 날, 동암 후인(東庵後人) 이모(李某)는 기한다.
[註解]
[주D-01]양씨(梁氏) :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가리키는데, 그는 불도를 신봉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다.
[주D-02]구요(咎繇)가 …… 한 것 : 구요는 순(舜)의 신하 고요(皐陶). 형벌을 맡아 공평하게 다스렸으므로 순(舜)은 그의 공을 칭찬하
여 “형벌할 적에 형벌을 없애려고 하여 백성들이 모두 중도(中道)에 맞는다.” 하였다.《書經 大禹謨》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건동선사(乾洞禪寺) 중수기
경원(慶原)은 양광도(楊廣道)에서 가장 궁벽한 고을이다. 그러나 시중(侍中) 장화공(章和公) 이하 유명한 재상, 큰 선비와 귀척(貴戚)의 공경이 많이 났으니, 대개 그 지형이 산과 내가 연결되고, 창해(滄海)를 끌어 당기고 있어 모여드는 기세가 특이하고 발산하는 기운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고을에서 서북으로 5리쯤 거리에 산이 우뚝이 솟고 국(局)이 열렸으며, 그 안에 옛날 절터가 있는데, 그 고장 사람들이 ‘건동(乾洞)’이라고 서로 전해오니, 실로 온 고을에서 제일 기이하고 빼어난 곳이다. 시위호군(侍衛護軍) 하씨(河氏)는 이름이 원서(元瑞)이며 이 고을의 사족(士族)인데, 젊은 나이에 궁중[宮掖]에서 급사(給事)로 있으면서 조심[謹愿]스럽다는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에 이르러 무너진 담장과 부서진 주춧돌이 떨기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개연(慨然)하여 황폐한 터를 다시 일으키기로 스스로 맹세하니, 때는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갑진년(충렬왕 30, 1304)이었다.
지금까지 20여 년이 쌓이는 동안 주머니에 저축한 것을 털고 의식(衣食)값을 절약하여 비용을 충당한 다음, 숲에서 재목을 베어내고 산에서 돌을 다듬어오며, 자갈을 담아오고 흙을 실어 나르기를 역부(役夫)들보다 앞서서 하였고,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비록 다 만들어졌더라도 반드시 고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하여 조금도 태만한 기색이 없었다.
기둥을 단청하고 동자 기둥을 조각하여 웅장하고도 화려한 것은 불상을 안치한 곳이요, 동방(洞房)과 온돌이 그윽하면서도 탁 트인 것은 중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당(堂)을 높게 무(廡)를 넓게 하여 창 앞에서는 쭈뼛한 산이 잡힐 듯하고, 정호(庭戶)에서는 큰 파도를 굽어보게 되었으며, 층층 담이 둘러 싸여 있고, 푸른 소나무가 삥 둘러 있었다.
오르내리며 둘러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합당하게 된데다가 종(鐘)ㆍ어(魚)ㆍ발(鉢)ㆍ나(螺) 등 염불하는 물건이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기(錡)ㆍ부(釜)ㆍ정(鼎)ㆍ당(鐺) 등 음식을 만드는 기구가 완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상(牀)ㆍ궤(几)ㆍ인(茵)ㆍ점(簟) 등 좌와(坐臥)에 필요한 시설이 주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또 장획(臧獲 노비)을 희사하여 부리기에 족하도록 하였으니, 이런 것들을 들어 말하건대,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바윗돌을 깎아내 원천수를 먹으므로 물 긷는 노고가 덜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양전(良田)의 수확을 거두어 공양하는 비용이 넉넉하니, 이는 신명이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은연중 와서 돕는 듯하다. 금년 10월에 서역(西域)의 지공선사(指空禪師)가 화산(華山)으로 가는 길에 지나다가 일일이 둘러보고는 크게 감탄하며 드물게 있는 일이라 칭찬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무리 천 수백 명과 함께 와서 그대로 머물렀었다.
