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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
불교에 삼보(三寶)라는 게 있다. 불(佛)·법(法)·승(僧).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네들. 이 삼보는 불교가 발딛고 서는 존립 근거이면서 동시에 궁극적 지향점이다. 삼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불교는 더 이상 불교로서 존재하기 어렵다. 모든 불교도의 최종 목표는 스스로 부처라는 완전한 인격을 성취하는 것이며, 법이라는 부처가 갖춘 보편적 진리를 체현하는 것이며, 어느 한 개인이 아닌 수행자집단으로서의 승가(僧伽)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삼보는 불교도와 비불교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변별점이 된다. 삼보를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 다시 말해 삼보에 귀의하는 이는 그가 누구든 불교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가 아무리 불교에 해박하더라도 삼보에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일으키지 않은 사람은 참된 불교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삼보는 불교의 핵심이요 정점이자 바탕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 가운데 이 삼보를 상징하는 절들이 있다. 이른바 ‘삼보사찰’(三寶寺刹)이다. 통도사(通度寺), 해인사(海印寺), 송광사(松廣寺)가 여기에 든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듯이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 국사(國師)를 지낸 열여섯의 고승들이 배출되었음은 물론 지금까지도 승가의 맑은 가풍이 비교적 잘 전해지는 까닭에 불교도들이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이 세 절을 각각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사찰로 꼽는 데 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해인사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법보사찰 해인사의 비중은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처음 출발부터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 통일 후의 신라 사회를 지탱한 이데올로기는 화엄사상이었으며, 화엄교학으로 무장한 화엄종 승려들은 이데올로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화엄사상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연구소, 혹은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화엄종 사찰이었으며, 그 선두에 열 군데의 화엄종 사찰, 즉 화엄십찰(華嚴十刹)이 있었다. 해인사는 이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었다.
1920년대 후반의 해인사 전경
가야산 너른 품에 깃들여 있는 해인사의 모습으로 현재는 몇몇 건물이 추가되었지만 기본 구성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화엄십찰은 하나같이 의상스님 혹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땅에 화엄종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의상대사였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이 신라 사회 전체로 확산, 파급되어갔기 때문이다. 해인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건주 순응(順應)스님은 의상스님의 손제자(孫弟子)가 된다.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신림(神琳)스님이 그의 스승인 까닭이다. 절은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때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대를 넘겨 이정화상(利貞和尙)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저간의 사정을 통일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이렇게 전한다.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대사에게서 공부하였고 대력(大曆, 766~779)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나무 쪽에 의지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 이때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에 국모(國母)로 계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양육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니 구름이 솟아오르듯 노을이 퍼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이에 가야산의 빼어난 경치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사의 귀한 보배는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신라가야산해인사 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
그러면 이렇게 터전을 닦은 절을 ‘해인사’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이 나온다. 이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된다.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그 세계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는 모든 번뇌가 다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서 펼쳐진다. 깨달음의 눈, 부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바로 일심법계이다.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有機世界: 器世間), 중생들의 세계[衆生世間],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知情覺世間]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마치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듯이.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이다. 우리들 마음의 바다에서 번뇌라는 가지가지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쉬어지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무량한 시간,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현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자 부처가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참된 근원이요 본래 모습이다. 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 말에서 따온 것이니, 말하자면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셈이다. 절 이름을 통해 다시 한번 해인사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화엄사상이라는 해인사의 창건 정신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해인사를 떠받치는 이념으로 작용한 듯하다. 고려 때 혁련정(赫連挺)이 찬술한 균여대사의 전기인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에 “스님은 북악(北岳)의 법손(法孫)이다. 옛적 신라 말기에 가야산 해인사에 화엄학의 종장(宗匠)이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은 관혜(觀惠)스님으로 후백제 거두 견훤의 복전(福田)1)이었고 다른 한 분은 희랑(希朗)스님으로 우리 태조대왕의 복전이었다. ······ 당시 사람들이 일컫기를 관혜스님의 문파를 남악이라 했고, 희랑스님의 문파를 북악이라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는 화엄사상이 해인사의 굳건한 뿌리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희랑대사와 고려 태조와의 만남이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자못 신비스럽게 분식되어 전해지는데, 아무튼 희랑대사가 태조를 도와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듯하고 태조는 그 보답으로 토지 500결을 해인사에 헌납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무렵 중창된 해인사의 모습을 지금으로선 알 수 없고 가람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선 뒤의 일이 된다.
조선조에 들면서부터 내리막길을 걷는 불교 사태 속에서도 해인사는 왕실의 비호 속에 온존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사세를 키우는 계기를 맞는다. 1488년 인수(仁粹, 덕종으로 추존된 세조의 맏아들 장(暲)의 비), 인혜(仁惠, 세조의 둘째아들 예종의 계비) 두 왕대비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당대의 고승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해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1490년에 공사를 마쳤던 것이다. 이때 세워진 각종 건물의 총 칸수가 160칸이었다. 이렇게 중창된 해인사의 모습을 문장과 충의로 일세를 울리던 매계 조위(梅溪 曺偉)는 1491년에 쓴 「해인사중수기」(海印寺重修記)를 통해 이렇게 묘사한다. 무려 집 160칸을 짓되 어떤 것은 낡은 것보다 크게 짓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작게 짓기도 하면서 규모가 화려하고 정화(精華)롭기는 몇 배나 더했으며, 부엌·목욕탕·헛간·변소라든가 동종(銅鐘)·목어(木魚)·요발(鐃鈸)·대고(大鼓) 따위도 모두 갖추어 새롭게 하였고, 금벽색(金碧色)의 단청이 산골짝을 휘황찬란하게 하였다. 역사(役事)를 마치고 9월 보름에 고승대덕 수천 명을 초청하여 법회를 굉장하게 베풀어 낙성하니 산문(山門)의 할 만한 일이 비로소 끝났다.
가람배치도
아마도 성종대의 중창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해인사의 틀이 잡혔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때의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임진왜란 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사이에 짧게는 1년, 길게는 수십 년의 간격으로 무려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번 제 모습을 바꾸었다. 그 가운데 1817년의 대화재는 천여 칸의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때 마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던 관계로 해인사의 중창을 후원하게 되고, 또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정희는 그의 나이 33세가 되는 1818년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쓰게 된다. 가로 4.85m 세로 0.94m의 감색 비단에 금니(金泥)로 쓴 이 거대한 상량문은 해인사의 소중한 보배로 지금도 남아 있다. 절이 불타지 않았다면 아예 있지도 않았을 테니 기념비적 가치와 아울러 하루아침에 해인사를 잿더미로 만든 안타까운 역사를 상기시키는 유물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때의 복구는 이전 모습보다 대폭 축소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때의 모습이 부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다. 1980년대 이전 해인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장대하고 고풍스러우며 실용적이면서 짜임새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의 모습에 어처구니없어 하고 적잖이 실망을 느낄 것이다. 실로 그렇다. 그 무렵의 건물 하나하나는 그다지 대수로울 게 없었다. 대장경판전을 제외하면 구조가 유달리 튼실하다거나 의장이 특별히 빼어나다거나 하는 집채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자세히 뜯어보면 남루하다 여길 만큼 그저 최소한의 기능에 맞춰 지은 집들이 도량을 채우고 있었다. 되풀이되는 화재 뒤끝에 부족한 예산으로 급하게 복구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낱낱의 건물은 앉을 자리에 앉아 있었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음에 조화를 잃지 않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 무렵, 대장경판전 왼쪽 모퉁이 담장에 기대어 아래를 굽어보면 멀리 남산 자락의 품 속으로 수십 채 건물의 지붕들이 마치 잔파도가 가볍게 일듯 일렁이며 잦아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적광전 구역해인사의 중심 구역으로 구광루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탑과 석등, 그리고 옛 축대는 변함이 없으나 근래 대적광전을 보수하면서 지붕을 크게 높이는 바람에 주변 건물들이 압도당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운율마저 느껴지던 옛모습과는 달리 지붕들 사이의 높낮이가 너무 커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먼저 들려온다. 개개의 건물은 과시라도 하듯 제 자랑에 여념이 없고 한껏 되바라져 그 안에 사람을 푸근히 감싸줄 것 같지 않다. 수행자들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주던 내밀한 공간들은 여지없이 뜯겨나갔다. 어떤 건물은 덩치에 비해 지붕만 비대해 가분수이고, 어떤 집채는 구부러진 대로 자연스럽고 친근감 넘치던 기둥들이 모두 반듯한 것들로 바뀌어 정감과 매력을 잃은 채 쌀쌀맞고 무표정하게 변해버렸다. 모두가 불과 20년 안팎의 짧은 세월 속에서 생긴 변화다. 승속을 막론하고 사려 깊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과 시대의 탓으로 돌리기엔 아쉬움이 크다. 이제 해인사는 그 많은 집채들이 요소요소에 자리잡고서 서로 어우러지며 보여주던 수수하고 수굿한 맛을 너무 많이 상실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찾는 해인사는 입체로 인식되기보다는 흩어진 점들의 집합으로 다가온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다. 88올림픽고속도로 해인사 교차로 입구 가야산휴게소·식당 앞 삼거리에서 가야산으로 난 1084번 지방도로를 따라 7.1㎞ 가면 길 왼쪽에 야천2구 버스정류장이 있는 야천삼거리가 나온다. 야천삼거리에서 왼쪽 가야산으로 계속 난 59번 지방도로를 따라 3.6㎞ 가면 가야산 국립공원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를 지나 약 300m 더 가면 길 왼쪽 홍류동계곡에는 농산정이, 오른쪽 바위벽에는 제시석이 있다. 제시석 앞에서 가던 길로 1.9㎞ 더 가면 길 왼쪽에 SK해인주유소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1.3㎞ 가면 해인사에 이른다. 특별한 용무 없이는 해인사까지 차로 갈 수 없다. 해인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쯤 가면 해인사 관광단지(신부락) 주차장에 이르는데 이곳에 주차하고 걸어가야 한다. 해인사 관광단지에는 호텔, 여관, 민박 등 다양한 숙식시설이 있다. 해인사 관광단지에 있는 해인사 시외버스터미널로는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마산·진주 등지에서 시외버스가 다니는데 특히 대구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까지는 약 15분 간격으로 하루 45회 직행버스가 다닌다. 서울 등 타지역에서 합천을 들르지 않고 해인사로 직접 가려면 교통이 편리한 대구로 먼저 가서 그곳에서 다시 해인사로 가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다. 합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까지는 묘산·야로·가야를 경유하는 직행버스가 하루 4회 다닌다.
