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5. 1. 21:55
태상소경 겸 집현전 제학공 묘단비명
(太常少卿 兼 集賢殿 提學公 墓檀碑銘)
옛날에 군자(君子)가 곤궁하면 홀로 그몸을 딲고 현달하면 천하(天下)를 구제하는 것이나직위가 높아지매 성만(盛滿)함을 경계하여 사직하고 물러와 휴양(休養)하는자(者)는 심히드물었으니 옛날 영능(英陵: 세종의 능)때에 소재(少宰: 참판)경주이공(慶州李公)은 자못 그러한 분이라 할것이다.
공이 젊었을때 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어서 마음을 딲고 학문에 힘써 널리 경의(經義)를 통하였고 효우(孝友)를 행하여 소문이 자자했다. 일찍이 발탁되어 여러번 좋은 벼슬을 지냈는데 자리에 있을때 마다 직분을 다하여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승진하고 관례되로 겸직(兼職)하였다.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니 당시에 어진 대부(大夫)의 풍도가 있다고 일컬었다. 정승 황(黃) 방촌(尨村), 희(喜: 황희 정승을 말함)와, 허(許)경암(敬菴), 조(稠)등, 제공(諸公)이 조정에천거하여 상경(上卿: 판서)의 물망이 있었는데 공이 듣고서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곤궁함을 참고 글을 읽으며 초야에 늙음이 나의 본분인데 다행히 밝은 임금의 시대를 만나 그릇되이 깊은 은혜를 입어 지위가 아경(亞卿:참판)에 이르렀으니 나에게 만족하다." 하고 드디어 상소(上疏)하여 물러오기를 구하여 경주(慶州)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하여 가사(佳沙)의 이천리(利川里)에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가은(佳隱)이라 하고 조그만한 정원에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비치하고 쾌활하게 스스로 즐기면서 이르기를 " 누가 이 속에 복희(伏羲) 천황씨(天皇氏), 즉 사람이 있는줄을 알겠는가?
방덕공(龐)의 훌륭한 곳도 자손(子孫)에게 편안함을 물려주는데 있었으니 이것도 또한 한가지 도리라" 하고 인하여 종적을 감추고 세상을 멀리하여 살다가 천수로 돌아가니 금박산(金朴山).아래 염불암(念佛巖) 유향(酉向)의 언덕에 안장했다.
정부인(貞夫人)은 권씨(權氏)니, 안동(安東)의 문벌좋은 집안에 사간(司諫)정(定)의 따님이요. 묘소는 같은 언덕에 있다.
공의 휘는 지회(之會)요,
자(字)는 아모(某)이다. 시조의 휘는알평(謁平)이니 비로소 진한(辰韓:오늘날 경주)의 표암(瓢巖)에서 탄강하여 신라시조(新羅始祖)를 추대 하였으므로 좌명대신(佐命大臣)이 되었고 그 후에 높은 벼슬이 이어졌으니 고려(高麗)의 초기에 중원태수(中原太守)호부랑중(戶部郞中),휘 금서(金書)는 경순왕(敬順王)의 세째 따님에게 장가 들었으니 즉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외손9外孫)이다.
여러대를 전하여 문하평리(文下平理)로 증직이 상서좌복야(上書左僕射)이고 호9號)가 열헌(悅軒)이며 휘 핵(翮)과 검교정승(檢校政丞)임해군(臨海君) 문정공(文定公)호가 동암(東菴)이며 휘 진(瑱)은 공의 6세조(六世祖)와 5세조(五世祖)이고 고조(高祖)는 계림부원군 문충공(鷄林府院君 文忠公)이니, 도덕과 문장이 온 누리에 들리어 세상에서 익재선생(益齋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서종(瑞種)이니 종부사부정(宗簿寺副正)으로 증직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이요,
조부(祖父)의 휘는 원익(元益)이니 대사성(大司成)이요, 아버지의 휘는 선(瑄)이니 비로소 조선국(朝鮮國)의 병조판서(兵曺判書)를 지내고 호(號)는 정헌(正軒) 효행(孝行)이 있어 동경(東京: 경주를 말함)읍지에 기록 되었다. 이하는 생략한다.
공(公)의 제사를 받드는 장희군(章熙君)이 집에전래하는 행적(行跡)을 수습하여 수백리 먼 길에 나를 찾아와 절하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언행(言行)이며, 사업이 기히 세상에 전할만한 것이 적지 않으나 지금 공의세상이 지난지 5백년이 되었고 여러번 화재를 당하여 문헌(文獻)이 유실되고 생졸9生卒)과, 관직(官職)의 이력 까지 상고 할수가 없으니 이것이 후손의 통한이 됩니다.