어떤 손님이 익재(益齋)에게 묻기를, “옛적에 양(梁) 나라 소씨(蕭氏)는 만승(萬乘)의 국세(國勢)를 가지고 사해(四海)의 힘을 다하여, 탑(塔)을 만들고 묘(廟)를 세우기를 이루 셀 수 없이 하였으니, 그의 공덕을 헤아린다면 어찌 절 하나를 세운 하씨의 백배만 될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달마(達磨)는 이것을 기롱했는데, 이번에 지공은 하씨를 찬탄하였으니 이는 그 까닭이 무엇인가?”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일이란 사세는 같으면서도 사리는 다른 것이 있으니, 흉중(胸中)에 권도(權度)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능히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옛 성인이 천하를 갖는 것도 자기에게 상관이 없이 여긴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니, 진실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공덕으로 여긴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공덕이 된다. 내가 보건대, 하씨는 힘을 쓰되 자신의 힘을 다하고 남에게 빌리지 않았으며, 마음가짐이 남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았으니, 조약돌과 한 줌의 흙은 공로가 수미산(須彌山)보다 높고, 한 줄기 향과 한 치의 초는 혜택이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으니, 이는 사세는 같지만 사리는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공과 달마가 다른 점에 대하여는 자네가 특별한 식견을 갖추기를 기다렸다가 곧 말하여 주겠노라.”하였다.
유원(有元) 태정 4년 12월에 기한다.
[註解]
[주D-01]종(鐘)ㆍ어(魚)ㆍ발(鉢)ㆍ나(螺) : 종은 범종(梵鐘), 어는 목어(木魚 : 길이 1미터 가량의 나무로 잉어처럼 만든, 불경 읽을 때
두드리는 것), 발은 발우(鉢盂 : 승려들의 밥그릇), 나는 바라(嘙囉).
[주D-02]기(錡)ㆍ부(釜)ㆍ정(鼎)ㆍ당(鐺) : 기는 세 발 달린 솥, 부는 발이 없는 큰 솥, 정은 세 발과 두 귀가 달린 큰 솥, 당은 두 귀와 세
발이 있는 남비 비슷한 것.
[주D-03]상(牀)ㆍ궤(几)ㆍ인(茵)ㆍ점(簟) : 상은 침상(寢牀), 궤는 안석(案席), 인은 왕골이나 부들로 짠 자리, 점은 대나무를 엷게 쪼개
어 엮은 자리.
[주D-04]양(梁) 나라 소씨(蕭氏) : 주 20) 참조.
[주D-05]수미산(須彌山) : 불가의 말로 사주(四洲)의 중앙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산. 둘레에 칠산(七山)ㆍ팔해(八海)
가 있고 또 그 밖에 철위산(鐵圍山)이 둘러 있어 물 속에 잠긴 것이 8만 유순(由旬), 물 위에 드러난 것이 8만 유순인데, 꼭대기
에는 제석천(帝釋天),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있다 한다.
[주D-06]항하(恒河) : 인도(印度)의 갠지스강.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백화선원 정당루(白華禪院政堂樓) 기(記)
묵암 탄사(黙菴坦師)가 용궁군(龍宮郡) 천덕산(天德山)에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두 개의 누각(樓閣)이 있었다. 서쪽은 ‘관공루(觀空樓)’라 하는데, 승려 중에 운수(雲叟)라는 노인이 기(記)를 지었고, 동쪽은 ‘정당루(政堂樓)’라 하는데, 정당 한 재상(韓宰相)이 일찍이 남쪽 지방을 유람하다가 이 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정당이 돌아올 적에 탄사는 나에게 글을 받아 누각이 영광되게 해줄 것을 부탁했고, 얼마 후 탄사가 또 왔기에 나는 서로 만나보고 묻기를,