홍류동과 제시석
절로 가는 길에는 계곡이 있다. 설악산 백담계곡을 지나 백담사에 이르고, 울진 불영계곡을 거쳐 불영사에 닿으며, 무주의 구천동계곡을 따라가면 백련사가 나온다. 절은 계곡이 있어 윤기가 돌고 계곡은 절이 있어 빛난다. 해인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 펼쳐지는 십리 골짜기가 홍류동계곡이다. 홍류동은 골짜기 양옆으로 전개되는 가파른 산이 빼어나고, 산을 뒤덮은 줄기 붉은 소나무숲이 장하고, 첩첩이 포개져 골을 가득 메우고 있는 바위들이 보기 좋고, 그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이 언제나 넉넉하다. 무엇보다 홍류동은 그 이름에 이미 계곡의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담겨 있다. 붉은빛[紅]이 흐르는[流] 골짜기[洞]-봄에는 진달래, 철쭉 따위 봄꽃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고 그 꽃잎이 떨어져 물을 따라 흘러내리며, 가을에는 울긋불긋 제 나름의 빛깔로 물든 갖가지 나뭇잎들이 또 그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하여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은 “아홉 굽이 날아내리는 물 격노한 우레런가(九曲飛流激怒雷) / 떨어진 붉은 꽃잎 끝없이 물결따라 흘러오네(落紅無數逐波來) / 무릉도원 가는 길 이제도록 몰랐더니(半生不識桃源路) / 오늘에야 산빛조차 시샘하는 그곳에 다다르리(今日應遭物色猜)”라고 홍류동의 경치를 예찬했다. 또 조선 초 형 강희안(姜希顔)과 더불어 선비화가이자 문신으로 이름났던 강희맹(姜希孟)은 남쪽으로 여행을 하다 이곳에 이르러 “이런 곳에 이름이 없으니 어찌 시인이나 글쓰는 이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그 물과 바위를 각각 ‘시를 읊조리는 여울’[음풍뢰(吟風瀨)], ‘붓에 먹물 찍는 바위’[체필암(泚筆巖)]라 이름짓고 시까지 한 수씩 남겼다. 그 가운데 음풍뢰를 읊은 시는 이렇다. “급한 물살 튀는 물방울 알알이 구슬이요(濺沫跳珠急) / 놀란 물결 깊어지니 주름 고운 명주일레(驚瀾皺縠深) / 이는 바람 맞으며 보고 또 보면(臨風看不足) / 저 검은 물밑에서 들려오는 용 울음소리(泓下有龍唫).” 비단 이 두 곳뿐만이 아니다. 홍류동의 기이한 바위, 경치 좋은 물굽이치고 이름이 붙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도원경에 드는 다리’[무릉교(武陵橋)], ‘옥구슬 흩뿌리는 폭포’[분옥폭(噴玉瀑)], ‘비 갠 달이 비치는 못’[제월담(霽月潭)], ‘신선들이 모여앉는 바위’[회선암(會仙巖)]······. 그리고 여기에 시가 보태어진다. 그리하여 홍류동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문기(文氣) 흐르는 자연이 된다. 서권기(書卷氣) 넘치는 문화가 된다.
홍류동해인사로 접어들면 펼쳐지는 십리 계곡길로, 언제나 맑은 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인하여 찾는 이들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사진에 보이는 정자는 홍류동 중간에 자리한 농산정이다. 그런 가운데 홍류동을 문자향(文字香) 가득한 골짜기로 만든 첫머리에 놓일 사람은 마땅히 고운 최치원일 것이다. 그는 이미 짙은 노을이 비낀 신라 사회를 버리고 이곳 가야산에 들어와 숨어살다 일생을 마감했다 한다.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僧乎莫道靑山好) / 산이 좋다면서 어찌하여 산 밖으로 나오려고 하시는가(山好何須出山外) / 뒷날 내 자취를 시험삼아 보시게나(試看後日吾蹤跡) /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一入靑山更不還).” 이런 시를 남겨 스님네들조차 들뜬 세상을 향하여 치닫는 현실을 풍자하고 자신의 결의를 다지면서-. 과연 그가 입산 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의 형으로 해인사에 머물던 현준(賢俊), 정현(定玄) 스님 등과 이따금 오가며 서로 사귀었다는 것이 사실로 전해질 뿐, 죽음조차도 홍류동 어느 바위 위에 신발 한 켤레, 지팡이 하나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전설로 남았을 따름이다. 그런 그가 홍류동에 베푼 시 한 수.
狂奔疊石吼重巒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
지척간의 말소리조차 분간키 어려울레.
常恐是非聲到耳
시비 소리 들릴까 저어하노니
故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 시켜 온 산을 감쌌네.
어찌 음미하면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자신의 포부를 맘껏 펴보지 못한 한숨소리가 처연하게 들리는 듯도 하지만, 홍류동을 읊은 숱한 시들 가운데 홍류동을 가장 홍류동답게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시가 아닐까 싶다. 홍류동 한 굽이 바위벽에 이 시가 새겨져 있다. 그곳을 흔히들 제시석(題詩石)이라고 한다. 글씨는 초서에 가까운 행서인데, 단숨에 써내려간 듯 매우 속도감이 있으면서 힘차다. 그러면서도 글자 크기의 변화나 획과 획,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과 짜임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28글자를 세 줄에 나누어 쓴 까닭에 첫 줄은 10자, 나머지 두 줄은 9자로 글자수가 다른데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포치(布置)가 정확하다. 대단한 달필의 무르녹은 솜씨다.
제시석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글씨로 단숨에 써내려간 듯 속도감이 있으면서 매우 힘차다.
이 글씨를 두고 최치원의 친필이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분분하다. 우리나라 인문지리학의 선구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돌 위에 고운이 쓴 큰 글자를 새겨놓았는데 지금도 금방 쓴 것같이 완연하다”(石上刻孤雲大字 至今宛然如新)고 말한 뒤, 그것이 이 시를 가리킨다고 했다. 대표적인 최치원 친필설의 하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그렇지 않다는 증언이 훨씬 더 많다. 가야산 너머 성주에 살았던 예학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가야산 기행문인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서 “최고운의 시 한 편을 폭포 옆 바위 위에 새겨두었는데 매년 장마 때마다 거센 물결에 깎여 이젠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었다. 손으로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글자를 겨우 판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刻崔孤雲詩一絶於瀑傍石面 而每年霖漲狂瀾盪磨 今不復可認. 摩挲久之 依稀僅辨得一兩字矣)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의 유명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도 첫 구절의 ‘狂奔’과 끝 구절의 ‘故敎’ 네 글자만이 탁본으로 실려 있다. 그밖에도 조근(趙根), 「산중일기」(山中日記)의 저자 우담 정시한(愚潭 鄭時翰), 김민택(金民澤) 등 여러 선비가 가야산 기행 뒤에 쓴 글들을 통해 정한강과 비슷한 견문을 토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흐르는 물 안쪽 바위에 새겨졌던 최치원의 친필시는 이미 마멸되어 사라진 지 오래임을 알 수 있고, 벼랑에 있는 지금의 시는 그 뒤 누군가가 다시 쓰고 새긴 것임이 분명하다. 아마 이중환은 직접 이곳에 와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바위벽에 새로 새긴 것을 최치원의 친필로 오해한 것은 아니었던가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글씨는 누가 쓴 걸까? 정식(鄭栻)이라는 선비는 기행문 「가야산록」(伽倻山錄)에서 안내해준 스님의 말을 들어 이 글씨가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필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시 구절을 새긴 왼쪽 아래 ‘尤庵書’(우암 쓰다)란 음각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이 글씨가 송시열의 작품이란 말인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글씨체가 우암의 진중하고 무게 실린 그것과 많이 다르다. ‘尤庵書’라는 글씨도 시 구절의 글씨와는 비교할 수 없게 조악하고 새긴 수법도 서로 다르며 본문과의 간격이 너무 좁다. 때문에 오히려 시 구절의 좋은 글씨를 방해하고 있어 후세의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러니 이 시구가 꼭 송우암의 필적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좀더 확실한 자료가 나올 때까지 글씨의 주인공을 가리려는 노력은 일단 덮어둘 수밖에 없겠다. 다만 어떤 사람의 솜씨이든 글씨가 참 멋들어진 것은 분명하고, 또 이 바위벽의 시를 통해 우리가 고운을 만날 수 있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伽倻之山最奇絶
가야산이 기절(奇絶)하여 천하의 으뜸이라면
千載孤雲罕儔匹
천 년의 외로운 구름[孤雲] 짝할 이 드물어
我欲從之竟不能
내 그를 따르고자 하나 끝내 그러질 못해
空讀遺編桂苑筆
부질없이 『계원필경』(桂苑筆耕)만 들척이누나.
