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과연 탈일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해외 팬이 많아야 하는데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항목들이 있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일본 국내 팬보다 해외 팬이 더 많다든지 그런 건 아니라서 상업적인 측면만으로 탈일본이라고 하기는 그런데, 사실 해외 진출을 하려면 거대 자본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땜에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 수 없었고 그래서 내용 면에서도 탈일본적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스팀이라도 있어서 해외 진출이 쉬워졌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해 팔고 있으니 해외 팬도 늘고 있지만요. 그렇다고 스팀에 올리기 이전 키 작품에서 탈일본적인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키 전체 작품들에서 탈일본적인 면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겉으로 보이는 작품들 제목이 영어인 것이 탈일본적이긴 합니다. 영어 제목이 아닌 예외는 '신이 된 날'과 새로 발표된 '카기나도' 뿐인데, 카기나도가 영어 제목이 아닌 것은 이벤트성 제목이거나 (일부러 클라나드 - 쿠라나도 - 와 비슷하게 지었다는 설이 있음.) 키 역사를 정리하는 듯한 내용 탓에 뭔가 특별하게 붙여졌거나인지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신이 된 날'의 경우 영어로 적을 때 (The) Day I Became a God인데 이전 오리지날 애니메이션 Angel Beats, Charlotte 후속작이라 일부러 영어 제목을 ABCD 순이 되게 맞춘 거라고 합니다. (하필 애니 평가도 공교롭게도 그 알파벹들에 해당...... --) 그렇다면 원래 영어 제목으로 붙이려 했다가 일본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라서 일본어 제목이 공식 제목이 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이 두 가지 예외에도 불구하고 노벨(게임) 쪽은 모두 영어 제목입니다. 이건 제작진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탈일본적인데, 일본 전통 음악적인 것도 있지만 대체로 외국인들에게도 거부감없이 감흥을 주는 좋은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악이란 것이 애초에 국경을 초월하기 쉬운 것이긴 하지만요. 반면 그림체는 탈일본을 가로막는 요소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이타루), 다행히 키 작품들에서 그림체 비중이 음악이나 시나리오보다 낮습니다. 시나리오는 일본어라는 장벽이 있지만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극복되고 있고 메시지 측면에서 인류 보편적인 것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시나리오 쪽을 좀 더 살펴 봅시다.
공간적 배경이 탈일본인 것은 하모니아가 있군요. 그 전에 리라이트가 일본이 주배경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몇몇 나라가 꽤 비중있게 나왔습니다. 야스민 같은 외국인 캐릭터도 많이 등장했고요.
외국인 속성 캐릭터 중 가장 인기있는 캐릭터는 쿠드이지요 (엄밀히 따지면 이중 국적이지만 외국인 속성인 것이 중요하니까). 이 쿠드가 혼혈인데, 아버지가 일본인이 아닙니다. 쿠드 어머니도 아버지가 러시아인이죠. 이 점에 왜 주목해야 하냐하면, 일본 2차원 문화에서 혼혈 캐릭터가 등장하면 보통 아버지가 일본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일본인이 아닌 경우가 드뭅니다. 왜 그럴까요. 민족주의적인 관념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일본 뿐만이 아니라 많은 아시아 민족들이 자기네 여자가 다른 민족 아이를 낳는 것을 꺼려합니다. 민족주의 + 약간의 남성우월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아시아에선 흔한 관념이라서 벗어나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쿠드가 다르다는 것은 키 제작진이 민족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키 제작진들은 넷우익과 반대편 쪽 성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탈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을 드러내지요. 김치, 닭갈비 등 한국 음식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부정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그외 외국 문화에 대해서도 어떤 반감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여성들에 대해서도 아래 취급하지 않고 있고 (탁틱스 시절 One에서 여성 캐릭터를 남성 주인공이 괴롭히는 경우도 있지만 나중에 반성함), 섬머 포켓츠에선 대놓고 페미니스트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성향은 현재 세계 주류 사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미투 운동이 몰아칠 때 일본에서는 실패했던 걸 생각하면 키 제작진은 일본 2차원 문화계 내에서 특이하고 진보적입니다. 일본에서는 특이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전 세계인들에게는 호감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키 작품 내용 면에서 탈일본적인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키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탈일본적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번역이라든지 그림체 향상도 이런 점에서 도움). 무엇보다도 키 제작진들이 처음부터 탈일본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 진출에 어떤 일본 이차원 문화 제작사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