“보리달마(菩提達磨)는 탑을 만들고 절을 세우는 것을 인위로 복을 만드는 일로 여기고, 혼자서 깨닫고 늘 아는 것을 참다운 공덕(功德)으로 여겨 비록 존귀한 천자(天子)에게 용납되지 않더라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탄사는 달마를 배우면서 도리어 토목(土木)에 노심하여 집을 웅장하게 짓고는 달관(達官)의 명칭을 빌어 호화롭게만 하니, 할 말이 있는가?”하니, 탄사는 말하기를, “지금 여기 누가 있다고 하자 천 리를 가야 할 참인데, 태만한데도 통솔하는 사람이 없어 중도에서 주저앉고, 우매한데도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지름길로 가다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지금 세상의 우리 무리들을 보건대, 도 배운다는 것이 옛사람의 남은 찌꺼기만 얻게 되면 버젓이 스스로 방자해져 명성이나 공리(功利)에 빠지고 마니, 중도에 주저앉는 태만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혹은 산 속에서 추위와 주림을 견디며 각심하여 닦고 깨닫되, 소견이 좁고 미혹하여 바로잡아 가지 못하니, 지름길로 가는 우매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분발하여 결사(結社)하니, 다소나마 우리 무리들을 규합하여 명예나 공리의 함정에서 벗어나고, 산 속의 추위와 주림을 면하도록 하여 태만한 사람을 통솔하고, 우매한 사람을 인도하게 된다면 우리 스승의 이른바 ‘혼자서 깨닫고 늘 안다’는 이치를 반드시 묵계(黙契)하여 환히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장차 우리 스승의 도를 넓히려는 것이지 짐짓 인위로 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휘로(暉老)와 배 상국(裵相國), 만공(滿公)과 백 소부(白少傅)가 주고받으며 문답한 일은 총림(叢林 불가를 가리킨다)에서 성대한 일로 전해오는데, 어찌 일찍이 달관(達官)이라고 피혐(避嫌)했었는가?
우리 누각 이름을 한공(韓公)에게서 딴 것이 고금의 세대 차이는 있지만, 그 취지는 한 가지이다.”
하였다. 나는 듣고난 다음 사례하고, 그의 말을 써서 기(記)를 만들었다. 산천의 경치나 지형의 좋음, 또는 건축의 시작과 낙성한 연월에 대해서는 운수(雲叟)가 말했기에 여기서는 다시 말하지 않는다.
[註解]
[주D-01]휘로(暉老)와 …… 백 소부(白少傅) : 휘로는 당(唐) 나라 때의 중이며 배 상국(裵相國)은 당 헌종(唐憲宗)의 정승이었던 배도
(裵度), 만공(滿公)은 중 여만(如滿)을 가리키며, 백 소부는 백거이(白居易)로 여만과 함께 향산사(香山社)를 결성하고 향산
거사(香山居士)라 호했었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운금루기(雲錦樓記)
올라가 볼 만한 산천의 경지는 반드시 모두 궁벽하고 거리가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자(王者)의 도성이나 대중이 모인 도회지에도 본래 좋은 산천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명성을 노리는 사람은 조정에, 이익을 노리는 사람은 시장에 묻혀, 비록 형(衡)ㆍ여(廬)ㆍ호(湖)ㆍ상(湘)이 굽어보고 쳐다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널려 있어 장차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슴만 쫓느라 산을 보지 못하고, 돈만 움키느라 사람을 보지 못하고 아주 작은 것은 살피면서도 수레의 짐은 보지 못하니, 이는 마음에 쏠리는 일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을 좋아하는 세력 있는 사람들은 관(關)을 넘고 진(津)을 건너 터를 잡고는 산수놀이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고매한 체하지만, 강락(康樂)이 길을 내자 주민들이 놀랐고, 허사(許汜)가 집터를 묻자 호사(豪士)들이 꺼렸으니, 그러지 않는 것이 도리어 고매하다.
서울 남쪽에 너비가 1백 묘(畝)쯤 되는 못이 있는데, 살림하는 여염집들이 빙 둘러 있어 즐비하고, 이거나 지고 타거나 걸어 그 옆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앞뒤에 연락부절한다. 어찌 뛰어나게 그윽하고 훤칠하게 넓은 지역이 이 안에 있을 줄 알랴? 후(後)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정축년(충숙왕 6, 1337) 여름 연꽃이 만발했을 때에 현복군(玄福君) 권겸(權廉)가 보고는 사랑하여 바로 못 동쪽에 땅을 사서 누각을 세웠다.