請君細訪孤雲蹤
청컨대 그대 고운의 발자취 낱낱이 밟았다가
歸來洗我塵胸臆
돌아와 내 가슴의 티끌을 쓸어주소.
孤雲孤雲千載鶴
고운, 고운이여 천 년의 학이여
目送君歸倚高閣
눈으로 그대 보내며 다락에 기대인다.
여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해인사로 떠나는 친구에게 부친 시이다. 이처럼 해인사 가는 길은 고운을 만나러 가는 길이자 고운의 발자취를 뒤밟았던 숱한 소인묵객(騷人墨客)과 선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하니, 죽장에 삿갓은 아닐망정 가볍게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서봄은 어떨지.
묘길상탑
일주문 못미처 사적비(事蹟碑), 송덕비(頌德碑), 이런저런 스님들의 부도비가 우줄우줄 늘어선 해인사 비석거리. 그 한옆에 푸른 이끼 곱게 앉은 자그마한 삼층석탑 하나가 오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눈길을 맞으며 얌전히 서 있다. 묘길상탑(妙吉祥塔)이다. 그냥 길상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체 높이 3m쯤으로 크기만 작을 뿐 이중기단에 3층 탑신, 5단의 처마받침을 가진 전형적인 신라탑이다.
해인사 묘길상탑해인사 입구 비석거리 한편에 서 있는 조그마한 석탑으로 불사리를 안치한 여느 탑과는 달리 당시의 전몰장병을 위로하는 일종의 기념탑이다. 보통 탑이라면 ○○사 삼층석탑, △△사 오층석탑 하는 식으로 층수에 따라 구별하여 보통명사로 부를 뿐, 이 탑처럼 고유명사로 지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작은 탑은 저만의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또 탑이라면 으레 법당 앞마당에 자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이 탑은 많은 사람 오르내리는 길가에 서 있는 걸까? 1966년 여름 일단의 도굴꾼들이 검찰에 검거되고 아울러 탑 안에 안치했던 지석(誌石) 4매와 157개의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탑 따위가 압수되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해인사 입구의 작은 삼층석탑에서 꺼냈다고 자백했다. 4매의 탑지에 적힌 내용도 그들의 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탑지 4매는 모두 규격과 재질이 같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에 두께가 2.5㎝쯤 되고 전(甎), 곧 벽돌처럼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 두 장은 앞뒤 양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두 장은 한 면에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첫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뒷면에 「운양대길상탑기」(雲陽臺吉祥塔記)가 새겨져 있다. 「해인사묘길상탑기」는 최치원이 글을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 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이다. 「운양대길상탑기」에는 탑의 높이, 소요자재와 경비, 그리고 공사 관련 인물들의 성명 등이 밝혀져 있다. 두번째 지석에는 백성사(百城寺) 길상탑 안에 공양물로 봉안하려던 불경 목록이 적혀 있다. 세번째 지석에는 앞면에 「해인사묘길상탑기」와 같은 취지로 오대산사(五臺山寺)에 길상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4자씩 떨어지는 운문으로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전몰한 치군(緇軍), 곧 승병들에게 바치는 조사(弔詞)가 「승병을 애도함」(哭緇軍)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마지막 네번째 지석에는 전란중 해인사에서 사망한 승려들과 일반인 56명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이상 지석에 새겨진 글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탑의 정식 명칭이 ‘해인사 묘길상탑’이라는 것, 묘길상탑은 불사리를 안치한 예사 탑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일종의 기념탑으로, 말하자면 전몰장병 위렵탑이라 할 수 있다는 것, 또 하나 승병 혹은 승군이 적어도 통일신라 말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끝으로 동일한 취지의 탑을 해인사를 비롯한 몇 군데 세우려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해인사에만 건립하게 되어 나머지 탑지들을 여기에 함께 넣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탑 하면 으레 불탑, 사리탑이라고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와는 전혀 건립 배경을 달리 하는 탑이 있을 수 있다는 뜻밖의 사실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승군 하면 조선이나 고려시대를 떠올리던 우리에게 신라 승군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점도 여간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최치원과 해인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살생을 무엇보다 꺼려하는 절집이 무슨 연유로 승속을 합쳐 56명이라는 많은 목숨을 희생해가며 전란에 휩쓸리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하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혹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광대한 경제력을 보유한 해인사가 이미 낙조가 짙게 드리운 진성여왕(재위 887~896) 연간의 통일신라 사회에 반기를 든 신흥 지방세력, 아니면 중앙정부나 해인사로부터 오랫동안 피해를 당해온 지방민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어 전란에 말려들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 그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묘길상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 상황을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원의 하나이다. 다만 거기서 어떤 정보를 어느 만큼 얻어내는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겠다. 묘길상탑,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큰 탑이다. 보물이다. 도굴꾼의 손아귀에서 되돌아온 탑지 4매와 석탑 공양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홍치4년명 동종
우리나라 범종의 우수함은 내남없이 다 아는 일이어서 국제적으로도 ‘Korean Bell’이라는 학술용어로 불리면서 은은하게 멀리 퍼지는 아름다운 소리, 우아하고 안정된 형태, 독특한 장식과 구조를 자랑한다. 하지만 ‘코리안 벨’이 모든 시대에 만들어진 우리 범종을 통칭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거나 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들만을 가리킨다. 그러면 신라 범종은 어떤 점 때문에 ‘코리안 벨’이라고 격을 달리하여 불리는 것일까?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종들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두드러진 것만을 들더라도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음관(音管) 또는 음통(音筒)의 존재이다. 음통은 종의 꼭대기에 굵은 대롱처럼 원통형으로 솟은 부분을 가리킨다. 종의 음질을 더 낫게 하는 데 어떤 작용을 하리라는 추정 이외에는 이 음관이 구체적으로 무슨 작용을 어떻게 하는지 뚜렷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다른 나라의 종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신라 종 고유의 장치이다. 다음으로 종을 매다는 고리가 되는 용뉴(龍鈕)도 신라 종은 독자적인 생김새를 지녀 그밖의 종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웃 나라들의 종은 몸통을 맞댄 채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한 용머리 둘을 종의 중앙 상부에 부착하여 종고리로 삼음에 비해, 신라 종은 음통에 몸뚱이를 붙인 한 마리 용이 꿈틀 고개를 숙여 입과 두 발로 종의 몸체를 다부지게 물고 움켜쥔 형상으로 용뉴를 마련한다. 또 한 가지 섞일 수 없는 차이는 비천상(飛天像)의 유무이다. 신라 종에는 종의 몸체 가운데쯤 천의(天衣)자락을 나부끼며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비천무늬가 서로 맞은편 두 군데에 도드라져 있으나 다른 나라의 종에서는 이런 무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이 또한 신라 종 특유의 양식이다. 유곽(乳廓)과 유두(乳頭)의 모양새나 숫자도 신라 종과 그밖의 종들을 구별하는 좋은 근거가 된다. 유곽이란 종의 상대(上帶) 아래쪽 네 방향에 자리잡은 네모난 테두리를 가리키고, 유두는 그 안에 젖꼭지처럼 돋아난 돌기들을 일컫는다. 중국 종에는 아예 이것들이 없고, 일본 종에는 있긴 있되 유곽은 단순하게 도드라진 선으로 구성되며 유두는 유곽 하나에 스무 개 이상씩 솟아 있다. 반면 신라 종은 유곽이 넓은 띠처럼 돌려지고 그 안에는 당초무늬가 섬세하게 돋을새김되며, 유두는 유곽 하나에 반드시 아홉 개가 종횡으로 줄을 맞춰 배열된다. 상대와 하대에 보이는 차이도 적은 것이 아니다. 상대와 하대는 종의 몸체 어깨부분과 아랫부분에 돌려진 띠무늬를 말하는데, 신라 종은 그것의 폭이 넓어 여기에 갖은 무늬가 새김질되지만 중국이나 일본 종은 융기된 몇 줄의 선으로 처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신라 종과 여느 종은 눈만으로도 그 차이점을 쉽게 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형태와 의장에서 커다란 편차가 있다. 한마디로 신라 종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이나 종소리의 질에 있어서 동서와 시대의 고금을 통틀어 단연 우수하다. 