하물며 공의 묘소 까지도 귀에는 익히 들었으나 눈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묘소를 바라보고 단소를 만드는 관례에 따라 추모(追慕)하는 뜻을 부쳐 왔으나 또 수십년을 지내도록 한 조각의 비석을 새기지 못하였으니 원하옵건데 일언(一言)을 써주어 후세에 전하도록 해주오" 하니,
아! 나같은 후생미학(後生未學)으로 이 일에 감당 할수가 없으나 돌아보건데 지금과 같은 말세에 이러한 일이 적으므로 그 이어감을 좋아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옹졸함을 잊고 대강 위와 같이 기록하여 돌아가 새기도록 했다.
명(銘)에 가로되
아! 아름답다.
월성이씨(月城李氏)는 동방(東方)의 번성한 씨족이로다.
문정공(文定公)과 문충공(文忠公)이 크게 고려(高麗)에서 떨쳤네.
공이 우뚝하게 탄생하니 선대(先代)의 덕망을 잘 이었도다.
가정에서 보고 들어 학문이 순실하고 돈독 하였고
어질고 밝은 임금을 만나 경연(經筵)에 뽑혀 들어갔네.
당시의 정승이 서로 천거하여 상경(上卿)을 주려 했으나
공이 성대함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종적을 감추었네.
공의 장지(葬地)는 불암(佛岩)의 기슭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수호를 잃었네.
길가는 사람까지 슬프게 여기어 단을 모아 향사를 올리니
후손이 성력을 다하였네.
이 비석을 세워, 천년 억년(千年億年)에 밝게 보이노라.
연안 이의국 지음(延安 李義國 撰)
옮긴이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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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太常少卿 兼 集賢殿 提學公 墓檀碑銘
古之君子 窮則獨善 其身達則 兼 善天下而 其以位高盛滿爲戒謙退休養者甚鮮昔我英陵之際少宰慶州李公殆庶幾乎公少有美質存心力學博通經義行以孝友聞早被擢用累歷淸選所居稱職陞太常少卿兼職如例尤加謙謹時稱賢大夫之風焉相臣黃尨村喜許敬庵稠諸公啓薦于 朝擬上卿之望公聞之愕然曰固窮讀書老於林下是乃素分而幸値 聖明之世謬蒙思渥位在亞卿於我足矣遂上疏乞骸而歸干慶之先鄕仍卜佳沙之利川里自號曰佳隱數畦松菊左右圖書囂囂自樂曰誰識此間更有羲皇上人歟龐德公之高處在於遺子孫安地則服田力行是亦一道因歛跡謝世竟以天年終干家擇葬於金朴山下念佛巖酉向之原貞夫人權氏安東望族司諌定之女墓在同原公諱之會字某始祖諱謁平肇降干辰韓之瓢巖翊戴羅朝爲佐命大臣厥後簪組蟬聯高麗初中原太守戶部郞中諱金書尙敬順王第三女卽麗太祖外孫歷累世門下評理 贈尙書左僕射號悅軒諱翮檢校政丞臨海君文定公號東菴諱瑱寔公六世五世也高祖鷄林府院君文忠公道德文章聞於天下世稱益齋先生而不名曾祖諱瑞種宗簿寺副令 贈門下侍郎祖考諱元益大司成考諱瑄始仕我 朝兵曹判書號正軒有孝行載東京誌闕承公祀者章熙君收拾家傳行略謁余於數百里遠程揖而進言曰吾先祖言行事業之可傳於世者不爲不多而今距公之世垂五百載累經灰燼文獻蕩逸其生卒官歷詳攷不得寔爲之痛恨而况公衣履之藏慣於耳而疑於眼者乎依古人望墓爲壇之禮以寓追慕之意殆亦數十載尙闕片石之鐫願惠一言以圖不朽焉噫余以後生末學不敢當是役而顧今叔世罕有此擧感其善述之誠而忘拙略識之如右俾歸而刻焉銘曰.
猗歟月城東方茂族文定文忠大鳴勝國公乃挻生克紹先德濡染家庭學問純篤遇聖明被選經幄時相交薦擬上卿職公嫌盛滿歸鄕遯跡衣履攸藏佛岩之麓世久失護行路嗟惜壇而享之後承殫力堅此貞珉昭 眎千億<끝>
延安 李義國 撰
▲소경공(少卿公)의 묘(설단)
[소재지] 경북 경산시 자인면 신관리 후산(慶北 慶山市 慈仁面 新冠里 後山) 염불
[묘제일(墓祭日)] 음 10월 2일(陰十月 初二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