높이는 두 길이나 되고, 연장(延長)은 세 발[丈]이나 되는데, 주추가 없이 기둥을 마련하였음은 썩지 않도록 한 것이요, 기와를 덮지 않고 띠로 이었음은 새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서까래는 다듬지 않았지만 굵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며, 벽토는 단청(丹靑)하지 않았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대략 이러한데, 온 못의 연꽃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이에 그의 아버지 길창공(吉昌公)과 형제ㆍ인아(姻婭)들을 초청하여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화평하고 유쾌하게 놀아 하루 해가 지는데도 돌아갈 줄 몰랐는데, 대자(大字)를 잘 쓰는 아들이 있으므로 ‘운금(雲錦)’ 두 자를 쓰도록 하여 누각 이름으로 걸었었다.
나는 한 번 가보니 향기로운 붉은 꽃과 푸른 잎의 그림자가 가없이 펼쳐져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며, 연기 낀 파도에 일렁이어 소문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했다. 어찌 그것뿐이랴?
푸르른 용산(龍山)의 여러 봉우리가 처마 앞에 몰렸는데 밝은 아침 어두운 저녁이면 매양 형상이 달라지며, 건너편 여염집들의 집자리 모양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으며, 지거나 이고 타거나 걸어 왕래하는 사람들 중의 달려가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손짓해 부르는 사람과 친구를 만나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 존장을 만나자 달려가 절하는 사람들이 또한 모두 모습을 감출 수 없어 바라보노라면 즐겁기 그지없다.
저쪽에서는 한갓 못이 있는 것만 보이고 누각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 또한 어찌 누각에 있는 사람을 알겠는가? 진실로 올라가 구경할 만한 경치가 반드시 궁벽하고 거리가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조정이나 시장에만 마음이 쏠리고 눈이 팔려 우연히 만나면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며, 또한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 경솔히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후(侯)는 허리에 만호후(萬戶侯)의 병부(兵符)를 띠고 외척(外戚)의 권세를 누리면서, 나이는 아직 옛날 강사(强仕)하던 나이(40세를 뜻함)가 채 못 되니, 부귀와 이록(利祿)에 빠져도 취하기 십상인데도 능히 인자(仁者)와 지자(智者)들이 좋아하던 바를 좋아하며, 주민들에게 놀라움을 주지도 않고 호사(豪士)들에게 꺼림을 받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뛰어나게 그윽하고 훤칠하게 넓은 지역을 시장이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찾아내어 소유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손님에게까지 미치며,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까지 미치니, 이야말로 가상하다. 익재 거사(益齋居士) 아무는 기한다.
[註解]
[주D-01]형(衡)ㆍ여(廬)ㆍ호(湖)ㆍ상(湘) : 형은 형산(衡山), 여는 여산(廬山), 호는 동정호(洞庭湖), 상은 소상강(蕭湘江). 곧 중국의
제일 가는 명승지를 말한다.
[주D-02]강락(康樂)이 …… 놀랐고 : 강락은 남조 시대(南朝時代) 송(宋) 나라의 서화가(書畫家)이자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
(封號). 그는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수백 명을 동원하여 시령(始寧)의 남산(南山)에서부터 임해(臨海)까지 나무를 베어
내고 곧바로 길을 내니, 임해 태수 왕수(王琇)가 크게 놀라 산적(山賊)이라 하였다.《宋書 謝靈運傳》
[주D-03]허사(許汜)가 …… 꺼렸으니 : 허사는 삼국 때 위(魏) 나라 사람. 한번은 유 비(劉備)와 함께 유표(劉表)의 집에 있으면서 당시
의 호사(豪士) 진등(陳登)을 평했는데, 허사는 “내가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진등을 찾았는데, 진등은 손님 대접을
하지 않고 자기는 높은 상에, 손님은 낮은 상에 눕게 했다.” 하면서 평하자, 유비는 “그대는 고사(高士)라는 명망이 있으면서 나
라에 충성할 마음은 갖지 않고 농토나 구하고 집터나 물었기 때문에 진등이 이처럼 박대했던 것이다.” 하였다.《三國志 魏志 陳
登傳》
[주D-04]인자(仁者)와 …… 좋아하며 : 산수(山水)를 좋아함을 말한다.《論語》 雍也에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智)한 자는 물
을 좋아한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묘련사(妙蓮寺) 석지조(石池竈) 기
삼장(三藏) 순암 법사(順菴法師)가 천자의 분부를 받들어 풍악(楓岳)의 불사(佛祠)에서 복을 빌고는 인하여 한송정(寒松亭)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곳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지는 몰랐다.