그러니 ‘코리안 벨’이라고 구별지어 부름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을 본 우리 범종의 전통양식은 이후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여 조선시대에 오면 ‘조선 종’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해야 할 만큼 신라 종과는 많은 양식상의 차이를 보인다. 가장 현저한 변화는 음관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신라 종의 등록상표와도 같았던 음관은 고려시대에도 줄곧 모습을 보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에 따라 용뉴도 필연적으로 모양이 달라져 이제는 중국이나 일본의 종처럼 용머리 둘이 몸통을 맞댄 모습으로 정착한다. 중국 종의 영향으로 생겨난 변화들이다. 비천상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을 날던 신라 종의 비천들은 고려시대부터 이미 변화를 보여 불보살이 연꽃 위에 앉은 모습으로 바뀌더니 이윽고 조선시대에는 반듯하게 선 보살의 모습으로 달라진다. 그 무늬가 놓이는 위치와 숫자도 달라져 비천상이 종 몸체 가운데 양쪽으로 나뉘어 자리잡고 있던 신라 종에 비해 조선 종의 보살입상은 몸체 위쪽으로 치우쳐 유곽과 유곽 사이 네 군데 위치하게 된다. 유곽과 유두는 기본적으로 신라 종의 전통이 이어지지만 여기에도 얼마간의 변동은 있다. 신라 종의 유곽은 아래와 양옆만 테두리를 돌리고 윗부분은 상대에 붙여 구성하였으나 조선 종의 유곽은 완전히 상대에서 떨어져나와 온전히 네모진 테두리를 두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상대와 하대의 변화도 크다. 상대는 아예 사라지면서 고려 초기 범종에서 등장하는 견대(肩帶), 곧 종의 천판 가장자리에 둘려진 연잎무늬띠가 약간 아래로 이동하여 상대 구실을 하게 되거나 몇 줄의 융기선으로 대체된다. 하대는 위치와 문양이 달라진다. 신라 종의 경우 하대는 종 몸체의 끝자락부터 일정한 폭을 이루며 당초무늬가 띠처럼 돌아가고 있음에 반해, 조선 종은 파도무늬가 박힌 하대가 끝자락에서 얼마간 올라온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종에는 우리 전통양식에는 없던 중대(中帶)가 나타나고 있다. 중대는 종 몸체 한가운데 세 줄의 도드라진 선이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신라 종이나 고려 종에서는 전연 볼 수 없었던 의장이다. 또 하나 크게 달라진 점은 당좌(撞座)의 소멸이다. 종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곳을 치게 되어 있다. 그래야 좋은 소리가 나고 종도 오래 가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 즉 종망치가 닿는 부분을 당좌라 한다. 신라 종에는 종의 밑동에서부터 종 길이의 3분의 1쯤 되는 지점의 맞은편 두 군데에 활짝 핀 연꽃을 돋을새김하여 당좌를 마련하고 있다. 고려 종에도 비슷한 위치에 고른 간격으로 네 군데 당좌를 두었다. 그런데 조선 종에 와서는 당좌가 돌연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까닭에 조선 종들은 하대 아래 여백의 적당한 자리를 종망치로 칠 수밖에 없어 흔히 그 자리에 종망치를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조선 초기 종의 하나가 바로 해인사 홍치4년명 동종(弘治四年銘 銅鐘)이다. 용뉴는 예의 쌍룡두로 구성하였는데, 종의 크기에 비해 좀 작은 편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처리되었다. 종의 어깨 윗부분에 아래로 향한 21장의 연잎을 돌려 견대를 두었으며, 따로 상대는 두지 않았다. 견대 아래로는 유곽과 보살입상이 번갈아가며 네 곳에 자리잡고 있다. 유곽은 역시 조선 종의 특징대로 견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벼운 사다리꼴 테두리를 두른 형태로 마련하였으며, 그 안에는 아홉 개의 유두가 정연하게 도드라져 있다. 원형의 두광(頭光)을 두르고 화려한 보관을 쓴 채 단정히 합장하고 선 보살상은 원만한 인상을 풍긴다.
홍치4년명 동종조선 성종 때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무늬가 가득한 매우 장식적인 종이다.
종 몸체 가운데에는 세 줄의 융기선을 돌려 중대로 삼았다. 이 점은 조선 종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 아래와 위에 띠처럼 새겨넣은 무늬는 이 종만이 보여주는 새로운 양식이다. 즉 중대와 유곽 사이의 공간에는 부드럽고 화려하게 양각된 보상당초무늬가 가득히 채워져 있으며, 중대 아래에서 하대 사이의 공간도 2단으로 나뉘어 상단에는 구름을 헤치며 날고 있는 네 마리 용과 여의주를, 하단에는 거친 파도가 치는 모습을 반쯤 도안화한 형태로 섬세하게 새김질하였다. 특히 종의 몸체에 운룡무늬가 새겨진 경우는 이전의 종에서는 없던 일로, 이 해인사 동종에 처음 등장하여 이후에 만들어지는 동종의 선행양식이 된다.
하대는 조선 종의 특징대로 종의 끝자락에서 얼마간 올라온 자리에 돌려져 있다. 그러나 하대 안 여덟 군데에 놓인 팔괘무늬는 이 종 특유의 장식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조선 종이라면 여기에 파도무늬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팔괘무늬로 바뀌고 파도무늬는 하대보다 한 단 위로 옮겨가고 있다. 사실 팔괘무늬가 해인사 동종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 말인 1346년에 조성된 개성 연복사 동종(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30호)에 이미 문양으로 채택된 적이 있긴 하다. 해인사 동종은 그것을 받아들여 이후 만들어진 종들에서 팔괘무늬가 드물지 않게 하는 계기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해인사 동종은 하대의 아랫부분을 제외하면 종 전체가 무늬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무늬들이 주조(鑄造)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아주 세련되고 정치하며 화려하다. 한마디로 해인사 동종은 ‘조선 종의 가장 장식적인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문화가 난숙기를 지나서야 나타날 수 있는, 건국 초기의 청신한 기풍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종이기도 하다. 네 곳의 유곽 아래 “弘治四年 辛亥春成 海印寺 寂光殿鐘”(홍치사년 신해춘성 해인사 적광전종)이란 글자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성종 22년(1491) 봄에 만든 해인사 적광전의 종’이라는 말이다. 이를 통해 이 종이 해인사가 겪은 숱한 재난 속에서도 처음 만들어진 목적대로 오백 년 넘게 해인사 대적광전을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대적광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종을 그대로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진품은 해인사의 박물관이 개관한 뒤에야 볼 수 있을 듯하다. 보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긴 해도 아쉬움이 크다. 높이 85㎝, 입지름 58㎝, 밑동 두께 6㎝되는 아담한 크기의 종으로, 보물이다.
목조희랑대사상
한 절을 거쳐간 고승을 추념하기 위해 불교에서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 부도나 비를 세우거나 아니면 초상화, 곧 진영(眞影)을 그려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리라. 그분 생전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기는 수도 있을 것이다. 초상조각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왠지 우리에게 낯설다. 서양이라면 실존했던 인물의 흉상 또는 전신상의 제작이 강한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다. 특히 시대가 올라갈수록 이 점은 두드러진다. 조선시대에도 초상조각은 드문 예에 속하고, 고려나 신라로 올라가면 그것은 낮달을 보기보다 어려운 실정이다.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초상조각은 우리 선조들이 썩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었지 싶다. 그런 가운데 이채롭게도 해인사에 고려 초의 초상조각이 한 점 전해온다. 목조희랑대사상(木造希朗大師像)이 그것이다.
목조희랑대사상초상조각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고려 초기의 초상조각으로 마치 희랑대사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 사실적이다. 이 초상조각의 주인공 희랑스님은 누구인가?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대로 그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해인사에 주석(住錫)하며 이른바 화엄학의 양대 파벌인 남악파와 북악파 가운데 후자를 이끌던 화엄학의 종장(宗匠)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조한, 고려 태조의 복전이기도 했던 스님이다. 그의 이름을 딴 암자인 희랑대(希朗臺)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해인사에서는 퍽 중요한 역사적 인물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종교적으로는 심오한 사상에 정통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변화의 시대를 주도해간 ‘성공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희랑스님을 당당한 기상, 좋은 풍채에 능수능란하게 상황 변화에 대처하는 활달한 수완가로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막상 희랑대사상을 통해 보는 스님의 모습은 이와는 많이 다르다. 적어도 이 조각만으로 본다면 희랑스님은 호한(浩汗)한 화엄의 세계를 헤엄친 사상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난세(亂世)를 헤쳐간 풍운아의 인상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단지 한평생을 오롯한 정진으로 일관한 조용한 수행자의 모습이 담겨 있을 뿐이다. 칠십 고개를 바라보는 곱고 단아한 학자풍의 노스님 한 분이 맑은 눈길로 앞을 응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주 기름한 얼굴은 깡마른 편은 아니지만 어디에도 살집이 없어 수행자의 얼굴답다.
