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의 여운 (1)
지하철 을지로 3가역은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갈아타려면 긴 환승로를 지나야 한다. 언제인가 환승터널 벽에 아래와 같이 큰 글씨로 짧지만 기다랗게 써놓은 조병화 시인의 ‘찬적’이란 시가 있었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다. 환승통로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동 통로이다. 출퇴근 시간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매우 혼잡스러운 곳이다. 그곳에 한가하게 머무를 수도 없고, 이동하는 짧은 시간이라도 눈에 찍히는 시귀(詩句)이지만 심금(心琴)을 울린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가끔 그 벽화(?)데 대해 이야기 한다. 명시로 회자되면서 사람의 마음을 멈추게 하는 마력을 가진 시이다. 이 시가 꽤 오랫동안 쓰여 있었는데 너무나 강렬한 충격을 받아서 지금까지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그 감동이 되살아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시인의 이 짧은 시의 덫에 걸린 것 같다.
흔히들 산지에서 생선을 신선하게 소비지로 이송하려면 천적끼리 함께 담아서 이동시킨다고 한다. 같은 공간에서 천적끼리 공존하려면 살기위해 항상 긴장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가? 나도 천적인 나와 항상 같이 있어야 하니까, 아니 나와 나의 천적이 일체이므로 살아있는 한 항상 긴장하여야 한다. 서로가 생존에 관한 어려운 결정을 하여야 하니까 긴장 하여야 한다. 결국, 이 핵관(核關)의 정리는 불가에서의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랄까.
조병화 시인의 ‘천적’은 허준의 벽화 ‘근심’과는 대비된다. 허준의 벽돌벽화는 자기수양이 덜 찼음을 되돌아보고 정진하라는 경구이다. 그런데 ‘천적’은 자책, 후회, 반성, 다짐이 되더라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내 탓과 네 탓은 글자 한자, 아니 점 하나의 차이이다. 우리속담에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 ‘잘되면 제 복, 못되면 조상 탓’,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얼마나 ‘이기적 편향(self-serving bias)’인가? 또, 사자성어에 여장절각(汝墻折角)이란 말이 있다. '네 집 돌담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 소가 들이 받아 뿔이 부러졌다‘는 말이다. 대단한 억지이다. 옛말이지만 요새 세상에도 널려있다. 오죽해야 교수들이 2020년의 사자성어로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했겠는가. 이는 바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다. 우리는 더 심한 말인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통치철학을 경험해보기도 했다.[2023.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