법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렸을 적에 일찍이 묘련사에서 두 바윗덩이가 풀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양을 상상컨대 어쩌면 이것이 아닌가 하고, 돌아오자 물색하여 찾아보니 과연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사방을 말[斗]처럼 모나게 다듬고 가운데를 확처럼 둥글게 팠으니 이는 샘물을 담으려고 한 것이며, 밑에다 주둥이처럼 구멍을 냈으니 이는 열고 찌꺼기를 씻어낸 다음 다시 막아 맑은 물을 담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 데는 물을 담는 것이고, 타원형인 데는 그릇을 씻는 것이며, 또한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 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는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백설(白雪)처럼 시원한 샘물을 끌어다가 황금빛의 움차를 끓이면서 익재(益齋)에게 하는 말이,
“옛적에 최 정안공(崔靖安公)이 일찍이 쌍명(雙明)을 위하여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절 북쪽 등성이로 절과의 거리가 몇백 보(步)쯤 되니, 이는 그 당시의 물건이 아니겠는가?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머무를 때, 삼암(三菴) 같은 분이 날마다 왕래했으니, 한 번 품평[題品]받았으면 반드시 값이 몇 갑절이나 나갈 것인데, 마침내 우거진 잡초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쌍명이 있던 시대가 지금 거의 2백 년이나 되는데, 비로소 나를 위해 한 번 나타나 앞에 두고 보람 있게 쓰이니, 바라건대 기를 지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고, 나의 구득을 축하해 주오.”
하였다.
나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쌍명의 기로회에는 이 학사(李學士)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자(字))가 있어서 모든 미미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진실로 담소(談笑)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문(詩文)에 실었었는데, 지금 그 문집을 상고해 보건대, 이에 언급한 것이 하나도 없음은 무슨 일이며, 그 뒤에도 또한 최 태위(崔太尉) 형제처럼 일을 좋아한 사람이 여기 와서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 돌이 지조(池竈)가 된 것은 쌍명 이전이어서 한송정과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매몰되어 불우한 지 오래니 어찌 삼암뿐이리요, 미수 역시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3백 년 전에 매몰되었다가 하루아침에 발견되어 비록 미수나 삼암은 만나지 못했지만, 법사를 만나 마치 그 사이에 소위 운수라는 것이 존재한 듯하니 물건과 사람은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이름나게 되는 것인가보다.
가정(柯亭)의 젓대[笛]와 풍성(豐城)의 칼이 채옹(蔡邕)과 뇌 환(雷煥)을 만나서야 이름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의 감식(鑑識)이 천 년토록 탄복받음도 또한 두 가지 물건 때문인 것이다. 법사는 공경(公卿) 가문의 귀족으로 비록 머리를 깎은 중이긴 하지만 본래 부귀한 분이다.
이제 천자의 사신이 되어 한 나라의 임금이 사우(師友)처럼 경애(敬愛)하는데도, 도리어 소인(騷人 문인)ㆍ묵객(墨客 서화가)과 풍월(風月)을 찾아 노니니, 그의 흉금을 알 만하다. 장차 뒷날의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만 듣고도 그의 마음에 두 덩이 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어쩌면 또한 채옹과 뇌환의 젓대와 칼일 것이다.
지원(至元) 3년 추석(秋夕)에 익재 이 아무는 기한다.
[註解]
[주D-01]최 정안공(崔靖安公)이 …… 만들었는데 : 정안공은 고려의 문신 최당(崔讜)의 시호. 그는 치사(致仕)한 후 장자목(張自牧)ㆍ
백광신(白光臣)ㆍ현덕수(玄德守)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고 시주(詩酒)로 소일하여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렀다.
쌍명(雙明)은 그 당시 학자이자 문인(文人)이었던 이인로(李仁老)의 호이며 자(字)는 미수(眉叟).