이마의 깊은 주름, 눈가와 입 언저리의 잔주름에는 스님이 살아온 세월이 차분하게 담겼다. 얇은 입술은 진중해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다변으로 말솜씨를 자랑할 것 같지도 않다. 잔잔한 목소리가 나직나직 흘러나올 듯하다. 긴 목에는 성대뼈가 불거졌고, 그 아래 열린 옷깃 안으로는 빗장뼈가 드러났다. 역시 욕심 없는 수행자에 걸맞는 모습이다. 손 모양도 단정하다. 흔히 불보살상은 수인(手印)이라 하여 다양한 손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지만, 이 스님상은 가부좌한 두 무릎 사이에 올려놓은 왼손 위에 오른손을 가볍게 포개고 있을 뿐이다. 법의(法衣)는 오늘날 스님들의 옷차림처럼 장삼과 가사로 이루어졌지만 모양과 색상은 조금 다르다. 장삼은 목이 깊게 팬 것이라든지 흰 바탕에 붉고 푸른 점이 꽃무늬처럼 찍힌 점 따위가 요즈음과 다르고, 가사도 안감은 군청색을 띠고 있으며 겉감은 붉은 바탕에 녹색띠를 가로세로 어긋 매겨 얼마간은 낯설다. 문제는 이런 복장이 과연 희랑스님 당시의 법의를 걸친 모습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틀림없이 그 무렵의 복식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뚜렷한 증거도 없다. 다만 오늘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몇 번인가 덧칠이 되었다고 보는 게 순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희랑대사상은 대단히 사실적인 조각품이다. 같은 불교조각 가운데 불상이나 보살상은 설사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곳곳에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이상화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희랑스님상은 전혀 그런 구석이 없고, 있는 모습을 꾸밈없이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습은 우리가 언제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노년에 든 수행자의 반듯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꼭 한 가지 비사실적인 부분이 있긴 하다. 가슴에 뚫린 작은 구멍이 그것이다. 해인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희랑스님 당대에 해인사에는 모기들이 극성을 부려 스님네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한다. 보다못한 희랑스님이 자신이 살고 있던 암자, 희랑대로 모기들을 불러모아 협상을 했다. 자신이 먹이를 배불리 줄 테니 다른 스님네는 절대 괴롭히지 않기로. 협상 조건은 존중되었다. 까닭에 지금도 희랑대 근처에는 모기가 들끓지만 큰절에는 모기가 없다고 해인사 스님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희랑스님상의 가슴에 남은 동그란 자국은 그때 스님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布施)하던 구멍이라는 얘기다. 일설에는 이 자국이 스님이 삼매(三昧)에 들어 빛을 내쏜 자취라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굳이 사실 여부를 따질 것까지야 없지 싶다.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들어두면 되니까. 희랑대사상의 재료는 나무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나의 통나무로 상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몇 토막의 나무를 이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조각을 끝낸 상 위에 고운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다시 옻칠과 같은 덧칠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채색을 올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작자가 누구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해인사에는 이 상을 희랑스님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 말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노년에 접어든 고승이 손수 자신의 초상을 조각한다는 사실이 불교적 사고방식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이 말을 희랑대사상이 희랑스님 생전에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희랑스님이 돌아간 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희랑대사상은 늦어도 10세기를 넘기기 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사의 희랑대사상은 마치 기념사진처럼 희랑스님의 인품과 학덕까지도 엿볼 수 있는 사실성이 매우 뛰어난 초상조각이다. 아울러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각 작품이기도 하다. 상의 높이 82㎝, 보물이다.
팔만대장경
80세를 일기로 수행자들의 벗, 먼저 길을 간 안내자임을 자처하던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했다. 그를 따르던 수행자들과 재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위대한 인격의 사라짐을 슬퍼하며 깊은 비탄에 잠겼다. 그럴 즈음 한 젊은 출가수행자가 이렇게 외쳤다. “자, 해방이다. 저 늙은 잔소리꾼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앞길에는 무엇이건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열려 있다. 우리는 비로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누리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대중들은 놀랐다. 특히 교단을 이끌어갈 책무가 주어진 장로들의 충격은 컸다. 시급히 불타의 교설을 정리하여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 할 필요가 절실함을 느꼈다. 서둘러 세존의 가르침을 결집하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때는 석가모니가 입멸하던 해,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성 교외의 한 바위굴에 500명의 장로들이 모였다. 주재자는 마하가섭존자였다. 이 자리에서 각자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교법을 모으고 대중적인 토의를 거쳐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통일된 교설을 확정했다. 실제에 있어선 대부분의 교설이 아난존자에 의해 토의석상에 상정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부처님의 수행비서를 지냈으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섭존자의 지시에 따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如是我聞)······” 하고 자신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바를 ‘송출’(誦出)하고 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장로들이 그 내용이 부처님 말씀과 틀림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한 뒤, 아직 문자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이었으므로 최종적으로 500명의 비구들이 한 목소리로 이를 외워서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교설의 내용은 확정되었다. 우리는 이를 ‘대합송’(大合誦)이라 부른다. 경건하고 장엄한 광경이었으리라.
교단의 생활규범, 즉 계율도 똑같은 방식으로 모아졌다. 다만 이때는 송출자가 아난존자 아닌 우바리존자였음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석가모니 제자 가운데 계율에 대해 가장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또 계율을 제일 잘 지킨 인물이었고, 때문에 뒷날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지계제일’(持戒第一)로 알려진 수행자였다. 이렇게 석가모니가 설하고 제정한 교법과 계율, 즉 경(經)과 율(律)이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모아진 일을 ‘제일결집’(第一結集)이라 한다. 경과 율이 결집된 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 경과 율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연구가 진척되었다. 주로 고승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들을 통칭하여 논(論)이라 한다. 이리하여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이른바 삼장(三藏)2)이 갖추어졌다. 이윽고 이 삼장은 불교가 인도를 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됨에 따라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질 때에도 그러하여 산스크리트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소개하는 일은 불교도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거의 모든 경전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이었다. 삼장의 양이 워낙 방대하여 한꺼번에 모두 번역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고, 따라서 번역자의 관심과 필요, 또는 목적에 따라 그때그때 번역이 이루어지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같은 경전이 거듭 번역되거나 내용과 체제가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번역된 경전들도 널리 유통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유통 과정에서 생기는 내용의 변형도 문제였다. 수(隋)·당(唐)을 거쳐 오대(五代)의 말기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서적의 유통은 필사(筆寫), 곧 베껴쓰기에 의존하였으므로 유통 범위는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필사의 단계가 늘어날수록 오류가 많아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난점들은 필연적으로 그동안 비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한역 경전들을 집대성하고 필사의 방법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전들을 돌이나 나무에 새겨 간직하려는 움직임을 낳았다. 그리하여 경·율·논을 체계적으로 정리·집성하여 나무판에 새긴 목판대장경이 출현하게 된다. 최초의 목판대장경은 북송 태조의 명으로 972년에 판각이 시작되어 만 11년 뒤인 983년에 완성된 북송 관판대장경(北宋 官版大藏經, 蜀版大藏經·開寶版大藏經이라고도 불렸다)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한역된 불전들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류·정리한 불전 목록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수록된 불전들을 새겨서 만든 것으로, 모두 1,076부 5,048권의 경전이 무려 13만 매의 목판에 새겨진 방대한 것이었다. 이 대장경은 한자문화권 최초의 대대적인 불전 정리작업이자 최초의 경전 판각 인쇄사업이었다. 따라서 대장경이란 말도 이때에 비로소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북송 관판대장경이 등장하자 그 뒤를 이어 가장 먼저 대장경 조조(雕造)를 추진한 곳은 고려였다. 고려에서는 현종 2년(1011)에 처음으로 대장경 조조를 시작하여 선종 4년(1087)까지 6대 76년에 걸쳐 작업을 진행하여 완성을 보았다.3) 우리가 흔히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초조대장경은 대체로 북송 관판대장경의 내용과 체제를 따랐지만 고려인들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거란에서는 비록 초조대장경보다 늦은 흥종(재위 1031~1054) 때 조판을 시작하였지만 완성은 적어도 24년 이상 빠른 거란대장경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1063년 거란에서 이 대장경 전질(全秩)을 보내오자 고려에서는 그 내용을 초조대장경 조판에 적극 반영하였다. 그 결과 고려 초조대장경 안에는 거란대장경에만 실린 불전들이 다수 수록되기에 이르렀고, 전체적인 분량도 570질 5,924권에 달해 북송 관판대장경보다 876권이나 많은 경전이 실리게 되었다.
팔만대장경판완성된 지 750년이 지난 목판이지만 마치 어제 만든 듯하다. 팔만대장경판의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판이다. 초조대장경을 만든 고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율·논 삼장에 대한 고금의 주석서와 그밖의 연구논문, 특히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여러 승려들에 의해 이룩된 저술들까지도 망라하는 대장경을 간행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른바 고려 속장경의 개판(開板)이다. 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었다. 문종의 넷째아들이면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그는 1085년 송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다니며 약 3천여 권의 문헌을 수집하여 귀국한 뒤, 계속하여 안으로는 국내 곳곳에서 고서를 모으고 밖으로는 요(遼), 일본 등에서 서적을 구입하였다.그는 우선 이렇게 수집한 문헌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간행하여 속장경에 수록할 서적을 결정한 다음,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 조조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1092년부터 1100년, 그가 입적하기 한 해 전까지 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대사업을 마무리하였는데, 여기에 실린 문헌은 그 수가 1,010부 4,740여 권에 달했다. 이 가운데는 중국에서 찬술된 문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신라 승려들의 저술도 119부 355권이나 포함되어 있어서 의천의 생각이나 속장경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매우 아쉽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속장경이나 초조대장경은 현존하지 않는다. 속장경은 어디에 봉안하였는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4) 다만 그 경판의 일부가 송광사에서 발견되었고 얼마간의 판본이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그 편린을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다. 초조대장경은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보존되다가 1232년 몽골병의 제2차 침입 때 저들의 방화로 불타버리고 말았다.5) 오늘날에는 일부 판본이 국내에 흩어져 있으며, 일본 난젠지(南禪寺)에도 약간의 판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장경판전 내부자연적인 습도조절이 완벽한 판전 내부의 판가 모습이다. 대장경판이 판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초조대장경이 한 줌 재로 사라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대몽항쟁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곧바로 새로운 대장경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 정부는 먼저 대장경 조성을 총괄하는 기구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대장도감에서는 판각용 나무의 산지를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벌목, 벌목한 나무를 바닷물에 담그거나 소금물에 끓여 나무의 진을 빼고 결을 삭히며 그늘에서 건조하는 일, 그런 나무들을 판각에 필요한 두께와 크기로 만들어 다듬는 연판작업, 여기에 새길 경전들을 낱낱이 교정하여 판하본(板下本)을 결정하는 일, 그리고 판하본을 글씨 잘 쓰는 이들로 하여금 경판의 체제에 맞추어 베껴쓰도록 하는 등사작업 등 수년에 걸친 예비작업을 거쳐 1237년부터 본격적인 판각에 들어갔다. 판각작업은 모두 12년이 걸려 1248년에 끝이 났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251년에는 낙성경찬회가 열려 대장경이 최종 완성되었음을 내외에 알렸다.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해인사에 보전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등으로 불리는 고려 대장도감판 대장경이다.