[주D-02]가정(柯亭)의 …… 칼 : 가정은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남쪽에 있는 정자 이름이며, 풍성(豐城)은 강서성(江西
省) 남창현(南昌縣) 남쪽에 있는 지명. 후한(後漢) 때의 문인 채옹(蔡邕)은 회계(會稽)로 피난을 가다가 가정에서 잤는데, 서까
래로 얹은 대나무가 독특한 소리가 날 것을 알고는 이것으로 젓대를 만드니 유명한 보물이 되었으며, 진(晉) 나라 때 뇌환(雷煥)
은 풍성 원으로 있으면서 하늘의 두우성(斗牛星) 사이에 이상한 광채가 뻗치는 것을 보고 옥사(獄舍) 옛터를 파내어 용천(龍泉)
ㆍ태아(太阿)라고 쓴 보검(寶劍)을 캐냈다.《會稽記》 《晉書 張翰傳》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익재난고 제6권
비(碑)
묘련사(妙蓮寺) 중흥비(重興碑)
서울의 진산(鎭山 주산(主山))을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송(宋) 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송악(松岳)을 숭산이라고 했다. 그 동쪽 등성이가 남으로 뻗어가다 갈라져 서쪽으로 꺾어지며 조금 낮아졌다 큼직하게 솟아나고, 또 갈라져 남으로 뻗어가다 세 개의 재[峴]가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용(龍)이 서려 있는 듯하고, 가까이서 보면 마치 봉(鳳)이 우뚝 서 있는 듯한데, 용의 배에다 터를 잡고 봉의 가슴에다 세운 부처의 궁전이 있으니, 이것이 묘련사이다.
우리 충렬왕(忠烈王)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함께 부처를 존신(尊信)하였는데, 불교에 들어가는 길은 《법화경(法華經)》이 가장 심오하며, 불경의 뜻을 창달한 것은《천태소(天台疏)》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여, 좋은 땅을 가려 정사(精舍)를 세우고, 《법화경》을 번역하여 도(道)를 찾고, 《천태소》를 강론하여 경의(經義)를 연구했으니, 장차 천자(天子)에게 복을 빌고 종묘에 복이 내리게 하려 한 것이었다.
불당을 지원(至元) 20년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낙성하였는데, 개산(開山)한 사람은 사자암(師子庵)의 노숙(老宿) 홍서(洪恕)가 바로 그 사람이다. 원혜국사(圓慧國師)가 결사(結社)를 주관할 때에 홍서가 또한 차석(次席)이었으며, 삼대(三代)를 전하여 무외국사(無畏國師) 때에 와서는 배우는 사람이 더욱 몰렸다.
충렬왕 때부터 일찍이 원혜국사에게 중석(重席)하였고, 무외국사에게 경의(敬意)를 다했으며, 충선왕께서는 더욱 예절을 존중히 하여 원문(院門 사원)의 선교(禪敎)가 영광스러운 보호 받음을, 다른 절들이 감히 바라질 못했다.
무외국사 이전의 희(禧)ㆍ인(因)과 무외국사 이후의 분(芬)ㆍ연(璉)ㆍ홍(泓)ㆍ염(焰)ㆍ여(如)와 지금의 당두(堂頭 주지) 길(吉)은, 모두 석림(釋林 불교계)의 특출한 사람들인데, 서로 이어받아 유지하여 종(鍾)ㆍ어(魚)ㆍ향(香)ㆍ화(火)가 처음과 다름없이 하였으나, 기둥과 지붕이 기울고 기와와 벽돌이 썩고 이지러진 것은 대개 6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어쩔 수 없는 사세였다.