우리가 이 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보통 인도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수를 표현할 때 팔만사천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서 유래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 대장경을 줄여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는 것, 인간의 번뇌 또한 무한하여 팔만사천 번뇌가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그 많은 번뇌를 다스릴 수 있는 부처님 가르침, 곧 법문(法門)도 팔만사천 가지인데 그것을 고스란히 판에 새긴 대장경이므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 그 풀이이다. 게다가 실제 경판의 양도 81,340매에 이르니 이 또한 이름에 부합하는 셈이다. 비록 경판은 8만 매가 넘지만 낱낱 경판은 거의 한결같은 크기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경판 하나의 크기는 대체로 가로 70㎝ 세로 24㎝ 두께 2.8㎝이고, 무게는 3.25㎏ 정도이다. 앞뒤 양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면마다 23줄, 줄마다 14자의 글자를 새겨 경판 1매에는 원칙적으로 64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경판 전체에는 무려 5,200만 자가 넘는 글자가 담겨 있다는 추산이 나온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이를 모두 인쇄하여 책으로 묶으면 1,501종 6,708권6)의 경전이 된다. 경판이 완성된 뒤에는 표면에 옻칠을 하여 해충의 피해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판의 양쪽 가장자리에 경판보다 약간 두꺼운 각목을 마구리로 대어 경판의 뒤틀림과 갈라짐을 예방하면서 경판을 인쇄할 때는 이를 손잡이로 사용하고, 평소 겹쳐서 보관할 때는 글자가 새겨진 면이 서로 닿지 않고 그 사이로 통풍이 잘 되도록 배려했다.
팔만대장경판의 마구리대장경판의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경판 양쪽 가장자리에 두꺼운 각목을 대었을 뿐 아니라 다시 네 귀퉁이를 동판으로 감쌌는데, 그 모습이 튼튼해보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동안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과 의문이 있어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 많은 경판을 만든 판목은 대체 무슨 나무일까 하는 점이었다. 백화목(白樺木), 즉 자작나무가 판목의 주종을 이룬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목재조직학을 이용한 표본적인 재질 조사에 따르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각각 판목의 62%와 13%를 차지하여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자작나무는 그보다 훨씬 비율이 낮은 8%를 점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층층나무(6%), 단풍나무(3%), 후박나무(3%)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그밖에 버드나무, 굴거리나무도 얼마간 사용하였음이 밝혀졌다. 대장경 조성 사업을 서로 분담했던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은 어떤 관계였으며 어디에 몇 군데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또 다른 의문의 하나였다. 대장경판에는 경전 한 권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경판 말미에 간기(刊記)가 붙어 있다. 대장경판 전체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불과 한두 글자씩 다를망정 꽤 여러 종류의 간기가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형식은 ‘○○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 또는 ‘○○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이다. 이로써 판각작업이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종경록』(宗鏡錄) 제27권 간기는 ‘丁未歲高麗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정미세고려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이라고 되어 있어 분사대장도감이 설치되었던 곳을 알려주고 있다. 이 간기와 기타 몇 가지 문헌기록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대장도감은 강화도에, 분사대장도감은 남해에만 있었던 걸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간기를 좀더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동일한 경전을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나누어 판각한 경우가 적지 않게 있음이 확인되었다. 심지어 2권 또는 3권으로 구성되는 적은 분량의 경전을 두 도감에서 나누어 판각하거나, 전체 60권 가운데 한 권만을 대장도감에서 판각하고 나머지는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우도 있음이 드러났다. 더 나아가 경판을 새긴 각수를 조사한 결과, 같은 경전을 권수만 달리하여 동일한 각수가 같은 기간에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동시에 새기고 있는 경우가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들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동일한 장소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당시 상황에서 강화의 대장도감에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을 오고가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한 경전의 극히 일부나 양이 적은 경전을 나누어 판각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고, 같은 각수가 동일한 기간에 강화와 남해를 오가며 판각할 가능성은 더욱 없는 까닭이다. 오히려 이 같은 사실로부터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같은 곳에 있었다고 유추함이 훨씬 자연스럽다. 따라서 분사대장도감이 남해뿐 아니라 강화도에도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이는 아예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모두 남해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제까지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강화에서 대장경판의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두 도감이 아주 가깝거나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분명히 밝혀졌지만 그 이상의 의견은 여타의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추론에 지나지 않으므로 앞으로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대장경판을 새긴 동기가 무엇인가도 논란거리이다.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발원에서 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이었다. 이규보(李奎報)의 유명한 「대장경을 새기며 임금과 신하가 올리는 기원의 글」(大藏刻板君臣祈告文)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런 해석에 살을 붙여 당시 국교였던 불교, 그것을 상징하는 대장경 판각이라는 거국적 사업을 통해 임금과 신하와 백성들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 이에 반하는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는 대몽항쟁의식을 고취시키고 그 힘을 바탕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대장경 조성의 주된 동기를 이룬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반대에 가까운 해석도 있다. 대장경 조조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이를 발의하여 주관하고 완수한 것은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와 그의 계승자인 아들 항(沆)이었다. 이들은 전란의 와중에서도 대장경 조조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이유를 최씨 무신정권의 수립과 유지 과정에서 드러난 그들의 불법성·폭력성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저항의 예봉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또 외적의 칼날 아래 맨몸뚱이로 장기간 방치된 백성들은 아랑곳없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강화도에서 피난하고 있는 최씨 무신정권으로 대표되는 무능하고 부패하고 부도덕한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와 불만을 종교적으로 해소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전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논리적, 현실적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고, 반대로 후자는 지나친 정치 편향의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이 문제도 다양한 각도의 접근이 요망된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의 역사적 배경을 첫째 최씨 무신정권의 정치적 목적, 둘째 6차에 걸친 몽골 침입이라는 미증유의 전란 속에서 오히려 강화된 민족의식·문화의식, 당시 고려 불교의 발전과 그 전통적 저력의 결합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완성된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가 언제, 어떤 경로로 해인사에 이안(移安)되었는지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문제이다. 『고려사』(高麗史) 권24의 기록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안치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으레 이 판당은 곧 선원사를 가리킨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서문 밖의 판당이 곧 선원사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태조실록』의 7년 5월 10일자 “강화 선원사로부터 옮겨온 대장경을 보기 위해 용산강에 행차하였다”(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輸自江華禪源寺)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1398년 이전 한동안 팔만대장경이 선원사에 봉안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 예로 고려 말기설, 태조 원년설, 태조 6년설, 조선 초기설 따위를 들 수 있는데, 어느 경우도 논리적인 취약점 또는 근거가 불충분한 문제점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결정적인 반증이 없는 한 비교적 믿을 만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에 따르면 앞서 본 대로 팔만대장경은 1398년 5월 이전에 강화도 선원사를 떠났음을 알 수 있고, 또 정종 원년 정월 9일의 기사에 의하면 이때 이미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출(印出)하고 있음도 틀림없다. 그러므로 강화도를 떠난 팔만대장경은 1398년 5월 한양을 경유하여 1399년 정월 이전에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하겠다.
운송 경로도 아직 명확치 않다. 크게 수로를 이용하여 운반했다는 설과 육로로 수송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수로이용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해로이용설이니, 한양의 한강에서 선적된 팔만대장경은 서해 연안의 수로를 이용해 해상 운반되었다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내륙수로 이용설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 충주에 이른 다음 육로로 새재를 넘고 다시 낙동강 물길을 이용하여 옮겼다는 의견이다. 육로운반설은 새재를 넘는 단계까지는 내륙수로 이용설과 같지만 그 뒤 낙동강 물길을 버리고 육로로 해인사까지 이운(移運)했다는 의견이다. 이 또한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다. 이처럼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숱한 의문과 논쟁거리를 품고 있지만 그것이 지닌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팔만대장경은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20종 이상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며, 현존하는 대장경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뿐 아니라 팔만대장경은 교정이 정밀하고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없기로도 유명하다. 이는 팔만대장경을 조조하기에 앞서 기존의 대장경들을 엄밀히 비교, 대조하여 가장 나은 선본(善本)을 채택한 다음 그를 바탕으로 완벽에 가까운 판하본을 만들고, 그에 따라 치밀하고 빈틈없이 판각작업을 진행시킨 결과이다. 고려 불교의 높은 수준과 대장경 조성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의 열정,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팔만대장경의 판하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대장경은 북송 관판대장경, 거란대장경, 초조대장경 등이다. 따라서 이들 대장경이 경판은 물론 판본조차 거의 모두 지상에서 사라진 현재 그 내용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팔만대장경이기도 하다. 한 연구에 의해 거란대장경 가운데 적어도 20여 종 300권 가까운 경전이 팔만대장경에 수록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팔만대장경의 성가를 입증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또 팔만대장경은 풍부한 내용을 자랑한다. 단적인 예로 팔만대장경보다 후대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대장경들 대부분이 양적으로 팔만대장경에 미치지 못함을 통해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일본과 중국의 여러 대장경은 물론 20세기 초 일본에서 인쇄본으로 만들어져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활용되고 있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조차도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내용이 풍부함으로 말미암은 미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다른 어느 대장경에도 실려 있지 않되 팔만대장경에만 올라 있는 경전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 『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따위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전적들은 만일 팔만대장경에 수록되지 않았더라면 그 존재조차 모른 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판각기술의 측면에서 보아도 대단하다. 판각용정서본(板刻用淨書本), 곧 판서본을 필사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적어도 수백 명을 넘고 그것을 판에 새긴 각수들 또한 그 이상으로 많았을 텐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장경판의 글씨는 마치 한 사람이 쓰고 새긴 듯 한결같다. 하긴 경판을 새길 때 일배일각(一拜一刻), 곧 부처님께 절 한 번 하고 글자 한 자 새겼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니, 그런 정성에 고려인들이 쌓아온 목판인쇄기술이 합쳐졌다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팔만대장경은 오늘날까지 거의 아무런 손상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글자가 마모, 결락된 것도 없으며, 경판이 부식되거나 갈라지거나 휘고 뒤틀린 것도 없다. 완성된 지 750년 이상이 지난 목판이 마치 어제 만든 듯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다. 경판의 보존 상태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것은 아마도 판각에 적합한 목재의 선택에서부터 판각이 끝난 경판 표면에 옻칠을 하여 마감하기까지 각 단계별 처리과정에 세심한 배려가 기울여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요컨대 팔만대장경은 고려인의 성실성과 열정에 더하여 생활과학, 경험과학이 낳은 목판인쇄문화의 결정판이라 하겠으며, 오늘날 우리가 정말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이요 찬란한 자부심이다. 국보 제32호이며,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대장경판전
해인사의 중심 불전(佛殿)인 대적광전을 뒤로 돌아들면 고색이 듬뿍 앉은 이중의 긴 돌축대 한가운데 높고 가파른 돌층계가 막아선다. 스물세 단 그 계단을 올라서면 흰 회벽 위로 담쟁이덩굴 너울너울 뻗어가는 정감 넘치는 담장을 반으로 가르며 일각문이 솟았다. 그 일각문을 넘어서면 넓게 두른 담장 안에 네 채의 건물이 긴네모꼴 평면을 이루며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흔히 장경각(藏經閣)이라고 부르는, 팔만대장경판과 그밖의 경판들을 간직하고 있는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이다. 남북의 두 건물에는 국간판(國刊板), 곧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고, 그 사이 동쪽과 서쪽 끝의 두 건물에는 팔만대장경보다 앞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경판들7)을 비롯하여 사찰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든 경판, 즉 사간판(寺刊板)이 안치되어 있다. 남북의 두 건물에는 각각 수다라장(脩多羅藏),8) 법보전(法寶殿)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이름을 통해서도 대장경을 갈무리한 두 건물의 쓰임새를 금방 알 수 있다. 두 건물은 크기와 모양이 같아서 정면 15칸 측면 2칸에, 익공계9) 우진각지붕 홑처마집이다. 보통 사간판고(寺刊板庫)라고 불리는 동서의 두 건물도 정면 2칸 측면 1칸에 주심포 맞배지붕 홑처마집으로 서로 크기와 모양이 같다.
해인사 대장경판전 전경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에 보수를 시작하여 7년 뒤인 1488년에 마쳤다고 하는데 지금의 대장경판전의 모습은 그때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장경판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상적이라면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올 무렵 신축되었겠지만 그런 사실을 전하는 아무런 기록이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세조 4년(1458) 원래의 판전 건물이 비좁아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해인사의 역사를 전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과는 다를망정 판전 건물이 늦어도 15세기 초에는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성종 12년(1481) 판전 보수에 착수하여 7년 뒤인 1488년에 일을 마쳤다 하며, ‘弘治四年’(1488)이라 새겨진 암막새에 “대장경판당 30칸을 수리하고 지붕을 이었다”(大藏經板堂三十間修葺)는 글씨가 남아 전하는 점으로 미루어 지금의 건물은 이때 형태를 갖추었다고 추정된다.
1964년부터 진행된 장경판전 보수공사 때 수다라장과 법보전 마루도리에서 묵서(墨書)와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622년에 수다라장, 1624년에 법보전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오늘날까지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겠지만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장경판전은 현재 해인사에 즐비하게 늘어선 수십 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해인사의 잦은 대화재로 다른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장경판전만은 무사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 간직된 대장경을 생각하면 참으로 천행이고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장경판전은 그 안에 갈무리된 대장경판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세운 집이다. 아마도 나무로 만들어진 대장경판을 오래 보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유지, 직사광선의 차단, 원활한 통풍과 환기 따위일 것이다. 장경판전은 이러한 쓰임새에 필요한 요소들이 주도면밀하게 베풀어진 건물이다. 우선 건물의 바닥부터가 여느 건물과는 다르다. 장경판전이 들어선 자리는 배수가 잘 되는 토질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만족치 않고 집이 앉을 자리에는 석회, 숯, 소금을 겹겹이 다져넣고 그 위를 황토로 마감하였다 한다. 알다시피 석회, 숯, 소금 따위는 모두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밑바닥에 층을 이루고 있으므로 비가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건물 안의 습기를 빨아들여 습도를 낮추고, 반대로 건조한 때에는 머금었던 습기를 내뿜어 적정한 습도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식 자동습도조절 장치인 셈이다.
대장경판전 배치평면도
햇빛은 경판의 보호에 득실이 반반이다. 그 속의 자외선은 이끼, 곰팡이, 곤충, 식물 등 생물의 번식을 막는 작용을 하며, 적외선은 흙바닥을 데워 공기의 대류를 촉진시켜 건물 안의 온도를 균일하게 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동시에, 자외선과 일부 가시광선은 목재를 변질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 장경판전은 햇빛의 이런 이중성을 건물의 방향과 살창 구조, 경판을 올려놓는 판가(板架)를 통해 조절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서남향에서도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좌향을 하고 있으며, 앞뒤 벽면에는 칸마다 상하 2단의 살창을 낸 개방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좌향과 구조를 통해 건물 내부의 필요한 곳, 즉 흙바닥으로 햇빛을 적절히 걸러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면서, 판가를 벽면에서 멀찍이 띄우고 흙바닥에서도 30㎝쯤 높여 설치함으로써 직사광선이 직접 경판에 닿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수다라장의 월문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대장경판전 구역으로 오르면 만나는 아름다운 문으로 그 모양이 둥글어 월문이라 부른다.살창구조는 일광의 조절뿐 아니라 환기와 통풍에도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는 장경판전의 핵심적 요소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앞뒤 벽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살창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문 크기의 미묘한 변화와 아주 독특한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크게 보자면 두 건물의 앞면 살창은 위쪽이 작고 아래쪽이 크며, 반대로 뒷면의 살창은 위쪽이 크고 아래쪽이 작아 한 건물의 앞뒷면이 서로 상반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건물의 앞면, 즉 남쪽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아래쪽으로 잘 받아들여 건물 안에서 원활한 대류작용을 유도한 다음 뒷면의 위쪽 창으로 내보내기 위한 탁월한 구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창문을 조사해보면 그 구조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눈치채게 된다.
수다라장의 앞면 살창은 아래가 2.15m×1.0m=2.15㎡이고, 위가 1.2m×0.44m=0.528㎡이다. 그러므로 아래창이 위창보다 약 4배 크다. 그런데 뒷면은 아래창이 1.36m×1.2m=1.632㎡이고 위창은 2.4×1.0=2.4㎡로 위창이 아래창보다 1.47배 크다. 다시 말해 아래위의 살창 크기가 건물 앞뒷면에서 단순하게 역전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 점은 법보전도 마찬가지다. 미세한 수치는 조금 다를지라도 정면은 아래창이 위창보다 약 4.6배 크고, 후면은 위창이 아래창보다 약 1.5배 커서 비율상으로는 두 건물의 살창구조가 흡사하다.
또 법보전의 뒷벽 살창들은 칸마다 조금씩 크기가 다르다는 것도 조사되었다. 도대체 크기가 다른 벽면 아래위의 살창이 건물 앞뒤에서 단순하게 역전되지 않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비율로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나, 북쪽 건물인 법보전 뒷면 벽의 살창들은 칸마다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현재로선 장경판전의 뒤쪽, 곧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고 습한 공기는 적절히 차단하면서 건물 안의 통풍과 환기를 원활히 하려는 장치이려니 짐작만 할 뿐 그 이상은 별로 밝혀진 게 없다. 옛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의 소산이 과학세대를 자처하는 현대인들을 비웃는 격이라고나 할지.