순암 선공(順菴旋公)은 원혜의 적자요 무외의 조카로 천자가 삼장(三藏)이란 호를 내려 연도(燕都 북경)의 대연성사(大延聖寺)에 있도록 하였었는데, 후(後) 지원(至元) 병자년에 강향(降香)하러 동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충숙왕에게 아뢰기를,
“묘련사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기원(祇園)으로 전에 그 분들의 초상이 있던 곳이니 전하(殿下)께서 새로 수리하신다면, 선대를 받드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듣고 감동하여 드디어 수백만의 금은과 보기(寶器)를 희사하여 상주하는 중들에게 보내니, 불도들은 서로 권면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혹은 계책을 짜고 혹은 힘을 분발하여 침실ㆍ대청ㆍ주방ㆍ행랑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것은 수선하고 기운 것은 바로잡으며, 썩은 것은 바꾸고 파손된 것은 보완하며, 불상 놓는 자리를 호화롭게 하고 재(齋) 차릴 주방의 비용을 넉넉히 하며, 소나무를 더 심고 담장을 높이 둘러 쌓았다.
선공(旋公)이 대자(大字)를 잘 쓰므로 불전(佛殿)의 액자(額字)를 금분으로 써서 처마 사이에 걸자, 광채가 해와 별과 겨루게 되니, 또한 서로 경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할 일을 다했다 하며, 마땅히 돌에 새겨 후세에 남겨야 한다 하여 합동으로 조정에 청하니, 왕은 신(臣) 아무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창건(創建)의 어려움이 지킴의 어려움만 못하고, 지킴의 어려움이 또한 복구의 어려움만 못하다. 이 절은 충선왕이 충렬왕에 대한 축원을 넓히기 위하여 건립하였는데 충숙왕이 보수했으며, 무외가 원혜의 자취를 승습(承襲)했는데 선공이 복구했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오직 마음에 있으므로 그와 같이 했다.[誰其有之 是以似之]’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국가와 자손들이 능히 조고(祖考)의 유업을 잊지 않아 퇴락하면 보수하고 전복되면 일으키기를 또한 이 절을 수리하듯 하여 비록 백대가 되더라도 추락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니, 생각하건대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렸을 때 선친 동암(東菴)을 따라 무외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또한 선공(旋公)은 나와 종유(從遊)하였으며, 더구나 우리 임금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어찌 감히 비루하고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아래와 같이 명(銘)한다.
오천축(五天竺 인도(印度)) 나라에 성인이 나시어 중생을 건지려고 병에 맞춰 약 쓰셨네. 오묘한 불법(佛法) 펼 수 없어 권도(權道)로 인간 세상에 나오셨으니, 영취산(靈鷲山) 모임의 뜻, 책 속에 엄연(儼然)하도다. 울창한 저 언덕의 고요한 정사(精舍)에 두 차례나 덕인(德人)을 청하여 자비의 도 폈도다.
도는 통합과 막힘 없지만, 기물은 이뤄지고 이지러지기도 하나니 어질고 또 지혜롭지 못하면 뉘 능히 완성하랴? 진실한 순암이여 한 말로 임금을 감동시키니 거룩한 선왕(先王)이 비부(秘府)의 돈 내리셨네. 설계하고 집을 지어 환하게 아름다우니 시내와 산, 구름과 달, 오래 되었지만 새롭도다. 제호(醍醐)를 배불리 먹으며, 담복(薝蔔 치자나무꽃)으로 분향하여 우리 황원(皇元)에 복 내리고, 종국(宗國)에도 미치게 하도다.
[註解]
[주D-01]개산(開山) : 절을 처음 세우는 것을 말한다.
[주D-02]중석(重席) : 좌석에 요와 방석을 이중으로 까는 것으로 존경하는 것을 뜻한다.
[주D-03]기원(祇園)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약칭.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왕사성(王舍城)에서 설법(說法)할 때에 급고독(給
孤獨)이라는 사람이 기타태자(祇陀太子) 의 원림(園林)을 산 다음, 정사(精舍)를 짓고 여래를 초청하여 설법한 곳.
[주D-04]영취산(靈鷲山) …… 엄연(儼然)하도다 : 영취산은 중인도(中印度) 마게타국(摩揭陀國)에 있는 명산(名山). 산 생김새가 매와
같으며 또 매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영산(靈山) 또는 취봉(鷲峯)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석가여래가 일찍이 이 산에서 《법화경(法華經)》등을 강했는데, 즉 오묘한 불법을 인간에게 알릴 길이 없어, 권도로 석가여래가
인간 세상에 나와 영취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한 내용이 《법화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김주희 (역)┃197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