대장경판전의 살창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앞뒤 벽면의 실창은 그 크기가 다르다. 이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잘 받아들여 건물 안에서 원만한 대류작용을 유도하기 위한 구조로, 매우 탁월한 기능이 입증되었다.대장경판 보존에 관한 한 현대인의 과학이 옛사람들의 경험을 따라잡지 못함은 그저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 1973년 정부에서는 화재에 매우 취약한 경판과 판전을 안전하게 보전하겠다는 명분으로 지금의 장경판전과 크기가 똑같은 지상 1층 지하 1층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새로운 판전을 세워 대장경판을 그리로 옮겨 보관하겠다는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계획에 대해 현재의 판전에서 700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것을 굳이 건물을 신축하면서까지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과 풍수지리설, 신앙적 측면을 내세워 해인사 측과 조계종단에서 먼저 반대를 하고 나섰다. 더 강력한 반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 일에 간여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경판전의 통풍 및 습도조절 기능이 이상적일 뿐더러, 시멘트로 판전이 신축되면 그 독소가 끼칠 해독이 경판에 더 많은 손상을 입히게 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공사를 강행했다. 그리고 그 건물은 1976년 완공을 보았다. 그러나 그 건물은 실패였다.
지하 1층, 지상 1층의 이 건물은 연건평이 574평인 현대식 건물로 방화에는 효과적이나 방수와 방습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음이 준공 후 10여 차례에 걸친 기술조사 결과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지하실에서는 각 벽면마다 물이 스며들어 밑바닥이 질퍽일 정도이고, 지상의 경우도 습기가 차서 나무에 곰팡이가 슬 정도라니, 이런 형편에서 만약 대장경판을 옮긴다면 727년간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세계적인 문화재가 단시일 안에 심히 손상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1978년 1월의 한 신문 칼럼이 전하고 있는 실패의 실상이다. 온·습도를 조절하기 위해서 독일 기술진까지 동원했던 결과가 그러했다. 일은 아까운 국가 예산만 낭비한 채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한편의 소화(笑話)는 군사독재정권의 무모한 강압식 문화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의 장경판전이 얼마나 뛰어난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장경판전은 이렇게 빼어난 기능성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사상과 교리를 건축적으로 구현해 보여주기도 한다. 먼저 우리는 장경판전이 들어선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심 법당의 정면 뒤, 이 위치는 이른바 삼보사찰의 상징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점이다. 불보인 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그렇고, 승보인 수행자들의 수행 공간인 송광사의 수선사(修禪社)가 그러하며, 이제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안치한 해인사의 장경판전 또한 그러한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에 해인사가 해인사라면, 그 말은 곧 장경판전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해인사가 해인사라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모두 정면 15칸 측면 2칸의 건물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곧 기둥열이 앞, 가운데, 뒤의 세 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실제로도 그러하여 가운데 높은 기둥[高柱]이 한 줄 서고 앞뒤로 평기둥이 한 줄씩 늘어서 있다. 따라서 수다라장의 기둥을 모두 합한 수가 48개, 법보전도 그 숫자가 48개이다. 여기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동서 사간판고의 기둥 수가 각각 6개씩이다. 이들을 전부 합친 숫자, 즉 장경판전 네 채 건물의 기둥 수는 108개가 된다. 백팔염주, 백팔번뇌 하듯이 이 숫자가 불교와 매우 친숙한 숫자임은 내남없이 다 아는 노릇이다. 백팔번뇌가 벌어지면 팔만사천 번뇌가 되고 그를 다스리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문이 있고 백팔법문이 있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 아닌가. 팔만사천 법문을 담은 팔만대장경이 108개 기둥으로 받친 집에 들어 있음-이 기막힌 은유가 과연 우연일 수 있겠는가?
장경판전은 기능성이나 종교성을 두고라도 매우 차원 높은 건축의 세계를 보여준다. 장경판전은 단순과 반복을 주개념으로 사용한 건축이다. 다듬지도 모나지도 않은 덤벙주초 위에 은은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는 아주 간단한 초익공을 올려 보머리를 받고 있을 뿐이다. 처마도 서까래가 한 줄 걸린 홑처마이다. 위 아래로 뚫린 살창 역시 기능에 충실할 뿐 어떠한 욕구도 내보이지 않는다. 그뿐이다.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아무런 장식도 기교도 조작도 없다. 필요가 낳은 디자인이고, 그래서 필요미의 최대치이다. 그리고 이 단순은 단발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5칸이나 되는 긴 흐름을 따라 끝없이 되풀이된다. 때문에 단순성은 강화되고 고조된다. 그럴 때의 단순은 평범한 단순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고귀한 단순’인 것이다. 간밤의 정적을 한껏 흡수했던 대기가 아직 깨어나기 전의 이른 시각, 혹은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가고 엷은 어둠을 따라 고요가 내리는 저녁 무렵에 장경판전의 바깥 기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라. 그러다가 법보전이나 수다라장의 한쪽 끝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라. 그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 ‘고귀한 단순’이리라.
연속이나 반복은 영원성과 통한다. 인간이 얼마나 반복적인 요소들을 인지할 수 있는가는 디자인 이론의 중요한 논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층수가 5층 정도, 길이 방향으로도 대략 5칸 정도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높이와 길이를 ‘인간적 척도’(human scale), 그 범위를 넘어서는 크기를 ‘기념비적 척도’(monumental scale)라고 한다. 그러니까 5칸을 넘고 10칸을 지나버리면 이제는 그것이 15칸이든 그 이상이든 ‘길다’는 사실만 인지될 뿐, 숫자로 칸 수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는 얘기가 된다. 사람의 인식을 넘어설 정도로 똑같은 기둥이 반복되고 한결같은 창이 되풀이되고 변함없는 칸이 계속될 때 우리는 무한을 생각하게 되고 일상을 넘어선 신성의 영역에 다가가게 되며 무상한 변화의 세계를 지나 영원의 시공 속에 발을 디디게 된다. 그리고 이 영원성은 불타가 설파했던 법, 그것의 현실태로서의 팔만대장경이 갖는 진리의 영원성과 만난다. 수다라장이나 법보전의 15칸이 갖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 단순과 반복을 통해서 장경판전은 우리에게 종교적 경건성을 가르쳐주며 신성조차 느끼게 해준다. 장경판전은 필요가 낳은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건축이다. 건축적 완성도, 종교성, 기능성이 상호 교류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우리에게 무한한 법열을 선사하는 건축이 장경판전이다. 경판 하나하나가 무수히 핀 연꽃이라면 장경판전은 그 연꽃들을 피워올린 장엄한 연못과 같은 건축이다. 국보이며, 1997년 팔만대장경과 함께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봉 마애불입상
공식 명칭은 ‘합천 치인리 마애불입상’이지만, 해인사 스님들은 그냥 ‘중봉 마애불’이라고 부른다. 해인사에서 산길을 따라 2.6㎞쯤 오르면 닿는 산봉우리, 중봉(中峰)에 있기 때문이다. 몸길이 5.8m, 머리 높이 1.7m, 전체 높이 7.5m에 이르는 듬직한 불상이다. 너비 3.1m 되는 바위에 고부조(高浮彫)로 두광(頭光)과 불신(佛身)을 새겼다. 신광(身光)은 따로 새기지 않았으되 바위가 자연스럽게 신광 구실을 한다. 크고 둥두렷한 두광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그게 오히려 불상의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얼굴은 그리 정감이 가는 모습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퉁퉁한 편인 데다 양 볼에 살이 올랐고 턱에도 군살이 졌다. 이마는 좁고 눈꼬리는 위로 치켜졌으며 인중은 짧고 입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작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인중과 입술은 어린아이의 얼굴이라면 귀엽게도 보였으련만 여기서는 오히려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데, 그 뚜렷한 게 지나쳐 마치 아프리카 어느 부족 사람들의 목에 끼운 고리처럼 보인다. 반듯하고 당당한 두 어깨는 각이 졌다. 양쪽 어깨를 감싼 통견(通肩)의 법의는 아주 두꺼워서 몸의 굴곡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발등까지 흘러내린다. 몸 가운데로 반복되는 U자형 옷주름은 잘 다듬어져 있으나 도식적인 반면 양쪽 소맷자락은 그런대로 자연스럽다.
아무래도 이 마애불상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두 손이 아닌가 싶다. 오른손은 어깨 가까이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였고, 손등이 드러난 왼손은 명치 언저리에 얹어 부드럽게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다른 부분이 크기에 걸맞게 선이 굵게 처리되었다면, 두 손만은 곰살궂다 싶을 만큼 자상하다. 펴지거나 구부러진 손가락들은 너무도 천연스럽고 쳐다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말을 거는 듯 표정이 풍부하다. 불상 전체가 남성적이라면 손만큼은 여성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다지 어색하지 않고 도리어 드러나지 않게 딱딱한 분위기를 눅여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중봉 마애불입상은 발랄한 생동감을 주는 불상은 아니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나타나는 형식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또, 굳은 얼굴 표정, 각이 진 어깨, 거의 선각에 가깝게 처리된 옷주름 등 고려시대 마애불에서 보이는 요소도 여럿 간직한 불상이다. 그러나 당당한 풍모와 크기를 고려한다면 몸 각 부분의 고른 신체 비례, 세부에 보이는 섬세함과 세련됨 따위로 보아 당대를 대표하는 마애불상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해인사의 무게가 실린 육중한 거작으로, 보물이다. 큰절의 잡답을 벗어나 마애불로 가는 길은 여간 즐겁지 않다. 봉우리로 오르는 마지막 300m를 빼곤 줄곧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갈 수 있는 길이고, 잡목숲 사이사이로 굵고 곧고 길게 자란 소나무, 잣나무를 넉넉히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셋이 가면 좋고, 둘이 가면 더욱 좋고, 혼자 가면 가장 좋은 길이 중봉 마애불로 오르는 산길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2022-04-1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